대산 신상구 국학박사 상생방송 특집 방송 여천 홍범도 장군에 출연

신상구 | 2018.02.26 01:13 | 조회 5425

                               대산 신상구 국학박사 상생방송 특집 방송 여천 홍범도 장군에 출연


     지난 2017년 10월 25일은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의 영웅 여천(汝千) 홍범도(洪範圖, 1868~1943) 장군이 이역만리 카자흐스탄에서 순국한 지 74주기가 되는 아주 뜻 깊은 날이었다.
    바로 그날 오후 2시에 한문화 중심채널 상생방송(김덕기 작가, 임인택 PD)에서 방송장비를 가지고 우리 충청문화역사연구소를 방문해 약 90분간 인터뷰를 하고 돌아갔다.  
    인터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설문 1 : 권업회의 설립 목적은 무엇이며 어떤 활동을 했나요?
       답 : 권업회는 1911년 5월 21일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新韓村)에서 이종호(李鍾浩)·상설(李相卨), 김익용(金翼鎔)·엄인섭(嚴仁燮) 최재형(崔才亨), 홍범도(洪範圖) 등 57명이 조직한 항일독립운동 단체로, 1912년 4월 기관지인 권업신문을 발행하여 민족정신 고양, 항일독립운동 전개, 교민의 단결과 지위 향상, 각종 기념일에 행사와 강연회를 개최하였다. 회원은 1913년 10월 2,600명, 1914년 8,579명이었다. 그러나 1914년 9월 러시아는 대일관계의 악화를 우려한 나머지 강제로 해산하였다. 그 후 이 전통은 1917년 창설된 전로한족중앙회(全露韓族中央會)로 이어졌다.

   *홍범도 장군은 처음에는 권업회의 부회장, 나중에는 사찰부장에 선임되어 활동하면서 신문발간 사업, 민족교육 사업, 그리고 한인의 경제력 향상 및 권익 보호에 심혈을 쏟았다. 선생은 권업회에 관여하면서도 항일무장투쟁을 위한 준비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선생은 회원들 모두가 노동하면서 그 노임의 일부를 독립전쟁을 위한 군자금으로 비축하는 노동회를 1912년 조직하였다. 이 회의 회장으로서 선생 또한 1913년부터 약 3년 동안 연해주 지역의 항구와 금광 등을 전전하며 노동하여 군자금을 조달하였다. 이 자금으로 선생은 소총과 탄약을 구입한 뒤, 이를 숨겨놓고 동지들과 함께 농사를 지으며 국내 진공의 기회를 엿보았다.

  *권업회는 이종호(李鍾浩)·김익용(金翼鎔)·엄인섭(嚴仁燮) 등이 결성하고 초대회장에 최재형(崔才亨), 부회장에 홍범도(洪範圖)를 선임하였다. 본부는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의 신한촌에 두었으며, 주요 도시에 지회와 분사무소를 두었다. 같은 해 12월 총회에서 회칙을 개정하여 조직을 의사부와 집행부로 나누고, 의사부의 의장과 부의장이 회를 대표하기로 하였다. 이에 의장에 이상설(李相卨), 부의장에 이종호가 선임되어 회무를 총괄하였다.
  권업회라는 이름만 보면 정치적인 색을 띠지 않는 순수 경제단체인 것처럼 보이나 이것은 일제와 러시아의 탄압을 피하기 위하여 붙인 위장명칭이고 실제는 항일구국운동이 목적이었다. 회원은 21세 이상이면 남녀·신앙·교육의 차별 없이 될 수 있었으나 3인 이상의 보증서가 있어야 가입시켰다.
  * 권업회는 효과적으로 활동하기 위하여 기관지 1912년 4월《권업신문》을 창간하였으며, 이를 통해 민족정신을 고양시켜나갔다. 또한 항일독립운동 전개, 교민의 단결과 지위 향상에 애썼으며, 각종 기념일에 행사와 강연회를 개최하였다. 회원은 1913년 10월 2,600명, 1914년 8,579명이었다. 그러나 1914년 러시아는 대일관계의 악화를 우려한 나머지 강제로 해산하였다. 그 후 이 전통은 1917년 창설된 전로한족중앙회(全露韓族中央會)로 이어졌다.
   *일본의 사주를 받은 러시아가 성명회를 강제로 해산하자 러시아의 한인 민족운동자들은 현실적이고도 장기적이며 지속적인 독립운동의 방략을 구상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선생을 비롯하여 이종호, 이상설, 최재형 등 연해주에서 활동하던 민족운동자들의 발기로 ‘조국독립’을 최고 이념으로 하는 자치결사로써 권업회가 1911년 5월 27일 연해주에서 창립되었다. 권업회의 목적과 이념은 한인사회의 권익을 증진시키는 ‘실업(경제)’ 문제와 독립운동을 강력히 추진하는 ‘항일(정치)’ 과제를 결부시키는 전술을 취하면서 조국독립을 달성하려는 데 있었다. 선생은 처음에는 권업회의 부회장, 나중에는 사찰부장에 선임되어 활동하면서 신문발간 사업, 민족교육 사업, 그리고 한인의 경제력 향상 및 권익 보호에 심혈을 쏟았다. 선생은 권업회에 관여하면서도 항일무장투쟁을 위한 준비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선생은 회원들 모두가 노동하면서 그 노임의 일부를 독립전쟁을 위한 군자금으로 비축하는 노동회를 1912년 조직하였다. 이 회의 회장으로서 선생 또한 1913년부터 약 3년 동안 연해주 지역의 항구와 금광 등을 전전하며 노동하여 군자금을 조달하였다. 이 자금으로 선생은 소총과 탄약을 구입한 뒤, 이를 숨겨놓고 동지들과 함께 농사를 지으며 국내 진공의 기회를 엿보았다.

    설문2 : 권업신문의 역할은 무엇이며 신채호 선생은 어떤 종류의 기사를 썼나요?
      답 : 권업회의 기관지인 권업신문은 1912년 4월  신채호(申采浩)·김하구(金河球) 등이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창간한 한인신문으로 민족정신 고양, 항일독립운동 전개, 교민의 단결과 지위 향상, 각종 기념일에 행사와 강연회를 개최하는 등 다양한 역할을 했다.  주필은 신채호, 발행인은 러시아인 주코프(Jukov)가 맡았다. 그리고 당시 러시아어에 유창한 한동권(韓東權)이 이 신문의 러시아어 번역을 담당하였다. 처음에는 일제의 압력을 피하기 위하여 발행인을 러시아인으로 하였으나, 일제의 압력은 계속되어 1914년 9월 일제의 간책에 의하여 러시아정부로부터 발행금지를 당하였다. 신문의 체재와 간행형식은 잘 알려지지 않고 있으나, 부정기적으로 간행된 것으로 추측된다. 신채호는 주필로 항일독립운동과 민족사 관련 기사를 많이 썼을 것으로 보인다. [네이버 지식백과] 권업신문 [勸業新聞]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설문 3 : 최재형 선생은 어떤 분이며 한 일은 무엇인가요?
       답 : 1908년에 창간되었던 한국국민회 기관지 대동공보, 1908년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에서 발행된 해외 한인 최초의 한글 신문인 해조신문, 권업신문을 운영한 것, 안중근 의사와의 관련성에 대해서도 말씀 부탁드립니다.) 최재형(崔才亨, 1858-1920)은 1858년 함경북도 경원 출신으로 러시아 상선 선원, 연해주 철도도로건설국 통역, 연해주 연추 도헌, 우신학교 교장, 동의회 총장, 대동공보 사장, 국민회 회장, 대양보 사장, 권업회 회장, 대한국민의회 외교부장 등 다양한 경력의 소유자로 제정러시아 말기 및 소련초기 연해주 한인사회를 이끌었던 대표적인 인물로 대한제국 시기의 대표적인 해외 독립운동가 가운데 한명으로, 특히 군수업으로 쌓은 막대한 부를 독립운동을 지원하는 데 사용하여,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인물이다. 최재형은 안중근을 대동공보 기자로 채용하여 힝일독립운동을 지원했고, 1909년에는 전 조선총독 이토 히로부미 암살계획에 참여하는 등 주로 연해주 무장독립투쟁을 주도했다. 1962 건국훈장 독립장 수여<[네이버 지식백과] 최재형 [崔才亨]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설문 4 : 최재형 선생과 홍범도 장군, 신채호 선생은 어떤 관계였나요?
       답 : 1911년 5월 21일 57명의 주요 항일인사들로 구성된 블라디보스톡 비밀회의에서 애국단체『권업회』가 조직되었다. 권업회의 초대 회장은 최재형, 부회장은 홍범도가 맡았다. 그리고 신채호는 1912년 4월 창간된 권업회 기관지인 권업신문의 주필을 맡아 활발한 항일독립운동을 전개했다. 그래서 최재형, 홍법도, 신채호는 연해주 항일독립운동을 주도한 동지관계로 보입니다.
  
    설문 5 : 한민족 상고사와 역사복원 등에 관해 위의 세 분의 인식과 활동은 어떠했요?    
       답 : 홍범도 장군은 포수출신으로 학력이 거의 없어 주로 무장투쟁을 전개하면서 정통사서인『환단고기』발간자금을 오동진 장군과 함께 지원하는데 그쳤다. 신채호 선생은 성균관 박사로 학력이 높아 문인으로서 <꿈하늘>․<이순신전> 등 수많은 문학작품을 발간했고, 언론인으로서 황성신문과 대한매일신보 논설기자․ 대한매일신보와 권업신문 주필로 활약하면서 수많은 논설 기사를 작성해 신문에 게재했으며, 민족사학자로서『조선상고사』,『조선상고문화사』등 수많은 저서를 발간하여 한민족사를 정립하는 데에 많은 기여를 했다. 최재형 선생은 의병부대를 직접 지휘하거나, 이범윤 등과 연합하여 무장투쟁을 전개했으며, 1909년에는 전 조선총독 이토 히로부미 암살계획에 참여하는 등 주로 무장독립투쟁을 주도하는 바람에 한민족 상고사와 역사복원에는 별로 기여한 것이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설문 6 : 4월 참변(신한촌 참변)과 간도참변은 자유시 참변과 어떤 관련이 있나요?
        답 : 4월 참변(신한촌 참변)은 1920년 3월 니콜리스크에 적군이 공격하여 다수의 일본거류민을 학살하자, 일본군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1920년 4월  신한촌(新韓村)을 기습하여 우리의 한민학교(韓民學校)와 한민보관(韓民報館) 등 주요건물을 불태우고 무고한 한인을 학살하였다. 이때  연해주에서 활동하고 있던 최재형(崔在亨)·김이직(金理直)·엄주필(嚴柱弼)·황경섭(黃景燮) 등 한인지도자가 사살되었으며, 블라디보스토크에서 50여 명, 니콜리스크에서 70여 명이 체포되었다. 간도참변은 1920년 6월 7일 봉오동전투와 1920년 10월 21일부터 26일까지 일어났던 청산리전투에서  대패한 일본군이 보복으로 1920년 10월부터 1921년 4월까지 간도에 거주하는 한국인을 무차별 대량학살한 사건이다. 1920년 6월 7일 봉오동전투에서 독립군에게 전멸에 가까운 패배를 당한 일제는 정규군 대부대를 만주에 직접 투입하여 일거에 독립군을 소탕할 계획을 세우고 일본군의 출병(出兵)을 정당화할 음모를 꾸몄다. 그동안 만주 진출을 위한 조사를 진행 중이었던 일제는 같은 해 8월 간도지역불령선인초토계획(間島地方不逞鮮人剿討計劃)을 세우고, 출병 구실을 만들기 위해 중국 마적(馬賊)을 사주하여 훈춘현[琿春縣] 10월 2일 일본 영사관을 고의로 습격하게 하였다. 이 훈춘사건을 빌미로 일제는 10월 7일 대규모의 병력을 간도로 출병시키도록 결정하고 10월 12일 간도 출병을 개시했다. 일본군은 출병 초기 항일운동 근거지를 중심으로 초토화 작전을 진행하다가 10월 20일을 기하여 대대적인 독립군토벌작전을 펼쳤다. 그러나 독립군이 일본군이 공격해 오기 힘든 산 속 또는 중·소 국경지대로 미리 이동해 버림으로써 일본군의 독립군토벌작전은 차질을 빚게 되었다. 그러던 중 10월 21일부터 26일까지 일어났던 청산리전투에서 크게 패하면서 일본군은 그 보복으로 한국인사회·항일단체·학교·교회 등을 초토화하는 것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이때부터 일본군은 1921년 4월까지 수많은 한국인 마을을 대상으로 방화·약탈을 일삼고 한국인들을 보는 대로 학살하였는데, 이 사건을 일컬어 ‘간도참변’이라 한다.《독립신문》에 따르면 간도참변으로 한국인 3,700여 명이 피살되었다고 전해지며, 이 참변으로 간도를 포함한 만주 지역에서 활발한 활동을 벌였던 한국인 사회 및 항일단체들은 큰 피해를 입었다. 자유시 참변은 1921년 6월 28일, 노령 자유시(알렉셰프스크)에서 3마일 떨어진 수라셰프카에 주둔 중인 한인 부대인 사할린 의용대를 러시아 적군 제29연대와 한인보병자유대대(이하 자유대대)가 무장해제시키는 과정에서 서로 충돌, 다수의 사상자를 낸 사건이다. 당시 희생자수는 자료마다 서로 다른데, <재로고려혁명군대 연혁>에는 사망 36, 포로 864, 행방불명 59명으로, <간도지방 한국독립단의 성토문>에는 사망 272, 익사 31, 행방불명 250, 포로 917명으로 되어 있다. 3사건의 공통점은 일본군이 항일독립군을 말살하는데 목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 3사건은 만주 거주 조선 민중의 은밀한 저항과 중국과 러시아 군대의 비협조로 별다른 큰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신한촌참변, 간도참변 [間島慘變], 자유시참변 (두산백과)

    설문 7 :  자유시 참변이 일어나게 된 원인은 무엇인가요?
       답 : 자유시 참변은 일명 흑하사변(黑河事變)이라고 한다. 자유시 참변은 1921년 6월 28일, 노령 자유시(알렉셰프스크)에서 3마일 떨어진 수라셰프카에 주둔 중인 한인 부대인 사할린 의용대를 러시아 적군 제29연대와 한인보병자유대대(이하 자유대대)가 무장해제시키는 과정에서 서로 충돌, 다수의 사상자를 낸 사건이다.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과 상해파 고려공산당의 파쟁이 불러일으킨 한국 무장독립전사상 최대의 비극적 사건이다. 사할린부대·이항(尼港)군대 라고도 불린 사할린 의용대는 이항(니콜라예프스크)에서 트라피친의 적색 빨치산과 함께 일본군을 대파한 한인부대로서, 이들이 일본군의 추격을 피해 자유시로 들어왔을 때, 당시 자유시에는 자유대대 외에도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최진동의 도독부군 등 간도지방에서 이동해온 한인무장 부대가 집결해 있었다. 사할린 의용대의 실력자 박이리아는 자유대대의 오하묵(吳夏默)·최고려(崔高麗) 등과 군통수권을 둘러싸고 대립하게 되었다. 자유대대는 원래 대한국민의회 휘하의 무장부대였다가 러시아 극동공화국 인민혁명군 제2군단에 편입된 한인부대이며, 대한국민의회는 상해 임시정부와 이동휘의 상해파 고려공산당에 대해 비판적인 이르쿠츠크파계였다. 그러나 당시 극동공화국 한인부에는 상해파의 이동휘계 인물인 박애(朴愛)·장도정(張道政) 등이 활동하고 있었다. 박이리아는 군통수권 장악을 위해 이르쿠츠크파와 반목하는 이들 상해파와 손을 잡고, 휘하부대와 간도에서 온 독립군부대를 자유시 근처 마사노프로 이동시켰다. 코민테른 동양비서부는 양 파의 대립을 조정하기 위해 고려혁명군정의회(高麗革命軍政議會)를 결성, 적군 빨치산 영웅 갈란다라시윌린을 의장 겸 총사령관에 임명하고 군통수권을 책임지도록 했다. 박이리아는 이에 불복했으나, 홍범도·안무(安武)의 부대가 마사노프에서 자유시로 빠져나오자 점차 고립되었다. 설득에 실패한 갈란다라시윌린은 29연대를 동원, 6월 28일 수라셰프카로 이동해 있던 사할린 의용대에 대해 무장해제를 단행했고 이때 자유대대도 29연대와 함께 행동했다. 당시 희생자수는 자료마다 서로 다른데, <재로고려혁명군대 연혁>에는 사망 36, 포로 864, 행방불명 59명으로, <간도지방 한국독립단의 성토문>에는 사망 272, 익사 31, 행방불명 250, 포로 917명으로 되어 있다. 당시 박이리아는 무사히 탈출했다. 고려군정의회는 포로심사를 거쳐 일부는 수감하고 나머지는 이르쿠츠크로 이동시켰으며, 다른 무장부대도 이르쿠츠크로 이동하여 적군 제5군단 산하 1개 여단으로 편성되었다. 자유시참변은 정확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고, 또 각각의 입장에 따라 사건해석과 평가가 다르나, 상해·이르쿠츠크 양 파의 파쟁이 빚어낸 비극으로서 이후의 한국 공산주의운동에 악영향을 미쳤다.[네이버 지식백과] 자유시참변 [自由市慘變] (한국근현대사사전, 2005. 9. 10., 가람기획)

    설문 8 : 러시아군이 독립군의 무장해제를 한 것은 일본으로부터 캄차카반도 어업권을 따내기 위해 일본의 요구를 들어주기 위함이었다고 하는데 이것이 사실인가요? 또한 그 과정에서 이루크츠파(자유대대)가 주도권을 잡고자 러시아의 하수인 노릇을 했다고 하는데 사실인가요?
      답 :  전후 사정으로 보아 사실인 것 같습니다. 어업권은 러시아 경제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고, 러시아는 일본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가 없어 러시아군이 강제로 독립군의 무장해제를 한 것 같다.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김주용 연구위원 041-560-0422, 수원대 사학과 박환 교수, 전북대 사학과 윤상원 교수)

    설문 9 : 홍범도 장군이 러시아군의 무기반납 요구에 승복하고 사할린의용대(상해파 공산당)를 떠난 이유는 무엇인가요?
      답 : 홍범도 장군은 한국 독립군 내부의 파벌로 인해 자유시 참변이 발생했기 때문에 러시아군의 무기반납 요구에 승복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지요.

    설문 10 : 자유시 참변에서 홍범도 장군이 한 일은 무엇인가요?
      답 : 홍범도 장군은 자유시에서 상해·이르쿠츠크 양 파의 파쟁이 벌어지자 자유시를 빠져나와 독립적으로 항일독립운동을 전개했다. 자유시사변 이후 한인무장세력은 러시아 공산당의 강력한 통제로 인하여 활동에 많은 제약이 가해졌고, 이로 인해 선생도 항일무장투쟁의 꿈을 간직한 채 이만, 연해주 등의 집단농장, 협동농장 등에서 농업에 종사하면서 농민층의 생활 향상과 한인동포들의 권익보호에 힘썼다.[네이버 지식백과] 홍범도 [洪範圖] - 대한독립군 사령관 (독립운동가)

    설문 11 :  자유시참변이 독립운동사에 끼친 영향은 무엇인가요?
       답 : 자유시참변은 상해·이르쿠츠크 양 파의 파쟁이 빚어낸 한국 무장독립운동사상 가장 비극적인 사건으로서 이후의 한국 공산주의운동에 악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김좌진 장군과 홍범도 장군을 통솔하여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를 승리로 이끌어  일제가 가장 두려워 했던대한독립군단 총재인 백포 서일 선생이 자유시 참변과 재기 실패에 책임을 지고 자결했다고 한다.

    설문 12 :  백포 서일이 연해주 독립운동에 미친 영향은?
        답 : 지난 2012년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 국학과에서 <백포 서일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정길영 국학연구소 연구원은 2013년 4월 26일 국회 헌정회관에서 개최된 '대일항쟁기의 역사적 교훈과 통일안보 - 백포 서일의 역사관 및 대일항쟁을 중심으로'를 주제로 한 학술회의의에서 이제 한국항일독립운동사에서 백포 서일을 주목해야 한다고 말했다. 서일은 일본과의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만이 조국의 국권을 회복하는 길이라는 신념이 있었다. 그는 1911년 중광단을 조직하여 1920년 청산리전투까지 10여 년 동안 갖은 어려움을 겪으며 대한군정서라는 강력한 군대를 준비하고 있었다. 청산리전투는 미리 계획한 전투가 아니었다. 소규모 대일항쟁군들이 국내진공작전을 수시로 펼쳐 일본 관공서를 파괴했다. 결국엔 일본 정규군의 추격전인 삼둔자전투와 봉오동전투가 발생한 것이다. 그 전투에서 또다시 일본이 대패하고 만다. 이때부터 일본은 간도지방 항일무장단체에 대한 대대적인 토벌전이 벌이게 된 것이다. 서일은 10년 동안에 걸쳐 무력부대를 만들고 대비해왔기 때문에 원치 않았던 일본과의 전쟁이었지만 대승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이다. 1920년 간도지역에 있었던 수많은 전투 중에 유독 청산리전투 성과만을 높게 평가받았다. 그 전투현장의 지휘관이었던 김좌진, 홍범도 등만 영웅이 되고 서일과 다른 전투는 빛이 희미해진 것이다. 그러나 1920년 한일전인 ‘간도회전’은 청산리전투지역인 서부전선과 혼춘과 왕청 일대의 동부전선으로 나누어 전투가 진행되었다. 대한군정서의 주력부대는 김좌진이, 연합부대는 홍범도의 인솔로 서부전선에 참여하였다. 서일은 잔여 부대를 이끌고 군무도독부, 독군부, 광복단, 의군단, 나자구의사부 등 8백여 명과 일본군 1만 명을 상대로 기습작전을 펼치며 적들을 소탕하였다. 일본군이 서부전선을 지원하지 못하도록 발을 묶어놓고, 또 청산리전투 후의 서부전선 부대들이 무사히 밀산지역으로 빠져나갈 수 있는 퇴로를 열어주는 등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서부전선은 항일무력부대 1~2천 명이 일본군 5천 명과 싸운 전투엿다. 반면에 동부전선은 전체병력 8백여 명이 일본군 1만 명과 싸웠다. 그 전투상황이 얼마나 급박하고 부담이 컸을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가 중국, 러시아, 일본 등 주변국 책동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우리 사관부터 바로 세워야 한다. 역사적으로 보면 단군민족정신이 살아있을 때는 그 나라는 흥하였고 단군민족정신이 쇠퇴하면 그 나라도 망하고 말았다. 단군민족주의는 홍익인간 정신이므로 국수주의로 비판받을 이유도 없다. 서일은 바로 이 정신으로 대한군정서 총재로서 청산리전투로 알려진 대일전쟁의 첫 전투를 위대한 승리를 이끌었다. 그뿐만 아니라, 대일항쟁의 정신적 기반을 만들었다. 이제 우리는 전통사관을 확립하고, 홍익인간 정신으로 세계평화를 이끄는 정신지도국으로 일어서야 할 것이다. 서일은 어떠한 세력이든 조국의 국권을 회복하는 데 도움이 된다면 모두 끌어안았다. 서일은 중광단을 조직할 때 대종교도와 의병을 중심으로 했다. 그러다가 1919년 3‧1항쟁 이후 본격적인 무력투쟁을 위해 중광단을 대한정의단으로 중창했다. 이때 대종교 일색에서 탈피하여 누구든 대일항쟁의 뜻이 있으면 모두 참여할 수 있도록 길을 열었다. 간도회전 후에는 10여 개의 유력한 항일무력부대들이 통합하여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하였을 때도 3,500명의 독립군이 서일 장군을 총재로 추대했다. 이것은 서일이 단군민족주의를 내세워 결속을 다지고 항일투쟁의 의지를 극대화 시켰기 때문이다. 또한 서일은 무기 구입과 운반 등 위험한 일을 솔선수범하는 등 사심 없이 항상 낮은 자세로 임했다. 그래서 독립군이 그의 인품에 감복하였고 수장의 자리도 조직원들의 추대로 이루어졌다. 1919년 4월 상해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세워졌으나 재정도, 군대도 없었다. 서일은 10년 동안 끈질기게 노력해 다른 어떤 항일단체보다 막강한 ‘대한군정서’ 무력부대를 만들어 냈다. 이후에 대한군정서군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정식 군대가 되었다. 따라서 청산리 전투는 의병전이 아니다. 마땅히 국가 대 국가 간의 전쟁으로 보아야 한다. 1919년 임시정부 의정원 29명 중 21명이 대종교인이었다. 주시경, 최현배 등의 한글학자․ 정인보, 신채호, 박은식 등 민족사학자․김좌진, 홍범도, 이범석 등 독립군 지도자․이시영, 신규식, 조성환 등 임정 민족지도자들이 모두 대종교인이었다. 서일은 대종교 3대종사(나철, 김교헌, 윤세복)에 들어갈 정도의 위치에 있었으니 그의 영향력은 컸다. 또한 임시정부에서 신규식을 대한군정서에 보내 주요사안을 연락했다. 임시정부는 대한군정서를 정식 군대로 삼았다. 서일은 임시정부의 군무총재로서 간도지역의 항일무장부대를 통솔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보면 서일과 임시정부의 관계는 밀접하다고 봐야 한다.

   첫 방송이 12월 22일 오전 11시에 있었는데, 신상구 국학박사는 끝 부분에 잠깐 출연했다.
   설문-답변 내용의 극히 일부분만  방송에 반영되어 아쉬움이 많았지만 전 국정원장 이종찬,  전 독립기념관장 김상웅, 동양철학박사 이찬구, 대종교 대종사 우원상 선생 등 유명인사들과 함께 출연한 것만으로도 영광으로 생각한다.  
   방송 시간을 미리 알지 못해, 본 방송은 시청하지 못하고, 인터넷에 올라와 있는 동영상으로 2번 시청해 보았는데, 내용이 너무 좋아 감동을 많이 받았다.
   많은 분들이 시청하여 여천 홍범도 장군의 위대한 항일독립정신을 창조적으로 계승발전시켜주시기를 기대합니다.    

                                                         2018.2.21일 꼭두새벽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국학박사, 향토사학자, 시인, 문학평론가, 칼럼니스트)
                                                              신상구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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