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능력

환단스토리 | 2016.09.13 13:21 | 조회 6085


-- 유지원 교수의 페이스북 글중. 


[공감능력]


‘공감 능력’을 노래하는 오페라가 있다. 리하르트 바그너의 [파르지팔]이다. 이 오페라에서 흐르는 가사가 ‘Durch Mitleid wissend, der reine Tor’로 번역하면 ‘연민을 통해 각성된, 순수한 바보’라는 뜻이다.


여기서 ‘연민’을 의미하는 Mitleid는 쇼펜하우어가 깊이 사유한 개념이다. Mit은 ‘함께 한다(with)’라는 뜻이고 Leid는 ‘고통’이라는 뜻이다. Mitleid는 ‘연민’과 ‘동정’이라 번역되지만, ‘측은히 여긴다’기보다는 ‘공감할 줄 안다’라는 의미에 가깝다.


한국어 ‘동정(同情)’은 ‘같은 페이소스(감정)를 공유한다’라는 어원을 가진 sympathy와 어원이 일치한다. 우리는 쇼펜하우어가 ‘감정을 함께 하는 것도 아니고(Mitgefühl)’, ‘사랑을 함께 하는 것도 아니요(Mitliebe)’, ‘고통을 함께 하는(Mitleid)’ 데에 천착하고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불교에서도 세상은 고통으로 가득 차있다고 말한다. 고통 받는 중생이 안타까워서 속세의 진흙탕에 뛰어들어 인간을 구원하려는 연꽃 같은 존재를 보살이라 한다. 기독교의 예수도 그런 의미일 것이다.


쇼펜하우어를 한창 탐독하던 시절로부터 벌써 15년이 지났다. ‘공감’에 관한 페이북 친구의 글을 보고 문득 바그너와 쇼펜하우어가 생각났다. 


쇼펜하우어는 인간 사회에 고통이 가득하다는 사실을 외면하지 않고, 그 고통을 함께 하는 데에서 인간다움과 구원의 실마리를 찾았다. 사람들은 고통을 이야기한다고 해서 쇼펜하우어가 염세 철학자라고 하지만, 나는 쇼펜하우어가 고통을 공감하는 Mitleid를 사유하며 철학적 해결책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오히려 쇼펜하우어에게서 ‘희망’을 읽었다.


[파르지팔]을 듣고 싶어지는 오전이다. ‘고통에 공감함으로써 열반의 각성을 한, 고통받는 인류를 구원할 순수한 바보’


이성과 합리, 계몽과 진보가 인류를 구원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입증된 음울한 19세기, 철학자들은 고통에 공감하는 능력이 인류를 구원할 것이라 했다. 21세기에 다시 봐도 옳은 혜안이다. 고통에의 공감력이 인류 뿐 아니라 서로 연결된 생태계인 지구 전체를 구원할 것이다.




[한국어]

이것은 한국어의 ‘사랑’에 관한 이야기이다.


세계 어느 언어에서도 ’엄마’를 뜻하는 단어에는 m이라는 음가가 들어간다. 아기가 처음 낼 수 있는 푸근하고 부드러운 소리이다. 조용히 발음해보면, 입의 가장 앞쪽에서 나는 소리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입술에서 혀로, 혀에서 어금니로, 어금니에서 목구멍으로, 목구멍에서 목 뿌리로, 목 뿌리에서 배로, 발성기관의 뒤로 넘어가고 아래로 내려갈 수록 점점 발음하기 어려워지고 깊어지며 묵직해지는 ‘어른의 소리’가 난다. 어린이가 ‘이모’를 ‘고모’보다 먼저 발음할 수 있는 이유이다.


발성기관에 집중하면서 ‘나불나불’을 빠르게 발음해보라. 입 앞쪽에서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어린아이처럼 많은 움직임이 일어난다. 그리고 ‘그윽히’를 천천히 발음해보라. 목구멍 뒤쪽에서 움직임이 거의 없는 깊고 그윽한 소리가 나다가 닫힌다.


자음과 모음의 소리들은 각각 나름의 이미지, 즉 심상을 가지고 있다. 이것을 ‘음상(音象)’ 혹은 ‘음성상징’이라 한다.


지구상에서 적도 근처 생물량이 많은 지역의 언어들에는 ‘나불나불’처럼 반복과 움직임이 활발하고, 어린이처럼 천진한 음상이 많다. 위도 50도 이상의 묵직한 대기압이 누르는 지역의 언어들에는 ‘그윽히’처럼 목 뒤에서 나는 어른의 음상이 많다. 


독일의 겨울날 아침, 카페에서 커피 한 잔을 할 때, 주변의 독일어 대화소리가 침묵보다 고요히 내리누르는 듯 느껴지는 이유이다.


인간의 언어는 ‘소통의 도구’로만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적도 근처의 언어 하나와 위도가 높은 지역의 언어 하나를 모두 소리내어 발음할 줄 아는 인간은 영어만 할 줄 아는 인간보다, 이 지구상의 화창한 어린이적 성품과 깊은 어른적 성품을 모두 더 풍요롭게 갖춘 삶을 살아가리라고 상상한다.


한국어 음성상징에서 ㅅ은 살아있고, 살아간다. 생생하고 싱그럽다. 샘처럼 솟구치며 송송 솟아난다. 한국어는 한 사려 깊은 탁월한 언어학자에 의해 음성의 소리, 의미, 정서, 회화적 이미지의 심상이 체계적으로 시각화한 글자를 축복처럼 선물 받은 세계에서 유일한 언어이다. 그 언어학자는 물론 세종대왕, 글자는 한글이다.


한국어 ‘살다’에서 ‘삶’이 나오고 ‘살림’이 나오고 ‘사람’이 나왔다. 그리고 ‘사랑’.


ㅅ은 생(生)이고 ㄹ은 활(活)이다. ㅅ은 에너지이고, ㄹ은 운동이다. 그리고 ㅏ는 내적으로 수렴하는 ㅓ와 달리 외부를 향해 확장되고 열려있다. 관계를 맺고 싶어 하는 에너지인 것이다.


사람은 멈춰있지만 사랑은 굴러간다. 사람은 현상이고 사랑은 사람을 살게하는 동력이다. 사람은 고체적 결정이고, 사랑은 유체적 흐름이다.


그러니 한국어에서는 ‘사랑’ 한 단어면 충만하다. 시옷, 아, 리을, 아, 이응 이 다섯 음성의 조합이면 사랑의 모든 것을 표현하기에 충분한 것이다.



[글자]

“글자는 고체화한 인간의 호흡이고, 

 결정화한 소리이며, 

 기호화한 우주의 숨이고 흐름이고 기운이다.”


소리는 연속적이다. 

그리고 발생하는 순간과 시간 속으로 소멸한다. 

이 소리에 시공간을 초월한 영원을 담고자 각 문화권의 인류는 이를 비연속적으로 분절하고, 단위화하고, 측정하고, 양으로 환산하고, 시각화하고 공간화한다. 이것이 글자이다.


그러니, 개별 역사나 문화의 특정 시대, 언어학과 같은 분화된 특정 학문을 구심점으로 삼으면 그것은 헛 소실점이 되어 전체 상을 일그러뜨리게 된다. 그 시원을 찾아 끝없이 거슬러 올라간 곳에는 철학과 수학, 물리학이 있었다.


글자는 청각을 시각화하고, 시간을 공간화한다.

글자는 고체화한 인간의 호흡이고, 결정화한 소리이며, 기호화한 우주의 숨이고 흐름이고 기운이다.


그러니 글자의 형상을 이해하려면 글자가 처한 환경, 작용원리, 궁극적으로 시공간이라는 틀을 바라보는 각 문화권과 각 시대의 인간 인식을 살펴야 한다.


시간을 거시적으로 보며 100년을 1초 단위로 빠르게 돌려보자. 개체의 고정된 상보다는 연결된 흐름이 보일 것이다. 이것이 동아시아에서 시간과 공간, 세계와 우주를 바라본 ‘시점의 스케일’이었다. 


이 흐름은 항상 변화하고 움직이며 기운 생동하는 에너지(氣)이고, 이는 우주만물의 법칙(理)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었다. 이것이 동아시아인이 바라본 우주철학이고 물리였다.


불교에서 제행무상(諸行無常)이라 하여, 움직이는 모든 것은 고정되지 않고 변화한다고 한 성찰과 깨달음도, 시간을 이처럼 거시적 스케일로 바라보면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문에 해가 드는 모습으로 표현된 間은 사이이고, 연결이며, 연속체를 분절하는 단위이기도 하다. 


동아시아에서는 ‘방 한 칸’할 때처럼 한 間을 정사각형의 단위로 생각했다. 동아시아에서는 1차원 직선형을 기본 단위로 삼는 서구와 달리, 2차원 정방형을 기본 단위로 삼았다. 


수학은 물론 문화의 모든 현상들이 이 단위에서 출발했다. 그래서 글자 역시 로마자처럼 선 위에 쓰지 않고, 그림일기나 원고지처럼 정방형의 칸 안에 채워 넣어서 썼다.


“맨눈으로는 분명하게 보이지 않지만, 분석의 눈으로는 볼 수 있는 자연 현상들 사이의 리듬과 패턴들이 존재한다. 우리가 물리법칙이라고 부르는 것들은 바로 이러한 리듬과 패턴들이다.”

- 리처드 파인만. 


인류 보편적인 우주와 세계를 바라보고, 이를 문화권별, 시대별로 특화된 시간과 공간에 대한 인식의 틀로 파악하며, 단위로 측정하고, 구획하고 분할하고, 거기서 발견되는 리듬과 패턴들을 재배열한 것이 글자를 비롯한 인간의 모든 일상과 예술의 문화현상이다.


맨눈으로는 ‘현상’이 보이지만, 분석의 눈으로는 ‘작용 원리’가 보인다. 글자라는 현상의 시원에는 그래서 철학과 수학과 물리학이 있었다.


내 학위 논문은, 예술대학의 논문에서는 허용되어 있는 다소 시적(詩的)인 제목을 가졌다.


Zum Raum wird hier die Zeit

여기서 시간은 공간으로 화한다.



[神에 대하여]

성경과 불경을 떠올리다가. 

하나님과 부처님 같은 비생명적 비물질적 존재가 인간의 모습으로 육화하지 않은 영적 상태에서 지구상의 인간종과 소통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다는 가정의 근거는 무엇인가? (도파민 분비?) 

그 의지의 고체화한 결정 같은 기록이 성경, 불경인 것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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