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 전 만해 한용운이 심우장에서 우리에게 던진 화두, 각성

신상구 | 2019.12.31 22:46 | 조회 4862


                                  100년 전 만해 한용운이 심우장에서 우리에게 던진 화두, 각성

   "국가의 흥망은 일조일석에 되는 것이 아니다. 어떠한 나라든 자기가 스스로 망하는 것이지 남의 나라가 남의 나라를 망하게 할 수 없는 것이다. 자존심이 있는 민족은 남의 압박만 받지 아니하고자 할 뿐 아니라 행복의 증진도 받지 아니한다." ㅡ한용운, 1920년 9월 24일 '3·1 운동 관련자 공판 기록'


   "시험하여 만고(萬古)를 돌아보건대 어느 국가가 자멸(自滅)하지 아니하고 타국의 침략을 받았으며, 어느 개인이 스스로를 멸시하지(自侮·자모) 아니하고 타인의 모멸을 받았는가. 망국(亡國)의 한이 크지 아니한 것은 아니나, 정복국만을 원망하는 자는 언제든지 그 한을 풀기가 어려운 것이다." ㅡ한용운, 1936년 '심우장만필-반성(反省)'


   지난 10월 28일 허우성 경희대 철학과 명예교수는 '조선일보'에 기고한 칼럼에서 옛 글 하나를 인용했다. 내용은 이러하다. '만고를 돌아보건대, 어느 국가가 자멸하지 아니하고 타국의 침략을 받았는가.' 일본이 침략해서 조선이 망한 게 아니라, 조선이 자멸했다는 말이다. 얼핏 보면 일제강점기가 모두 조선이 못난 탓이라는 식민사관으로 읽힌다.


   인용된 원문에 이어진 내용을 보자. '어느 개인이 자모(自侮·스스로를 멸시함)하지 아니하고 타인의 모멸을 받았는가. 그러한 일은 없을 것이다. 망국(亡國)의 한이 크지 아니한 것은 아니나, 정복국만을 원망하는 자는 언제든지 그 한을 풀기가 어려운 것이다.' 무조건 일본에서만 나라가 사라진 원인을 찾고 분노만 하고 있으면 민족의 미래를 만들 수 없다는 말이다.


   이 말을 한 사람은 만해 한용운(1879~ 1944)이다. 당시 조선일보에 '심우장 만필'이라는 글을 연재하면서 기고한 글 가운데 하나다. 제목은 '반성(反省)'이다. 때는 1936년, 나라가 사라지고 식민 시대가 26년을 넘긴 해였다.


   1919년 1월 22일 고종이 죽었다. 나라가 사라지고 9년째였다. 이렇다 할 구심점이 없던 조선 사람들은 이를 계기로 결집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시장은 철시했고 시민들은 음주가무를 삼갔다. 수원에서는 조선 국왕 장례식 때 썼던 백립(白笠)이 품절됐다. 비분강개함을 참지 못하고 자결하는 유림도 있었다. 총독부가 임의로 정한 인산일(장례일)은 3월 3일이었다. 3월 2일 현재 서울에 모인 군중은 10만 명에 달했다.(서동일, '1919년 파리장서운동의 전개와 역사적 성격', 2008) 천도교를 중심으로 기독교와 불교계는 조직적인 저항운동에 착수했다.


   1919년 11월 4일 상해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에 실린 한용운의 '조선 독립에 대한 감상의 대요'. 그해 7월 10일 총독부 검사 조사 과정에서 작성한 논문이다.


   하지만 유림에게 군주 고종의 '훙거(薨去·왕의 죽음)'가 중요했고 그를 따르는 충군(忠君) 애국의식밖에 없었다. 사람들에게 그들은 독립과 무관한 '역겨운 상복을 입은 유교적 예문가'들이었다.(1919년 1월 23일 '윤치호일기') 영남 유림 곽윤(1881~1927)은 "임금도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하면 바꿔야 한다"고 주장하는 독립운동가 임유동(1900~1950)을 "진짜 미친 놈(眞突兀漢)"이라고 비난했을 정도였다.('중재선생문집', 서동일 '파리장서운동의 전개와 영남지역의 숨은 협력자들', 2015, 재인용)


   훗날 성균관대학교를 세운 영남 유림 김창숙은 3월 1일 파고다공원에서 군중으로부터 이런 욕을 들었다. "나라를 망칠 때는 온갖 죄악을 다 지어놓고 민족적 독립운동에는 한 놈도 끼지 않은 오만한 놈들!"(김창숙, '기미유림단사건에 관한 추억의 감상', 벽옹일대기)


   2월 하순 불교 대표 한용운은 그 유림을 독립선언에 끌어들이기 위해 경남 거창 거유(巨儒) 곽종석을 찾아갔으나 즉답을 받지 못했다. 그리하여 3월 1일 태화관에 모였던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유림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체포된 민족대표들은 서대문형무소에서 수감카드용 사진을 찍었다. 붉은 벽돌담 앞에 선 한용운은 당당하다. 카메라를 응시하는 눈빛은 활활 타오른다. 이듬해 9월 24일 '독립선언사건'에 대한 공판이 열렸다. 재판장이 한용운에게 물었다. "조선 독립에 대한 감상은 어떠한가." 그가 이리 답했다.


   서울 성북동에 있는 심우장(尋牛莊). 만해 한용운이 1933년부터 광복 1년 전인 1944년 죽을 때까지 살았던 집이다. 1937년 만주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 김동삼이 순국하자 한용운은 그 유해를 이 심우장으로 운구해 장례를 치렀다. 한용운은 평생 단 한 번 이 장례식 때 눈물을 보였다고 한다. /박종인 기자
    "자존심이 있는 민족은 압박뿐 아니라 행복의 증진도 받을 생각이 없다. 이번 독립운동이 총독의 압박에 저항한 일이라고 착각하지 말라. 사천 년 장구한 역사를 가진 민족이 언제까지 남의 노예가 될 것인가."(1920년 9월 25일 '동아일보') 그 어떤 간섭도 용인하지 않겠다는 의지였다.


   하지만 이에 앞서 한용운이 던진 말은 의미심장하다. "고금동서를 물론하고 국가의 흥망은 일조일석에 되는 것이 아니다. 어떤 나라든지 스스로 망하는 것이지 남의 나라가 남의 나라를 망하게 할 수 없는 것이다. 수백 년 부패한 정치와 현대 문명에 뒤떨어져 나라가 망한 것이다."


   일본의 압제에 의해 나라가 사라졌지만, 나라가 망한 근본 원인은 내부에 있었다는 것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망국의 원인이 그러하니 조선은 조선인 스스로 부활시키도록 건드리지 말라는 뜻이다. 그리고 한용운은 "내가 감옥에서 지은 글이 있으니 읽어보라"며 진술을 마쳤다. 각성(覺醒) 없는 부패와 반성 없는 과거 집착이 나라를 사라지게 만든 근본 원인이라고, 일본인 재판장에게 당당하게 말한 각성한 승려였다.


   그 승려가 감옥에서 지은 글 제목은 '조선 독립에 대한 감상'이다. 1919년 7월 10일 검사 취조 때 작성한 글이다. 이 글은 곧바로 한용운의 상좌인 춘성이 빼돌려 그해 11월 4일 자 상해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에 게재됐다.(박재현, '만해 한용운의 평화사상', 통일과 평화, 2017) 한용운은 이 글에서 이렇게 물었다. "수천 년 역사가 외국 침략에 의해 끊기고 외국인의 학대하에 소와 말이 되면서 행복으로 여길 자가 있겠는가."


   독립선언서를 인쇄한 천도교 계열 보성사 사장 이종일에 따르면, 한용운은 '고문의 공포에 통곡하는 사람들에게 똥을 퍼붓고'(이종일, '묵암비망록') 3년형을 살고 출소했다. 1922년 5월 출소한 날 마중 나온 사람들에게 그가 이렇게 소리를 질렀다. "너희는 인사를 할 줄은 알고 (출소해서) 인사받을 줄은 몰랐더냐?"(김광식, '만해 연구', 동국대학교출판부, 2011)


   세월이 갔다. 식민 시대는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가 쉰 살이 된 1929년 12월 21일 한용운은 또 경찰에 소환돼 요시찰 인물 사진을 찍었다. 세월이 10년 흘러 얼굴에는 주름이 늘고 곤궁함도 엿보이지만 각성된 당당함과 초연함은 더욱 번뜩인다.


   출소 직후부터 재개된 사회 활동은 그가 죽을 때까지 끝이 없었다. 민립대학설립운동 지원(1923), 조선불교청년회(1924), '님의 침묵' 발행(1926), 신간회 경성지회장(1927) 광주학생의거 민중대회 발기(1929). 그리고 1933년 서울 성북동에 집을 마련했다. 지인인 벽산 스님과 박광, 조선일보 사장 방응모 등이 마련해준 집 이름은 심우장(尋牛莊)이다. 불교에서 진리의 상징인 '소'를 찾는 집이다. 이곳에서 한용운은 '각성한 조선 민족'을 위해 많은 글을 지었다.


   1936년에 '조선일보'에 연재한 '심우장 만필(漫筆)'에는 1920년 그가 법정에서 던졌던 화두가 더 깊게 발전해 있다. 내용은 이러하다.


   '불행한 경지를 만나면 흔히 하늘을 원망하고 사람을 탓한다. 강자를 원망하고 사회를 저주하고 천지를 원망한다. 얼핏 보면 영웅처럼 보인다. 그러나 자기를 약하게 한 것은 다른 강자가 아니라 자기며, 자기를 불행케 한 것은 사회나 천지나 시대가 아니라 자기다. 망국의 원인이 제거되지 않는 이상 제이, 제삼의 정복국이 다시 나게 되는 것이다. 자기 불행도, 자기 행복도 타에 의하여 오리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가련하기도 하지만 가증스럽기가 더할 수 없다.'(한용운, '심우장 만필-반성') 그가 이렇게 덧붙였다. '자각과 노력은 만사 성공의 원천이 된다.'


   암울하기 짝이 없는 세상을, 침략자 일본을 탓하기에 앞서 노력과 자각으로 극복하라고, 이 당당한 민족운동가 만해가 말했다. 이듬해 만주에서 전사한 독립투사 김동삼의 유해가 조선에 돌아왔다. 한용운은 김동삼을 심우장으로 모셔와 생전 처음 통곡을 하며 장례를 치렀다.


   1942년 10월 조선어학회사건이 터졌다. 학자들이 대거 체포되고 조선어사전 원고는 압수됐다. 핑계를 갖다 붙이면 아무나 체포되고 학생은 태평양전쟁 학도병으로 징집당하는 사태가 몇 달을 갔다. 혜화전문학교 불교학과 출신 박설산 또한 징집영장을 받았다. 그해 말 박설산이 인천에 있는 여운형을 찾아갔다. 여운형은 "끌려가서 총 쏘고 칼 쓰는 법을 배우라"고 말했다. 그리고 심우장으로 가 한용운을 찾아갔다. 한용운은 방응모, 정인보와 함께 바둑을 두고 있었다. 사정을 들은 한용운이 갑자기 바둑판과 바둑알을 집어던지며 고함을 질렀다. "죽지 마라, 이놈들아!"


   박설산은 이렇게 회상한다. "여운형 선생의 깊은 뜻을 몰라   심장이 터질 것 같았고, 살기 위해 죽지 말라는 게 아니라 살아남아야 할 지상명령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박설산, '뚜껑없는 조선 역사 책', 1994, 도서출판 삼장, p227) 조선인은 각성 중이었다. 2년 뒤 한용운은 심우장에서 죽었다. 100년 전 각성과 반성을 주문했던 한용운이었다. 그 화두(話頭), 100년이 흐른 지금 더욱 절실하지 않은가.


                                                              <참고 문헌>
   1. 박종인, "100년 전 한용운이 심우장에서 던진 화두, 각성", 조선일보, 2019.12.31일자. A2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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