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정 이지함의 올곧은 생애와 훌륭한 업적

신상구 | 2020.03.02 11:40 | 조회 5854


                                                               토정 이지함의 올곧은 생애와 훌륭한  업적

   1569년 홍문관 부교리 율곡 이이가 당시 국왕 선조에게 보고서를 올렸다. '나라가 마치 오래 손보지 않은 1만 칸 큰 집처럼 옆으로 기울고 위로 빗물이 새고 대들보와 서까래는 좀이 먹고 썩어서 구차하게 아침저녁을 넘기고 있는 것 같다.'(이이, '옥당진시폐소', 1569)
   9년 뒤 대사간에 임명된 이이가 사표를 던지며 또 상소를 했다. '나라 형세가 위태로워졌음을 전하가 스스로 아는 바이다.'(1578년 5월 1일 '선조수정실록') 나라가 엉망진창이니 정신 똑바로 차리고 국정을 추스르라는 이야기였다.
   또 4년 뒤 이이가 작심하고 또 상소를 올렸다. '200년 동안 저축해 온 나라가 지금 2년 먹을 양식도 없다. 나라가 나라가 아니다(國非其國·국비기국).'(이이, '진시폐소', 1582) 이듬해 병조판서 이이가 또 상소를 올렸다. '지금 나라는 1년도 지탱하지 못한다(今之國儲 不支一年·금지국저 부지일년).'(1583년 2월 15일 '선조실록')
   10년 넘도록 나라 살림을 회생할 조치를 취하지 않아 결국 '2년치'였던 국가 재산이 1년 만에 '1년치'로 줄었다는 말이니, 도대체 나라 경영을 이따위로 하는 정부와 지도자와 고위 관료들이 어디 있다는 말인가. 가뭄 대책은 기우제요, 역병 대책은 시신 수습이 기본 정책이던 그들이었다. 그 무렵 한 지방 군수는 붓과 잡설을 버리고 발로 뛰어 비상사태에 대처했다. 토정(土亭) 이지함(李之菡)이다. 구체적이고 실효적인 방법으로 백성을 구한, 하지만 오래도록 세상을 등졌다가 허망하게 죽은 한 공무원 이야기.
   서경덕, 이순신, 이황, 이이, 정여립, 조식, 정인홍, 류성룡, 이항복, 기타 등등 16세기는 영웅의 시대였다. 다시 말해서, '난세(亂世)'였다. 소시민으로 행복하게 살 수 있었던 사람들을 끌어내 앞장서게 만든 시대였다.
   충청남도 아산시 영인면 영인초등학교 입구에는 옛 아산현청 정문인 여민루(慮民樓)가 서 있다. 토정 이지함은 죽기 석 달 전 아산현감으로 부임해 구체적이고 모범적인 빈민 구제정책을 시행했다. 가난, 역병과 학정에 신음하던 백성에게 그의 정책은 직접적이고 구체적이었다.
   건국 후 150년 세월이 흘렀다. 조선 통치 시스템은 안정기에 접어들었다. 그 안정기에 율곡이 거듭 올렸던 상소 시리즈는 의미심장하다. 나라를 지탱할 국부(國富) 창출에 실패했다는 뜻이다. 생산직인 공(工)과 유통업자인 상(商)은 성리학적 신분 질서 최하위로 천대받았다. 양반이 안정적으로 책을 읽을 수 있는 기반은 농업이었다. 농업 진흥을 위해 세종은 일본으로부터 논에 물을 대는 기계 수차(水車)를 도입했다. 4년 만에 기계 수차는 "대개 사람들이 새로운 것을 싫어하는(大抵人情 憚於新作·대저인정 탄어신작)" 탓에 폐기됐다.(1433년 4월 8일 '세종실록') 그래서 농업 또한 가뭄이나 홍수가 닥치면 맥을 추지 못했다. 조선은 딱 먹고살 수 있는 정도만 생산하고 나머지는 천시하거나 금지했다. 이게 홍문관 재직 시절부터 이이가 줄기차게 상소를 올리게 된 원인이다. 그 시대에 토정 이지함이 살았다.
   '토정비결'의 저자로 더 알려져 있지만, 이지함은 서경덕, 조식, 이이와 교류하던 선비요 학자였다. 붓만 놀리는 선비가 아니었다. 상것들이나 할 일을 그는 자기 손으로 했다. 부모 무덤이 침수될 우려가 있자 이지함은 직접 소금과 생선을 팔아 제방을 쌓았다.('토정선생 유사', '토정유고') 성리학을 공부하라고 권하는 율곡 이이에게 이지함은 이리 답했다. "나는 욕심이 많아 성리학을 못 한다."(이이, '석담일기(石潭日記)' 하권 1578년) 탁상공론만 하기에는 세상에 할 일이 널려 있다는 뜻이다.
   산천을 떠돌던 1573년, 나이 쉰일곱에 이지함은 처음으로 관직에 임용됐다. 포천 현감이다. 그때 현장 시찰에 나선 이지함에게 사십대 여자가 말했다. "젖이 나오지 않아 못 먹이던 세 살짜리가 죽었다. 항아리 밑을 쓸어 싸라기 몇 톨을 씹어 급히 입에 넣으니 숨이 다시 통했다. 하나 며칠이나 버틸지."(이지함, '이포천시상소(莅抱川時上疏)', '토정유고') 남편도 굶어 죽고 아이 죽음을 기다리던 여자를 만난 것이다. 참으로 난세였다.
   그때 이지함이 선조에게 상소를 한다. '국고는 바다에 미치지 못하고, 여러 고을 쓸 돈은 밑 빠진 잔보다 많다. 산에 묻힌 은을 왜 채취를 금하는 것이며 무궁한 물고기도 무엇이 아까워 잡지 못하게 하며, 무궁무진한 소금도 무엇이 아까워 못 굽게 하는가. 농사가 근본이고 소금 굽는 일이 끝이지만 끝으로 근본을 도와야 궁핍하지 않은 것이다. 생명을 구제하려면 다 풀어라.'('이포천시상소')
   규제 개혁을 요구하는 지방 현감의 상소는 거부됐다. 이지함은 '본래 오래 있을 생각이 없었기에 곧바로 돌아갔다.'('석담일기' 상권 1574년) 가난은 만성적이었고, 이후 몇 년 동안 나라에 역병이 돌았다. 나라에서는 병막(病幕)을 만들어 약재를 나눠주고 격리 조치를 취했다. 하지만 하층민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조치였다.(권복규 등, '조선 전기 역병에 대한 민간의 대응', 의사학, 1999) 이이가 "이제 나라 꼬라지를 왕 당신도 알겠지" 하고 상소하던 그 무렵이다.
   4년이 지난 1578년 5월 이지함은 충청도 아산현감에 임명됐다. 예순두 살이었다. 신임 현감은 "양어장에서 수시로 고기를 잡아 바치라고 해 죽겠다"는 민원을 듣고 곧바로 양어장을 메워버렸다. 문제는 산적했다. 아산은 군역자 수를 맞추기 위해 '늙고 병들어 죽을 지경인 사람은 물론 나무와 돌과 닭과 개 이름까지' 군역자 명단에 올려져 있었고, 존재하지도 않는 사람의 군 복무 대신 낼 군포(軍布)를 댈 수가 없어 온 집들이 풍비박산이 된 고을이었다. 역병이 휩쓸고 간 거렁뱅이 고을이, 이번에는 군정(軍政)으로 신음하는 것이다. 이지함은 '천리(天理)의 존망 여부를 가름하게 될' 일이니 해결해달라고 상소를 올렸다.('이아산시진폐상소(莅牙山時陳獘上疏)')
    충남 보령에 있는 이지함의 묘. 오른쪽에는 아버지, 왼쪽 뒤편에는 요절한 아들 묘가 있다. 집안 발복을 위해 이지함은 아들의 불운을 떠안았다. 그리고 관내를 떠돌며 걸식하는 유민 구제책으로 만든 관청이 '걸인청(乞人廳)'이었다. 걸인청은 거지들을 수용해 일을 가르치는 기관이었다. 정약용에 따르면, '가장 무능한 자는 볏짚을 주어 짚신을 삼도록 하고 그들의 일하는 것을 감독하니, 하루에 10켤레를 만들어 팔아 하루 일당으로 쌀 한 말을 사지 못하는 자가 없었다.' 능력에 따라 단순노동을 시키고 합당한 대가를 지불하니, 거지들이 그 돈으로 옷을 지어 입었다. 두어 달 사이에 의식이 모두 충족되었다.(정약용, '목민심서' 진황 6조 규모)
    '서울에 있는 창고는 한계가 있고 궁핍한 고을의 요청은 무궁하다.'('이포천시상소') 현금과 현물을 통한 가난 구제책은 비현실적임을 그는 명확하게 알고 있었다. 걸인청에서 벌어진 각종 행정 행위는 '토정유고'(1720)를 비롯해 정약용(19세기 초), 이유원(19세기 후반)까지 두루 기록돼 있다. '걸인청'이라는 명칭은 아산에 전승되는 이름이며 기록에는 보이지 않는다. 이유원은 걸인청을 '영남에 기근이 든 1570년 세웠다'고 기록했다.(임선빈, '걸인청의 역사적 실재와 활용방향', 2015년 충남의회 토론회) 아산에는 영인초등학교 구내에 아산현청 정문인 여민루(慮民樓)가 남아 있다. 장소가 어디든 시기가 언제든 선비는 붓만 놀리고 백성은 자기와 상전 먹을 것을 책임지던 시대에 이지함은 뚜벅뚜벅 발로 뛰며 비(非)선비적으로 살았다.
    1578년 7월 그 행정가 이지함이 죽었다. 아산현감으로 부임한 지 두 달 만이다. 사망 소식은 곧바로 조정에 보고됐다. '천리(天理)의 존망 여부를 가름하게 될' 그의 상소도 전달되지 못했다.(1578년 7월 24일 '선조실록') 이지함은 부모가 묻힌 선산에 안장됐다. 선산은 보령에 있다. 그 옛날 이지함 본인이 부모 묏자리로 잡았던 곳이다. '토정유고'에 따르면 그곳은 후대에 두 정승이 날 자리이나 막내아들에게 불길한 자리였다. 이지함은 "집안을 위해 내가 재앙을 감당하겠다"며 그 자리에 부모 묘를 잡았다. 맏형 지번의 아들 산해는 영의정이 되고 둘째 형 지무의 아들 산보는 이조판서가 되었다. 이지함의 아들 산두는 스무 살에 요절했다.('이지함 시장') 그 선산에 초능력자 아비와 불우한 아들이 가족들과 함께 잠들어 있다. 선산 주소는 충남 보령시 토정로 1048이다.
    앞날을 훤히 내다봤던 초능력자 이지함은, 왜 쉰일곱 살에야 관직에 올랐나. 둘도 없는 친구 안명세의 죽음 탓이다. 안명세는 명종 때 홍문관 정자(正字)였다. 소위 대윤과 소윤이 권력 투쟁을 벌여 승리한 소윤은 대윤을 철저하게 압살했다. 그 전말을 사관 안명세가 기록했는데, 그 기록에 처형한 사람과 처형당한 사람과 그 이유가 적혀 있었다. 이게 빌미가 돼 안명세는 소윤에 의해 목이 베여 죽었다.(1548년 2월 14일 '명종실록') 이지함은 그날 서로 손을 잡고 영결을 하고는 옷을 찢어 발을 싸매고 달아났다.('연려실기술' 명종조 고사본말) 이후 그는 거짓 미치광이로 세상을 도피했다.(1586년 10월 1일 '선조수정실록')
    이게 모범 행정가 이지  함이 웅지를 펼치지 못하고 늙어버린 이유다. 이게 환갑을 넘긴 신참 노 행정가가 현장에서 느닷없이 죽게 된 이유다. 이게 16세기 그 숱한 영웅들이 난세를 바로잡지 못하고 기러기가 높이 날아 화살을 피하듯 세상을 버리고 산골짜기에서 늙어 죽은 이유다. 지금도 세상에는 힘으로 호령하고 말로 치국(治國)을 하는 자들이 널려 있지 않은가. 참으로 난세가 아닌가.
                                                                                      <참고문헌>
  1. 박종인, "왜 말로만 백성 구제한다고 떠드는가", 조선일보, 2020.2.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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