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하는 대한민국- "왜 화나세요?'

진성조 | 2011.04.09 22:53 | 조회 55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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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하는 대한민국]“왜 화나세요?” 평범한 시민들에게 물어보니

ㆍ“나의 삶은 불행하다” … 18명 중 14명
ㆍ“고로 나는 분노한다” … 14명 중 10명

“당신은 지금 화가 나 있습니까?’

경향신문은 최근 20~80대의 평범한 시민 18명을 만나 ‘현실에 만족하는지’ ‘불만스럽다면 특히 무엇에 화가 나는지’를 물었다. 이들 중 ‘현실에 만족한다’고 답한 사람은 4명뿐이었다. 나머지 14명은 ‘불만이지만 만족하며 살려고 노력한다’에서부터 ‘현실이 너무 싫다’는 반응까지 스펙트럼이 다양했다. 일부는 심지가 거의 타 들어간 다이너마이트처럼 곧 터질 듯한 모습이었다. ‘분노 치료’ 전문가인 민성길 서울시은평병원장(정신과 전문의)은 “과거에도 화를 참지 못해 병원을 찾는 환자들이 있었지만, 최근 몇 년 사이 이런 환자 수가 급증하고 증세도 다양해지고 있다”고 말했다. 한국 사회, 한국 사람들은 지금 분노하고 있다. 인터뷰는 솔직한 대답을 듣기 위해 익명을 전제로 진행했다.

◇ 현실이 불만스럽지만 참고 살아 = 대출상담업을 하고 있는 ㄱ씨(39)는 무리해서 산 집의 대출금 이자를 갚는 데 월급의 대부분을 쓰고 있다. 하지만 월급 200만원으로는 원금은커녕 대출금 이자도 내기 어렵다. 이 때문에 갚아야 할 원금만 더 늘어난 상태다. ㄱ씨는 “어렵게 마련한 집인데 대출금 때문에 하루하루 살아가는 게 너무 힘들다. 죽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상고를 졸업한 뒤 10년이나 다닌 지방 은행이 김대중 정부 때 정리됐다”며 “다른 은행으로 옮겼더라면 지금처럼 힘들지는 않았을 것 같다”고 했다.

대기업을 다니다 중소기업으로 옮긴 ㄴ씨(46)는 “한국 사회에서 중소기업의 낮은 위상을 실감한다”며 “이런 환경에서는 사회운동가가 될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라고 털어놨다. 그는 대기업 과장 시절 좀 더 적극적으로 회사생활을 했더라면 지금쯤 그곳에서 ‘을(乙)’이 아닌 ‘갑(甲)’으로 사회생활을 하고 있을 것이라며 아쉬워했다.

“나는 더이상 살아있을 가치가 없다.” 결혼한 지 30년된 주부 ㄷ씨(56)의 말이다. 직장에 다니는 딸과 대학생 아들을 둔 ㄷ씨는 이제 다 컸다며 자신을 무시하는 자녀와 명예퇴직 이후 바깥으로 도는 남편 사이에서 ‘내가 왜 이렇게 살아왔는지’ 뒤늦게 후회하고 있었다.

노인들이 모여드는 탑골공원에서 만난 ㄹ씨(83)는 “현실에 전혀 만족할 수 없다. 죽을 수만 있다면 당장 내일이라도 죽고 싶고, 자식들도 내가 죽기를 바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과거 암투병을 하면서 가진 재산을 전부 자식들에게 물려준 이후 자식들과 사실상 ‘의절’한 상태다. 재산을 나눠 받은 자식들은 더이상 자신을 찾지 않았다. 그는 “큰아들이 나를 때리기도 했다”며 “매일 죽고 싶지만, 억울해서 이대로는 죽을 수 없고 가족들한테 복수하고 죽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고 고백했다.

대학생 ㅁ씨(27)는 등록금과 생활비 마련을 위해 패밀리레스토랑에서 아르바이트를 한다. 3학기 학자금 대출까지 받은 상태다. 하지만 일과 공부를 병행하다보니 생활 자체가 어렵다. 그는 “집안 사정이 넉넉지 않아 부모님께 손을 벌리기 힘들다. 그런데 남는 시간을 쪼개 취업 준비까지 해야 하니 현실이 버겁다”고 말했다.

◇ 폭력 충동 느끼지만 분노 풀 곳 없어 = 이처럼 현실에 불만을 품은 사람들 가운데 상당수가 폭력 충동을 느껴본 적이 있으나, 이 같은 분노를 풀 곳은 없다고 대답했다. 현실에 불만이 있다고 밝힌 14명 가운데 10명이 ‘누군가를 때리고 싶다’고 했다. ‘누군가를 죽이거나 자살을 생각해본 적이 있다’고 밝힌 사람도 2명 있었다.

ㅂ씨(28)는 일본에서 3년간 유학한 뒤 지난해 여름 한국에 들어와 외식업 해외사업팀에서 근무하고 있다.

그는 지난달 동일본 대지진이 발생한 뒤 주변 사람들이 “이제 일본에 못 가겠네”라고 했을 때 그들을 죽이고 싶었다고 털어놨다.

ㅂ씨는 한국에서 일정 기간 일한 뒤 일본으로 돌아가 취직하는 것이 목표였다. 그는 “요즘 일이 내 뜻대로 풀리지 않고, 사소한 일조차 마음대로 되지 않을 때는 그냥 아무나 때리고 싶어진다”고 말했다.

대학생 ㅁ씨(27)는 “아르바이트하는 패밀리레스토랑에서 손님이 눈에 뻔히 보이는 거짓말을 하고도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발뺌할 때 정말 죽이고 싶다”고 말했다. “마음 속에 항상 분노를 품고 산다”고도 했다.

경찰공무원 ㅅ씨(45)는 야간 당직 근무를 설 때마다 화가 나지만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담배 한 대를 피우는 것밖에 없다.

그는 “주변 친구들이 진급하거나, 나보다 젊은 경찰대 출신이 고위직에 올라갈 때마다 술취한 사람들을 상대하는 내 생활이 후회되지만 취객들을 때릴 수도 없고 그저 피하려고 노력할 뿐”이라고 털어놨다.

ㅂ씨는 “밤이 되면 자살하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사람이 살면서 맛볼 수 있는 최고치의 행복이 있을텐데 그걸 이루지 못하는 현실을 납득하기가 어렵다”고 했다. 여성의류회사 영업사원 ㅇ씨(24)도 “고객을 상대할 때마다 욕을 하거나 싸움을 하고 싶지만 무조건 참는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사무직 회사원 ㅈ씨(34)는 “내 전공과 맞지 않는 일을 해오면서 몸이 나빠져 조직섬유근통이라는 병을 얻었다”며 “내가 체질적으로 강하지 못한 사람이기도 하지만, 대화를 나눌 친구를 만나기도 어려워서 화가 나도 무조건 참다보니 건강을 잃은 것 같다”고 밝혔다.

청소노동자 ㅊ씨(52)는 종교에 의지해 견디고 있다. 화가 날 때면 교회에 가서 기도를 하고 찬송가를 부른다. 퇴직을 앞둔 회사원 ㅋ씨(57)도 “신을 통해 나를 볼 때 죽고 싶은 충동을 억제하게 된다”고 말했다.

ㅌ씨(59)는 30년간 의류제조업을 하며 살아왔지만 공장이 중국 회사에 넘어가면서 집 근처 아파트 경비원 자리를 얻었다. 하루종일 주민들을 상대하며 일하는데도 ‘빈둥빈둥 왔다갔다 한다’는 말을 들을 때면 현실을 부정하고 싶어진다.

남편과 사별한 뒤 어렵게 사는 ㅍ씨(78)는 “자식들도 가난해서 날 도울 형편이 못 된다. 누굴 원망할 수도 없고, 그저 지금처럼 시간이 흘러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의 한 가지 바람은 버스나 지하철을 탔을 때 사람들이 자리를 양보해줬으면 하는 것뿐이다.



<류인하·주영재·정희완 기자>


입력 : 2011-04-07 21:39:51수정 : 2011-04-08 00:1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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