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이버 캐스트(철학편)- 양명학의 창시자, 왕수인

진성조 | 2011.06.03 07:23 | 조회 8046

“나의 영명함이여, 천지와 귀신을 주재한다! 나의 영명함이 없다면, 하늘이 높다 한들 누가 우러러보겠는가? 나의 영명함이 없다면, 땅이 깊다 한들 누가 내려다보겠는가? 나의 영명함이 없다면, 누가 귀신의 길흉화복을 가져오는 힘을 느낄 것인가? 천지도 귀신도 만물도 나의 영명을 떠나 존재할 수 없으니, 나의 영명도 천지와 귀신과 만물을 떠나 존재할 수 없다. 하나의 기운이 전체에 흐르나니, 어찌 너와 내가 따로 있겠는가?”

-왕수인, [전습록]

과거 전용 학문이 된 명대 유학

몽골을 북쪽으로 몰아내고 “한족 천하”를 회복한 명태조 주원장(朱元璋, 1328~1398). 그는 한때 머리를 깎고 승려 노릇을 했었고, 개인적으로는 유학을 결코 좋아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오랫동안 격하되었던 중화문명을 부활시키고” 황제를 정점으로 하는 중앙집권 체제를 이룩하려면 옛 남송 땅인 강남에서 주자학을 익혀온 선비들의 도움이 절실했다. 그리하여 원대에 침체되었던 과거제를 확충하면서 시험 과목을 [논어], [맹자], [중용], [대학]의 ‘사서(四書)’로 정하고, 이 때 주희(朱熹, 1130~1200)의 주석본을 표준으로 삼도록 했다. 이로써 주자학은 백수십년 만에 ‘관학’이 된 것이다.

다만 그는 어디까지나 주자학을 이용하려는 입장이었기에, 주자학에서 국가에 대한 충성, 금욕주의, 농본주의 등은 중시하고 지지했지만 한편으로 황제권에 대한 선비들의 자율성을 강조한 부분은 못마땅하게 여겼다. “폭군은 정벌할 수 있다”는 사상을 담은 [맹자]를 유독 싫어한 나머지 수도의 공자묘에서 맹자의 위패를 제거하려 한 적도 있었다. 그리고 선비들이 쓴 글귀 하나하나에 트집을 잡아 엄벌에 처하는 “문자의 옥”을 여러 번 일으켰으며, 검교라는 직속 첩보조직을 키워 신하들의 언행을 낱낱이 감시했다.


그리하여 명왕조의 선비들은 원왕조 때와 달리 학자이자 관료로서 직접 국정을 운영하는 근간 노릇을 할 수는 있었으나, 송왕조 때처럼 자유롭게 생각하고 말하기란 힘들게 되었다. 이처럼 선비의 기개를 살릴 수 없어지면서 주자학은 단지 과거에 급제하기 위해 익히는 “입시용 학문”이 되어 버리는 경향마저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원왕조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유학이 진흥되다 보니, 주자학을 출세를 위해 배우기보다 그 학문 자체가 좋아서 열심히 익히는 사람들도 나오게 된다. 왕수인도 그런 사람이었다.

청년 왕수인, ‘질풍노도의 시대’를 살다


그 호인 양명(陽明)에 성을 붙인 ‘왕양명’으로 많이 알려져 있는 왕수인은 명왕조가 수립(1368)된 백여 년 후인 1472년, 지금의 저장성에 있는 여요에서 명문의 자손으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육조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명필 왕희지도 그 일원이었다. 왕수인의 아버지 왕화는 장원급제를 거쳐 남경 이부상서까지 지내다가 당대를 주름잡던 환관 유근(劉瑾, ? ~ 1510)과 충돌해서 퇴직했던 사람이었다.

왕수인이 11세 때 개인 교사에게 수업을 듣다가 “공부의 목적은 과거 급제에 있다”는 스승의 말에 “아닙니다. 공부는 성인(聖人)이 되기 위해 하는 것입니다”라고 말해 스승을 당황케 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하지만 청소년기의 왕수인은 오직 공부에만 뜻을 둔 학구파는 아니었다. 시인이었던 할아버지의 영향도 있어서 간혹 빼어난 시를 지어 주위를 놀라게 했으며, 친구들과 시 짓는 모임을 만들기도 했다. 또 15세 때는 북방을 유람하고는 장차 위대한 장군이 되어 오랑캐를 무찌르겠다는 꿈을 꾸었다. 몽골계 소년들과 함께 말을 달리며 활쏘기 시합도 하고, 꿈에 후한시대에 이민족을 정벌해 유명해진 복파장군 마원을 만나보고 감격해서 시를 짓기도 했다. 또 병법 공부에 몰두하고는 북경 일원의 도적떼를 토벌할 계책을 세워 상소하려 했으나, 아버지가 “전쟁이 애들 장난인 줄 아느냐”며 매번 가로막았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결혼식 전날, 어느 도사에게서 불로장생의 비법 이야기를 듣는 데 혹하여 그만 밤을 새고 혼례 당일에도 나타나지 않았다는 일화도 있다.

명무종. 명왕조 제10대 황제로 유근 등 환관의 꾐에 빠져 온갖 방탕을 일삼았다


이렇게 관심 분야가 다양했던 왕수인이 학문에 매진하기로 결심했던 때는 18세인데, 누일재(婁一齋, 1422~1491)라는 학자를 만난 것이 계기였다. 누일재도 과거 공부로서의 학문을 거부하고 평생 학문을 닦기로 한 주자학자였는데, 그에게 자극받은 왕수인은 본격적으로 주자학을 공부한다. 그러나 그런 다짐도 3년 만에 위기를 맞았다. ‘격물치지’의 일환으로 뜰에 서 있는 대나무의 이치를 탐구하고자 7일 동안 꼬박 대나무를 바라보았지만, 결국 얻은 것은 없는 채 병이 나 버렸기 때문이었다. 실망한 그는 주자학 공부에 회의를 품었고, 문학, 병법, 도교와 불교 공부 등에 다시 마음을 쏟기 시작했다. 한때는 도사가 되려고 입산하여 수련하기도 했다.

어느덧 20대 후반에 접어든 그는 명문가 자손으로서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압력 때문인지, 늦깎이로 과거 공부를 시작해서 28세에 급제했다. 한동안 관직 생활을 하다가 31세에 병으로 사직하고 고향 여요에 돌아왔는데, 양명동(여기서 그의 호가 비롯된다)에 따로 집을 짓고 살며 좋아하는 이런 저런 공부를 했다. 그런데 어느 절에 3년 동안 묵좌수행을 하고 있는 승려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가서 만나보았다. 그 승려는 정말로 일체의 구속에서 벗어나 높은 경지에 다다른 사람으로 보였으나, 왕수인이 “부모님 걱정은 되지 않느냐”고 물으니 그만 눈물을 쏟고 말았다. 이것으로 왕수인은 큰 깨달음을 얻었다고 하는데, 자신이 계속 관심을 가져온 불교에 대한 불신, 그리고 모든 사람의 마음에는 순수한 인간적인 마음, 유교에서 말하는 측은지심이 깃들어 있다는 생각이었다. 이렇게 다시 유교로 돌아온 왕수인은 2년 뒤 다시 관직 생활을 시작한다.

고난 속의 깨달음, “마음이 모든 것이다!”


35세가 되던 1506년, 그때까지 평온했던 그의 인생에 처음으로 풍파가 찾아온다. 바로 아버지의 관직 생활을 끝내게 했던 환관 유근과의 대립 때문이었다. 왕수인은 유근의 비리를 고했다가 오히려 처벌을 받게 된 관리들을 편들며 유근에게 맞섰는데, 결국 자신도 그들처럼 되고 말았다. 기절할 때까지 곤장을 맞고 투옥되었다가, 다음 해에 귀양길에 올랐다. 유배지인 용장은 기후가 나쁘고 풍토병이 심해서 귀양 중에 죽는 사람이 많은 곳이었다. 그러나 약 1년 동안 용장에서 지내며, 왕수인은 비로소 사상가로서 틀을 잡게 되었다. “유학이 참된 학문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주자학을 따를 필요는 없다.” 모든 것을 이치(理)로 파악하는 주자학은 근본적으로 잘못되어 있으며, 진정 중요한 것은 마음(心)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대나무를 아무리 바라본들 대나무와 동떨어져 있는 자신의 마음만을 확인하게 된다. 불교는 그런 마음을 비우고 공(空)을 깨달으라고 하지만, 부모님 생각에 눈물을 흘리던 승려에서 볼 수 있듯 사람의 마음이란 그렇게 완전히 비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가장 순수하고 착한 마음을 되찾고 살리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리하여 잡념이나 욕심이 사라진 크고 고결한 마음인 채로 세상을 바라본다면, 그 때야말로 대나무이든 부모님이든 그 참된 의미를 얻을 수 있으리라!

“내 마음은 밝게 빛난다”


이렇게 “용장에서의 큰 깨달음”을 얻은 왕수인은 1509년에 유근이 실각, 처형되자 유배에서 풀려나고 다시 관리가 되었다. 한동안은 지방관으로 일했는데, 그는 근무하는 한편으로 자신의 학술을 가다듬고 제자를 길렀다. 45세부터 약 4년 동안은 어사가 되어 각 지방의 도적을 토벌하는 일을 했는데, 일찍이 열중했던 병법 실력을 발휘하여 매번 대승을 거두었다. 1519년에는 강서성의 영왕(寧王)이 일으킨 반란을 진압하기도 했다. 이러는 중에 무너진 향촌질서를 바로 세우기 위한 여러 제도도 고안해서 시행했다. 열 집마다 하나의 단위로 묶어 민방위와 상호 감시를 하도록 하는 십가패법, 일반 백성을 임시 군졸로 채용하는 민병제, 그리고 명나라에서는 최초로 시행한 향약 등이다. 십가패법은 나중에 중앙정부에서 정식 채택하여 보갑법이 되었고, 향약도 각지에서 뒤따라 실시되었다. 이처럼 행정처리와 군사지휘로 바쁜 가운데서도 학술과 교육에도 손을 놓지 않아서, [대학]의 주자학적 해석을 반박하는 [고본대학], 자신의 사상을 풀어낸 대표작 [전습록], 주희의 사상이 만년에는 많이 바뀌었으며 자신의 양명학은 그 주희 만년의 사상을 계승한 것이라고 주장한 [주자만년정론] 등을 펴냈다.

“불랑기포”. 포르투갈에서 전래된 이 화포를 중국에서는 왕수인이 영왕의 반란을 진압할 때 처음 사용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영왕의 반란을 진압하여 명성이 높아진 왕수인은 참소를 받아 다시 한 번 위기를 맞았다. 사상 쪽에서도 나흠순을 비롯한 논적들이 나타났다. 그러나 왕수인은 만년에 접어들면서 사상적으로 더욱 원숙해졌고, 명예도 높아졌다. 56세부터는 다시 군 지휘관 임무가 주어졌는데, 몸이 병약해졌기에 사양했지만 허용되지 않았다. 그리하여 광서성의 비적을 소탕하고 묘족의 봉기도 평정했으나, 결국 병이 악화되어 1528년과 1529년이 엇갈리던 시점에 숨을 거두었다. 마지막 남긴 말은 “내 마음은 밝게 빛난다”였다.


심즉리와 치양지


양명학은 주자학과 어떤 점에서 다른가. 세상의 이치를 직접 궁구하기보다 먼저 자신의 마음을 성찰하고 바로잡음으로써 그곳에서 이치를 밝혀내는 방식, 왕수인은 이것을 “마음이 곧 이치이다(심즉리, 心卽理). 세상에는 마음만이 있으며, 마음 없이는 아무런 이치도 없다”라고 설명했다. 이처럼 마음을 모든 것의 중심에 두었으므로 양명학을 심학(心學)이라고도 한다.

마음의 문제는 사실 주자학에서도 중시했다. 그러나 [서경]의 ‘대우모’와 [맹자]의 ‘사단(四端)’을 해석하면서, 주희는 사람에게 선을 지향하는 마음과 악을 지향하는 마음이 함께 갖추어져 있으며 이 중에서 선을 지향하는 마음이 더 근본적이나 욕망 때문에 가리워지기 쉬우므로 수양을 통해 선의 마음을 확충하고 악의 마음을 억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왕수인은 주희와 동시대인인 육구연(陸九淵, 1139~1192)의 사상을 본받아서, 사람의 마음에는 본래 선악이 없다고 보았다. 그런데 어떤 행동을 할 것인가 선택할 때 지(知)를 사용하는데, 만약 제대로 안다면 사람은 언제나 선량하게 행동하게 된다. 어린아이라 해도 어버이를 사랑하고, 나쁜 일을 보면 얼굴을 찌푸린다. 바로 제대로 된 지(良知)를 나면서부터 가지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사람이 악한 일을 하는 것은 나면서부터 있는 양지를 잊어버리고 ‘어리석은’ 지로 판단, 그에 따라 행동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치지(致知), 곧 치양지(致良知)는 이 본래의 지를 회복하고, 마음을 가득 채운 다음 보존하는 수양법이다.

사적인 욕망을 억제하고 ‘선량한 마음’을 유지하도록 힘써야 한다는 점에서는 주희와 양명의 결론이 비슷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이를 응용하면 큰 차이가 나게 된다. 주자학에서는 마음이 두 개인데다 태어날 때부터 개인별로 어느 쪽 마음의 힘이 강한지가 정해진다고 본다. 똑같이 수양을 해도 쉽게 착해지는 사람이 있는 반면, 좀처럼 그렇게 못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악한 마음을 잘 다스리는 사람이 군자이며, 다른 사람의 머리 위에 설 자격을 갖춘 사람이다. 따라서 신분의 차이는 어느 정도는 태어날 때부터 정해져 있는 것이다.

양명 좌파의 일원으로 “인간해방론”을 주장한 이지(이탁오).
<출처 : (CC) 曳杖行歌意欲仙 at Wikipedia.org>.

일본에 양명학파를 수립한 나카에 토오쥬.

그러나 양명학에 따르면 마음은 어느 누구나 똑같이 선악이 없고, 양지 또한 태어날 때부터 평등하게 갖춰진 것이다. 군자가 되는 수양 또한 주자학에서는 오랜 공부와 덕행을 필요로 하지만, 양명학에서는 마음만 제대로 먹으면 언제라도 가능하다. 따로 어려운 책을 읽으며 공부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왕수인은 “경전은 단지 참고하기 위한 자료이며, 경전을 읽는다고 군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라고 했다. 이는 신분제가 뚜렷했던 전통사회에서는 엄청난 폭발력을 발휘할 수도 있는 주장이었다. 그래서 이른바 “양명좌파”라고 불리는, 왕수인의 계승자 중 가장 급진적이었던 이지(李贄, 1527~1602), 하심은(何心隱, 1517~1579), 나여방(羅汝芳, 1515~1588) 등은 “배움이 많으면 오히려 혼란스러워진다. 배우지 않는 편이 치양지에 유리하다”, “글공부를 한다고 성인이 되겠는가? 대장장이가 되든지, 장돌뱅이가 되든지, 성인이 되기에는 부족함이 없다”, 심지어 “내 마음에 악이란 없으니, 부귀영화를 욕망하거나 미녀를 욕망한다고 그것이 어찌 잘못이겠는가” 등의 주장을 쏟아내었다. 이런 주장은 양명을 오도한 것이라고 보았던 당견(唐甄), 황종희(黃宗羲, 1610~1695) 같은 사람도 황제나 명문족벌이 백성 위에 군림하는 것은 근거가 없다고 비판했다.

근대의 여명이었나?


오늘날 이런 양명학의 특성에서 “근대성”의 실마리를 찾는 사람도 많다. 경전이나 스승의 권위를 부정하고 오직 자신의 마음에 선악을 선택할 권리를 준 것은 서구 근대화 과정에서 종교와 전통이 권위를 잃고 개인의 의지가 모든 것의 중심에 서게 된 사상적 전환과 흡사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신분제의 사상적 토대가 부정되고 만민평등 사상이 재조명되었을 뿐 아니라 개인의 욕망까지도 긍정되는 모습을 보면, 과연 그런가 싶기도 하다.

하지만 적어도 왕수인 본인은 근대적 사상의 소유자였다고 보기에 무리가 있다. 후대의 일부 양명좌파는 몰라도, 왕수인은 주희와 마찬가지로 학문의 목표를 도덕적 완성에 두었다. 이 때의 도덕이란 충, 효, 예의염치 등 유교적 가치관에 따른 도덕을 말한다. 또한 근대적 정신의 핵심에는 일체의 권위를 의심하고 거부하는 회의주의가 자리하는데, 양명학은 회의가 아닌 포용을 했다. 사람의 마음 밖에 실재하는 객관적 존재를 모두 무시하고는, 모든 것을 자신의 마음에 받아들이고 주관적으로 풀이해버린 것이다. 주관적으로 지각할 수 없는 사물의 이치가 존재한다는 생각은 오히려 주자학에 있었다. 서구에서는 코페르니쿠스지동설, 케플러의 타원형 우주, 뉴턴의 물리법칙, 나아가 다윈진화론 등을 통해 세계는 인간을 위해 존재하지 않으며, 우주는 신을 고려하지 않고도 해명된다는 과학적 사고에 익숙해졌다. 그러나 왕수인은 “나는 대나무의 이치를 따로 궁리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대나무는 내 마음 속에 있기 때문이다. 내 마음을 바로 본다면 대나무의 이치는 저절로 알게 된다”는 식이었다.

그렇지만 양명학이 명나라 말기, 중앙정부의 권위가 점점 의심받는 가운데 서민들의 경제력과 자립심이 늘어가던 시대에 큰 호응을 받았던 사상임은 틀림없다. 그대로 계속되었다면, 그것은 서구 근대화 초기의 공화주의적 발전으로까지 이어졌을지도 모른다. 또한 양명학은 동아시아의 실제 근대화 과정에서 일정한 역할을 했다. 일본에서는 일찍이 나카에 토오쥬, 구마자와 반잔 등이 양명학을 받아들여 도쿠가와 막부가 관학화한 주자학에 대항했으며, 이시다 바이칸이 양명학을 참고하여 ‘세키몬 심학(心學)’을 만들어냈다. 중국에서는 양계초(梁啓超, 1873~1929), 담사동(譚嗣同, 1865~1898), 그리고 젊은 시절의 마오쩌둥(毛澤東, 1893~1976)까지 양명학의 영향을 받아 개혁과 민주주의 사상을 발전시켰다. 한국은 동양 3국 가운데 양명학의 영향이 가장 적었으나, ‘실학’에서 주자학과 다른 목소리를 내려 했던 데는 어느 정도의 영향이 보인다. 그리고 구한말에서 일제강점기에 이르는 동안, 박은식(朴殷植, 1859~1925)처럼 양명학을 기초로 새로운 ‘자주적 공화정치사상’을 이룩하려던 사람들도 있었다.

함규진
함규진 / 역사저술가
글쓴이 함규진은 여러 방면의 지적 흐름에 관심이 많다. 정치학을 전공하여 대학에서 강의를 하는 한편, 주로 역사와 관련된 책을 여러 권 썼고, 인물이나 사상에 대한 번역서도 많이 냈다. 동양과 서양, 전통과 현대, 보수와 진보 등 서로 대립되는 듯한 입장 사이에 길을 내고 함께 살아갈 집을 짓는 것이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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