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대에 보수와 진보의 이념구도

신상구 | 2020.04.08 02:34 | 조회 4990

 

                                                                           2020년대에 보수와 진보의 이념구도

   정치에서 적과 동지의 구분은 불가피하다. 그러나 경쟁이 소모전으로 흐르지 않게 하려면 함께 더 나은 사회를 성취해야 한다는 연대의식이 필수적이다. 이낙연(왼쪽) 더불어민주당 상임공동선대위원장이 3일 강원 춘천시 중앙시장에서 유세 중이던 김진태 미래통합당 춘천ㆍ철원ㆍ화천ㆍ양구갑 후보를 만나 악수하고 있다. 춘천=연합뉴스
   2020년대에 보수와 진보의 이념구도는 어떻게 될까. 근대사회가 열린 이후 이념구도는 정치사회와 시민사회에 심원한 영향을 미쳐 왔다. 그런데 지난 20세기 후반 이후 이 이념구도는 변화를 거듭했다. 이에 대한 상징적 표현이 사회학자 울리히 벡이 말한 ‘적이 사라진 민주주의’다. 오늘날 서구사회 이념구도에서 적은 과연 누구인가. 적은 존재하는가.
                                                                                       1. 이념구도의 분화
   보수란 ‘보존한다(conserve)’는 말에서 비롯된 개념이다. 보수주의의 선구자인 에드먼드 버크는 인간의 합리적 능력이 제한돼 있고, 사회가 이성이 아니라 도덕 및 관습에 의해 재생산되며, 문명의 진보가 사회 안정을 유지함으로써 가능하다고 봤다. 이런 고전적 보수주의는 20세기 후반 ‘신자유주의적 보수주의’로 변신했다. 신자유주의적 보수주의는 전통과 질서를 중시한다는 점에서 고전적 보수주의를 계승하지만, 자유시장경제를 적극 옹호한다는 점에서 신자유주의를 지향한다.
   진보란 변화를 통해 더 나은 삶과 사회를 모색하려는 사상적ㆍ정치적 기획을 통칭한다. 근대 이후 진보주의는 17, 18세기의 계몽주의와 19세기의 마르크스주의로 대표됐다. 20세기에 들어와선 서구의 ‘자본주의 안의 개혁’(사회민주주의)과 동구 및 중국의 ‘자본주의 밖의 혁명’(사회주의)으로 분화돼 왔다. 오늘날의 진보주의는 서유럽의 사회민주주의에서 미국의 진보적 자유주의를 거쳐 생태주의와 페미니즘을 포함한 급진 민주주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을 포괄한다.
   주목할 것은 나라에 따라 보수와 진보의 의미가 시간의 구속을 받아 왔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구(舊)소련과 같은 국가사회주의의 경우 20세기 전반에는 진보적 성격을 보여줬지만, 20세기 후반에는 보수적 성격이 두드러졌다. 오늘날 서구사회에서 보수는 안정ㆍ성장ㆍ시장ㆍ공동체를 강조하는 반면, 진보는 변화ㆍ분배ㆍ국가ㆍ개인을 중시한다.
   더불어 주목할 것은 평등에 관한 해석이다. 보수 대 진보에 대응하는 개념 쌍이 ‘우파 대 좌파’다. 정치학자 노르베르토 보비오는 사회적 평등에 대한 태도에 따라 좌파와 우파를 구분했다. 좌파가 더 많은 평등을 원하는 그룹이라면, 우파는 평등을 부정하지 않되 사회가 불가피하게 계층적일 수밖에 없다고 보는 그룹이라는 것이다. 대체로 우파는 ‘기회의 평등’을 중시한 반면, 좌파는 ‘결과의 평등’까지를 강조한다.
   ‘자본주의 우파 대 사회주의 좌파’라는 이항 대립 구도를 다시 쪼갠 건 민족주의였다. 중도 개혁을 표방한 문재인 정부도 민족주의를 지지를 끌어내는 핵심 동력으로 삼았다. 문재인 대통령과 참석자들이 지난달 1일 서울 종로구 배화여고에서 열린 3ㆍ1절 행사를 마친 뒤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왕태석 선임기자
   21세기 서구 이념구도의 변화를 선구적으로 포착한 이는 정치학자 매리 캘도어다. 캘도어는 1980년대 이후 냉전체제의 해체와 세계화의 진전에 따라 기존 자본주의 대 사회주의의 대결구도가 의미를 잃어가고 있다고 분석했다. 그는 전통적인 우파 대 좌파의 기준에 더하여 ‘민족주의를 중시하는 일국주의 대 세계화를 중시하는 세계주의’를 또 하나의 기준으로 제안했다.
   구체적으로, 우파의 경우 일국주의와 결합하면 대처리즘으로 대표되는 ‘신우파’가 되고, 좌파의 경우 일국주의와 결합하면 전통적 사회민주주의로 대표되는 ‘구좌파’가 된다. 그리고 우파가 세계주의와 결합한 흐름은 ‘초국적기업’으로 대표되고, 좌파가 세계주의와 결합한 흐름은 ‘글로벌 비정부조직(NGO)’으로 대표된다.
   요컨대, 1980년대 이후 서구사회에서 보수 대 진보의 ‘2분구도’는 보수적 민족주의, 보수적 세계주의, 진보적 민족주의, 진보적 세계주의의 ‘4분구도’로 변화돼 왔다. 이러한 과정에서 개별 이슈들에 새로운 정치적 합종연횡이 추진됐다. 예를 들어, 유럽연합(UN)의 진전에 대해 강경 보수와 강경 진보가 반대했다면, 온건 보수와 온건 보수는 협력했다. 이념적 적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지만, 대단히 불투명해진 것은 분명해 보였다.
                                                                            2. 2020년대와 이념의 미래
   21세기에 들어와 이념구도의 분화를 더욱 강화시킨 것은 세계화의 진전과 포퓰리즘의 발흥이었다. 세계화는 앞서 말했듯 민족주의냐, 세계주의냐의 선택을 강요했고, 이러한 현실은 기존 이념구도를 크게 뒤흔들었다.
   “무정부주의자, 노동조합원, 신민족주의자, 환경보호주의자, 외국인숙소 방화범, 소기업, 교사, 사제, 가톨릭 주교, 교황, 공산주의자, 파시스트, 페미니스트, 극단적 정통론자, 이슬람 근본주의자, 새ㆍ조류애호가 등. 그들은 모두 ‘세계화와 싸워야 한다. 세계화에 의존해서 말이다!’라는 차파티스타 운동의 좌우명을 따라 움직인다.”
   벡의 ‘세계화 시대의 권력과 대항권력’에 나오는 구절이다. 오늘날 세계화를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 세계화는 우리 삶의 방식을 송두리째 재구성한다. 벡이 전달하려는 것은 분명하다. 첫째, 좌파와 우파, 보수 대 진보의 전통적 대립구도가 세계화 시대에 그 유효성을 상실해 가고 있다. 둘째, 이러한 다양화 속에서 새로운 이념적 중첩과 융합, 정치적 적대와 연대가 형성되고 있다.
   평등과 민족주의에 대한 태도가 기준인 기존 이념 구도에 다시 균열을 가한 건 엘리트를 적으로 돌려 국민 대중의 마음을 움직이는 포퓰리즘이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대표적 포퓰리스트다.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달 31일(현지시간) 백악관에서 ‘코로나19’ 대응 전담반(TF)과 함께 언론 브리핑을 하고 있다.
   이런 혼돈스러운 과정에서 포퓰리즘의 부상은 이념구도에 다시 한 번 큰 영향을 미쳤다. 포퓰리즘은 ‘엘리트 대 국민’이라는 이분법을 내세워 기성 보수 대 진보의 정치권을 모두 엘리트주의로 묶어 비판했다. 보수 대 진보, 일국주의 대 세계주의에 엘리트 대 국민이라는 새로운 이념적ㆍ정치적 균열이 더해지는 순간이었다.
   지난 10년을 돌아보면, 정치사회에서 가장 강력한 영향을 행사한 것은 포퓰리즘의 거침없는 진군이었다. 미국의 트럼프, 일본의 아베, 중국의 시진핑, 러시아의 푸틴 모두 포퓰리스트였다. 넓게 보면, 프랑스의 마크롱도 중도적 포퓰리스트로서 여기에 포함시킬 수 있다.
   포퓰리즘이 단일한 층위를 이루는 것은 아니다. 미국 트럼프주의와 같은 보수적 버전과 스페인 포데모스와 같은 진보적 버전으로 나눠볼 수 있다. 이 두 버전 사이의 결정적 차이는, 저널리스트 존 주디스가 지적하듯, 외국인 노동자와 난민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는지에 있다. 주목할 것은, 이러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포퓰리즘이 정치권을 모두 기득권으로 묶어 비판함으로써 기성 이념구도를 근본적으로 재구성하고 있다는 점이다.
   2020년대에 이념의 미래는 그렇다면 어떻게 전망할 수 있을까. 두 가지 경향이 점점 분명해지는 것으로 보인다. 첫째, 자유주의, 사회민주주의, 신보수주의의 공간이 갈수록 좁아지고 있다. 그 빈 자리를 민족주의와 세계주의, 보수적 포퓰리즘과 진보적 포퓰리즘이 점령해갈 가능성이 커 보인다.
   둘째, 이러한 과정에서 정치학자 스티븐 레비츠키와 대니얼 지블랫이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에서 분석한 민주주의의 위기가 증대할 것으로 보인다. 오늘날 포퓰리즘과 결합된 보수와 진보는 서로의 존재를 부정한 채 합법적으로 민주주의를 전복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자유와 평등의 구현을 위한 생산적 경쟁이라는 이념의 고전적 이상이 점점 중요해지는 시대를 우리 인류는 살아가고 있는 셈이다.
                                                                                  3. 한국사회와 이념구도
   우리 사회에서 보수 우위의 이념구도가 보수 대 진보의 경쟁 구도로 변화된 것은 민주화 시대였다. 여기에는 세 계기가 큰 영향을 미쳤다. 첫째, 1987년 민주화 시대의 개막 이후 시민사회에서 시민운동과 노동운동이 진보를 이끌었다. 둘째, 1999년 진보의 정치 세력화를 내건 민주노동당이 출범했다. 셋째, 김대중정부와 노무현정부를 이끌었던 민주화세력이 점차로 복지국가 등 이념을 수용하면서 진보의 정치적 정체성을 강화시켰다.
   주목할 것은, 서구사회에서 1980년대 후반 동구 사회주의의 붕괴 이후 이념의 분화와 통섭이 진행된 반면, 우리 사회에선 21세기에 들어와 이념구도가 갈수록 공고화돼 왔다는 점이다. 이념구도의 정립과 갈등이 뒤늦게 개화했기 때문이다. 더하여, 박정희시대를 어떻게 볼 것인지, 대북정책을 어떻게 추진할 것인지의 한국적 이념구도의 특징을 이루는 이슈를 놓고 보수와 진보가 팽팽히 맞서 왔다.
   2020년대 우리 사회의 이념구도의 미래는 어떻게 볼 수 있을까. 두 가지를 지적하고 싶다. 첫째, 이념과 정치는 본질적으로 ‘적과 동지의 이분법’에 기초한다. 따라서 진영논리는 지속적으로 우리 사회 이념구도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둘째, 그러나 동시에 이념과 정치의 궁극적 목표는 더 나은 사회로의 발전 추구에 있다. 더 나은 사회를 성취하기 위한 조건 중 하나가 연대와 협력과 통합에 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진영논리를 부정하지 않되 생산적 경쟁을 통해 질 높은 연대와 협력과 통합을 일궈가야 할 과제를 우리 사회 보수와 진보는 모두 안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참고문헌>
   1. 김호기, "적 아니면 동지’ 민주주의 망가뜨리는 이념 구도", 한국일보, 2020.4.7일자. 2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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