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나쁨보다 못남에 더 비판할까요?

진성조 | 2010.09.25 16:40 | 조회 5406
[세상읽기] 나쁨과 못남 / 남재일
한겨레
» 남재일 경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두 인물이 여론의 뭇매를 맞고 있다. 웬만한 샐러리맨 열배 정도의 돈을 벌면서 도박으로 출연료까지 압류가 들어오게 한 신정환과 몸에 걸친 명품이 4억이 넘는다고 떠벌려 화를 자초한 ‘명품녀’.
이들은 어떤 사람일까? 나쁜 사람일까 못난 사람일까?

나쁜 사람이 되려면 타인에게 직접적 위해나 손실을 입혀야 될 것 같은데, 둘은 어리석음으로 자신에게 치명타를 입힌 경우이기 때문에 못난 사람에 가까울 것 같다.

여기에 하나 덧붙이자면, 둘 다 그 지독한 어리석음에도 불구하고 돈복이 많은 행운아라는 것이다. 이런 사람 유형을 ‘복 많은 못난 사람’이라고 해두자.

길거리에 버려진 아이로 성장해 여중생을 살해한 김길태는 어떤 사람인가? 나쁜 사람이고 동시에 못난 사람이다. 김길태에 비하면 강호순은 범행수법이 훨씬 치밀하고 잔혹해서 ‘못났다’ 보다 ‘나쁘다’는 인상이 강했다.

강호순은 그냥 ‘아주 나쁜 사람’이라고 하자. 이 둘에 대해 여론은 엄혹했다. ‘나쁜 사람’에 대해 여론이 흥분하는 것은 당연하다. 한 사회의 도덕적 감정이 살아있다는 표시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 사회의 도덕적 감정은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 것인가? 적어도 명백하게 나쁜 사람에 대해 흥분한다는 것은 그렇다는 증거로 보인다.

그러면 못난 사람, 그것도 특히 ‘복 많은 못난 사람’에 흥분하는 것은 도덕적 감정의 발로로 볼 수 있는가? 혹자는 신정환의 도박은 불법이고, 여론의 뭇매는 여기에 대한 반응이라고 한다.

만약 그렇다면 언젠가 마카오에서 익명의 재벌 2세 그룹이 하룻밤에 수십억을 잃었다는 기사가 나갔을 때 여론은 왜 그리 잠잠했을까? 익명이니까 그랬을 수도 있다. 하지만 진정 분노했다면 왜 익명이 실명이 되도록 조사하라고 촉구하는 여론이 조성되지 않았을까?

결국 신정환이 여론의 표적이 된 것은 도박행위 자체의 나쁨보다 집이 저당 잡히고 출연료가 압류되는 지경까지 간 못남이 더 큰 이유가 아니었을까? 말하자면 약자의 처지가 되니까 뭇매가 쏟아진 게 아니었을까?

‘명품녀’의 경우도 불법증여 혐의가 있다고 주장할 수 있다. 하지만 훨씬 심각한 사회적 범죄인 재벌의 불법증여가 밝혀졌을 때 여론은 그렇게 흥분했던가. 화가 난 이유가 불법증여가 아니라 명품소비 그 자체 때문은 아닌가? 만약 그렇다면 심심찮게 보도되는 연예인들의 명품소비에도 마찬가지로 흥분했던가?

결국 명품녀가 대중을 화나게 한 것은 명품을 쓸 능력이 없어 보이는 ‘못난 인간’이 부모가 준 용돈으로 샀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장동건과 고소영의 명품이 문제가 안 되는 건 소비로 보기 때문이다. 명품녀의 명품이 문제가 되는 건 과소비로 보기 때문이다. 과소비는 못남의 문제이지 나쁨의 문제는 아니다.

‘복 많은 못난 사람’에 대한 과민함과 극단적 대조를 이루는 것은 ‘조금 나쁘고 잘난 사람’에 대한 둔감함이다. 사회적 지위나 권력, 지식을 이용해 갖은 부당이득을 챙기다 발각되면 변명하는 기술도 있는 사람들에 대해 여론은 지극히 관대하다.

‘나쁨’은 축소되고 심지어 나쁨이 ‘현실적 유능함’으로 은밀히 해석되기까지 한다. 이들에 대한 둔감함은 현실적으로 할 수 있는 게 없기 때문에 비롯된 대중의 좌절감의 발로일까, 아니면 그들을 닮고 싶은 욕망의 발로일까?

칸트도덕적 삶의 가장 큰 적을 선악과 행불행, 선악과 미추를 혼동하는 것으로 봤다. 악함보다 못남을 더 적대시하는 것이 문제라는 거다. 진정한 도덕적 감정은 표면에 나타나는 못남보다 기저에 흐르는 나쁨에 더 강한 분노를 느낄 줄 알아야 한다.

비록 그 나쁨이 유능한 자의 작은 나쁨이라 할지라도. 신정환과 명품녀를 질타하는 여론의 도덕적 감정은 나쁨보다 못남에 주목한다는 의심에서 떳떳할 수 있는가? 약자의 부도덕에 특히 민감하다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가?

--- 남재일 (경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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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글을 보고 느낀 깨우침은 ~~

우리가 지금 살고있는 선천 우주의 봄,여름 문명시대는 상극섭리가 세상을 지배하여, 이세상은 온통 <음>은 누르고 <양>이 기승을 부리는 시대인데, 그래서 <양>인 남성-강자 지배의 세상이 되었다는게 '증산도 진리의 역사관,세계관' 입니다.

이 글에서 강자(양=상류층,지배자) 가 아닌, 약자(음)에 속하는 대중들이 나쁜 이들에 분노하는 것 보다는 오히려 '크게 나쁘진않고 못난사람(신정환,명품녀)'에 더 비판을 많이 가하는 점에서...저는 느낀점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왜 그럴까요?

저는 많은 대중들에게- 즉, 선천인간 모든 이들에게 본성적으로 <'약육강식'의 좋지못한 본능적 피>가 누구에게도 조금씩 흐르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선천 상극세상엔 경쟁,투쟁이 자연스러우니 이런 '경쟁적 상극의 마음'이 조금은 필요하겠지만~

그러나, 대다수 사람에게는 '나쁜것'에 분노하기 보다는 못난것, 착해 빠진것을 더욱 경멸하는 그런 " 정말 못난(성숙되지 못한) 마음심보 " 가 내면에 있다고 생각해봅니다.

그래서 지금 선천우주 에서는 거의 모든인간이 우열의 차이는 조금 있으나 지구축이 기울어있듯이 마음심보가 균형과 중도를 못이룬채 심보가 삐뚤어져 있는 소인배로 모든인간이 태생적으로 그렇게 생겨먹게 되었다고 생각해봤습니다.

우주의 천리를 인류역사상 최초로 심오하게 밝힌, 한동석 박사의 <우주변화 원리>에서도 지금의 탄생-성장 시간대의 선천우주에서는 모든인간이 다 미성숙되어, 지금의 인류의 정신문명, 도덕관 으로는 인류의 이상세계를 건설할수가 없다는 결론을 내립니다.

새로운 세상, 새로운 우주문명, 새 시대가 와야 한다는 것이죠. 그것이 바로 증산도

에서 말하는 <우주(천지)의 가을 문명시대, 지상낙원 문명시대. 입니다. 그 세상에 넘어가는 '신인류(新人類)' 는 지금우리와는 다른 성숙되고 인격적으로 완성된 인간 들이 되겠죠.

새로운 세상- 모든인간이 다 성숙될수 밖에 없는 우주 가을개벽(후천개벽)이 와서

천지생명도 완성되고 천지의 자식인 인간생명도 완성된 천지기운을 받아 음양이 조화,균형을 이룬 정음정양(正陰正陽)의 우주가을 지상낙원 문명이 열릴때에야 가능하겠죠...이런 생각을 해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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