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호근 칼럼] 600년 순혈국가의 문, 549명 난민이 두드리다

환단스토리 | 2018.06.26 15:50 | 조회 5160

[송호근 칼럼] 600년 순혈국가의 문, 549명 난민이 두드리다


중앙일보] 입력 2018.06.2




제주 예멘 난민신청자. 최충일 기자


예멘인(人) 549명이 제주공항에 내렸다. 내전을 피해 조국을 등진 사람들, 난민이다. 가까운 유럽을 단념하고 이슬람 국가가 있는 동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말레이시아는 형제들의 입국을 냉정하게 거부했다. 이들의 절망적 시선에 극동의 작은 섬 제주가 들어왔다. ‘평화의 섬’이자 무사증 30일 체류가 가능한 낙원으로 비쳤다. 그러나 그 낙원이 600년간 순혈주의로 무장한 유교국가의 단호한 성문(城門)이라는 사실을 알 리 없었다. 

  

난민 허가 문제가 불거지자 법무부는 예멘을 비자 면제 제외 국가로 재빨리 분류했다. 난민을 받지 말라는 국민청원이 30만 명을 넘어섰다. 혈기 왕성한 이슬람 청년을 ‘잠재적 성범죄자’로 낙인찍는 거북한 표현도 등장했다. 범죄와 치안, 일자리 걱정은 정당한 명분이기는 한데 더 깊은 심연에는 한반도의 오랜 습속인 순혈주의가 꿈틀대고 있음도 부인하기 어렵다. 

  

어찌해야 하나? 난민들을 환영하는 캐나다로 보내야 할까? 아니면 360년 전 제주에 난파해 동물처럼 살다 겨우 탈출한 하멜(H. Hamel) 같은 운명? 당시 태풍에 목숨을 건진 선원 중에는 흑인이 섞여 있었다. 제주 목사가 조정에 장계를 올렸다. “이 무리 중에는 시커먼 짐승 같은 종자도 있습니다. 심문을 했는데 말은 바람 같았고, 글은 물결 같았습니다.” 국제난민법이 발효 중인 오늘날 이들이 하멜처럼 되지는 않을 터, 이 시점에서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지혜를 발동해 봄 직하다. 단군 자손들이 난민이 된 적은 없었던가? 

  

1905년 수백 명의 조선인이 멕시코 유카탄에 내렸다. 에네켄 농장의 노예로 팔려간 난민이었다. 현재 멕시코에 거주하는 한인 후예는 1만1000여 명. 이들의 지난 100년은 한과 눈물로 가득 차 있다. 북간도 역시 눈물의 땅이다. 1860년대부터 시작된 이주민은 1900년에 10만 명, 1930년대에는 40만 명에 달했다. 가난해서, 일제 탄압에 못 이겨 두만강을 건넜다. 월북 시인 이용악이 눈물 젖은 두만강을 읊었다. “잠들지 말라 우리의 강아/너의 가슴을 밟는 뭇 슬픔이 목마르고/…/북간도로 간다는 강원도 치와 마조 앉은/나는 울 줄을 몰라 외롭다.” 1909년 일제는 청(淸)과 조약을 맺어 북간도 조선인을 불법체류자로 분류했다. 

  

어디 이뿐인가? 제주 4·3 사건 당시 겨우 살아남은 남정네들은 산에서 내려와 몰래 어선을 탔다. 일본으로 밀항하는 위험천만한 배였다. ‘자이니치’로 불리는 재일조선인은 81만 명, 주민기본대장카드에는 여전히 ‘조선인’이라 찍혀 있다. 이민과 난민을 합쳐 낯선 땅에 흩어져 살고 있는 동포는 모두 743만 명에 달한다. 한국의 디아스포라, 민족 이산(離散)의 역사가 그리 길고 아프다. 

  

그래서인지 외국에서 발생하는 천재지변과 테러, 각종 사고 소식에 한국인의 안전 여부가 꼭 따라붙는다. 끈끈한 동포애, 든든한 보호막이다. 그런데 그 속에는 종족 순혈주의가 똬리를 틀고 있음도 간과할 수 없다. 종족 순혈주의는 전란의 가장 치명적 인자(因子)였다. 90년대 발칸에서 발발한 그 악명 높은 인종청소는 물론, 시리아 종파(宗派) 분쟁에도 순혈주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중동 삼국에 분산된 쿠르드족은 종족 국가 건설이 소원이다. 미래의 화약고다. 

  

반면 캐나다 같은 이민국가에는 공동체 연대감이 순혈주의를 대체한다. 순혈국가라도 오히려 인종 연대감을 중시하는 스웨덴 같은 나라도 있다. 20년 전, 스톡홀름 시내 광장에서 진풍경을 목격했다. 30대 후반 남성이 끄는 유모차에는 흑인 아기가 잠들어 있었다. 민족주의가 강한 바이킹 자손들이 일찌감치 인종 유대감을 실천하는 풍경에 숙연함을 느꼈다. 

  



한국은 과연 순혈국가인가? 인류학적, 고고학적 연구에 의하면 ‘아니다’. 몽골 수도 울란바토르 인종박물관에는 아시아대륙에 퍼져 사는 40여 인종의 밀랍인형이 전시돼 있다. 모두 친숙한 얼굴들이다. 서울과 부산에서, 속초와 해남에서 익숙하게 목격되는 유형의 얼굴이다. 이모 같고, 삼촌 같다. 고려 속요인 ‘쌍화점’에 출현하는 회회(回回)아비, ‘처용가’의 처용은 서역인이었다. 고(故) 정주영 회장은 북방계, 고 박태준 회장은 남방계다. 신채호와 최남선이 단군의 유물을 찾아 만주를 헤매고 백두산을 등정한 것은 일제의 천손강림설과 대적하기 위함이었다. 민족 연대감의 씨앗을 찾으려 했지 혈통 증명이 아니었다. 

  

대한민국은 사실상 다인종 혼혈국가다. 명칭이 조금 어색한 ‘다문화가정’ 인구도 100만을 넘었다. 저출산 정책에 100조원을 쏟아붓고도 세계 최저 출산율을 경신하는 우리는 이제 난민, 이민정책을 대폭 손질해야 한다. 언제까지 문 닫고 살 수 없다. 난민 문제를 제주에만 맡겨 놓을 수 없는 이유다. 

  

송호근 본사 칼럼니스트·서울대 석좌교수 


http://news.joins.com/article/22747104?cloc=joongang|home|newslist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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