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 젠트리피케이션 문제

신상구 | 2020.05.20 03:48 | 조회 4354

   

                                                                             도시 젠트리피케이션 문제

   “덜컹거리는 전철을 타고 찾아가는 그 길. 우리는 얼마나 많을 것을 잊고 살아가는지. 어릴 적 넓게만 보이던 좁은 골목길에 다정한 옛 친구 나를 반겨 달려오는데.”
   동물원이 불렀던 ‘혜화동’이다. 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도 나왔다. 나의 젊은 시절 서울의 풍경을 떠올리게 하는 곡이다. 근대화가 시작된 후 서울 등 우리 도시들은 끝없이 변화해 왔다. 2020년대에 도시의 선 자리와 갈 길은 어떻게 볼 수 있을까.
                                                                   1. 젠트리피케이션을 어떻게 볼 건가
   도시의 변화에서 오늘 주목하려는 것은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이다. 젠트리피케이션은 본래 전문적 학술 개념이었다. 그런데 몇 해 전부터 이 말은 우리 사회에서 뜨거운 관심을 모아 대중적 시사 용어로 부상했다. 그 까닭은 몇몇 지역에서의 임대료 상승과 그에 따른 원주민 및 자영업자의 이주가 사회적으로 큰 주목을 받았다는 데 있다.
   국립국어원은 젠트리피케이션을 ‘둥지 내몰림’으로 옮겼다. 구체적으로 ‘구도심이 번성해 중산층 이상의 사람들이 몰리면서 임대료가 오르고 원주민이 내몰리는 현상’을 뜻한다.
   젠트리피케이션이란 개념을 주조한 이는 사회학자 루스 글래스다. 글래스는 1960년대 초반 런던 노동계급 거주지역에 새로운 주택들이 들어서면서 중간계급이 들어오고 정작 노동계급은 쫓겨나는 현상을 젠트리피케이션이라고 불렀다. 신사계급을 뜻하는 ‘젠트리(gentry)’가 새로운 주민이 된다는 의미가 젠트리피케이션 개념에 담겨 있다.
   젠트리피케이션을 체계적으로 이론화한 이들은 지리학자 닐 스미스와 지리학자 데이비드 레이다. 경제학자 신현준과 사회학자 이기웅이 ‘서울, 젠트피케이션을 말하다’에서 지적하듯, 스미스와 레이가 겨냥한 초점은 사뭇 다르다.
   먼저 스미스는 1970년대에 도심의 슬럼을 재개발해 높은 임대 수익을 얻으려는 자본의 적극적 투자가 젠트리피케이션을 낳았다고 분석했다. 한편 레이는 전후 부상한 신중간계급이 새로운 라이프스타일을 누리기 위해 도심으로 진출한 게 젠트리피케이션으로 나타났다고 설명했다. 이렇듯 젠트리피케이션 개념에는 자본의 투자 전략과 새로운 문화ㆍ소비 공간의 등장이라는 이중적 특성이 공존해 있다.
   ‘서울, 젠트리피케이션을 말하다’는 서촌과 홍대, 해방촌 등의 젠트리피케이션을 소개한다.
   주목할 것은 스미스와 레이가 염두에 둔 대상이 달랐다는 점이다. 스미스는 미국의 뉴욕을, 레이는 캐나다의 밴쿠버를 분석의 배경으로 삼았다.
   이러한 사실은 젠트리피케이션과 이에 대한 주민들의 태도가 도시에 따라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점을 보여준다. 어떤 도시에서는 자본의 투자라는 생산적 측면이 젠트리피케이션을 이끌었고, 다른 도시에서는 중간계급의 문화생활이라는 소비적 측면이 젠트리피케이션을 주도했다. 이 점을 고려할 때, 지구적으로 관찰할 수 있는 다양한 젠트리피케이션들은 그 중간 어디쯤엔가 놓여 있다고 볼 수 있다.
                                                                      2. 2020년대와 지구적 도시의 미래
   신현준과 이기웅은 서구사회의 젠트리피케이션을 세 단계로 구분했다. 첫 번째 물결이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1970년대 초반까지 북반구에서 이뤄진 도시개발 과정이었다면, 두 번째 물결은 197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도시재생이란 기치 아래 정부가 부동산 시장에 정책적으로 개입한 과정이었다. 그리고 세 번째 물결은 그 이후 신자유주의가 도시 개발에 영향을 미치고 젠트리피케이션이 남반구로 확장된 과정이었다.
   마지막 세 번째 단계인 1990년대 이후 주목할 현상의 하나는 ‘지구적 도시(global city)’의 등장이었다. 사회학자 사스키아 사센은 1991년 발표한 ‘글로벌 도시’에서 뉴욕, 런던, 도쿄와 같은 지구적 도시들이 국제무역 중심지라는 오래된 역할을 넘어서 새로운 역할을 떠맡게 됐다고 선구적으로 분석한 바 있다.
   구체적으로 지구적 도시들은 세계경제를 위한 방향 제시와 정책 수립의 중심으로서의 ‘사령부’를 발전시켰고, 경제개발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금융 및 전문화된 서비스를 제공했다. 더하여, 새롭게 확장되는 산업에서 생산과 혁신의 주요 지점을 이뤘고, 금융과 서비스 산업이 생산하는 상품을 사고파는 시장을 형성했다.
   뉴욕은 이 지구적 도시의 대표격이다. 사센에 따르면, 뉴욕에는 350개의 외국계 은행과 2,500개의 외국계 금융기업이 자리 잡고 있다. 은행원 네 사람 중 한 명은 이 외국계 은행에서 일하고 있다. 지구적 도시는 이제 금융 상품과 지구적으로 흩어져 있는 사무실 및 공장을 관리하는 전문화된 서비스를 제공하는 공간을 이룬다.
   화려한 그래피티로 장식된 2017년 미국 뉴욕 브루클린 윌리엄스버그 지역의 건물 외벽. 맨해튼의 고가 임대료에 밀려난 가게들이 브루클린으로 옮겨오면서 이곳에 정착했던 예술가들이 설 자리가 다시 줄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지구적 도시인 뉴욕에서 진행된 도시재생에 대해선 사회학자 사론 주킨이 2010년 내놓은 ‘무방비 도시’가 주목할 만하다. 주킨은 1970년대 이후 뉴욕에서의 도시 변화가 어떻게 진행됐는지를 추적한다. 탈산업화와 공공지출 삭감으로 방치된 브루클린 등 지역들에 가난한 예술가들이 싼 임대료를 찾아 이주하면서 문화재생이 시작되고, 그 결과 삭막하고 불편했던 ‘까칠함’의 공간이 도시 본래의 모습을 갖춘 ‘진정성’의 공간으로 변모했다고 주킨은 분석한다.
   주킨의 관찰에 따르면, 새로운 소비문화를 형성하는 이러한 공간들을 자본이 그대로 놓아둘 리 없다. 문화 사업가들이 이곳에 진출하게 되며, 결국 임대료가 상승하고 체인 상점 및 고급 주택이 들어서면서 가난한 예술가들의 공동체와 소규모 지역상인 등은 추방되기 시작했다. 저널리스트 제인 제이콥스의 고전적인 도시 연구인 ‘미국 대도시의 죽음과 삶’을 떠올리게 하는 ‘진정성의 도시 장소들의 죽음과 삶’이라는 ‘무방비 도시’의 부제에서 볼 수 있듯, 주킨은 1970년대 이후 뉴욕이란 지구적 도시의 역동적 변화를 박진감 있게 묘사하고 있다.
   2020년대에 젠트리피케이션과 지구적 도시의 미래를 그렇다면 어떻게 볼 수 있을까. 두 가지를 지적하고 싶다. 첫째, 젠트리피케이션의 모습은 나라마다, 그리고 도시마다 다르다. 서구사회의 양상과 비서구사회의 양상이 상이하고, 비서구사회에서 동북아시아의 경우와 동남아시아의 경우가 상이하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둘째, 이러한 다양성 속에서도 주킨의 분석은 적잖은 함의를 안겨준다. 획일적 재개발이 도시의 영혼을 앗아가 버린다는 주킨의 비판은 앞으로의 도시계획의 출발점으로 삼을 만하다. 21세기 인류 삶의 터전으로서의 도시가 가져야 할 모습은 공간의 고유성과 창의성을 간직하고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장소의 맥박과 숨결을 느낄 수 있게 해야 할 것이다.
                                                                       3. 한국사회와 젠트리피케이션
   앞서 말했듯, 젠트리피케이션은 나라마다 다른 양상을 띤다. 이기웅은 한국적 젠트리피케이션의 특징으로 세 가지를 꼽았다. 첫째, 서구에서 젠트리피케이션이 이뤄진 도심이 원래 게토화된 지역이었던 반면, 우리의 도심은 그렇지 않았다. 둘째, 서구와 달리 우리의 젠트리피케이션은 주거 공간보다 상업 공간에서 진행돼 왔다. 셋째, 우리의 젠트리피케이션은 서구에서 중요했던 인종 문제가 없었다.
   서울 성동구 성수동은 요즘 ‘뜨는 동네’다. 2010년대 초반부터 젊은 예술가들이 몰려와 공장ㆍ주택 위주의 회색빛 골목길에 색을 입혔고 힙한 카페와 레스토랑, 갤러리들이 따라 들어왔다. 성동구 제공
   21세기에 들어와 우리 사회에서도 상업적 젠트리피케이션이 빠른 속도로 진행됐고, 뜨거운 사회문제로 부상했다. ‘홍대’를 위시해 가로수길, 경리단길, 북촌, 서촌, 해방촌, 익선동, 성수동 등의 핫플레이스들은 이러한 상업적 젠트리피케이션의 대표적인 사례들이라 할 수 있다.
   젠트리피케이션을 그대로 놓아두면 ‘뜨는 동네’에는 대형 프랜차이즈 업체들이 들어온다. 그 결과 핫플레이스를 일궈온 이들이 떠나면서 그 장소만의 고유하고 독특한 분위기가 사라지는 이른바 ‘문화 백화 현상’이 일어난다. 문화 백화 현상은 해당 지역의 개성 있는 얼굴을 지우고 결국 활력을 소멸시킨다.
   문제의 핵심은 젠트리피케이션이 세입자와 임차인들의 생존에 위협을 안겨준다는 점이다. 젠트리피케이션이 가져오는 부정적 결과를 방지하기 위한 제도 개선이 요구된다. 이를 위해 2018년 임대차계약 갱신청구권을 5년에서 10년으로 늘리는 상가건물임대차계약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하기도 했다.
   도시의 주인은 자본이 아니라 사람이다. 따라서 지방정부는 물론 중앙정부는 지역 상생이라는 생태계 조성을 위한 다각적 노력들을 더욱 기울여야 한다. ‘혜화동’의 한 구절인 “어릴 적 넓게만 보이던 좁은 골목길”과 같은 장소들을 지키고 가꾸는 것은 삭막한 도시에 온기의 숨결을 불어 넣어준다.
   2020년대에 도시재생은 중요한 사회정책의 하나다. 인간의 얼굴을 한 도시 풍경을 되살리고 간직하는 도시정책이 지속적으로 추진돼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참고문헌>
   1. 김호기, "가로수길, 경리단길, 서촌… 도시의 주인은 자본 아닌 사람", 한국일보, 2020.5.19일자. 2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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