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산과 문화를 사랑한 아사카와 다쿠미(淺川巧) 이야기

신상구 | 2018.04.02 03:04 | 조회 6048

                                       한국의 산과 문화를 사랑한 아사카와 다쿠미(淺川巧) 이야기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국학박사, 향토사학자, 시인, 문학평론가, 칼럼니스트) 신상구

   “억수같이 비가 내렸다. 다쿠미가 숨을 거두었다는 소식이 이웃에 알려지자, 사람들은 무리 지어 이별을 고하러 몰려들었다. 그의 시신을 보고 통곡한 조선인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조선인과 일본인의 반목이 심하던 당시 조선의 상황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장면이었다. 자진해서 나선 조선인들이 청량리에서 이문동 언덕까지 운구했는데, 자청한 사람들이 너무 많아 다 응하지 못할 지경이었다. 도중에 마을 사람들이 관을 멈추고 노제를 올리고 싶다고 애원하기도 했다.”

   다쿠미의 장례식장을 지켜보았던 동료 ‘야나키 무네요시’가 쓴 추도문의 일부이다. 한 사람의 인생은 관 뚜껑을 닫을 때 판가름이 나는 것이라는 말이 있다. 일본인이었지만, 조선인들의 사랑을 받았던 남자, 아사카와 다쿠미. 그는 누구이기에, 이렇게 마지막 가는 길까지 조선인들의 사랑을 받았던 것일까?

   아사카와 다쿠미는 만 스물세 살 부터 17년간 조선에서 살았다. 조선에 부임했을 때도 그는 '조선 사람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 몇 번이나 고향으로 돌아갈까 생각‘ 했다고 한다. 그리고 '내가 조선에 있는 것이 언젠가는 무슨 일에 요긴하게 쓰일 수 있게 해 주소서.' 라고 늘 기도했다. 그는 조선에 살면서 조선인들과 같은 것을 먹고 마시며 같은 옷을 입고 같은 말을 써야겠다고 결심했다. 실제로 그는 조선인 마을에서 조선인들과 어울려 온돌방에 살았고, 늘 한복을 입고 생활했다. 하루는 바지저고리 차림에 망건을 쓰고 외출을 했다가 일본 순경들에게 조선인으로 오해를 받아 괄시를 받은 일이 있었다. 당시 일본 순경들은 버스 안에서 한복을 입고 앉아있는 자를 '요보(조선인의 '여보'를 비하한 말)'라 조롱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나도록 강요했다. 그런데도 끝까지 그는 한복을 고수했다고 한다.
   조선총독부 산림청의 산림과장이었던 아사카와 다쿠미는 자연을 사랑했고 조선의 산천이 일본에 의해 마구잡이로 개발되는 것을 안타까워하였다. 또 전형적인 조선총독부의 삼림 수탈 정책을 비판하였고 조선의 산림녹화사업에 크게 이바지했다.
  아사카와 다쿠미의 형 아사카와 노리타카(淺川伯敎, 1884-1964)는 일본 출생의 조각가로 조선에서 보통학교 교사로 재직하고 있었다. 그는 ‘조선문화’ 연구자였고, '조선 도자기의 신'이라고도 불릴 정도로 한국 도자기 전문가였다. 아사카와 다쿠미는 형의 영향으로 조선의 민예품을 접하기 시작했다. 다쿠미는 특히 소반에 푹 빠져있었다. 소반은 조선인들의 생활이 그대로 녹아있는 물건이기 때문이었다.
   아사카와 다쿠미의 저서인『조선의 소반』은 소반의 역사와 범위는 물론 종류와 쓰임새, 명칭, 지역에 따라 소반을 분류하여 정리하여 놓은 책이다. 사진을 찍을 수 없으면 다쿠미가 직접 삽화를 그려 넣은 등 다쿠미의 소반에 대한 애정과 정성을 확인할 수 있다.『조선의 소반』은 조선인들에게 조선인이라는 사실에 긍지를 갖게 하는, 조선인의 민족의식, 민족주의를 고무시키는 내용으로 가득 차 있다.
   아사카와 다쿠미는 소반뿐만 아니라 조선의 다양한 민예품들에 관심을 가졌다. 그의 형 노리다카와 함께 조선의 가마터를 찾아다니기도 하고 소반, 제례기, 식기, 문방구, 실내용구에 이르기 까지 조선인들이 실생활에 광범위하게 사용하는 생활용품을 수집하여 연구하였다. 그는 월급이 나오는 대로 골동품 점을 돌아다니며 민예품을 수집하다가 빈털터리가 되기 일쑤였다.
  마침내 다쿠미는 자신의 친구인 야나기 무네요시와 의기투합하여 박물관을 설립하기로 한다. 다쿠미가 당시 활동하던 동인지에「‘조선민족미술관’ 설립에 대하여」라는 호소문을 발표하였고 기부금을 모으기 시작했다. 각지에서 속속들이 다쿠미를 돕기 위해 기부금을 보내왔다. 또 다쿠미는 두둑하지 못한 자신의 지갑까지 털어 미술관 설립에 온 정성을 쏟았다. 그리고 마침내 1924년「조선민족미술관」을 설립했다. 조선의 민예품은 조선 땅에 남아있는 것이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한 다쿠미는 자신이 세운「조선민족 미술관」에 평생 모은 민예품들을 기증했다.「조선민족미술관」은 현재「국립민속박물관」의 모태가 되었고 그의 민예품들은 귀중한 유산이 되어 지금도 우리 곁에 남아있다.
  아사카와 다쿠미는 조선을 진정으로 사랑한 임업인이었고, 민예 학자였다.<아사카와 다쿠미 - 조선의 소반 (KBS 천상의 컬렉션)>
  
   아사카와 다쿠미(淺川巧)는 1891년 1월 15일 야마나시(山梨)현 키타코마(北巨摩)군에서 출생했다. 일기나 동료들의 기록에 의하면 1890년 10월 22일경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아사카와 다쿠미는 1901년 아키타(秋田) 심상 고등 소학교에 입학하였으며, 1906년 야마나시 현립 농림 학교에 진학하여 형과 함께 자취하였다. 이듬해인 1907년 8월 야마나시현에서 산림의 무차별한 남벌과 도벌에 의한 수해로 하천이 범람하고 232명이 사망했는데, 이런 참상을 목격하고 치수(治水)의 근원인 조림(造林)의 중요성을 통감하였다. 1909년 학교 졸업 후 아키다(秋田) 현 오오다테(大館) 영림서에서 국유림 벌채 작업에 5년간 종사하였다.
   1913년 5월 조선으로 건너와 소학교 교원으로 일하고 있던 형 노리타카의 권유로 이듬해 아사카와 타쿠미도 조선으로 건너와 조선 총독부 농공상부 산림과(山林課)에 취직하였다. 주 업무가 양묘(養苗)였으므로 종자를 채집하기 위해 조선 각지를 돌아다녔으며 많은 조선 사람과 문물을 접하게 되었다. 또한 도자기에 대한 남다른 관심을 가진 형의 뜻에 공감하였기 때문에 전국에 산재한 도요지를 답사하고 자료를 수집하는 데도 관심을 가졌다. 조선의 이곳저곳을 다니면서 도자기는 물론 조선의 민예품에도 큰 관심을 두고 몰두하였다. 1915년 형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를 만나 청화 백자를 선물하며 조선 예술에 대한 관심 사안을 논의하였다. 이를 계기로 야나기 무네요시는 조선의 민예에 처음으로 눈을 뜨게 되었다. 1916년 2월 미쓰에(みつえ)와 결혼하여 딸을 하나 두었으나 부인 미쓰에는 1921년 9월 폐렴에 걸려 사망하였다.
   아사카와 다쿠미는 일본의 무분별한 개발과 수탈적 임업 때문에 헐벗고 균형 잃은 조선의 산을 안타까워했고, 1917년 동료와 함께「조선 당송(唐松)의 양묘 성공 보고」라는 글을 발표하여 조림 사업에 이바지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1919년『조선 거수 노수 명목지(朝鮮巨樹老樹名木誌)』를 저술하였다.
   아사카와 다쿠미는 조선의 민둥산을 푸르게 하는 것이 소명이라 믿고, 전국을 다니며 맞는 수종을 고르고 식목을 거듭하여 자연 상태 흙의 힘을 이용하는 '노천매장법' 방식으로 조선오엽송 종자를 싹 틔우는 방법도 개발했다.
   1920년 야나기와 함께 조선 민족 미술관(朝鮮民族美術館) 설립 운동을 시작하여 조선의 민예를 이론적으로 전파하는 데 큰 족적을 남겼다. 1922년 조선 총독부가 조선 신궁을 세우고 광화문을 헐려고 하자 부당성을 주장하며 반대하였다. 그해 10월 이조 도자기 전람회를 주선하며 야나기(柳) 등과 분원(分院) 도요지를 조사하였다. 1923년 10월 사쿠(咲)와 재혼하여 이듬해 딸을 낳았으나 바로 죽었다.
   1924년 4월 경복궁 집경당(緝敬堂)에 조선 민족 미술관(朝鮮民族美術館)을 설립하고, 잣나무 종자의 노천 매장 발아 촉진법을 개발하였다. 1925년 5월「도요지 답사를 마치며」를 저술하였고, 1928년 3월『조선의 소반』을 탈고하였다. 1930년「조선 고요적(古窯跡) 조사 경과 보고」를 집필하고, 12월 조선공예회를 개최하였다. 1931년 2월부터 3월까지 식목 행사 준비를 앞두고 조선 각지를 돌며 양묘에 관한 강연 때문에 과로한 나머지 1931년 4월 2일에 급성 폐렴에 걸려 40세를 일기로 요절했다. 아사카와 다쿠미가 죽은 뒤에도 한동안 경성에서 살던 아내와 딸은 대한민국 광복 후 일본으로 돌아갔다.
   한국의 산과 문화를 사랑했던 아사카와 다쿠미는 유언대로 한국에 묻혔다. 그래서 아사카와 다쿠미의 이름 앞에는 "죽어서 조선의 흙이 된 일본인"이라는 수식어가 항상 붙는다.
   아사카와 다쿠미는 조선총독부가 조선의 땅에서 조선의 문화유산을 약탈하고 훼손시키는 것을 보며 마음 아파했다. 또 일본인들이 조선 땅에서 벌이는 탄압과 만행을 보며 항상 죄스러운 마음을 안고 살았다. 그는 자신의 저서 『조선의 소반』서문에 이런 말을 남겼다.

  "피곤에 지쳐 있는 조선이여, 다른 사람의 흉내를 내기보다 지니고 있는 중요한 것을 잃어버리지 않는다면 멀지 않아 자신에 찬 날이 올 것이다. 이것은 공예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이렇게 다쿠미는 진심으로 조선인을 생각하고 희망을 전했다. 조선만이 가지고 있는 가치를 알아보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았던 것이다.
   2012년 아사카와 다쿠미의 일생을 그린 일본 영화 '백자의 사람: 조선의 흙이 되다(일본어: 道〜白磁の人)가 개봉했다. 에미야 다카유키의 소설 《백자의 사람》이 원작이다.
   저서로는『조선의 소반(朝鮮の膳)』(1929), 『조선 도자명 고(朝鮮陶磁名考)』(1931)가 있다.
   묘소는 본래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이문동에 있었으나 1937년 도로 건설로 경기도 구리시 교문동 망우 공원 묘지로 이장되였으며, 해방 후 흥분한 사람들에 의해 파괴되었다.
   1963년, 한일 조약이 체결되면서 반일 감정이 극에 달했던 때였다 연일 반일 시위가 열리던 그때, 다쿠미를 기억하는 한국인과 일본인들은 오랜시간 방치됐던 다쿠미의 묘를 복원했다. 그가 일했던 임업연구소의 후배들도 함께였다. 30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지만, 그들은 다쿠미가 보여줬던 조선 사랑을 잊지 않고 기억한 것이다. 지금도 서울 망우리 묘지에 잠들어있는 다쿠미의 묘비에는 아래와 같은 글귀가 남겨져있다.
  '한국의 산과 민예를 사랑하고 한국인의 마음속에 살다 간 일본인, 여기 한국의 흙이 되다'
   매년 4월 2일 서울과 일본의 유지(有志)들이 타쿠미의 묘 참배 행사를 열고 있다.
                                                                <참고문헌>
   1. “조선의 소반”,  KBS 천상의 컬렉션, 2018.3.31. 밤 10시 20분 방영.
   2. “아사카와 다쿠미(淺川巧)”,『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18.4.1.
   3. “아사카와 다쿠미(淺川巧)”, 네이버 위키백과, 2018.4.1.
                                                                <필자 약력>
.1950년 충북 괴산군 청천면 삼락리 63번지 담안 출생
.아호 대산(大山) 또는 청천(靑川), 본관 영산신씨(靈山辛氏) 덕재공파(德齋公派)  
.백봉초, 청천중, 청주고, 청주대학 상학부 경제학과를 거쳐 충남대학교 교육대학원 사회교육과에서 “한국 인플레이션 연구(1980)”로 사회교육학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UBE) 국학과에서 “태안지역 무속문화 연구(2011)"로 국학박사학위 취득
.한국상업은행에 잠시 근무하다가 교직으로 전직하여 충남의 중등교육계에서 35년 4개월 동안 수많은 제자 양성
.주요 저서 :『대천시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아우내 단오축제』,『흔들리는 영상』(공저시집, 1993),『저 달 속에 슬픔이 있을 줄야』(공저시집, 1997) 등 4권.  
.주요 논문 : “천안시 토지이용계획 고찰”, “천안 연극의 역사적 고찰”, “천안시 문화예술의 현황과 활성화 방안”, “항일독립투사 조인원과 이백하 선생의 생애와 업적”, “한국 여성교육의 기수 임숙재 여사의 생애와 업적”, “민속학자 남강 김태곤 선생의 생애와 업적”, “태안지역 무속문화의 현장조사 연구”, “태안승언리상여 소고”, “조선 영정조시대의 실학자 홍양호 선생의 생애와 업적”, “대전시 상여제조업의 현황과 과제”, “천안지역 상여제조업체의 현황과 과제”, “한국 노벨문학상 수상조건 심층탐구”, “중봉 조헌 선생의 생애와 업적” 등 93편
.수상 실적 : 천안교육장상, 충남교육감상 2회, 통일문학상(충남도지사상), 국사편찬위원장상, 한국학중앙연구원장상, 자연보호협의회장상 2회, 교육부장관상, 문화체육관광부장관상, <문학 21> 시부문 신인작품상, <문학사랑>·<한비문학> 문학평론부문 신인작품상, 국무총리상, 홍조근정훈장 등 다수  
.한국지역개발학회 회원, 천안향토문화연구회 회원, 대전 <시도(詩圖)> 동인, 천안교육사 집필위원, 태안군지 집필위원, 천안개국기념관 유치위원회 홍보위원, 대전문화역사진흥회 이사 겸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 보문산세계평화탑유지보수추진위원회 홍보위원, 동양일보 동양포럼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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