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칼럼] 역병의 경고를 듣는 현자가 된다면 /유성환

환단스토리 | 2020.02.21 18:17 | 조회 5000

[인문학 칼럼] 역병의 경고를 듣는 현자가 된다면 /유성환


전염병은 신의 징벌, 고대 문명에도 등장

의학 발전한 지금도 감염증 주기적 창궐…전 인류적 대응 나서야


국제신문 2020-02-05 


우리나라를 비롯한 전 세계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의 공포에 휩싸여 있다. 신규 감염 확진자 수는 가파르게 늘고 있고, 누적 사망자는 492명에 이른다(2월 5일 오전 9시 기준). 바이러스의 진원지로 알려진 중국 후베이성 우한(武漢)시는 상주인구 1100만 명인 거대도시인데 이젠 인적이 완전히 끊긴 유령도시가 되어버렸다. 마치 2011년 개봉한 스티븐 소더버그 감독의 영화 ‘컨테이젼(Contagion)’의 한 장면을 보는 듯하다.


한편,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지난달 28일 테드로스 아드하놈 게브레예수스 세계보건기구(WHO) 사무총장을 만난 자리에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은 악마다. 우리는 악마가 활개 치고 다니게 놔두지 않겠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시 주석의 이번 발언은 부실한 초기 대응으로 전염병이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고, 그 결과 정치적 위상과 리더십에 심각한 타격을 입은 지도자가 말할 수 있는 자연스러운 정치적 수사(修辭)에 가깝다. 그러나 필자에게는 그 생화학적 특성과 작동기제 등이 이미 과학적으로 규명된 미생물체를 한 나라의 최고 권력자가 “악마” 또는 “마귀”로 지칭한 것이 예사롭지 않다. 지금도 널리 사용되는 ‘병마(病魔)’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다루기 힘든 질병, 특히 어떻게 해볼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확산되는 전염병을 초자연적인 존재의 악행이나 신의 징벌로 여기는 발상은 생각보다 그 뿌리가 훨씬 깊다.


문명의 발상지로 알려진 고대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에는 신들이 인간을 지상에서 거의 완전히 절멸시켜 버리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이른바 ‘인류 멸망 신화’가 전승되어 내려온다. 주목할 만한 점은 이 두 지역의 신화에서 인류를 멸망시키는 효과적인 방법 중 하나로 신들이 전염병을 사용한다는 사실이다.


우선 인류 멸망의 동기와 결말이 비교적 단순한 고대 이집트 신화부터 살펴보자. 이집트의 최고신은 태양신이다. 그런데 태양신이 노쇠하게 되자 태양신을 얕본 인간 중 일부가 반란을 일으킨다. 태양신은 자신에 대항하는 인류를 징벌하기 위해 암사자 여신인 세크메트(Sekhmet) 여신을 지상으로 내려보내 사람들을 무차별적으로 살육하게 한다. 그런데 세크메트가 자신의 임무를 너무나 훌륭하게 수행하는 바람에 태양신은 고민에 빠진다.


인류 중 일부는 자신과 다른 신들을 섬기도록 살려 두어야 했다. 자신의 통제에서 벗어난 세크메트의 살육을 멈추게 하기 위해 태양신은 한 가지 계책을 생각해낸다. 그리고 자신의 신관들에게 맥주에 붉은 황토를 섞어 피처럼 보이게 만든 후 피에 굶주린 세크메트가 지나갈 길목에 부어 놓으라고 명령한다. 태양신의 계획대로 붉게 물든 맥주로 목을 축인 세크메트는 술에 취해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망각하고 자애로운 암소 여신으로 변해 하늘로 올라간다. 인류는 절멸의 위기에서 구원받는다. 현대의 이집트 학자들은 암사자의 형상을 한 세크메트가 태양의 파괴적인 열기와 그에 따른 가뭄, 전염병 등을 상징한다고 해석한다. 요컨대 세크메트는 태양빛이 가장 강렬한 한여름에 창궐하는 계절성 전염병이며 신화에서처럼 최고신은 자신의 의지에 따라 전염병을 퍼뜨릴 수도, 거둘 수도 있는 권능을 가지고 있다고 여겨졌다.


지금의 이라크 남부 지방에 해당하는 고대 메소포타미아에는 다양한 ‘인류 멸망 신화’가 전해져 내려오는데 이 가운데 기원전 17세기 것으로 추정되는 ‘아트라하시스(Atrahasis)의 태초 이야기’에서는 단기간에 엄청나게 불어난 인간들이 지상에서 내는 소음으로 편히 쉴 수 없게 된 천상의 신들이 인간을 절멸시키기로 결정하고 남타르(Namtar)라는 역병의 신에게 질병을 퍼뜨리라고 명령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러나 역병으로 인류를 절멸시킨다는 계획은 실패하고 결국 신들은 더욱 효과적인 방법인 홍수를 일으켜 인간을 멸망 직전까지 이르게 만든다.


그렇다면 역병이 인류를 절멸시키지 못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바로 신화의 주인공이자 현자인 아트라하시스가 신의 조언에 귀 기울이고, 신의 명령에 따라 남타르에게 풍성한 제물을 바쳤기 때문이다. 제물을 받은 남타르는 더 는 질병을 퍼뜨릴 명분을 잃고 지상에서 물러난다.


의학과 과학이 눈부신 발전을 이룬 현대에도 주기적으로 창궐했다가 소멸하는 전염병의 유행을 지켜보노라면 자연은(혹은 신들은) 겸손한 사람들만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여전히 우리에게 중요한 무언가를 끊임없이 조언하려 하는 듯하다.


고대 신화의 현자들처럼 우리 모두가 자연과의 무분별한 조우(遭遇)에 대해 경각심을 갖고, 눈앞의 이익을 초월해 인수공통(人獸共通) 감염병 같은 전 인류적 재앙을 함께 예방할 겸손하면서도 용감한 현자가 될 수는 없을까?


서울대 아시아언어문명학부 강의교수·이집트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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