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생활철학 비교

신상구 | 2020.04.19 02:42 | 조회 5907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생활철학 비교

    그리스 북동부 마케도니아 지방에서 태어난 아리스토텔레스는 17세 때 아테네로 가서 플라톤이 세운 당대의 최고 교육기관인 아카데미아에 들어간다. 플라톤이 죽을 때까지 20년을 아카데미아에서 수학·천문학·철학·수사학 등을 배우고 연구하며 지냈으니, 아리스토텔레스는 명실상부한 플라톤의 제자다. 이후 마케도니아로 돌아가 알렉산더 대왕의 가정교사로 2년 정도의 시간을 보내고는 아테네로 되돌아와 리시움(Lyceum)이라는 자신의 학교를 세운다. 리시움은 아카데미아와 더불어 고등교육의 중요한 본산으로 자리 잡는다.
   플라톤의 제자이기는 하지만 두 철학자는 스타일이 전혀 다르다. 플라톤이 큰 그림을 그리고 과감하게 자신의 입장을 밀어붙이는 선이 굵은 철학자라고 한다면, 아리스토텔레스는 현실적 조건과 세부사항을 살피는 세심한 철학자다. 그는 자연현상을 관찰하고 정리하는 작업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당시는 모든 학문적 작업을 아울러 철학이라고 불렀던 시절이어서 그렇지, 훗날에 태어났다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과학자가 되었을 것이다.
   현실을 세심히 고려하는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을 이야기할 때도 플라톤처럼 과도하게 이상주의적으로 기울지 않는다. 행복하기 위해서는 재물도 있어야 하고, 친구와의 즐거운 시간도 필요하며, 자식 없이는 행복하기 어렵고, 준수한 용모도 행복에 도움이 된다고 하면서 일상의 기준들을 적절히 존중한다.
   행복에 대한 그의 생각의 핵심에는 인간다움이 있다. 행복한 삶은 인간다운 성품을 풍성하게 발현하며 사는 것, 말하자면 가장 인간답게 사는 것이라는 아이디어다. 그렇다면 행복에 대한 답은 인간이란 어떤 존재이고, 어떻게 사는 것이 인간답게 사는 것인가에서 찾아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세계가 목적에 의하여 움직여진다고 이해하였다. 의자는 앉기 위하여 만들어지고, 그래서 그 사물이 의자인 이유는 사람을 앉히는 목적에 기여하기 때문이다. 사람을 앉히는 기능을 하지 못하는 물건은 예술품은 될지 몰라도 의자는 아니다. 사람이 만든 물건들은 모두 목적과 기능이 핵심을 이룬다. 톱이 그렇고 자동차가 그렇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람이 만든 물건뿐 아니라 생명체들도 기능(ergon)을 갖는다고 생각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정립한 이 세계관은 후에 목적론적 세계관이라는 이름을 얻었고, 근세에 들어와 기계론적 세계관에 의하여 도전을 받을 때까지 거의 2000년에 걸쳐 서양 지성사에 큰 영향력을 발휘한다.
   목적론적 세계관에서 사물은 목적과 기능을 갖고 있으며, 그 기능을 수행할 때 가장 그것답다. 인간도 인간으로서의 기능을 다할 때 인간답다. 인간 노릇을 해야 인간이 된다는 말이다.
   인간 노릇을 구성하는 첫째 요소는 덕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다’라고 말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가 뜻한 바는 사람들과 어울려 자기 의사를 표현하고, 그 속에서 자기 이해를 도모하고 조정하는 행위를 한다는 현대적 의미와는 거리가 있다. ‘정치적’이라고 번역된 단어 ‘politikos(πολιτικός)’는 ‘polis(πόλις, 도시국가)에 속한다’는 의미다. 개인이 도시국가를 떠나서 존재할 수 없으며, 도시국가를 구성하는 애국심·정직·용맹·우정·공감 등 덕목들을 갖추지 않고서는 인간다울 수 없음을 의미한다.
   덕을 잘 갖춘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 한 번의 정직한 행동이 그 사람을 정직한 인물로 만들지 않는다. 행동을 일정한 방향으로 하는 성향 또는 경향성이 갖추어져야 정직함의 덕을 갖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참을 말하고, 거짓을 피하는 성향이 우선 몸에 배어 있어야 한다.
   행위가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성향이 중요하지만, 그것만으로 덕을 갖추었다고 할 수는 없다. 거짓말을 하지 않도록 잘 훈련된 어린이는 착한 아이인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 아이가 정직함의 덕을 구비했다고 할 수는 없다. 좀 더 성숙한 삶의 태도가 동반되어야 한다. 거짓으로 이득을 취하는 것에 역겨움을 느끼며, 그런 사람과 가까이하고 싶어하지 않고, 또 진실을 말하는 것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등의 정서적 반응과 도덕적 평가를 포함한 복합적 성향과 연결될 때 우리는 덕을 갖추었다고 한다. 말하자면, 좋은 경향성이 정서적 반응, 삶의 태도와 결합되어 성품이 될 때 비로소 덕이 된다.
   성품으로서의 덕은 이론적으로 가르치고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도덕 법칙을 잘 알고 행동의 시시비비를 잘 가린다고 하여 덕 있는 성품을 보장하지 않는다. 인간됨의 교육은 교실이 아니라 삶의 현장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이다. 덕이 몸에 배게 생활 속에서 습관화하고, 덕 자체를 즐기게끔 현장에서 삶의 태도를 성숙하게 만들어 성품을 갖추는 데에 교육의 본질이 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주목한 둘째 인간 노릇은 이성에 있다. 생명의 세계는 식물, 동물, 인간으로 이어진다. 식물은 환경으로부터 영양을 섭취하고 성장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동물은 여기에 더하여 주변을 지각하고 몸을 움직여 활동하며 활발히 번식하는 기능을 한다. 인간은 더 나아간다. 식물과 동물에 필요한 기능에 더하여 진정 인간이기 위해서는 이성적이어야 한다. 순간순간 변화하는 감각의 세계에 매몰되지 않고, 보편적 진리와 아름다움을 관조하는 것, 또 주어진 상황에서 가장 현명한 행동은 무엇인가를 분별하는 등 이성의 능력이 인간을 인간답게 한다. 소크라테스, 스승 플라톤으로부터 내려온 이성주의의 위력이 면면하다.
   이성은 덕을 완성하는 데에 기여한다. 한 사람이 바람직한 성향을 갖추고, 그를 따르는 것 자체를 즐긴다고 해도, 이성적 판단이 동반되지 않으면 자신뿐 아니라 주변에 있는 사람 모두에게 해를 끼치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용기가 사람을 파멸에 이르게 할 수 있다. 동정심은 좋은 것이지만 상대방이 마음의 상처를 받을까 두려워 필요한 사실을 제때에 알려주지 못하여 피해를 줄 수도 있다. 그래서 덕의 완성을 위해서는 사리를 분별하여 덕을 가장 합리적으로 실천하는 지혜가 동반되어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능력을 프로네시스(phronesis)라고 불렀다.
   흔히 실천적 지혜라고 번역되는 프로네시스는 이성적 판단 능력에 속하면서도, 단지 이론적 차원에 머물지 않고 실제적인 삶의 경험과 어우러진 응용 능력이다. 이제 이성과 삶의 경험이 어우러져 실천적 지혜를 갖추고, 실천적 지혜를 구체적인 삶에서 덕스러운 성품에 맞추어 응용할 준비가 되었을 때 인간은 식물, 다른 동물과 구분되어 인간다움의 경지에 오른다.
   행복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는 인간다움에 대한 견해로부터 바로 따라나온다. 덕 있는 성품이 갖추어지고, 이성적 능력으로서의 실천적 지혜가 여기에 잘 결합하여 인간다운 삶이 번창하는 것이 행복이다. 이를 에우다이모니아(Eudaimonia εὐδαιμονία)라고 불렀다.
   에우다이모니아는 요새의 행복관과 차이가 크다. 현대인은 행복하면 주관적으로 긍정적인 느낌, 뭔가 즐겁고 쾌적한 느낌을 갖는 감각적 상태를 연상한다. 에우다이모니아는 감각적 상태가 아니라, 덕에 합당한 방식으로 행동을 합리적으로 선택하여 인간다움을 발현하여 활동하는 것이다.
   이런 차이점 때문에 어떤 이들은 에우다이모니아를 행복으로 번역하는 것을 문제 삼는다. 행복은 삶이 어디로 가야 하는가를 가리키는 이정표와 같은 개념이다. 무엇을 행복이라 부를 것인지는, 삶의 최종 목적을 어디에 두어야 하는가의 질문과 맞닿아 있다. 에우다이모니아가 행복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하며 삶의 지향점에 대한 이견으로부터 눈을 가리는 것은 비겁하다. 우리의 행복관, 삶의 이정표를 되돌아보는 것이 맞다.
                                                                                      <참고문헌>
    1. 김기현, " 덕과 지혜로 빚어지는 인간다움 그리고 행복", 중앙일보, 2020.4.17일자. 2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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