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산대사 휴정 스님의 생애와 업적

신상구 | 2020.05.31 18:35 | 조회 4673


                                                                            서산대사 휴정 스님의 생애와 업적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등 왜적의 침입으로 조선의 국운이 풍전등화의 위기에 놓이자 수많은 백성이 의병을 일으켜 왜적에 맞서 싸웠다. 특히 ‘불살생(不殺生)’ 계를 어기면서까지 분연히 일어섰던 의승들의 활약은 대단했다. 그 중심에 서 있던 인물이 바로 서산대사(西山大師)로 잘 알려진 청허당(淸虛堂) 휴정(休靜, 1520∼1604) 스님이다. 휴정 스님이 삭발염의한 지리산 자락 하동에는 서산대사길(지리산 옛길)이 만들어져 있다.  


            머리는 희게 세었지만 / 마음은 세지 않았다고/옛사람이 일찍이 말하였네. / 지금 닭울음소리 듣고/

            장부의 해야 할 일 능히 마쳤네./홀연히 본고향을 깨달아 얻으니/모든 것이 다만 이렇고 이렇도다./

            수많은 보배와 같은 대장경도/원래는 하나의 빈 종이로다.〈서산대사 오도송〉


   서산대사(西山大師)는 휴정 스님의 별호다. 이외에 묘향산인(妙香山人), 청허당, 백화도인(白華道人), 풍악산인(楓岳山人), 두류산인(頭流山人), 조계퇴은(曹溪退隱) 모두 스님을 지칭하는 말이다. 교과서에도 소개될 만큼 잘 알려진 서산대사는 사명대사(四溟大師) 유정(惟政) 스님의 스승으로 ‘호국불교’를 상징하는 인물로도 손꼽힌다.
                                                                        1. 어릴 때부터 불교와 깊은 인연
   서산대사는 평안도 안주 출신으로, 아버지 최세창(완주 최씨)과 어머니 김 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이름은 여신(汝信)이며, 어릴 때부터 불연(佛緣)이 깊었다. 여신이 세 살 되던 해 부처님오신날에 아버지가 등불 아래에서 졸고 있는데, 한 노인이 나타나 “꼬마스님을 뵈러 왔다.”고 말했다. 그리고는 두 손으로 여신을 안고 주문을 외우며 머리를 쓰다듬은 다음 이름을 ‘운학(雲鶴, 서산대사의 아명)’으로 지으라고 당부했다. 여신은 아이들과 놀 때도 돌을 세워 부처라고 불렀고, 모래를 쌓아놓고 탑이라 부르며 놀았다.
   여신은 9세 때에 어머니를 여의는데, 이듬해 아버지마저 여의는 큰 슬픔을 겪었다. 이후 안주목사 이사증(李思曾)을 따라 한양으로 가 성균관에서 3년 간 글과 무예를 익힌 뒤 과거시험에 도전했다. 하지만 번번이 낙방했다. 여신은 낙방의 쓰라림을 잊으려  지리산으로 유람을 떠났다가 지리산에 들어가 화엄동(華嚴洞)·칠불동(七佛洞) 등을 둘러봤다. 이렇게 지리산 인근 사찰에 머물던 여신은 영관대사(靈觀大師)의 설법을 듣고 불법(佛法)에 심취, 〈법화경〉·〈화엄경〉·〈유마경〉·〈능엄경〉·〈반야경〉 등의 경전과 〈전등(傳燈)〉·〈염송(拈頌)〉등 선(禪) 서적을 탐구했다.
                                                                        2. 숭인대사를 은사로 출가하다
   출가자의 길을 가기로 결심한 여신은 지리산 원통암(圓通庵)에서 숭인대사(崇印大師)를 은사로 모시고, 삭발염의 했다. 출가 사찰에 관한 기록은 휴정 스님의 문집인 〈청허당집(淸虛堂集)〉에는 나오지 않고, 스님의 제자인 제월(霽月) 경헌 스님(敬軒, 1542~1632)의 문집인〈제월대사집(霽月大師集)〉상권에 수록된 ‘청허대사행적(淸虗大師行蹟)’에 “…… 대사는 영관대사의 법회에 참석해 불법을 듣고 신봉하여 숭인장로에 의해 원통암에서 머리를 깎고

……”라고 나온다. 
   스님은 1540년(중종 35) 일선(一禪) 스님을 수계사(授戒師)로, 석희(釋熙)·육공(六空)·각원(覺圓) 스님을 증계사(證戒師)로, 영관 스님을 전법사(傳法師)로 모시고 계(戒)를 받았다. 그 뒤에는 운수행각(雲水行脚)을 하며 공부에 매진했다. 1549년(명종 4) 승과(僧科)에 급제한 휴정 스님은 대선(大選)을 거쳐 선교양종판사(禪敎兩宗判事)에 올랐다.
   그러나 스님은 1556년 선교양종판사직을 내놓고, 금강산·두류산(지리산)·태백산·오대산·묘향산 등을 다니며 정진했다. 1589년(선조 22)에는 정여립(鄭汝立) 역모(逆謀) 사건에 연루됐다는 의혹에 투옥됐지만, 선조는 휴정 스님을 무죄 석방했다. 당시 선조는 ‘잎사귀가 스스로 붓끝에서 나오고, 뿌리가 땅 위에서 나오지 않아 달이 떠도 그림자 보이지 않고, 바람 일어도 소리가 들리지 않네.’라는 시를 붙인 묵죽(墨竹) 한 폭을 손수 그려서 하사했다. 이에 서산대사는 그 자리에서 ‘소상강의 대나무 한 그루가 성주의 붓끝에서 피어났나니, 산승이 향불 사르는 곳에 잎사귀마다 가을 소리 묻어나리라.’는 내용의 시를 지어 선조에게 올렸다. 
   서산대사에 대한 선조의 신뢰는 대단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평양을 거쳐 의주까지 피난을 갔던 선조는 묘향산으로 신하를 보내 서산대사를 불렀다. 대사는 선조를 알현한 자리에서 “늙고 병들어 싸우지 못하는 승려는 절을 지키면서 나라를 위해 부처님에게 기원하도록 하고, 나머지는 통솔해 전쟁터로 나아가 나라를 구하겠다.”고 말한 뒤, 전국 사찰에 격문을 보내 승병을 모집했다.
   선조는 후일 서산대사의 공로를 인정해 ‘국일도대선사선교도총섭부종수교보제등계존자(國一都大禪師禪敎都摠攝扶宗樹敎普濟登階尊者)’라는 존칭과 함께 정2품 당상관 직위를 하사했다. 서산대사는 1604년 1월 묘향산 원적암(圓寂庵)에서 설법을 마치고 자신의 영정 뒷면에 ‘80년 전에는 네가 나이더니, 80년 후에는 내가 너로구나.’라는 시를 적어 유정·처영 스님에게 전한 뒤 좌탈입망(坐脫立亡)했다.
   서산대사가 수행자가 되길 결심하고, 첫 발을 내디딘 곳은 지리산이다. 현재 서산대사가 출가 후 오르내린 길을 ‘지리산 옛길’ 이라고 부르는데, 지리산국립공원 내 하동군 화개면 신흥마을과 의신마을을 잇는 길이다. 자동차도로가 생기기 전 이 길은 마을 주민들의 교통로였다. 신흥마을에는 신흥사가, 의신마을에는 의신사가 있었다고 전한다. 서산대사는 두 사찰을 비롯해 지리산 자락에 있었던 여러 사찰을 다니며 정진했다.

                                                                    3. 신흥~의신마을 잇는 4.2km 구간
   경남 하동군과 지리산국립공원사무소는 서산대사가 걸었던 신흥마을과 의신마을을 잇는 4.2㎞ 구간을 정비해 2012년 12월 개통하면서 ‘서산대사길’로 명명했다. 4월 중순, 평소 등산객이 드문 평일을 이용해 서산대사길을 걸었다. 사람들과의 접촉을 피하려는 게 가장 큰 이유였다. 서산대사길 입구인 신흥마을은 주민 1~2명을 제외하곤 오가는 사람도 없었고,

   가끔 오가는 자동차만 눈에 띌 뿐 조용했다. 식당이 몇 곳 있었지만, 코로나19 영향으로 모두 문을 닫은 상태였다. 식당 주차장도 쇠줄을 걸어놓은 탓에 이용할 수 없었다. 서산대사길 입구에서 300여 미터 떨어진 공터에 주차한 뒤 산행에 나섰다.
   입구엔 길 안내판과 함께 ‘신흥~의신 옛길’이라는 현판이 걸린 문이 있다. 이 문을 지나자 싱그러운 초록이 펼쳐졌다. 양옆으로 싱그런 잎사귀를 주렁주렁 매단 차나무가 무리지어 자라고 있었다. 하동 특산물 중 하나가 녹차라는 사실을 떠올리니 고개가 끄덕여졌다.
   길 오른쪽은 대성계곡이고, 계곡 너머는 의신마을까지 연결된 자동차도로다. 산길을 걷기 힘든 이들은 자동차로 의신마을에 간다고 하니,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곳인 듯했다. 서산대사길은 어린이도 충분히 오갈 수 있을 만큼 수월하다. 정선 정암사 자장율사 순례길에 비하면 그야말로 ‘양반’이다. 그래도 산길이다 보니 곳곳에 오르막과 내리막이 있지만, 급경사 구간은 짧다.
   시원한 바람과 함께 재잘거리는 새들의 지저귐, 그리고 대성계곡의 청량한 물소리에 무거웠던 몸과 마음이 다 비워지는 느낌이다. 서산대사도 온갖 자연의 소리를 들으며 포행(布行)을 하고 잠시 멈추어 서서 명상을 했으리라. 자연의 소리는 길을 걷는 동안 끊임없이 들렸다. 세상의 모든 시름을 날려버릴 수 있을 만큼 맑고 깊고 깨끗한 울림이었다. 서산대사길 중간에는 민가가 두세 채 있고, 농민이 키우는 산나물 등도 곳곳에 있다. 농산물 채취를 금하는 경고문도 곳곳에 붙어 있으니, 물욕(物慾)은 버려야 한다.

                                                                         4. 원통암엔 서산대사 자취 남아
   서산대사길의 3분의 1지점에 전설이 담긴 돌 하나가 세월을 켜켜이 쌓고 있다. 바로 ‘의자바위’다. 임진왜란 당시 왜병이 의신사를 불태우고 범종을 훔쳐가려 했다. 이를 알게 된 서산대사가 신통력으로 범종을 의자로 바꿔놓았다. 이를 본 왜병들은 혼비백산해 도망갔다고 한다. 이때부터 이 의자바위(의신사 범종)는 이 길을 지나는 이들이 잠시 쉬어가는 휴식처가 되었다. 현대인의 관점에선 허무맹랑한 이야기지만, 서산대사의 법력이 높았음을 알려주는 일화임에는 틀림없다. 
   평탄한 길을 걷다 보면 어느 새 의신마을에 가까워진다. 멀리 의신마을이 보이는데, 산이 둘러싸고 있어 아늑하다. 의신마을의 한 민가 담벼락에는 서산대사의 진영과 임진왜란 당시 서산대사의 활약상, 원통암 등의 그림이 그려져 있어 눈길을 끈다. 의신마을은 서산대사길의 종착지다. 하지만 마을에서 편도로 약 1km 떨어진 곳에 서산대사 출가지인 원통암이 있어 발길을 재촉했다. 도로 바닥에는 원통암 방향을 표시하는 곰이 그려져 있다.  
   원통암으로 향하는 길은 오르막의 연속이다. 돌이 많고, 경사도 심해 서산대사길에 비해 몇 배 힘들었다. 해가 떨어지기 전에 산을 내려와야 했기에 가쁜 숨을 고르며 올랐다. 길 곳곳에 돌탑이 쌓여있다. 어떤 돌탑은 바위를 기단으로 삼아 쌓아올렸는데, 원통암을 오간 불자들이 한숨 돌리며 만든 듯했다. 지천에 흐드러진 봄꽃도 험한 산길을 오르는 힘겨움을 덜어 주었다.
   쉬다 걷다를 반복하기를 1시간, 잘 다듬어진 긴 돌계단 끝에 ‘서산선문(西山禪門)’이라는 편액이 걸린 문이 우뚝 서 있었다. 문 앞에 다다르니 ‘나는 누구인가’라는 글귀가 쓰인 푯말이 눈에 들어왔다.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천천히 내뱉으며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를 반복하며 지나온 길을 떠올렸다. ‘나는 왜 이곳까지 왔을까?’ 스스로에게 물었다. 서산대사도 원통암 입구에서 ‘나는 왜 여길 왔을까?’라고 자문하지 않았을까?
   경내에는 주 법당인 ‘원통암’이 있고, 그 옆에는 ‘청허당, 서산대(西山臺)’라는 글귀가 적힌 편액이 걸린 수행공간이 있다. 작은 앞마당에는 여러 그루의 나무가 암자의 운치를 더했다. 앞마당에서 내려다보이는 풍경은 시야가 탁 트여 마음마저 시원해진다. 서산대사도 이 풍경을 보면서 화두를 되뇌었을 터.
   서산대사는 이곳에서 출가 후 참선수행에 매진해 한 소식을 얻었다. 초발심을 잊지 않고 실천했기에 부단한 정진으로 깨달음을 얻었고, 사명대사와 같은 훌륭한 제자를 양성해낼 수 있지 않았을까? 그리고 대사는 한 목숨 아끼지 않고, 전장에 뛰어들어 꺼져가는 국운을 되살려놓았다. 
   서산대사는 지리산을 정말 좋아했다. 과거에 낙방해 의기소침해 있을 때 기운을 북돋아 준 곳이고, 제2의 인생길에 들어설 수 있게 해준 곳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지리산(두류산) 관련 시를 많이 남겼다. 〈한국불교전서〉에 들어있는 스님의 문집인 〈청허당집〉 권1에 수록된 시 한 수를 소개한다.


               아득히 그리워지는 이 마음이여/하염없이 저 멀리 바라보는구나./ 새는 산 빛 속에 날아다니고/

               매미는 석양 속에 목메어 우네./사람의 검은 머리 근심으로 희어지고/푸른 숲 잎들도 병들어 붉

               어졌네./ 생이별도 사별과 다르지 않으니/어찌 다시 동쪽 서쪽을 물으리오./골짝 입구의 조각구

               름 심야처럼 깜깜하니/인간 세상 큰 장마가 질 것을 알겠도다./ <추회(秋懷)>


   서산대사는 후학들을 위한 불교지침서인 〈선가귀감(禪家龜鑑)〉, 〈선교결〉, 〈심법요초〉 등을 저술했다. 또 포교를 위해 가사(歌辭)를 지어 보급했다. 우리가 알고 있는 ‘회심곡(回心曲)’이 서산대사의 작품이다. 
   서산대사가 초발심한 원통암에서 사회생활에 첫 발을 내딛었던 당시를 떠올렸다. 그 때 다짐했던 ‘부끄럽지 않게 열심히 살자.’는 말을 곱씹었다. ‘나는 누구인가’ 글귀를 마음에 새기면서, 뉘엿뉘엿 지는 해를 뒤로 하고 다시 세속의 공간으로 돌아왔다.   ‘나는 누구인가?’는 누구도 답을 줄 수 있는 오직 자신만이 찾을 수 있는 질문이다. 각박한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산소와 같은 질문이 아닐 수 없다.
                                                                                         <참고문헌>
   1. 이강식, “風雲처럼 살며 충의 다했던 휴정 스님 초발심 흔적 곳곳에”, (주)금강신문,『금강』통권 284호(2020.5-6월호), (주)해인기획, 2020.5.20. pp.76-86.


twitter facebook me2day 요즘
1,144개(3/77페이지)
게시판
번호 제목 글쓴이 조회 날짜
공지 [회원게시판 이용수칙] 관리자 45720 2023.10.05
공지 상생의 새문화를 여는 STB 상생방송을 소개합니다. 환단스토리 206635 2018.07.12
1112 [역사공부방] 애국지사 정정화의 생애 사진 대선 165 2024.02.26
1111 [역사공부방] ‘토종 박사’ 차미영 교수, 한국인 첫 獨 막스플랑크 연구소 단장 선임 대선 164 2024.02.26
1110 [역사공부방] 풍수를 한국 전통지리학으로 정초한 최창조 선생을 기리며 사진 대선 163 2024.02.25
1109 [역사공부방] <특별기고> 2024년 정월대보름 맞이 대동 장승제 봉행을 경 사진 대선 224 2024.02.24
1108 [역사공부방] 대전 근대건축물 한암당 ‘흔적 없이 사라질 판’ 사진 대선 237 2024.02.22
1107 [역사공부방] 노벨과학상 수상 가능성 사진 대선 197 2024.02.22
1106 [역사공부방] <특별기고> 만장의 의미와 유래 사진 대선 215 2024.02.19
1105 [역사공부방] '남북 통틀어 20세기 최고 언어학자인 김수경 이야기 대선 253 2024.02.16
1104 [역사공부방] 보문산에서 발견된 1천년 불상 어디에 있나? 사진 대선 215 2024.02.16
1103 [역사공부방] 프랑스 대문호 빅토르 위고의 생애와 업적 대선 228 2024.02.15
1102 [역사공부방] 간디가 말한 망국의 7가지 징조. 우리 사회 혼란 병폐 모순과 일치 걱정 대선 203 2024.02.13
1101 [역사공부방] ‘파란 눈의 聖者’ 위트컴 장군 사진 대선 280 2024.02.11
1100 [역사공부방] 한국 첫 화학박사 고 이태규씨 일가 사진 대선 258 2024.02.10
1099 [역사공부방] 1969년 한국인 첫 노벨상 후보 이태규 화학박사 대선 312 2024.02.07
1098 [역사공부방] 대전 노숙인 54명 르포 사진 대선 289 2024.02.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