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불교 탄압 전말사

신상구 | 2020.06.24 01:38 | 조회 4662

                                                                            조선 불교 탄압 전말사
강원도 원주에 있는 거돈사지.
강원도 원주에 있는 거돈사지. 고려 왕찰이었던 거돈사는 임진왜란을 전후해 폐허가 됐다. 전란 탓도 있지만 축대가 온전하고 불상들 목이 달아난 흔적으로 미뤄볼 때 누군가가 고의로 파괴한 부분도 보인다. 서울 원각사, 양주 회암사는 성리학 세력에 의해 사라진 대표적인 사찰이다. 부패한 불교 세력을 무너뜨리고 새 왕조를 세운 조선 사대부는 조선 말까지 불교 말살을 기도했다. 이들은 승려들을 '무위도식하는 자'로 비난하는 동시에 '의승(義僧)'이라 부르며 산성 축성, 왕릉 공사, 종이 제작, 시신 매장 같은 부역에 강제로 동원했다. /박종인 기자
의승(義僧): 임진왜란 때 의병의 한 형태로 참전한 승려들을 지칭하는 말. 조선 후기에는 남한산성 및 북한산성 등에서 교대로 상번하던 지방 승군들을 통칭하는 용어로 쓰임(한국학중앙연구원 '역주 조선왕조실록')

―특징: 죽을힘을 다한다(盡其死力·진기사력)(1669년 6월 20일 '현종실록')

―사회적 대우: '놀고먹는 자 중 으뜸'(倖民中僧尼爲最·행민중승니위최)(송시열, 1669년 1월 4일 '현종실록')

   그랬다. 승려를 '군(軍)'이라 칭하며 부역에 데려다 쓰고, 죽을힘 다해 임무를 완수하는 그들을, 그들을 부려먹는 사대부들은 놀고먹는 놈이라 불렀다. 승려들이 남한산성, 북한산성 만들고 종이 만들어 사대부 읽을 책들 찍는 사이에 그네들이 살던 대찰(大刹)은 방화로 사라졌다. 누가 태웠나. 그 사대부들이 태웠다.

                                                                           1.  조선 왕조 개국과 척불(斥佛)
   1392년 7월 17일 이성계가 개경 수창궁에서 왕위에 올랐다. 다섯 달 뒤인 12월 6일 양광도(광주와 양주)와 경상도 안렴사(도지사) 조박과 심효생이 "상중에는 부처 공양을 금하겠다"고 보고했다. 임금이 고개를 저으며 이리 말했다. "대유학자 이색도 부처를 숭상했거늘, 이 무리들은 무슨 글을 읽었건대 부처를 좋아하지 않는가?"(1392년 12월 6일 '태조실록')
   왕조를 바꾼 역성혁명 동지는 성리학으로 중무장한 신흥 사대부였다. 타도 대상인 고려 말 실세는 불교 세력이었다. 혁명 구호는 당연히 억불(抑佛)이었다. 이론에 대한 공격보다는 불교 세력이 저지른 악행을 문제 삼았다. 옛 지배 세력 뿌리를 뽑아야 새 지배 질서가 구축될 수 있었으니까. 

   성리학 사대부 집단은 집권 초부터 끝없이 왕들에게 척불(斥佛)을 요구했다. 혁명에 군사력을 제공한 전주 이씨 왕족은 그게 이상했다. 왜 불교를? 하지만 조선은 왕권과 신권의 연합 왕국이다. 대개 역대 왕들은 사대부 의견을 따랐다. 이들이 내세운 논리는 '아비도 군주도 없는(無父無君·무부무군) 불충불효의 교를 방치하면 천리(天理)가 멸망한다'였다.(성균관 생원 101명 집단 상서(上書), 1424년 3월 12일 '세종실록')
                                                                          2. 1516년 승려, 법전에서 사라지다
   개국 초기부터 승려들은 부역에 동원됐다. 한양 신 도읍, 경복궁 건설에도 승려들이 동원됐다. 하지만 기준은 있었다. '마음 수양하는 자' '강론하는 자'는 제외되고 '초상집에서 옷과 음식을 기웃대는' 하등 승려들만 동원됐다.(1395년 2월 19일 '태조실록') 이들에게는 승려 신분증인 도첩(度牒)을 부여했다.
   연산군을 몰아내고 중종을 앉힌 사림파는 이 '도첩' 자체를 폐지하라고 요구했다. 승려 자체를 인정하지 못하겠다는 것이다. 재위 4년째인 1509년 9월 29일 중종에게 사헌부가 도첩제 폐지를 요구했다. 중종은 거부했다. 요구는 하루도 빠짐없었다. 10월 25일 왕에게 사헌부 관리가 이렇게 물었다. "사설에 빠지셨나이까(惑於邪說乎·혹어사설호)?" 왕은 또 거부했다. 이틀 뒤 사간원 대간이 말했다. "대단히 실망이외다(尤爲缺望·우위결망)." 7년 뒤 중종은 결국 '경국대전'에서 도첩제 항목을 삭제하는 데 동의해버렸다.(1516년 12월 16일 '중종실록')
                                                                                    3. 승려들, 산성을 쌓다
    이괄의 난을 치른 인조 정권은 내란과 오랑캐 후금 침략에 대비해 남한산성을 쌓았다. 1624년 7월부터 1626년 11월까지 진행된 축성 공사에는 100% 승려들이 투입됐다. '놀고먹는 인원을 투입했는데, 명승 각성(覺性)이 팔도에서 온 승려들을 총섭했다.'(장유, '남한성기'(1643), 서치상, '벽암각성과 남한산성의 축성조직', 한국건축역사학회 2009년 9월 학술발표회) 비슷한 시기에 벌어진 평양성 축성 공사에는 충청·강원·황해 승려 600명이 징발됐다.(1624년 6월 27일 '인조실록') 숙종 때 북한산성 축성 공사도 100% 징발된 승려들 작업이었다. 이들을 통칭 '축성승군(築城僧軍)'이라 한다.

                                 양주 회암사지. 16세기 후반 명종~선조 연간에 유생 집단에 의해 소실됐다.
    승려들을 징발한 이유는 두 가지였다. '군역의 고통이 혹심해 이를 피해 승려가 된 자가 10 중 6~7'(1636년 8월 20일 '인조실록')이기 때문이었다. 가혹한 수취 체제로 백성이 절로 도망갔으니 이들을 부려야 한다는, 이 악순환적 논리에 승려들은 부역승이 되었다. 그리고 이들은 '일반 백성이 사흘 걸릴 일을 사력(死力)을 다해 하루 만에 끝내는'(1669년 6월 20일 '현종실록') 우수한 노동자였다. 게다가 식량을 스스로 마련해야 하는 무임금 노동자였다. 이들은 단순히 승군이라 불리다가 숙종 때 '의승(義僧)'으로 통칭됐다.
    축성이 끝나면 승군 일부는 성에 남아 성을 방어했다. 절을 짓고, 높은 누각을 지어 무기고로 사용했다. 남한산성과 북한산성에는 병영 겸 절 용도로 만든 '승영사찰(僧營寺刹)'이 각각 10군데, 11군데 있었다. 사찰 건축 또한 승려들이 맡았다. 이를 '모승건찰(募僧建刹·승려를 모아 절을 지음)'이라고 불렀다. 승영사찰 근무 또한 각도에서 차출된 승려들이 맡았으니, 이 제도를 '의승입번(義僧立番·승군이 교대로 복무)'이라고 했다.(서치상, 위 논문)
   이름이 뭐든, 승려는 노동력에 불과했다. 의승들 군량미와 각종 비용은 모조리 소속 사찰 부담이었다. 병자호란이 끝나고 2년 뒤인 1639년 '의승'이라는 말에 으쓱해진 전라도 승군이 깃발을 세우고 장수라 칭했다. 그러자 인조는 "실로 큰 변고이니 의법조치하라"고 명했다.(1639년 1월 7일 '인조실록')
                                                                                4. 승려들, 왕릉을 만들다
   광해군 때 일부 지역을 시작으로 대동법(大同法)이 시행됐다. 각종 공물을 현물 대신 쌀로 받는 세제다. 단, 두 예외가 있었으니 왕릉을 만드는 산릉역(山陵役)과 중국 사신 접대를 위한 조사역(詔使役)은 여전히 쌀이 아닌 부역으로 메꿨다. 그리고 공물을 만들던 여러 부역이 쌀로 바뀌면서 조선 정부는 필요한 현물을 승려들 부역으로 충당하기 시작했다.
   이 산릉과 조사 작업에 주로 투입된 인력이 '농사에 바쁜 백성이 아닌', 의승들이었다. 1718년 숙종 세자빈 심씨 산릉에는 1000명이, 1720년 숙종 사후 산릉 작업에는 승군 2000명이 징발됐다. 작업 기간 먹을 식량은 승군 각자가 준비했다.(1718년 2월 20일 '숙종실록', 1720년 6월 14일 '승정원일기') 시신 매장, 도토리 줍기, 제방 공사, 벌목, 석재·벽돌 제작, 군량 운송에도 모두 승군이 동원됐다.
                                                                               5.  승려들, 종이를 만들다
    왜란과 호란 이후 종이 만들던 국립 조지서는 파괴됐다. 하지만 종이 수요는 급증했다. 대동법 이후 농민들은 종이 재료인 닥종이 밭을 논으로 바꿔버렸다. 종이는, 절에서 만들게 됐다. 그 '지역(紙役)'이 하도 지독해서 지치고 쇠약해진 승려들이 다 도망가 폐사되는 절도 속속 생겨났다.(1786년 7월 24일 '비변사등록')
   1800년대 후반 양산 통도사 또한 폐사될 위기에 빠졌다. 그때 주지 덕암당이 6개월 동안 머리를 길러 평민으로 위장하고 서울로 가서 권력가 권돈인을 만나 담판을 지었다. 1838년 무렵 권돈인이 경상관찰사로 와서 지역을 혁파했다. 그 '어마어마한' 혜택에 감격한 통도사는 이 두 사람 각자를 위해 공덕비를 세웠다.
   사대부들은 절에서 만든 종이로 책을 만들고 황제국 청나라 조공에 충당했다. 1643년 인조 때 청나라로 보내는 조공 종이(방물지)는 8만7000권이었고 1650년 효종 때는 11만5500권이었다.(오경후, '조선후기 승역의 유형과 폐단', 국사관논총 107집, 2005) 국립국어원에 따르면 1권은 20장을 뜻한다.
   지역 사대부까지 승려들을 구박했다. 1785년 7월 13일 충청도 화양동 만동묘 중수공사에 화양동서원 유생들이 상주 승려들을 징발했다. 서원 유생들이 떼로 체포됐다. 유생들은 "하찮은 승려를 부렸기로 이렇게 황묘(皇廟) 역사를 방해하는가"라고 반발했다.(1785년 7월 13일 '정조실록') 왕도 어찌하지 못하는, 선비의 나라였다.
                                                                              6. 탄압의 극성기, 현종 시대
    성리학 교조화가 한창이던 1659년 현종이 즉위했다. 백성이 누릴 권리는 박탈당하고 군사 의무와 토목 의무와 잡역 의무만 잔뜩 짊어진 그 승려들에게 재앙이 닥쳤다. 이듬해 내린 조치는 이러했다. 첫째, 왕실 사찰인 원당(願堂) 철폐(1660년 4월 3일). 둘째, 모든 승려들 환속 조치(12월 19일). 셋째, 왕실 여자들의 절인 자수원과 인수원 철폐. 넷째, 자수원에 있는 열성신패 매립(이상 1661년 1월 5일 '현종실록').
   탄압 정도가 아니라 말살을 기도하는 이 정책에, 남한산성 축성 감독인 각성의 제자 처능이 이렇게 상소했다. "종이도 잡물도 승려들이 만든다. 관청에서 겨우 걸어 나오는데 또 동원령이 떨어진다. 어기면 매질을 당한다.'(백곡 처능, '간폐석교소(諫廢釋敎疏·불교 폐지에 대한 상소)', 1661, 오경후, '조선 후기 불교정책과 대응론', 역사민속학, 2009 재인용)
    1797년 정조가 이렇게 한탄했다. "승려들이 돈을 마련하는 것이 거북이 등에서 털을 깎아 내는 것과 다름없게 되었구나."(정조, '홍재전서'164, 일득록4 문학4) 왕이 한탄해도 세상은 변하지 않았다.
    그래서 원주에 있는 거돈사는 황량하다. 저 너른 터에 신라 양식 석탑 하나와 부처상 사라진 석좌(石座) 하나가 서 있다. 언제 절이 사라졌는지 아무도 모른다. 조금씩 부서지지 않고 단기간에 파괴됐다고 폐사지 흔적은 말한다. 1566년 개성 사는 유생이 이성계가 살던 양주 회암사를 불태우려는 시도가 적발됐다.(1566년 4월 20일 '명종실록') 33년 뒤인 1599년 6월 4일 '선조실록'에서 회암사는 '회암사 옛터'로 변해 있었다. 그 사이 유생들이 방화를 하고 불상 목을 깨뜨려 담벼락 아래 버린 것이다. 절에 있던 무학대사 승탑은 1821년 광주 사는 유생 이응준이 아비 묘를 쓴다고 부서뜨렸다.(1821년 7월 23일 '순조실록') 서울 탑골공원에 있던 원각사는 연산군 때 폐사되고 운평(運平·무희) 1000명과 광희(廣熙·악사) 1000명과 가흥청(假興淸·2급 기생) 200명이 상주하는 궁중 음악원 장악원(掌 樂院)으로 변했다.(1505년 2월 21일 '연산군일기')  
     그 27일 전국에서 장정 2650명이 징발됐다. 2650명 모두, 승려였다
                                                                                          <참고문헌>
    1. 박종인, " 그 많던 절들은 어디로 다 가버렸을까", 조선일보, 2020.6.23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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