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형벌 잔혹사

신상구 | 2020.08.07 02:10 | 조회 4884

                                                                                     조선형벌 잔혹사


   19세기 말~20세기 초 한성에서 촬영된 태형 장면(왼쪽). 조선은 죄가 확정된 기결수에 대한 형 집행은 물론 조사 중인 미결수에게도 형을 가하는 고문이 적법했다. 그가운데 막대를 다리 사이에 끼워 부러뜨리는 주리 틀기는 죄수가 죽거나, 살아도 걷지 못하는 참혹한 고문이었다. 영조 때 포도청의 주리 틀기를 금했지만 주리 틀기는 다른 관청에서는 다른 형태로 조선 망국 때까지 시행됐다. 위 그림은 구한 말 화가 김준근이 그린 '주리 틀고'. /미국 라파예트 컬리지 컬렉션·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

   1904년 러일전쟁 취재를 위해 조선에 입국한 스웨덴 기자 아손 그렙스트는 통역가 윤산갈과 함께 한성 감옥을 찾았다. 해가 바뀐 1905년 정초였다. 한 죄수 처벌을 참관했는데, 미리 설명을 들은 통역가 윤씨는 "하느님, 이건 너무 잔인…" 하면서 달아나버렸다. 혼자 처벌 장면을 본 그렙스트는 "윤산갈이 너무 부러웠다"고 했다. 형 집행은 이리 되었다.

​   '집행인들이 죄수 안다리에 막대를 집어넣고 온몸 무게를 막대 끝에 얹었다. 다리뼈가 부러져 으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아픔을 표현할 소리가 없는 듯 죄수의 처절한 비명이 멎었다. 죄수 눈은 흰자위만 남았고 이마에서는 식은땀이 비 오듯 흘러내리더니 몸이 축 늘어지면서 쓰러졌다. 집행인들이 난폭하게 뼈가 부러졌나 확인해도 느끼지 못했다. 죄수가 의식을 회복해 고개를 좌우로 흔들면서 신음소리를 토하자 집행인들은 팔과 갈비뼈 사이에 막대기를 집어넣어 뼈들을 차례로 부러뜨린 다음 비단끈으로 목을 졸라 죽였다.'(아손 그렙스트, '스웨덴기자 아손, 100년 전 한국을 걷다', 책과함께, 2005, p286)

​   때는 20세기요, 장소는 대한제국 황도(皇都) 한복판에서 사형수 하나가 전신 골절상을 입고 처형된 것이다. 오른쪽 위 작은 사진이 그렙스트가 촬영한, 죄수가 주리를 틀리는 장면이다. 이제 전근대사회라면 지구상 어디든 존재했던 잔인한 형벌, 그리고 특히나 조선에서 망국 때까지 벌어졌던 무법천지 막장 형벌제도에 대하여 알아보도록 하자.

   조선이 택한 형벌은 태장도유사 5형이다. 태(笞)는 싸리 회초리, 장(杖)은 큰 가시나무 막대기로 볼기를 치는 형이다. 도(徒)는 장형과 징역을 겸하고 유(流)는 장형과 함께 원악지로 쫓는 형이다. 사(死)는 사형이다. 목을 졸라 죽이는 교형, 목을 잘라버리는 참형이 있다. 이 다섯 형은 전통적인 중국 대명률에 따른 형벌이다. 조선에서는 절도범 왼쪽 복사뼈 힘줄을 1촌 5푼 잘라내는 단근형(斷筋刑)도 세종 때 신설됐다.(1436년 10월 15일 '세종실록')

​   사형 중에는 산 사람 사지를 베어내고 마지막으로 목을 베 여섯 토막으로 만드는 능지처사형도 있었고 팔다리를 각각 수레에 묶어 찢어 죽이는 거열형(車裂刑)도 있었다. 죽일 놈은 죽일 시기가 따로 있었는데, 극악무도한 범죄자를 빼고는 추분이 지나야 형을 집행하는 대시형(待時刑)과 언제든 바로 죽이는 부대시형(不待時刑)이 있었다. 그다음, 고문 이야기다.

   조선 형법 체계는 자백에 의존했다. 재판은 피의자 자백을 받아야 끝이 났다. 그 자백에 근거해 판결문을 작성하는데, 이 판결문을 결안(結案)이라 했다. 결안이 없으면 끝이 나지 않으니, 자백을 빼내기 위해 쓰인 도구가 고문이다. 형이야 한번 받으면 그만이지만, 고문은 영혼을 파괴하는 수단이었다. 고문을 볼작시면―.

​   죄인 등을 마구 때리면 태배(笞背)요, 엄지발가락을 묶어놓고 발가락이 떨어져 나갈 때까지 온몸을 치면 난장(亂杖)이며, 여러 집행인이 붉은 몽둥이로 피의자를 에워싸고 집단 구타하면 주장당문(朱杖撞問)이다. 불로 달군 쇠붙이로 몸을 지지면 낙형(烙刑)이요, 피의자를 묶어놓고 무릎 위에 무거운 돌을 얹어 짓누르는 압슬형(壓膝刑)과 장대를 무릎 사이에 끼워 뼈를 부러뜨리는 전도주뢰형(剪刀周牢刑), 일명 주리 틀기가 있었다. 주리를 틀면 죽거나 죽지 않으면 걷지를 못해 종신토록 부모에게 제사를 올리지 못한다고 했다.(정약용, '목민심서' 형전 신형(愼刑·형벌을 신중히 할 것))

​   그 고문이 하도 끔찍한지라 압슬형과 낙형과 주장당문과 난장은 영조 때 폐지되거나 금지됐다. 영조는 "주리 틀기라는 고문이 있는 줄 몰랐다"며 주리를 금지했고(1732년 영조 8년 6월 20일 '영조실록') 이듬해에는 인두로 지지는 낙형을 금지했다.

​   그런데 어느 왕 시절, 조태언이라는 사간원 사간이 임금 의중도 모르고 딴소리를 지껄였다. 분노한 왕이 명했다. "저놈을 삶아 죽일 터이니, 창덕궁 돈화문에 가마솥을 대기시키라." 이른바 팽형(烹刑)이다. 법에도 없는 형을 가하겠다는 왕을 대신들이 극구 말린 덕에 조태언은 목숨을 부지하고 흑산도로 유배를 떠났다.

​   사간을 삶으려고 했던 그 왕이 5년 전 주리 틀기를 몰랐다고 주장한 그 영조다.(1737년 8월 13일 '영조실록') 이제 영조와 그때 여당이었던 노론이 벌인 무법천지 행형사를 읽어본다.

​   영조가 즉위하고 4년 만에 충청도 사람 이인좌가 난을 일으켰다. 소론 강경파와 남인이 선왕 경종이 암살당했고, 영조에게는 정통성이 없다고 주장하며 일으킨 무장 쿠데타다. 1728년 무신년 3월 15일 이인좌는 소현세자 후손인 밀풍군 이탄을 왕으로 추대하고 군사를 일으켜 충청도 청주성을 함락했다. '무신란(戊申亂)'이라고 한다. 열흘도 안 돼 난은 진압되고, 그 주모자에 대한 수사가 시작됐다.

​   국문 과정에 영조가 직접 개입했다. 3월 25일 '역적 이사성에게 낙형(烙刑)으로 위세를 보이니' 이사성이 공초(자백)하였다. 이틀 뒤 이순관을 문초하며 낙형을 베푸니 이순관이 공초하였다. 4월 5일 박필몽이 자백을 거부하자 낙형을 행하라 명하였다. 역시 입을 열지 않으니 의금부에서 압슬형을 청하자 허락하지 않고 다음 날 처형했다. 이듬해 7월 좌우 정승이 낙형이 불법이라고 건의했다. 영조는 "요망하고 악독한 자에게 아낄 형벌이 아니다"라고 버티다가 마뜩잖게 받아들였다.(1729년 7월 16일 '영조실록')

​   또 1년이 지난 1730년 또 다른 역모 사건이 터졌다. 이 또한 영조가 친국을 했다. 3월 12일 이하방이라는 피의자를 친국했는데, '낙형을 가하자 범죄 사실을 사실대로 털어놓았다.' 또 4월 17일 최필웅이라는 연루자는 낙형으로 고문을 당한 뒤 사형당했다. 그때 영조가 이리 말했다.

​   "이런 놈은 결안하여 정법할 것이 없으니 부대시능지처참(不待時凌遲處斬)하라." 현대어로 번역하면 이런 뜻이다. "판결을 선고받고 법에 따라 처형할 필요가 없으니 당장 여섯 토막으로 잘라 죽여라."

​   3년이 지난 1733년 남원에서 영조를 비방하는 대자보가 발견됐다. 영조가 연루자들을 또 친국했다. 그해 8월 7일 창덕궁 인정문 앞에 끌려나온 김원팔 자백이 미진했다. 영조는 낙형을 열두 번 가하라고 명했다. 김원팔은 연루자 이름을 줄줄 댔으나 자기는 주모자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김원팔은 결국 다른 혐의로 처형됐다.

​   그리고 보름 뒤 뜸을 맞다 말고 영조가 "낙형을 금하라"고 명한 것이니, 몸을 인두로 지져 자백을 받아낼 역모 혐의자가 다 처형되고 난 다음이었다. 그날 영조는 뜸 100방을 맞다가 “뜸뜬 종기가 점차 견디기 어려움을 알게 되었다”며 고통스럽기 짝이 없는 낙형을 금하라고 한 것이다.(1733년 8월 22일 ‘영조실록’)

   이인좌의 난에서 남원 대자보까지, 강경 소론과 남인들이 떼로 처형되고 정치권에서 사라졌다.

   1755년 영조 31년 2월 나주에서 영조를 비방하는 대자보가 발견됐다. 이 사건을 처리한 뒤 5월에 실시된 토역(討逆) 기념 과거 시험에서 또 역모를 상징하는 답안지가 발견됐다. 이들은 모두 포도청과 추국청에서 조사와 함께 심한 고문을 받았다. 추국청 조사 과정에는 영조가 직접 친국했다. 두 사건 연루자들은 대부분 소론과 남인들이었다.

   일제강점기 혹은 통감부 시대 촬영된 태형 장면(왼쪽 사진). 마루 위에 일본인으로 추정되는 사람들이 보인다. 오른쪽은 스웨덴 기자 그렙스트가 촬영한 1905년 한성 주리 틀기 장면. /미국라파예트컬리지컬렉션 호머헐버트, 'History of Korea' vol 2

   나주 대자보 사건 연루자 69명은 포도청에서 많게는 100대 이상 장형(杖刑)을 당했다. 영조가 금한 주리를 두 번씩 틀린 사람도 있었다. 추국청으로 넘어간 뒤에는 일곱 차례에 걸쳐 140대 장형을 당한 사람도 있었다. 이 가운데 9명은 물고(物故)됐다. 고문 도중 죽었다는 뜻이다.

​   과거 시험 역모 사건 연루자는 모두 86명이었는데 이들은 곧바로 추국청에서 심문을 받았다. 열한 번에 걸쳐 330대까지 장을 맞은 이도 있었다. 장형을 받던 도중 고문사한 사람이 속출했다.(이상 조윤선, '영조대 남형, 혹형 폐지 과정의 실태와 흠휼책에 대한 평가', 조선시대사학보 48집, 2009)

​   그런데 문제는 이 두 역모사건 수사 과정에 국왕과 수사관의 탈법과 무법이 판을 쳤다는 사실이다. 실록을 뒤져본다.

​   '망측하고 부도한 말을 한 죄인 이전을 우선 남문 밖에서 사지를 찢어 효시하라.'(5월 16일) '역승(逆僧) 김창규가 '어서 빨리 죽이시오' 하니 임금이 효시하도록 명했다.'(5월 20일) '죄인 이세현은 역적 무리의 사냥개다. 다른 역적과 함께 결안을 기다리지 말고 속히 사형시켜라.'(5월 21일)

​   역모 답안지 작성자인 심정연이 답안 작성을 윤혜와 공모했다 하여 윤혜가 조사를 받았다. 혀를 깨물고 자백을 거부하는 윤혜를 영조는 주장당문(朱杖撞問)으로 고문했다. "급하게 조사하지 마시라"고 신하가 만류하자 영조는 갑옷을 입고서 윤혜를 숭례문으로 끌고 갔다. 군악대에 취악을 울리라 명한 뒤 또 고문을 하자 윤혜가 자백했다. 영조는 참수를 명하고 대신들에게 일일이 구경하라며 그 목을 돌렸다. "왜 하급 관리가 할 일을" 하고 판부사 이종성이 만류하자 영조는 이종성을 충주로 유배형을 내렸다. 잘린 목 운반이 늦은 훈련대장은 곤장을 쳤다. 목은 깃대에 걸라 명했다. 그때 임금은 크게 노한데다가 또 아주 취해 있었다(上旣盛怒 且頗醉·상기성노 차파취).(1755년 5월 6일 '영조실록')

​   판결은 없었다. 법 적용 또한 없었다. 왕명이 법이었다. 노론 관료들은 이를 말리지 않고 오히려 "여러 역적은 물론 그 처자들도 연좌해서 처벌하라"고 왕에게 권했고, 왕은 이를 윤허하였다.(1755년 3월 7일 '영조실록') 27년 전 무신란 때 살려뒀던 밀풍군 이탄의 가족 또한 이참에 죽이라고 청했다. 영조는, "애써 윤허한다"고 답했다.(6월 4일)

​   결국 소론 강경파와 남인은 물론 주요 왕족도 살아남지 못했다. 그 과정에서 노론 대간들은 연좌제까지 들먹이며 영조의 행동을 방조했다. 영조와 노론은 정적들을 완전히 정리한 것이다.(조윤선, 앞 논문)

​   그리고 4년이 지났다. 탕평정치를 외쳤던 영조 주변은 노론으로 가득 채워졌다. 집권 내내 불안했던 권력은 이제 안정됐다. 1759년 8월 19일, 집권 35년째를 맞은 영조는 "결안(판결) 없이 처형하거나 목을 내거는 일, 왕명만으로 처형하는 일을 금한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내가 여러 흉적들을 처형함에 있어 결안을 받지 않음이 없었고, 결안을 받은 것 역시 일찍이 명백하지 않은 것이 없었노라."(1759년 8월 19일 '영조실록') 그리고 1770년 6월 18일 난장과 주장당문을 공식 금지했다. 그때 영조 나이 76세였고 권좌에 있은 지 45년째였으며, 모든 정적이 사라진 다음이었다.

​                                                                                          <참고문헌>

     1. 박종인, "조선 형벌 잔혹사 "판결 따위 필요 없다, 그냥 죽여라", 조선일보, 2020.8.5일자. A2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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