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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세기 문화코드 (7) 국자랑國子郞

2016.07.28 | 조회 9005 | 공감 3




7. 국자랑國子郞


국자랑은 신교를 배우고 실천하기 위해 뽑은 젊은이들로서 조선 신교의 낭가정신에서 시작된 것이다. 


최초의 낭도郎徒는 환웅천왕이 거느리고 온 3000의 문명개척단[濟世核郞]이었다. 삼성조 시대에는 나라를 이끌어가는 지도자와 관료, 제사장, 장교가 모두 낭가에서 나왔으며 삼신상제와 환웅께 제사를 올리는 것을 주관하고 신교의 가르침을 받들며 문무文武에 정진하였다.


단군조선 초부터 소도蘇塗 옆에 경당扃堂을 세우고 미혼의 남녀 젊은이들에게 글읽기, 활쏘기, 말타기, 예절, 음악, 격투기, 검술 등을 가르쳤다. 11세 도해 단군 때는 삼한 전역에 제도화되었는데 낭가정신의 유풍이 크게 성盛하게 되었다. 


11세 도해 단군 때 기록을 보면, ‘명산의 가장 뛰어난 곳을 찾아 국선國仙의 소도를 설치케 하셨다’고 했다. 또 13세 흘달 단군 20년(BCE 1763)에 “미혼 자제로 하여금 글 읽고 활 쏘는 것을 익히게 하여 국자랑이라 부르게 하였다. 국자랑들은 돌아다닐 때 머리에 천지화를 꽂았으므로 사람들이 천지화랑이라고도 불렀다”라고 하였다. 


"구당서"〈동이전 고구려조〉에는 사학인 경당을 이렇게 적었다. 


고구려의 습속은 나무 심부름하는 미천한 집안에 이르기까지 서적을 좋아하여, 거리마다 경당이라 부르는 큰집을 지어놓고 미혼자제들로 하여금 이곳에서 독서와 활쏘기를 밤낮으로 익히게 하고 있다.[俗愛書籍, 至於衡門廝養之家, 各於街衢造大屋, 謂之扃堂, 子弟未婚之前, 晝夜於此讀書習射.]


경당은 문무를 겸비한 인재를 양성하는 곳이다.


이와 같은 한민족 고유의 신교 낭가郎家제도의 기원은 환국시대로부터 비롯하여→배달국의 ‘제세핵랑濟世核郞’→단군고조선의 ‘국자랑國子郞’→북부여의 ‘천왕랑天王郞’→고구려의 ‘조의선인皂衣仙人’, 백제의 ‘무절武節’(정명악 주장), 신라의 ‘화랑花郞’→고려의 ‘재가화상在家和尙’(서긍의 '고려도경') 또는 ‘선랑仙郞’, ‘국선國仙’으로 계승되어 왔으며, 윤관의 9성 정벌 때는 ‘항마군降魔軍’으로 이어져 내려왔다.


낭도들은 수려한 산천을 찾아 단체 생활을 하면서 단결력과 무사정신을 길렀으며, 정서와 도덕을 함양하였다. 또한 무술, 기마술, 궁술 등을 익혀 용맹한 전사로서 국가에 충성하였다. 조의선인이나 화랑은 신교라는 종교정신으로 무장한 군대였던 것이다. 그리고 소도는 그들의 모임처였고, 그들은 소도무사였다. BCE 239년에 북부여北夫餘를 건국한 국자랑 출신 해모수解慕漱가 천왕랑天王郞이라는 새로운 낭가를 편성하였다. 신라의 삼국통일 이후에는 화랑제도로 통합되었다. 그 뒤로 명맥이 쇠잔하였으나 그 정신만은 한민족의 역사의식 속에 깊이 잠재되어 ‘조선 시대 선비의 저항정신’, ‘구한말의 항일 구국운동’과 ‘3·1운동’ 등으로 민족의 위기 때마다 유감없이 표출되었다.


이러한 낭가사상이 일본에 전파되어 일본의 무사도武士道를 만들었다. 일본의 무사도는 중세에 와서 발생하였다. 이때부터 그들 이름에 랑郞자를 붙이는 경우가 나타났다. 낭은 화랑도에서 따온 글자이다. 즉 화랑은 죽지랑, 처용랑, 미이랑, 장춘랑 등과 같이 이름에 랑자를 붙여 쓴 것이다. 또한 일본인은 의인, 열사, 협객 등의 설화로써 무사도 정신을 고취하는 것을 낭화절浪花節(나니와부시)이라 한다. 낭화는 화랑을 거꾸로 쓴 것이다. 무사도는 바로 조선 신교의 낭가정신에서 시작된 것이다. 일본 근대화의 문을 연 메이지 유신도 무사도 정신이 그 원동력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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