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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역사 보천교 2부

2018.08.31 | 조회 4787 | 공감 0

이 글은 상생방송 책으로 만나는 가을개벽 문화 -잃어버린 역사 보천교 2부편을 편집하였습니다.

 

 

 

<진행자>지난 시간에는 보천교가 무엇인지와 보천교의 규모에 대해 알아보았는데요. 교수님 말씀에서 일제강점기 대한의 백성들에게 끼친 보천교의 영향이 실로 막대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Q. 이런 보천교를 연 '월곡 차경석'은 어떤 분인가요?

 

<김철수 교수> 제가 볼 때는 우리 근대사에서 가장 왜곡된 인물이 아닌가 싶습니다. 당시 신문들을 찾아보면 아마 좋은 이야기를 하는 곳은 한 군대도 없는걸로 알고 있습니다. 식민권력의 보고서에도 뭐라고 하냐면 속이 좁고 담력이 없다 이렇게 해서 비난을 합니다.

 

그러면 가만히 생각해보면 600만 민중은 어떻게 됩니까. 그런 분을 따른 아주 우매한 민중으로 전락하게 되죠. 그게 바로 일제가 노렸던 정책입니다. 그러나 당시 차월곡을 만났던 사람들의 기록도 있는데요. 그런 기록들을 보면 월곡 선생은 풍채도 있고 배포가 아주 컸고요. 능히 한 조직을 담당할 기량을 갖고 있었다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다른 기록들도 보면, 예를 들어 60방주를 선정할 당시에도 차월곡 선생을 추대하자는 이런걸 볼 때나 차월곡 선생이 그 때 보여줬던 여러가지 면을 보면 겸양지덕까지 다 갖춘 그런 인물로도 볼 수 있습니다.

 

 

차월곡 선생의 부친 차치구가 정읍에서 동학수령을 했던 분이고 분살형을 당했던 그런 분이라는 것도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 면으로 봤을 때는 상당히 잘못된 시선이고 오해가 많은 인물로 볼 수 있습니다.

차치구(車致九, 1851~1894) - 차경석의 부친, 동학혁명군의 정읍지역 지도자

 

 

<진행자> 증산 상제님께서도 "경석은 대재(大才)요 만인지장(萬人之長)이 될 만하다." [도전 3편 291장]

인물 됨을 평가 하셨던 것이 기억 나는데요. 보천교가 이렇게 대규모 조직을 완성하고 또 원활히 운영할 수 있었던데는 특별한 조직 체계가 있었다고 하던데요.

 

Q. 보천교의 조직체계는?

 

<김철수 교수> 보천교가 가졌던 조직에 대해서는 많이 알려져있지 않습니다. 저도 최근에 보천교 조직에 대해 다시 새롭게 보고 있는데요. 우리가 흔히 보천교 조직을 이야기 할 때 몇가지 기본 개념이 있습니다. 우선 비밀포교라는 이야기.

 

이 비밀포교에 대한 말도 우리가 새롭게 생각을 해주셔야 되는게 있습니다. 왜냐하면 민족종교의 포교라는 것은 교단을 형성하고 거기에 들어오는 사람, 이렇게 하지 않습니다. 동학에서도 그랬고. 연원제(淵源制), 연비제(聯臂制) 이렇게 하지만, 그런 것들에 대한 하나의 식민권력의 의도적인 개념이 비밀포교라고 볼 수 있고요.

 

 

 

1916년에는 24방주제를 채택 했고 그러다 1919년에 보천교 60방주제를 만들어냅니다. 우선 수화금목(水火金木)해서 4정방위가 있고요. 그 밑에다가 육임, 십이임, 팔임, 십오임, 그렇게 쭉 구성이 됩니다. 그러한 60방주제까지는 많은 사람이 알고 있어요.

 

그런데 여방주 제도가 있었다는 것은 사실 잘 이야기 하진 않습니다. 이야기는 조금 해도 글로서는 많이 나오진 않습니다. 그 여방주 제도가 있었다는 것도 우리가 기억을 해둘 필요가 있고요. 역시 이 것도 60방주제와 같은 흐름이라고 보시면 될거 같습니다.

 

이와 더불어 교무기관이 있습니다. 기무교관은 중앙본소에 총정원, 총령원이 있고요. 지방에는 각 도에는 진정원이 있습니다. 진정원까지는 보통 알고 있는 내용이고요. 그리고 각 군에는 정교부가 있고. 우리가 알고있는 단재 신채호 선생의 부인 박자혜 여사가 정교부의 선포사라는 지위를 갖고 있죠.

 

 

이러한 조직도 중요하지만 제가 요즘 관심을 갖고 있는게 교의회(敎議會)입니다. 보천교는 독특한 의결기관을 갖고 있었다는 겁니다.  교의회 조직은 강선회(綱宣會)와 보평회(普評會)로 구성되는데, 요즘 비추어 생각한다면 양원제를 생각하시면 됩니다. 우리나라는 채택하지 않고 있습니다만 상원과 하원 이렇게 보시면 됩니다. 그만큼 상당히 민주적인 조직구조를 갖고 있어다고 볼 수 있습니다.


보평회 같은 경우는 전국각지에서 대표되는 136명이 모여 들어 보천교의 중요한 일들을 결정 하게끔 되있다는 겁니다. 보천교 조직에 대해선 상당히 흥미로운 내용들이 많이 담겨있습니다.

 

<진행자> 보천교의 60방주 제도는 보천교의 실제적인 뿌리인 태모 고수부님의 도체조직 공사가 근원이 됐다는 것이 확실히 느껴집니다. 그리고 여방주 제도는

"사람을 쓸 때에는 남녀 구별 없이 쓰리라. 앞 세상에는 남녀가 모두 대장부(大丈夫)요, 대장부(大丈婦)이니라." [도전 2편 53장] 하신 상제님 말씀처럼 여성의 인권을 중요시 여긴 것이 느껴집니다.

 

이런 조직력을 바탕으로 보천교에서는 참 많은 일들을 했잖아요.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이

 

Q.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보천교의 독립자금을 지원한 일인데요. 여기에 대해 말씀해 주세요.

 

<김철수 교수> 그렇죠. 독립운동, 특히 임시 정부와 관련된 일들이 많았죠. 그래서 김구 주석이 정읍에 와서 "상해 임정은 정읍에 많은 빚을 졌다"

 

 

 

이렇게 이야기 했다는 그런 증언도 나옵니다. 이거는 김홍규라고 보천규의 목(木)방주면서 자금을 총괄하고 있던 분이 있는데요. 그 아드님이 탄허스님이고, 탄허스님의 사위대는 분이 이런 증언을 해준겁니다.

김홍규(金洪奎, 1876~?) - 탄허스님의 부친, 보천교의 북도 재무로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한 독립운동가

 

아시다시피 당시 독립운동에 지원을 하고 있다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인적자원을 제공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물적자원입니다. 보천교는 특히 물적지원이 많았는데요. 예를 들어 1921년만 보더라도 김홍규가 30만원을 모금해 가지고 10만원을 독립운동 자금으로 지원했다는 사실. 이건 신문에도 많이 나와있는 이야기고요. 그 외에도 사실 숨겨진 내용들이 더 많습니다.

 

 

인적자원 제공 같은 경우도 있죠. 1923년 초가 되면 임시정부가 상당히 어떤 기로에 선다고 볼 수 있는데요. 상해에서 전 세계에 걸쳐 펼쳐져 있는 한민족 대표들을 다 불러모아 회의를 하게 됩니다.

 

우리가 흔히 한민족국민대표 회의라고 하는데, 여기에 보천교에서 세 사람이 참가를 했다는 것. 이 참가라는건 내가 하겠다고 해서 되는게 아니고 그쪽에서 다 대표자를 불러모은 겁니다.

 

보천교 대표에서 배홍길, 김종철, 그다음 보천교청년단 대표로 강일이 참여를 합니다. 이 세 사람이 참여했다는 것은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당시에 조선에 있던 종교단체에서 세 사람이 참여한 경우는 천도교와 보천교입니다. 그런 것에 비추어보면 보천교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게되고요.

 

여기에 참석했던 강일과 배홍길, 물론 이건 본명이 아닙니다. 이 두 사람은 나중에 끝나고 난 다음 곧바로 김원봉으로 부터 의뢰를 받아 의열단(義烈團)에 가입을 합니다. 의열단은 아마 다 아실거에요. 몇 년 전에 밀정이라는 영화에도 나오는데요. 무장독립운동단체입니다. 이 의열단에 가입해서 활동을 아주 활발하게 한 그런 사례들도 보입니다.

 

 


Q.당시 상해임시정부와 대한독립단에도 대한독립자금을 지원했다고 하던데요.

 

<김철수 교수> 예, 맞습니다. 아마 최근에 보천교의 독립운동을 다룰 때 가장 주가 되는 내용이라고 볼 수 있는데요. 보천교와 김좌진 장군과의 관계를 보면 보통관계가 아니라고 봅니다.

 

1923년에 천안사람으로 유정근이라는 사람이 체포됩니다. 본명이 유민식인데 김좌진 장군의 참모이자 밀사로 활동을 합니다. 그 유정근이 조선으로 밀서를 가지고 들어옵니다. 각계각층에 몇몇 사람들에게 보내는 밀서를 가지고 들어오는데 그 중 하나가 월곡 차경석 선생에게 보내는 거였죠.

 

내용을 보면 만주로 초치하려는 계획이라 합니다. 뭐냐면 보천교의 차경석 선생을 만주로 모시고 가려 했던 겁니다. 그래서 독립운동을 같이 하자라고 합니다. 인적자원과 많은 자금을 같이 독립운동에 쓰자라는 그런걸 하려다가 체포가 됩니다. 

 

 

 

그런 뒤에 또 나타나는게 뭐냐면 1924년에 김좌진 장군에 대해서 보천교에서 5만원을 지원했다는 그런 기록이 발견되고 있죠. 이것도 여러분들이 가만히 생각해보면 김좌진 장군이 1920년대에 청산리 전투에서 승리를 하지 않습니까. 승리를 하고 난뒤 일제의 탄압으로 상당히 어려운 지경에 처하는데요.

 

그러다가 이걸 회복하는 계기를 만들었던게 바로 보천교의 지원이었습니다. 흔히 2만원을 지원했다는 기록도 있고 5만원을 지원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이게 같은건지 다른건지는 조금더 연구를 해봐야겠지만 그만큼 많은 지원을 했다는 겁니다. 참고로 5만원이라는 돈은 요즘으로 말하면 20억 정도로 잡으면 적당할 것 같습니다.

 

 

 

<진행자> 엄청나네요. 광복후 귀국한 김구 주석이 정읍 보천교에 많은 빚을 졌다고 발언한데서 알 수 있듯이 독립운동에 피와 같은 자금지원에 보천교가 큰 공헌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네요.

 

Q.이외에도 물산장려 운동을 주도했다고 하던데요


<김철수 교수> 예, 그런 이야기와 기록들도 있습니다. 물산장려 운동에 참여를 했고 함께 했다는 기록들입니다.
물산장려운동 - 1920년대에 일제의 경제수탈정책에 항거에 벌였던 범국민적 민족경제 자립실천운동

 

특히 진주 진정원 같은데서는 물산장려운동과 직접적으로 관련을 맺었다는 그런 기록들이 있습니다. 이와 관련되어 조금 말씀드려야 될게 뭐냐면, 조만식 사건이라는게 있는데요. 1925년 11월에 발생했는데. 당시 신문에서는 일명 권총단 사건이라고 하고요. 공식적인 자료명칭은 우리가 정의부 및 보천교의 군자금 모집사건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정의부 사건이라고 우리가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나타나는 사람이 조만식입니다. 흔히 고당 조만식 선생하고 혼동하는 경우가 많이 있는데요. 그러나 여기 조만식은 보천교도로 경성 보성법률 전문학교를 졸업했고 당시 식민권력의 기록을 보면 독립운동에 열렬히 참여를 했고, 항상 독립운동을 획책한 자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조만식과 또 한분이 앞에서 언급한 단재 신채호 선생의 부인 박자혜 여사입니다. 이 조만식 선생과 박자혜 여사가 어떻게 본다면 만주의 정의부와 보천교를 연결시키는 매개 역할을 했다라고 볼 수 있습니다. 나중에는 정의부와 협정을 맺습니다.

 

협정 내용을 보면 보천교는 재외독립운동을 후원한다. 두 번째는 보천교 신도들을 만주에 일부 옴겨 그 쪽에서 생산기지를 마련한다. 그래서 만주 개척 후에는 그 이익금을 독립단에 제공 한다. 그리고 보천교는 그걸 하기 위한 군자금 모집에도 적극적으로 협조한다.

 

 

그렇게 군자금 모집에 협조한다는 이런 것들 때문에 정의부로 부터 권총을 받고 내려와 활동을 하며 정읍에 갔다가 여기서 체포된 사건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보통 말하는 조만식 사건이고요.

 

보천교의 만주이주계획에 대해서도 이후에 끊임없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책에도 자세히 나와있습니다만 특히 1925년 그 기록을 보면 당시 만주에서 10만 향지를 70만원에 구입을 했다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10만 향지 아마 이게 잘 판단이 안되실 건데요. 향이라는건 그쪽의 독특한, 우리로 말하면 평과 같은 단위인데 이정도가 되면 2천만평이 됩니다.

 

짐작이 어려울 수 있지만 지금 아마 세종시 전체 면적이 한 2천2백만평으로 생각하시면, 그만한 땅, 토지를 계약을 하고 그쪽에다 보천교도들을 옮겨서 활동하고 생산기지를 마련하려고 하는 계획이 있었다. 물론 성공하지는 못했습니다만 그런 것도 한번 참조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진행자> 지금 보천교의 중심지였던 전북 정읍 대흥리에 가보면 농촌지역임에도 공장들이 많이 있는것을 볼 수 있던데 얘기를 들어보니 보천교 당시 지어진 공장들이 지금도 그 명맥을 잇고 있다고 하더라구요.

 

Q. 옛 공장들이 아직 명맥을 이어가는 것도 물산장려운동의 일환인가요?

 

<김철수 교수> 예, 물산장려 운동의 일환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하나의 자급자족이라던가 여러가지 측면을 띄고 있다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전읍 대흥리에는 보천교 입장에서 보면 자급자족의 경제 기반을 다 갖추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방직공장도 갖고 있었고, 당시 벽돌 공장이라는 건축과 관련된 시설과, 심지어 매점 같은 경우도 전부다 가지고 있던게 바로 그러한 형태들입니다.

 

특기할 것은 대흥리에 기산조합이라는 것도 있는데요.
기산조합己産組合 - 노동자들의 결속과 권익을 보호하기 위한 노동조합

 

이 기산조합도 우리의 관심 대상이 됩니다. 일본 상품을 배격하고 보천교 신도들이 우리 것을 공동구매하고 어떤 약속을 해 나가는 그런 모습도 보입니다. 그리고 이런 기선조합 같은 경우는 제가 볼 때 한국최초의 하나의 직종별, 지역별 노동조합으로 자리매김 할 수도 있다고 봅니다.

 


<진행자> 네, 지금까지 잃어버린 보천교에 대해 말씀 나눠봤는데요. 일제 강점기 민족종교의 역할에 대해, 그 중에서도 가장 큰 역할을 했음에도 철저히 망각된 보천교에 대해 새롭게 인식할 수 있는 기회가 됐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일제의 보천교 탄압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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