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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역사 보천교 3부

2018.09.06 | 조회 5358 | 공감 0

 

<진행자> 일제강점기 무려 600만 명이 신앙하며 가장 많은 독립자금을 제공했던 보천교. 그러나 집요하게 전개된 일제의 민족종교 탄압과 민족정신 말살정책으로부터 보천교도 자유로울 수는 없었는데요.

 

오늘 이시간엔 『잃어버린 역사 보천교』를 통해 보천교가 겪었던 시련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지난 시간에는 보천교가 무엇인지, 또 일제 강점기 보천교의 규모와 역할 등에 대해 알아 봤는데요. 독립 자금을 가장 많이 지원하고 후천개벽과 지상선경 도래를 통해 민중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불어 넣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일제가 이런 보천교의 활동에 가만히 있었을리 만무하죠.

 

Q. 일제는 민종종교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했나요?

<김철수 교수>  네, 그렇습니다. 일제는 민족종교를 말살 시키기 위해 온갖 책략을 다 동원합니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선 일본의 메이지유신 시대 종교정책까지 같이 이해 해주시면 나중에 상당히 도움이 될 겁니다.

*메이지유신 明治維新(명치유신) - 1868년 일본의 막번체제를 무너뜨리고 왕정복고를 이룩한 사건

 

 

뭐냐면 1868년에 메이지유신을 경험하고 난 다음, 일본정부는 국민들을 통합하기 위해 어떻게 해야 될 것인가를 종교에서 찾습니다. 그게 우리가 흔히 말하는 신도 국교화 정책인데요.

*신도神道 국교화 정책 - 신도를 국가종교로 만들어 천황중심 사회를 만들려는 정책

 

그러한 경험이 어떻게 본다면 일제강점기에도 민족종교 탄압에 그대로 이용되지 않았나 이렇게 생각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일제는 강점을 하고 난 직후 사회단체들을 전부다 해산시킵니다.

 

종교들에 대해서도 이 태도를 취하죠. 1911년이 되면 사찰령이라 해서 불교를 통제하기 위한 것, 경학원 규칙이라 해서 유교를 통제하기 위한 것, 사립학교 규칙은 기독교를 통제하기 위한 것입니다. 사립학교의 경우 당시 기독교에서 설립한 학교들이 많았기 때문에 사립학교 규칙을 통해서 통제를 하게 됩니다.

 

조금 지나 1915년이 되면 <포교규칙>이라는 것을 공포합니다. 원래 포교 규칙이라는 것은 꼭 민족종교를 통제한다라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뭐냐면, 종교 포교에 대한 규칙을 마련한 것인데 그 안에 들어가보면 실질적으로 '민족종교를 어떻게 단속할 것이냐' 하는 그런 방안이 마련 됐다는 겁니다. 그게 우리가 흔히 말하고 있는 바로 그 유사종교정책이죠.

 

 

여기서 종교라는 것은 신도, 불교, 기독교만을 종교라 한다. 그 이외에는 전부 종교 유사 단체로 몰겠다. 이렇게 하는겁니다. 종교 유사단체로 몰게 되면 어떻게 되냐면 탄압을 하더라도 종교탄압도 아니고요, 말살 시켜도 괜찮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제 민족종교들은 전부다 그쪽으로 몰아버립니다. 흔히 말하는 분리 단속을 하는겁니다. 이러한 유사 종교라는 개념은 실질적으로 일본에서도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조선에서 먼저 말하고 일본으로 건너간 형태가 되죠.

 

그렇게 단속의 경우 종교는 신도,불교,기독교는 항무국(요즘 말하면 교육부)에서 맡고, 유사종교로 몰은 민족종교는 경무국(요즘 말하면 경찰청)에서 담당 하게 됩니다.

 


<진행자> 일제는 자신들의 고유 종교인 신도를 신앙 할 것을 강제하고 신사참배까지 시켰기 때문에 당연히 민족종교에는 부정적일 수밖에 없었을 텐데요.

 

Q. 일제의 '신도'는 무엇인가요?

<김철수 교수> 앞에서도 잠깐 이야기 했습니다만 메이지정부를 경험하고 신도를 국교로 해서 국민을 통합하고 일본 국민들을 전부다 하나로 묶자 하는 정책이 나타납니다. 그런데 당연히 일본 쪽에서도 신도 국교화에 대해서는 다른 종교들의 반발이 심했죠. 그래서 일본이 마련한게 뭐냐면 신사는 종교가 아니다.

 

 

신사 비종교론을 1871년에 태정관 포고로 마련합니다. 그러니까 당신들은 관여하지 마시오. 이건 종사다. 우리 조상을 모시는 그런 하나의 의례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니까 이걸 갖고 다 하겠다. 이렇게 만들어 냅니다.

 

그 조상이란건 뭐냐면 그 꼭대기는 당연히 일본의 왕이 자리합니다. 흔히 말하는 황민화 정책으로 나가는 거죠.

 

이렇게 일본 내에서 성공을 시켰고 그 다음 침략을 통해서 주변 여러 나라를 식민지화 시키면서 여기에도 같이 적용을 시키는겁니다. 사할린, 오키나와, 대만 등 다합니다.

 

여러가지 정책을 펴는 과정에서 바로 이러한 종교정책, 신사정책을 만들어 나가기 시작하는 겁니다. 여기서 제가 앞시간 이야기 했던 남산의 조선신궁을 만들어 냅니다. 그 조선신궁에서는 누구를 모십니까. 당연히 일본의 최고신이라는 천조대신 아마테라스 오오카미를 모시게 되는거죠.

조선신궁朝鮮神宮 - 일제가 한국 식민지배의 상징으로 서울의 남산 중턱에 세운 신사

 

 

1920년대 들어서면서 조선신궁에 <단군 합사론>이라는게 나오는데요. 단군성조를 거기다 모시자는 운동이 벌어집니다. 이게 좋은 의미가 아니고, 천조대신 밑에다가 위치를 시키겠다는 겁니다.

단군 합사론合祀論 - 일제가 조선신사에 단군과 조선 태조를 일본신화의 개국신과 합사시켜 제사하려던 계획


같이 모시자는게 아니고 일렬로 딱 세워가지고 위아래를 만들어 내겠다는 겁니다. 그게 나중에 결국에는 식민사학과도 그대로 연결이 되는겁니다. 1925년에 남산에 조선신궁이 세워지고 그 때부터는 일본이 본격적으로 신사에 대한 경배라던가 참배 그런 운동을 시작합니다. 우리가 흔히 황국신민화 정책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황국신민화皇國臣民化 정책 - 한민족의 정체성을 말살하여 일본민족에 통합하려는 민족말살정책

 

 

<진행자> 일제는 국가 신도를 구심점으로 민중을 조직화하고 내선일체를 확립하는 수단으로 삼은 것이네요.

내선일체內鮮一體 - 일본과 조선은 한 몸이라는 뜻으로,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이 조선인의 정신을 말살하고 조선을 착취하기 위하여 만들어 낸 구호.

 

이뿐만 아니라 민종종교를 탄압하기 위해서 종교를 분리하는 정책을 시행했다 말씀하셨는데요.

 

Q. 일제가 수립한 '종교분리정책'이란 무엇인가요?

 <김철수 교수> 우리쪽에서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게 종교와 유사 종교 분리란 말입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종교라는 말이 우리 역사 속에서 언제 쓰였는가. 도대체 왜 우리는 그 종교라는 개념에 개입을 해야 되는가 그런 문제가 생깁니다. 그것은 이 종교라는 말이 근대성, 근대적인 것이라는 사고방식을 갖고 있기 때문이죠.

 

 

왜냐하면 우리 나라에 종교라는 말이 쓰인것은 1882년 그 경에 쓰입니다. 그러니까 아주 근대적인 개념입니다. 당시가 1910년대라고 하면 1880년 대는 아주 지근거리에 있는 그런 시대란 말입니다.

 

그 종교라는 개념이 우리가 만든 것도 아니고 일본에서 만들어진 개념입니다. Religion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만든 것인데 이건 기독교라는 개념을 종교라는 개념하고 연결시킨 말입니다.

종교宗敎 - 본래 불교 용어로 일본에서 영어 Religion을 '종교'로 번역

 

그래놓고 포교규칙을 통해 종교와 유사종교를 분리시켰습니다. 종교는 신도,불교,기독교 / 유사종교는 민족종교 다 구분시켜 버립니다. 여기서 논리는 뭐냐면 종교는 근대적인 근대성을 갖고 있고요. 유사종교는 전근대성을 가진 것으로 이야기 됩니다.

 

그래서 유사종교는 결국 미신, 사교화 정책으로 삿된 종교라는거죠. 삿된 가르침 

 

그러다보니 이거는 우리 사회를 위해서 '없어져야 될 거' 해서 당시 모든 언론과 민중들까지도 '아 유사종교는 좋지 않은 것이다' 이런 인식을 갖게끔 만드는 거죠. 그렇게해서 아까도 말씀드렸습니만 종교는 괜찮지만, 유사종교는 종교가 아니기 때문에 탄압을 해도 종교탄압에 해당이 되지 않고요. 이런 내용이 되버린거죠.

 

그런데 이걸 가만히 생각해보십시오. 마지막으로 고민해 볼 의문을 던지는데요. 그러면 왜 신도,불교,기독교는 종교일까. 거기서도 신도는 왜 종교죠? 라는 겁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바로 그 부분을 여러분들이 곰곰히 생각해 본다면 유사종교 정책, 포교정책, 종교정책의 그 의도를 알 수 있습니다.

 

 

<진행자> 유사종교라는 말은 지금도 우리나라에서 사용하고 있는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민족종교를 말살하기 위해 일제가 만들어낸 말인만큼 결코 사용해서는 안되겠습니다.

 

이런 통제와 탄압에도 불구하고 1919년 3.1만세운동이 천도교와 대종교를 비롯한 민종종교들의 대거 참여로 이루어지는데요.

 

 

Q. 3·1만세운동 이후 일제의 종교정책은 어떻게 바뀌었나요?

<김철수 교수> 3.1운동을 기점으로 해서 일본의 종교정책도 바뀌게 됩니다. 포교규칙도 변경이 되는데요. 그러나 다 아시다시피 유화정책이라고 해서 진짜로 뭔가 도움을 준게 아니고 당근과 채찍을 동시에 사용하겠다는 그런 의도가 뚜렷하게 나타납니다.

 

그래서 각종 종교 단체를 중앙집권화 시키게 되죠. 최고지도자에다가 친일파를 앉히고 일본이 고문을 붙여서 모든 종교단체를 어용화 시키려는 그런 책략들을 씁니다.

 

 

나중에 곰곰히 생각해 본다면 실질적으로 3.1운동 이후에 종교정책은 더욱더 교묘하게 민족종교에 대한 탄압이 이루어졌다고 보는게 맞습니다. 유사종교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그 법규가 나오고 난 다음에 민족종교단체를 유사종교로 인정된 경우는 한번도 나타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진행자> 그동안 강압에 의한 통치를 했다면 이제 겉으로는 유화책을 쓰는 척하면서 민족정신과 독립의지를 꺾어 나가는 교묘한 술책을 쓴 것이네요.

 

Q.그렇다면 급격히 교세가 성장한 보천교에 대한 탄압이 거세졌겠네요?

<김철수 교수> 그렇죠, 당연합니다. 천도교는 3.1운동을 주도했기 때문에 힘이 약화가 되버렸고, 대종교는 만주쪽으로 이동해서 독립운동에 가담을 하고 있었죠. 그러다보니 3.1운동 이후가 되면서 보천교에는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그리고 보천교에 대한 탄압에 대해 어떤 사람들은 '보천교도 탄압했다'라고 묶어서 얘기하는데요. 사실은 일제 식민정책, 3.1운동 이후 종교정책의 대부분은 보천교를 주요대상으로 한 정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리고 보천교가 그때까지 가만히 있다가 나온게 아니죠. 보천교라는 명칭만 없었지 일제강점과 더불어 월곡 차경석 선생 같은 경우 끊임없이 활동을 하고 있었단 말이죠. 예를 들어 국권회복 활동을 표방한다던가 갑종 요시찰인으로 편입해서 고생한다던가 이러한 활동들을 꾸준하게 진행하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삼일운동 이후에는 보천교가 탄압의 주요대상이 되었다 이렇게 볼 수 있습니다.

 

<진행자> 3.1만세운동 전에 보천교에 대한 탄압에 대해 말씀해 주셨는데요.

 

Q. 차경석교주를 '갑종 요시찰인'으로 지정했다고 하는데 그것이 무엇인가요?

<김철수 교수> 우리가 흔히 이 요시찰 제도가 3.1운동 이후에 만들어진게 아니냐 하는 그런 생각들을 원래 갖고 있었어요. 그런데 일본의 식민권력 보고서를 보면 1917년 차경석을 갑종 요시찰인으로 편입했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3.1운동 이후 이 요시찰 제도가 본격화된거죠. 이거는 시찰, 감시의 대상자라는 말이겠죠. 어떤 사람이 감시 대상자가 되느냐면 당연히 총독정치에 불만자들, 사상이 불온한 자들 이렇게 되있습니다. 그당시로 본다면 사회주의자나 독립운동을 표방하는 사람이 주가 될겁니다.


 

그런 사람들을 나눕니다. 갑을병정 이렇게 순서대로 나누어 구분하게 되는데요. 역시 갑에 해당됐다는 것은 그만큼 많은 감시의 대상이 됐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죠. 그만큼 끊임없이 감시를 받고 있었다 볼 수 있습니다.

 

<진행자> 그만큼 일제가 보천교를 주시했다는것을 반증한다 볼 수 있겠습니다. 그럼에도 보천교에서는 독립자금 지원을 계속 했잖아요.

 

Q. 제주도에서는 항일무장봉기도 있었는데 그에 대해 말씀해주세요.

<김철수 교수> 예, 그 사건을 우리는 1918년 법정사 항일항쟁으로 현재 자리 매김하고 있습니다.

법정사法井寺 항일운동(1918) - 국권회복을 목적으로 일으킨 제주도 최초, 최대의 무장 항일운동

 

강점기에 일어난 어떻게 본다면 최초의 사건이기도 합니다. 제주도 최초의, 제주도에서 일어난 최대의 항일항쟁 운동이라고 이야기 하고 있는데요. 이 사건은 안타깝게도 현재 학계에서는 불교 운동으로 편입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나중에 기회가 되서 식민권력의 보고서들을 보신다면 이사건은 '차월곡이 영일군 김연일과 모의했다' 라고 나옵니다. 김연일이 결국 법정사 주지가 되고 그 당시에 보천교도들과 불교도들이 모여 항쟁을 하게 됩니다. 상당히 과격하게 항쟁을 하는데 그결과 30여명이 검거되는 사건입니다.

 

 

그런데 저도 자꾸 이야기 하고 있는게 뭐냐면 왜 이것을 꼭 불교운동으로 봐야 되냐, 왜 보천교 운동으로 하면 안되느냐 그런 불만도 있고, 궁금도 하거든요. 그런데 여기서 몇 가지 생각해 볼 문제는 보천교라는 명칭이 아시다시피 1922년 1월에 보천교라는 명칭이 나타났기 때문에, 이 때는 보천교라는 명칭이 없죠.

 

그래서 선도교라고 해야할지 태을교라고 해야할지 훔치교라고 해야할지 그 부분이 조금 그렇고요. 그러다보니 월곡 차경석이라는 이름만 계속 등장을 하게 됩니다.

 

또 하나는 불교도들과 보천교도들이 모여서 이 운동을 일으켰지만, 이 운동의 주도층이 누구냐 하는 겁니다. 이런걸 가만히 살펴보면 이건 보천교 운동으로 자리매김해도 충분할 걸로 생각이 듭니다.

 

이것과 관련되어 자료를 보실려면 김형렬의 위봉사 항일운동 사건이라는게 있습니다.
*봉사 항일운동(1918.8.16) - 상제님의 수석성도 김형렬과 위봉사 주지 곽법경이 일으킨 항일운동

 

 

이것도 위봉사의 곽법경과 더불어 연합하여 항쟁을 하고 결국 그 사건으로 인해 나중에 김형렬 성도가 독립유공이라는 자리에 앉게 되는데요. 이것도 분명히 김형렬과 위봉사 신도들과의 연합 작전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제주법정사 투쟁하고는 달리 자리매김하고 있다는 점. 이런 것들을 생각해보신다면 1918년 법정사 항일무장봉기도 보천교운동으로 자리매김 될 날이 오지 않겠나 생각 해봅니다.

 

그리고 3.1운동 직전에 1918년 11월 경에는 또 제주도에서 보천교도 이찬경이 목포로 솜 19포대를 들여오게 됩니다. 들어오다 목포경찰서에 체포되는 사건이 발생되는데, 그 솜 포대안에는 10만원이 은닉이 되고 그게 발견되면서 검거가 되는데요.

 

이때 보천교의 24방주 조직이 노출됩니다. 어떤 하나의 단체가 조직이 노출된다는 것은 상당히 큰 충격을 주지 않습니까. 당시 고판례 수부님이 체포되는 사건도 발생하게 되죠.


<진행자> 네, 일제의 핍박과 탄압에도 대한독립을 이루기까지 보천교 신도들의 크나큰 헌신과 노고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네요.

 

지금까지 잃어버린 역사 보천교에 대해 말씀 나누는 시간 가졌는데요. 다음 시간에는 일제의 의한 보천교 와해와 역사왜곡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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