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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시의 고향을 찾아서 (3) - 조한강상유회早寒江上有懷

2020.07.13 | 조회 4494 | 공감 0

한시의 고향을 찾아서

 

상생문화연구소 원정근



맹호연孟浩然의 「이른 추위에 강가에서 느낀 바가 있어(조한강상유회早寒江上有懷)」


【제목풀이】

이 시의 제목은  「조한강상유회早寒江上有懷」이다. 이 시는 맹호연이 차가운 강가에서 마음에 느낀 바가 있어 지은 것이다. 맹호연이 40세 이후 장강 하류 지역을 떠돌 때 지은 시로 추정된다. 


나뭇잎 떨어지니 기러기 남쪽으로 날아가고,

북쪽 바람에 강가가 차갑구나.

내 집은 양수 굽이,

멀리 초나라 구름 끝에 떨어져 있네.

고향 그리는 눈물 나그네 길에 다 말랐는데, 

하늘가에 외로운 배 보이누나.

나루터를 못 찾아 물으려고 하건만, 

바다와 맞닿은 강이 저녁에 아득아득.   


목락안남도木落雁南渡, 북풍강상한北風江上寒.

아가양수곡我家襄水曲, 요격초운단遙隔楚雲端.

향루객중진鄕淚客中盡, 고범천제간孤帆天際看.

미진욕유문迷津欲有問, 평해석만만平海夕漫漫.


【시풀이】

맹호연(689-740)은 성당盛唐의 시인으로 호북성湖北省 양양현襄陽縣에서 태어났다. 맹호연의 이름은 호浩이고, 자는 호연浩然이다. 맹호연이 녹문산鹿門山에 거주했기 때문에 맹녹문孟鹿門 또는 녹문처사鹿門處士라고 불렀다.


왕유王維와 더불어 전원산수시파를 대표한다는 측면에서 왕맹王孟으로 불리기도 했다. 장구령張九齡(678-794), 왕창령王昌齡(698-757), 이백李白(701-762), 두보杜甫(721-770) 등과 폭 넓은 교유관계를 맺었다. 젊은 시절 고향에서 살다가 마흔 무렵에 당나라의 수도인 장안에 가서 진사 시험에 낙방하고 장강 일대를 유람하다가 낙향하여 은둔생활을 하였다. 말년에 재상 장구령의 식객으로 잠시 일한 것 이외에는 관직에 오르지 못하고 평생토록 불우한 삶을 보냈다.


이 시는 시인이 장강 유역을 떠돌면서 배회할 때 고향에 대한 향수에 젖어 지은 작품이다. 바다와 맞닿은 강이라는 뜻을 지닌 ‘평해平海’라는 말로 미루어 볼 때, 장강長江이 동쪽으로 흐르다가 바다로 접어드는 곳에 이르러 이 시를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무더위가 사라지고, 어느새 소슬한 가을이 돌아왔다. 가을은 ‘원시반본原始返本’의 계절이다. 모든 것이 시원을 살펴 근본으로 돌아가는 때이다. 나뭇잎은 떨어져 뿌리로 돌아가려고 하고, 기러기는 추운 겨울을 나기 위해 북쪽 고향을 떠나 남쪽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한다. 그러나 시인은 가족들이 애타게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장강 유역을 떠돌면서 벼슬살이로 나아가지 못하는 울분과 비애를 달래고 있었다.


맹호연의 고향은 호북성湖北省 양양현襄陽縣이다. 한수漢水가 흐르다가 양양襄陽 일대에 이르러 물줄기가 굽어진다. 그래서 ‘양수곡襄水曲’이라 표현하였다. 시인의 고향인 양양은 옛날에는 초나라에 속했고 장강 유역과 비교해서 지세가 높은 곳에 자리를 잡고 있기 때문에 ‘초운단楚雲端’이라 표현하였다.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은 소망과 염원을 구름과 강물에 담아 간접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시인은 나그네의 향수를 직접으로 표출한다. “고향 그리는 눈물 나그네 길에 다 말랐는데, 하늘가에 외로운 배 보이누나.”가 바로 그것이다. 시인이 길손으로 객지를 떠도는 도중에 얼마나 사무치게 고향을 그리워했으면, 고향을 그리워하는 눈물이 다 말랐다고 표현했을까? 또한 시인은 아득히 멀리 떨어진 하늘가의 쪽배를 바라보면서 고향으로 돌아가고픈 향수를 실어 보낸다. 




마지막 두 구절은 『논어論語‧미자微子』에 나오는 공자孔子가 자로子路를 시켜서 나루터를 묻던 고사를 활용하였다. 장저長沮와 걸익桀溺은 춘추시대 세속을 벗어나 몸소 논밭을 갈아 자급자족하며 숨어살던 은자였다. 장저와 걸익은 자로에게 나루터가 있는 곳을 알려 주지 않고, 도리어 공자를 조롱하였다.


혼탁한 세상에서 벗어나 직접 농사를 지으면서 고고하게 살지 않고 안 되는 일인 줄을 뻔히 알면서도 천하를 구제하기 위해 부질없이 쏘다니고 있다고 공자를 비판한 것이다. 이런 장저‧걸익과 공자의 관계는 바로 맹호연의 양가적 감정을 대변한다.


장저와 걸익은 전원에 돌아가 자유롭게 살고자 하는 입장을 반영하고, 공자는 벼슬살이로 나가려는 입장을 반영하고 있다. 시인은 황혼이 깔리는 저녁 풍경을 배경으로 삼아 저 멀리 돌아가는 쪽배와 넓디넓게 펼쳐지는 강물에다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실어서 절묘하게 표현하고 있다.


맹호연은 호탕한 풍류와 고상한 품성을 지닌 사람이었다. 세상이 다 알다시피 참으로 오만불손하기 짝이 없던 시선詩仙 이백도, 12살이나 선배였던 맹호연의 인품을 진심으로 존경하여 「맹호연에게 드리다(증맹호연贈孟浩然)」에서 이렇게 찬미한다. 


내가 좋아하는 맹선생님, 

풍류로 온 세상에 소문났네.

젊어서 벼슬 버리고,  

늙어선 소나무와 구름에 누웠어라.

달에 취해 자주 술에 빠지고, 

꽃에 홀려 임금도 섬기지 않았네. 

높은 산 어찌 우러러보리?

다만 맑은 향기 공경할 뿐이어라. 


오애맹부자吾愛孟夫子, 풍류천하문風流天下聞. 

홍안기헌면紅顔棄軒冕, 백수와송운白首臥松雲.

취월빈중성醉月頻中聖, 미화부사군迷花不事君.

고산안가앙高山安可仰? 도차읍청분徒此揖淸芬. 


전통적 지식인이 대부분 그러했듯이, 맹호연도 양가적 감정을 지니고 있었다. 한편으로는 고향의 전원에서 한가로이 살고자 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벼슬살이에 나아가 천하창생을 위해 온몸을 다 바쳐서 일하려는 것이다.


공자가 말한 것처럼, 천하에 도가 있으면 나아가 벼슬을 하고 천하에 도가 없으면 조용히 물러나 숨어 살아야 한다. 맹호연이 당나라 현종玄宗이 다스린 개원開元 연간의 태평성대를 살고 있었으니, 어찌 벼슬살이에 나서지 않을 수 있으랴!    


맹호연은 통일제국인 당나라에서 살면서 세상에 나아가 천하창생을 구제하려는 큰 뜻을 펼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벼슬살이에 나가서 큰 이상과 포부를 실현하지 못하고 천하를 유람하면서 허송세월을 보냈다.


맹호연은 전원살이로 돌아가 자유롭게 살지도 못하고 벼슬살이로 나아가 창생구제의 이상을 펼치지도 못하는 진퇴양난의 상황에 빠졌다. 전원살이와 벼슬살이 사이에서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마음의 모순과 갈등을 심하게 겪었다. 


맹호연은 40세에 장안에 가서 과거시험에 응시한다. 그러나 맹호연은 과거시험에 낙방하여 벼슬살이에 나아가지 못하고 실의에 빠져 고향의 전원으로 돌아간다. 


조정에 글 올리는 일 그만두고,

남산의 허름한 집으로 돌아왔네.  

재주 없으니 현명한 군주가 버리고,

병이 많으니 벗도 멀어지네. 

흰머리는 노년을 재촉하고,  

봄은 세밑을 핍박하네.

끝없는 생각 시름으로 잠 못 들고, 

소나무에 걸린 달이 밤 창에 허허롭네. 


북궐유상서北闕休上書, 남산귀폐려南山歸敝廬. 

부재명주기不才明主棄, 다병고인소多病故人疏. 

백발최년노白髮催年老, 청양핍세제靑陽逼歲除. 

영회수부매永懷愁不寐, 송월야창허松月夜窓虛. 


이 시의 제목은 「세모에 남산으로 돌아가다(세모귀남산歲暮歸南山)」이다. 한해가 저무는 세밑이다. 시인의 마음엔 하나 가득 슬픔이 고였다. 세상에 나가서 천하창생을 구제하려던 이상이 물거품이 되어 버렸다. 


“송월야창허松月夜窓虛”에서 ‘허虛’는 매우 절묘하다. 자연의 풍경과 시인의 심정이 모두 공허함을 정경교융(情景交融)의 경지에서 제시한 것이기 때문이다. 적막한 밤도 공허하고, 벼슬길에 오르지 못한 시인의 마음도 공허하다. 


맹호연은 돌아온 고향의 전원에서 봄날 아침을 노래하는  「봄날 아침(춘효春曉)」라는 시를 남긴다. 


봄잠에 날 새는 줄도 몰랐더니,

곳곳에 새 소리 들리누나.

간밤에 비바람 소리 들렸으니, 

꽃잎은 얼마나 떨어졌을꼬? 


춘면불각효春眠不覺曉, 처처문제조處處聞啼鳥.   

야래풍우성夜來風雨聲, 화락지다소花落知多少?   

 

밤새 비바람이 휘몰아쳐 지나간 뒤 아침의 신선한 공기를 마시며 떨어진 꽃잎을 애잔한 마음으로 노래한 시다. 이 시는 너무도 평범하여 눈을 씻고 아무리 찾아봐도 기묘한 데를 발견할 수 없다. 하지만 되풀이해서 여러 번 읽다가 보면 시 속에 담긴 오묘한 운치를 느낄 수 있다.


시인은 노곤한 봄잠에 빠져 날 밝는 줄도 모르고 골아 떨어졌다가, 여기저기 새 우는 소리에 문득 잠에서 깨어났다. 그 순간, 간밤에 어렴풋이 비바람이 세차게 몰아쳤던 기억이 불현듯 떠오른다. 시인은 그 비바람에 꽃잎이 과연 몇 송이나 떨어졌을까 하고 걱정스러운 듯이 반문한다. 생기발랄한 화사한 봄날에서 시들어 떨어질 쓸쓸한 가을철을 생각한 것이다.




돌아온 생명의 봄에서 돌아갈 죽음의 가을을 돌아보는 것이다. 계절은 지나가도 다시 돌아오지만, 사람은 한 번 가면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법이기 때문이다.


맹호연은 옛 벗의 전장田莊에 들러서 지은 「과고인장過故人莊」이라는 유명한 전원시를 남겼다. 


옛 벗이 닭고기와 기장밥을 차려놓고,

시골집으로 날 초대했네.

푸른 나무는 마을 주위를 에워싸고, 

푸른 산은 성 밖에 비껴 있네.

창 열어 마당과 채마밭을 마주하고, 

술 들며 뽕과 삼 이야기하네.

중양절을 기다렸다가,

다시 와서 국화를 감상하리라.  


고인구계서故人具鷄黍, 요아지전가邀我至田家.

록수촌변합綠樹村邊合, 청산곽외사靑山郭外斜.

개헌명장포開軒面場圃, 파주화상마把酒話桑麻.

대도중양일待到重陽日, 환래취국화還來就菊花.


한가로운 시골 농촌의 정겨운 풍경을 시적 정감을 담아서 멋들어지게 표현한 시다. “술 들며 뽕과 삼 이야기하네.”는 도연명의 말을 활용한 것이다. 도연명의 「귀원전거오수歸園田居五首‧기이其二」에 나오는 “만나도 잡말 않고, 단지 뽕과 삼 자라는 것만 말하네.”(相見無雜言, 但道桑麻長.)가 그것이다.


순박한 시골 농촌에서 사람들끼리 만나서 하는 이야기에 어찌 잡말이 있을 수 있겠는가? 오로지 나눈 얘기는 농삿일에 관한 것일 뿐이다. 이 시의 시안詩眼은 바로 ‘취就’에 있다. ‘취’는 본래 나아간다는 뜻이지만, 여기서는 국화를 감상하며 즐긴다는 뜻이다.  


맹호연은 앞선 시대의 사람에게서 새로운 희망의 등불을 찾았다. 동진東晋과 유송劉宋의 교체기에 살았던 도연명陶淵明(365-427)이다.


맹호연은 「이씨의 원림에 병들어 누워(이씨원와질李氏園臥疾)」에서 “나는 도연명의 흥취를 좋아하나니, 숲과 뜰에는 세속의 감정이 없다오.”(我愛陶家趣, 園林無俗情.)라고 하고, 또 「한여름 남원에 돌아와 장안의 옛 벗에게 보내면서(중하귀간남원기경읍구유仲夏歸南園寄京邑舊游)」에서 “『고사전』을 읽은 적이 있는데, 가장 훌륭한 이는 도연명이었지. 날마다 전원의 흥취에 빠져서, 스스로 복희씨 이전의 사람이라 여겼지. 나는 또 무엇을 하는 자이기에, 허둥허둥 단지 나루터만 묻나.”(嘗讀高士傳, 最嘉陶徵君. 日眈田園趣, 自謂羲皇人. 予復何爲者, 恓恓徒問津.”라고 한다. 


맹호연은 단순하고 소박한 전원의 일상적 삶에서 복희씨 이전의 태평시절의 이상적 삶을 꿈꾸었던 도연명을 참으로 흠모하고 동경하였다.


도연명은 진정한 삶의 고향을 찾기 위해서 자발적 가난을 선택하였다. 벼슬살이의 허위와 속박에서 벗어나 참삶의 즐거움을 만끽하기 위해서 전원살이로 돌아갔다. 도연명이 「귀거래해사」에서 말하는 “지금이 옳고 지난날이 잘못되었음을 깨닫는다.”(覺今是而昨非)고 하는 ‘각비覺非’가 바로 그것이다.지난날의 비시적非詩的 삶인 벼슬살이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뜻이다. 이제부터 전원살이의 시적 삶을 주체적으로 선택하겠다는 것이다.


반면에 맹호연은 끝끝내 벼슬살이에 대한 갈망과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평생토록 벼슬살이와 전원살이 사이에서 갈등하고 방황하였다. 이 점이 도연명과 뚜렷이 구별되는 점이다. 맹호연은 끝내 벼슬길에 나가려는 바람을 이루지 못한 채 고향 양양에 찾아온 왕창령王昌齡(698-757)과 호탕하게 주연을 즐기다가 해묵은 병이 도저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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