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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열단 창단 제101주년’을 앞두고 (2)

2020.07.28 | 조회 4280 | 공감 0

항일무력투쟁의 아방가르드 ‘의열단 창단 제101주년’을 앞두고 2


 상생문화연구소 정원식 연구위원

 

(본 칼럼은 2019년 11월 9일 경향신문에 필자가 기고했던 것을 대폭 수정 보완)

 

약산 김원봉 지휘 하에 일사분란한 작탄활동 전개’

1920년 3월 밀양·진영 폭탄반입사건을 시작으로 동년 12월 밀양경찰서 폭탄투척과 1921년 9월 조선총독부 폭탄투척, 그리고 1923년 1월 종로경찰서 폭탄투척의거 등 의열단은 반일 무력투쟁을 전개해 일본 제국주의 세력들의 간담을 서늘케 했다.


이에 일제는 김원봉에게 김구보다 40만원이나 많은 무려 100만원(현 가치 320억원)의 현상금을 내걸며 강력히 대응했다.


초기 의열단의 중요한 의거활동을 독립운동사 자료를 기초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밀양·진영 폭탄반입사건 

일본 고관에 대한 암살과 주요 관공서의 폭파를 목적으로 하는 의열단의 제1차 암살파괴계획은 1920년 3월에 시작되었다. 우선 폭탄을 국내로 반입하기 위하여 3월 중순 경 의열단원 곽재기(郭在驥)가 만주 안동현(安東縣)에서 밀양의 김병완(金炳完)에게 보낸 폭탄이 경기도 경찰부에 탐지되어 폭탄 3개도 압수되고, 폭파계획의 행동책임을 맡은 관련자 18명 중 곽재기 등 12명이 일본경찰에게 붙잡혔다.


5월 중순경에는 의열단원 이성우(李成宇)가 다시 폭탄 13개 및 권총 2점을 입수하여 안동현 이륭양행(怡隆洋行)을 통하여 경상남도 진영(進永)의 강원석(姜元錫)에게 보냈는데, 이것이 일본경찰에 발견됨으로써 압수되고 이 사건의 관련자 윤치형(尹致衡) 등 6명이 붙잡혔다. 따라서 이 폭탄의 반입과 함께 파괴대상을 선정, 검토하면서 거사 준비에 착수하던 의열단의 행동대원들의 거사는 좌절되었다.




1920년 6월 곽재기·이성우 등 전원이 검거되어 10월에 경성지방법원검사국에 송치되었는데 이 사건의 관련자는 모두 26명이었고, 붙잡힌 단원은 18명이었다.


이 사건은 경성지법에서 8개월간의 예심을 거쳐 붙잡힌 지 1년이 지난 1921년 6월 언도공판에 회부되어 16명 중 강원석 1명만 면소(免訴) 방면되고 나머지 15명은 모두 유죄로 결정되었다. 특히, 선고 공판에서 이성우와 곽재기는 주범으로 지목되어 8년형이 선고받았다.



(2) 부산경찰서 폭탄투척의거

제1차 암살파괴계획이 좌절된 지 얼마 안 된 1920년 9월 14일, 경상남도 부산경찰서가 의열단원 박재혁(朴載赫)에 의하여 폭파되고 서장 등 3명이 즉사한 사건을 말한다. 1920년 9월 초 박재혁은 선편(船便)으로 상해를 떠나 나가사키(長崎)를 거쳐 9월 13일 부산에 상륙하였다.


싱가포르에서 사업을 경영하고 있던 그는 의열단의 ‘공약 10조’ 제7항의 “하시, 하지에서나 초회에 필응한다.”는 단명에 의하여 상해로 와서 부산경찰서 폭파의 임무를 띠고 입국하였다.


입국한 다음날 아침 그는 중국인 고서적상(古書籍商)으로 변장하고 평소 지면이 있던 부산경찰서장 하시모토(橋本秀平)를 방문, 고서적을 구경하는 그에게 먼저 의열단의 전단을 보인 다음 폭탄 2개를 투척하였다. 폭음과 함께 둘이 함께 쓰러졌는데, 중상을 입은 서장은 병원으로 가는 도중에 사망하고 옆에 있던 일본경찰 2명도 즉사하였다. 박재혁도 중상을 입은 채, 투옥된 날부터 단식을 시작하여 9일 만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최천택(오른쪽) 선생과 부산경찰서 폭탄 투척 의거 하루 전날 찍은 사진 (개성고등학교역사관)


(3) 밀양경찰서 폭탄투척의거

부산경찰서 폭탄투척의거가 일어난 지 불과 3개월 만인 1920년 12월 27일 오전 7시 30분경 밀양경찰서 서장실에 전 경찰이 모여 서장 와타나베(渡邊)의 훈시를 듣고 있을 때, 밀양 출신 의열단원 최수봉(崔壽鳳)이 경찰서 창밖에서 폭탄 2개를 연달아 투척하였다.


제1탄은 남쪽 유리창으로 던진 것으로 정렬하고 있던 순사부장의 오른손에 맞아 불발되고, 다시 정면 현관에서 던진 제2탄은 복도에서 폭발하였으나 인명피해는 없었다. 이 사건은 일본경찰에게 피해를 주지 못하였지만 민심에 충격을 불러일으켰다.


의거에 사용된 폭탄은 이종암·김상윤 등이 제공한 것인데, 이 거사는 결국 실패로 돌아갔으며, 최수봉은 현장에서 단도로 자결을 기도하였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붙잡혀 치료받은 뒤 검찰로 송치되었다. 그는 대구지방법원에서 무기징역을 언도받았으나, 검사의 공소로 대구복심법원에서 사형이 선고되었다. 최수봉은 태연하게 교수대에 올라 21세의 짧은 생애를 장렬하게 마쳤다.




(4) 조선총독부 투탄의거

1921년 9월 12일 오전 10시경 서울 남산 밑에 있는 왜성대(倭城臺:지금의 숭의여고 부근) 총독부청사 2층에 있는 회계과와 비서과에 각각 1개씩의 폭탄이 투척되었다. 비서과의 것은 불발이었으나, 회계과의 것은 큰 폭음과 함께 폭발하여 건물의 일부가 파괴되었다. 이 의거가 일어나자 일본경찰은 비상령을 내리고 범인체포에 혈안이 되었으나 색출에 실패하였다.


결국, 이 사건의 진상은 이듬해 3월 상해에서 일본 육군대장 다나카(田中義一)에 대한 암살저격사건으로 김익상이 붙잡혀 그가 실토할 때까지 밝혀지지 않았다. 의열단원 김익상(본명 金鳳男)은 서울 출신으로 1921년 9월 10일 폭탄 3개를 지니고 북경을 떠나 이튿날 서울에 도착, 12일 전기수리공으로 변장하여 총독부 정문을 무사히 통과하고 2층으로 향하여 거사하였다.


당시 그는 의거 후 일본인 목수로 변장하고 그날 저녁 용산역에서 기차를 타고 평양에서 하차하여 하루를 소일한 뒤 신의주를 거쳐 무사히 북경으로 돌아갔다. 이 사건은 일제에게 큰 충격을 주었으며 서울 시민을 놀라게 하였다.




(5) 상해황포탄의거 : 다나까 기이치(田中義一)대장 저격의거

1922년 3월 28일 일본 육군대장 다나카 기이치(田中義一)가 기선편으로 상해에 도착한다는 정보를 접하자, 의열단은 그의 암살저격계획을 세웠다.


이 계획은 치밀하게 추진되어 부두에서 제1선은 오성륜(吳成崙), 제2선은 김익상, 제3선은 이종암이 맡기로 했다. 제1선을 맡은 오성륜은 배에서 내려 걸어오는 다나카를 저격하였으나, 때마침 앞으로 나선 영국인 여성이 맞아 즉사하였고, 제2선을 맡은 김익상이 곧이어 자동차에 오르는 것을 저격하였으나 그의 모자를 관통시키는 데 그쳤다.


제3선의 이종암은 앞으로 나아가 폭탄을 던졌으나 자동차 뒤에 떨어진 폭탄이 불발되고 말았다.  결국 의거는 실패로 돌아가고 3명 중 김익상·오성륜이 일본경찰에게 붙잡혔는데, 같은 해 4월 오성륜은 탈옥에 성공하고 김익상만 일본 나가사키로 압송되어 사형 언도와 무기징역을 거쳐 20년 징역형으로 감형되어 복역하고, 출옥한 지 얼마 안 되어 일본형사에게 연행된 채 암살당하였다.



(6) 종로경찰서 폭탄투척 의거

1923년 1월 12일 밤 8시경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한 사건을 말한다. 이 의거를 일으킨 사람이 의열단원 김상옥(金相玉)이었음은 그가 순국할 때까지 당시의 일본경찰당국도 몰랐다. 그러나 종로경찰서가 폭탄세례를 받은 지 5일이 지난 1월 17일 눈 내리는 새벽 3시, 그의 은신처인 삼판통(지금의 후암동) 고봉근(高奉根/김상옥 매부)의 집이 종로경찰서 형사진에게 탐지되어 우메다(梅田) 경부 등의 지휘 아래 20여명의 일본경찰에게 포위되었다.


당시 형사진 가운데 있던 조선인 형사 조용수가 최초로 탐지하였다고 한다. 김상옥은 단신으로 일본경찰과 총격전을 벌여 다무라(田村) 형사부장 등을 사살하고, 그 밖의 수 명에게 중상을 입힌 뒤 포위망을 뚫고 남산 쪽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그는 눈 덮인 남산을 넘어 지금의 금호동에 있는 안장사(安藏寺)를 찾아 승복을 빌려 입고 효제동 이혜수(李惠受/애국부인회를 조직한 여성독립운동가)동지의 집에 은신하였다. 1월 22일 새벽 5시 30분 경 일본경찰은 우마노(馬野) 경기도 경찰부장의 총지휘로 경성(현 서울)시내 4개 경찰서, 기마경찰대 등 총 1,000여 명이라는 3.1혁명 이후 최대 규모로 투입된 일제 무장경관은 효제동의 은신처를 완전 포위하였다.


김상옥 의사는 단신으로 두 손에 권총을 들고 일본경찰 1천 여 명에 맞서 서울 한 복판에서 3시간 30분가량 접전 끝에 서대문경찰서 경부 구리다(栗田淸造) 외 16 명을 사살하고 총탄이 다하여 최후의 한발로 자결하였다. 그때 나이 34살의 위풍당당했던 김상옥 의사의 생애는 조국 독립을 위해 불꽃같이 피어오른 후 그렇게 우리 민족의 영웅은 사려져 갔다. 김상옥 의사는 종로경찰서 폭파 전 상하이를 떠나오며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나의 생사가 이번 거사에 달렸소! 만약 실패하면 내세에서 만납시다. 

나는 자결하여 뜻을 지킬지언정 적의 포로가 되지 않겠소!”




(7) 제2차 암살파괴계획(폭탄반입사건)

1923년 초 의열단이 조선총독부 등 일제 관공서와 총독 사이토(齋藤實) 등 일제 고관을 대상으로 하는 제2차 파괴암살계획을 말한다. 이를 위해 상해에 비밀폭탄 제조공장을 두고 폭탄기술자로서 독일인·헝가리인 등을 초빙하여 고성능의 폭탄을 제조하였다.


이를 국내로 반입하기 위하여 상해에서 톈진(天津)으로 운반하였는데 여기에는 〈조선혁명선언〉 및 〈조선총독부관공리에게〉라는 유인물도 함께 포함되어 있었다. 이 폭탄반입계획은 김시현이 실행을 담당하여 톈진에 가서 홍종우(洪鍾祐) 등을 지휘하여 수송하기로 하였다. 그는 당시 경기도 경찰부의 한국인 경부 황옥과도 동지적 결합을 하고, 1923년 3월 7일 안동현의 조선일보사 안동지국장 댁에 들렀다.


12일 오전 6시 차로 김시현·황옥·김재진(金在震)·권동산(權東山) 등 4명이 폭탄 18개와 권총 5정을 가지고 톈진을 출발하여 서울로 향하고, 나머지 폭탄 18개와 유인물은 안동현 홍종우집과 신의주 조동근(趙東根) 집에 숨겨두었다. 그러나 위의 4명 중 김재진이 평안북도 경찰부 고등과 김덕기(金悳基)에게 매수되어 이 계획을 일본경찰에게 밀고함으로써 홍종우·백영무(白英武)·조동근·조영천(趙英千) 등 4명이 체포되고 폭탄 10개, 선언서·전단 691매를 압수당하였으며, 그 뒤 신의주에서 발견된 폭탄 8개와 합쳐 폭탄 18개를 압수당하였다.


또한, 경기도 경찰부에서는 서울에 도착한 김시현·황옥 등 10여 명을 체포하고 폭탄 18개를 압수하였다. 이로써 의열단의 암살파괴계획은 의거에 착수하기 위한 준비과정에서 좌절되고 이에 관련된 의열단원들은 모두 체포되고 말았다.





(8) 동경 니주바시 폭탄투척의거

1924년 1월 5일동경 니주바시 사쿠라다몬(二重橋櫻田門)에 폭탄을 투척한 사건을 말한다. 이 의거는 의열단원 김지섭(金祉燮)에 의하여 감행된 것으로 일본 천황이 사는 궁성을 파괴하고자 한 것이다.


김지섭은 신년 벽두 동경에서 열리는 의회에 조선총독을 비롯한 일제의 고관들이 참석한다는 소문을 듣고, 이곳에 폭탄세례를 주기 위한 목적으로 1923년 12월 20일 3개의 폭탄을 지니고 상해를 떠나 일본으로 향하였다. 1923년 9월에 일어났던 관동대진재(關東大震災)에 희생된 동포들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한 이번의 의거계획은 그의 마음을 설레게 하였다.


그러나 막상 동경에 도착하여 제국의회가 휴회 중임을 알게 되자 계획을 바꾸어 궁성에 폭탄을 투척하기로 하였다. 1924년 1월 5일 저녁 그는 궁성 니주바시 앞에 접근하여 우선 제1탄을 보초 경찰에게 던졌으나 불발되었으며, 다시 2탄을 던졌으나 역시 불발이 되어 정문 석책(石柵) 밖에 떨어지고, 마지막으로 던진 3탄도 불발이 되고 말았다.


이 거사는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실패에 돌아가고 그는 일본경찰에게 붙잡히게 되었다. 그는 사형 구형에 무기징역을 선고받아 복역중, 20년으로 감형되었으나 1928년 2월 몸이 극도로 쇠약하여 옥사하였다.




(9) 동양척식회사 및 식산은행폭탄투척의거

1926년 12월 28일 하오 2시경 동양척식회사 및 조선식산은행에 폭탄을 투척한 사건을 말한다. 이는 의열단원 나석주(羅錫疇)에 의하여 이루어진 의거로, 의열단이 그동안 계획한 여러 차례의 암살 및 파괴공작이 실패한 뒤 모처럼 성공을 거둔 것이었다.


나석주는 1926년 7월 하순 톈진에서 김창숙이 준 자금으로 권총과 폭탄을 구입하여 같은 해 12월 26일 인천에 도착하였다. 12월 28일 거사를 단행하기로 하고 오후 2시경 먼저 식산은행에 들어가 폭탄 1개를 던지고, 다시 동양척식회사로 들어가 폭탄을 투척하고 권총을 난사하면서 1층과 2층에서 수 명의 사원을 사살하였다.


동양척식회사를 아수라장으로 만들고 그곳을 나와 전차길로 뛰어나왔을 무렵 총소리를 듣고 달려온 경기도 경찰부경부보를 사살한 다음, 일본경찰 4, 5명의 추격을 받게 되자 권총으로 자결했다.




‘보다 혁신적인 대 변신을 위해 자진 해체를 단행‘

1920년대 후반 들어와서 의열단 활동은 소강상태를 보이다가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를 1932년 남경 천녕사라는 사찰에 설립하였다. 이 간부학교는 김원봉이 주도가 된 조선의용대 창설(1938년)의 근간이면서 신흥무관학교에 이은 항일간부양성의 요람이 되었다.


특히 우리에게 문학 시인으로만 알려진 이육사 선생도 항일무장투쟁 전사의 면모를 갖춘 행동파 독립지사였다. 1935년 김원봉을 중심으로 체계적인 정치 조직화를 위한 ‘조선민족혁명당’ 창당을 앞두고 의열단은 창조적 해체를 단행했다.



‘독립운동사의 큰 맥을 잊는 가교역할’

의열단은 1908년 전명운·장인환 미국 의거, 1909년 안중근 의거, 1919년 3.1혁명운동, 임정수립, 신흥무관학교 설립 등 이들 정신과 사상을 계승했다. 무력투쟁의 최일선 전위조직으로 활동하며 1935년 공식 해체되기까지 한인애국단 창단에 영향을 끼쳤다.


또한 조선의용대와 한국광복군으로 연결되는 독립운동사의 큰 맥을 형성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특히, 대한독립운동사에서 지도적 위치에 있던 김구(金九)·김규식(金奎植)·김창숙(金昌淑)·신채호 선생 등을 의열단의 고문으로 삼고, 장개석(蔣介石) 중화민국총통의 후원을 받았다.


또 다른 독립운동단체가 기존의 온건하고 소극적인 노선에서 항일무장투쟁으로 변화하는데 큰 변곡점을 제공하여 민족의 독립투쟁 정통성과 무장투쟁역량을 보여주었다. 이는 일제 식민지배에 신음하는 조선 민중들에게 항일의지 고취는 물론, 조국 광복의 희망을 힘껏 불어넣는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이처럼 의열단의 활동은 우리 독립운동사에 결코 무시할 수 없는 큰 족적을 남겼다. 그러나 올해가 의열단 창단 제101주년, 광복 75주년임에도 불구하고 이들 행적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우리 국민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그 이유는 해방 이후 친일, 반공에 기초한 남한 사회의 집권세력이 독립운동에서 좌파 세력이 한 역할에 대한 정당한 평가를 거부하였기 때문이다. 



독립운동가 김원봉 선생, 재평가를 통한 진정한 역사 복원을 할 때

작년 4월과 6월 한 독립운동가의 서훈을 놓고 우리 사회가 크게 한번 홍역을 겪었다. 그 중심인물이 바로 의열단 단장인 약산 김원봉이다. 그는 조선민족혁명당 대표, 조선의용대 총대장, 한국광복군 부사령관, 대한임시정부 군무부장(현 국방부장관)등 독립운동사에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의 업적을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약산의 서훈을 둘러싼 논쟁의 직접적인 원인은 해방 이후 그가 보였던 11년간의 북한 행적 때문이다.


해방 이후 남한사회가 좌·우 대립의 극한으로 치달으면서 몽양 여운형 선생이 대낮에 피살되었다. 친일 고등계 형사 출신 노덕술에 의해 심한 고문과 모욕을 받은 김원봉은 생명의 위협을 느끼자 1948년 4월 20일 월북하였다. 그는 북한에서 한직이라 할 수 있는 검열상과 노동상, 그리고 최고인민위원회 부위원장을 끝으로 1958년 11월 “중국 국민당 장개석의 사주를 받은 국제간첩”이라는 죄목으로 김일성에 의해 숙청되었다.


한편 당시 평양 주재 소련 대사 〈알렉산더 푸자노프 일지〉에 의하면, “김원봉은 조선노동당에 가입하지도 않았으며, 김일성 숙청의 칼날이 다가오자 남한을 향해 필사적으로 탈출을 시도하였다.”라고 기록돼 있다. 


약산은 그의 독립운동 공적이 좌우이념과 남북분단이라는 냉전적 사고의 잣대로 재단되었다. 그래서 남북한 모두에게 외면을 받아 근현대사의 미아로 전락하였다. 우리 사회는 약산의 11년 북한 행적만을 집착하여 거의 30여 년의 치열한 독립운동 행적을 모두 부정하고 빨갱이로 낙인찍었다.


그리하여 한국 전쟁 때 약산의 친동생 4명, 사촌 5명이 보도연맹 사건에 연루되어 밀양 근교 야산에서 피살되었고, 약산의 부친도 가택연금 상태에서 굶어 죽었다. 나머지 가족들도 연좌제 때문에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못했다. 


이러한 김원봉 선생과 그의 형제, 친척들의 비극적인 모습은 과거 우리 보수정권의 행태와 뚜렷이 대비된다. 그들은 주체사상의 대부 황장엽의 74년간 북한 행적을 애써 외면하면서 한국에서의 13년(1997년~2010년) 행적을 높이 평가하여 북한 민주화위원장으로 추앙하고 최고 훈장인 1급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수여했으며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하였다.  


진영 논리에 입각한 소모적인 사회적 논쟁을 피하기 위해서는 김원봉에 대한 평가를 해방 이전과 이후로 나누어야 한다. 그의 독립운동 관련 공적은 있는 그대로 인정해야 한다. 다만, 해방 이후 북한 고위직 경력이 있으므로 한국전쟁의 도의적 책임에서는 자유로울 수 없으며, 이는 역사적으로 상응한 비판을 받아야 한다.


앞으로 정치권에서는 역사적인 인물인 약산 선생을 현실 정치무대로 소환하여 당리당략의 정치적 제물로 삼지 말아야 한다. 즉 약산을 역사적 인물로서 당당히 비판할 수 있으나, 정치적 이해관계의 희생양으로 삼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독립운동사에서 김원봉 선생은 항일독립투쟁의 상징과도 같아 그를 빼놓고 독립운동을 얘기할 수 없기 때문이다.


끝으로 우리는 의열단 창단 제101주년을 앞두고, 국내와 중국대륙, 그리고 만주 허허벌판에서 풍찬노숙하며 일본제국에 맞서 하나뿐인 목숨을 조국 독립을 위해 초개와 같이 버렸던 의열단원의 행적을 똑똑히 기억하고 추모해야 할 것이다. 김원봉의 독립운동 공적에 대해서 보다 성숙한 역사 인식과 안목으로 제대로 평가하는 날이 속히 오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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