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인간과 신명이 해원하는 때

2010.08.14 | 조회 5561

원한이란 무엇인가

 

박경리의 소설『토지』를 보면, 조준구라는 자가 재산을 다뺏으려고 하자 어린 서희가 눈에 시퍼런 칼날을 품고 절규합니다.“ 찢어죽이고말려죽일테야!”라고. 하도 못살게구니 까 원한이 사무쳐서 천진난만하던 어린아이의 입에서 그런 말이 튀어 나온 것입니다.

 

이렇듯 원寃은 남에게 일방적으로 당해서 가슴이 아픈 것을 말합니다. 원은 개별적인 정서로서 개인의 삶과 환경에 따라 내용이 다양합니다.


반면에 한恨은 보편적인 정서입니다. 사람은 자생自生하는 인생의 본질적인 문제, 근본 과제 때문에 가슴에 나름대로 한이 맺힙니다. 예컨대 부모가 일찍 돌아가셔서 영혼에 상처가 생겼다면, 그것이 한이 됩니다. 인간이 성숙해 나가는 과정에서 입은 상처가 축적되어 맺힌 것이 한입니다.

 

이러한 원과 한의 문제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아, 나는 좋은 집에 태어나 배부르게 잘 먹으며 즐겁게 살고, 또 사업도 잘 돌아가니, 그런 건 내가 알 바 아니다. 원한이 없으면 인간이 아니지, 원한이 없는 인간이 어디 있나!”이렇게 이야기하고 넘어갈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상극 질서 속에서 파생된 인간과 신명의 원한이 ‘인류 역사에서 벌어지는 비극의 근원’이기 때문입니다. 원한은 선천 말대를 사는 인류의 내면 깊은 곳, 의식의 저 깊은 곳에서 천지의 강물처럼 도도히 흐르고 있습니다.

 

천지 안에 가득 차 있는 원과 한을 풀어 주지 않으면 새 세상을 열 수가 없습니다. 새 세상이 올 수도 없습니다. 지축이 서서 자연 개벽이 백 번 천 번 이루어진다 할지라도, 현실 세계는 더 참혹한 원한의 불구덩이 속으로 빠져들 뿐입니다.

 

척이 없어야 잘 산다

 

인간이 품은 원한의 고통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증폭됩니다. 여기서 증오심이 생기고, 보복의 문제가 생깁니다. 그것을 한 글자로 척隻이라 합니다. 남에게 원한을 맺게 하여 그 사람과 원수지간이 되는 것을‘척 짓는다’고 합니다.

 



선천의 역사는 악척의 역사였습니다. 피의 역사요, 보복의 역사요, 저주의 역사였습니다. 이런 사례는 수없이 많습니다. 그러니 사람은 세상을 좋게 살아야 합니다. 덕을 베풀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남 잘 되는 것 못 보고 남에게 해코지를 하면, 반드시 척을 받아 생을 좋게 마감할 수 없습니다. 해코지당한 사람들이 죽은 뒤 척신이 되어 가해자는 물론이고 그 자손 대까지 쫓아다니며 철저하게 보복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증산 상제님께서는 ‘척이 없어야 행복하게 잘 살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상말에 ‘무척 잘 산다’이르나니‘척이 없어야 잘 산다’는 말이니라. (2:103:1)

 

“무척 잘 산다”에서 ‘무척’은 요즘에는 ‘다른 것과 견줄 수 없이’, ‘대단히’라는 뜻으로 쓰입니다. 그런데 상제님은 이 말을 ‘남과 척이 없다. 남에게 미움 사는 게 없다’는 의미라고 풀어 주셨습니다.

 

‘뱃속 살인’이 남기는 하늘을 꿰뚫는 원한

 

원과 한의 실상을 밝혀 주신 상제님께서는 역사상 처음으로, 사람으로 태어나지 못하고 죽은 자의 원한에 대해 무서운 말씀을 하셨습니다. 바로 낙태아의 원한입니다.

 

뱃속 살인은 천인공노할 죄악이니라. 그 원한이 워낙 크므로 천지가 흔들리느니라. (2:68:1~2)


태아는 부모의 합궁으로, 음적 기운인 어머니의 난자와 양적 기운인 아버지의 정자가 만나서 만들어집니다. 이 태아가 온전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입혼入魂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하늘사람[神, 魂]이 그 집안 조상신들의 입회하에 어머니 자궁 속 태아에게 들어가는 것입니다. 입혼식이 거행된 후, 태아는 모태 속에서 조상신의 음호를 받으며 출생하는 순간까지 성장합니다

.

그런데 임신 중절을 하면 태아의 영靈과 육肉이 갈가리 찢기고 유린되어 그 신명은 철천지한徹天之恨을 품고 천지간을 떠돌아다니게 됩니다. 밤톨만 한 신체, 잘려 버린 손과 발, 처참하게 찢겨진 상처!

 

영으로 보면, 낙태당한 그 어린 신명들도 우리와 똑같이 생각도 하고 감정을 갖고 있습니다. 그 신명들은 수십 수백 명이 어깨동무를 하고 떼를 지어 몰려다니며 원망이 가득 찬 눈으로 우리를 노려봅니다.

 

그런데 그 신명들은 정상적으로 살 수가 없기 때문에 자살을 합니다. 자기를 완전히 소멸시키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명의 자살 사건입니다. 달리는 차에 뛰어들어 박치기를 하거나, 전쟁터에 가서 쏟아지는 포탄에 몸을 던져 자기를 해체시켜 버립니다. 그래서 상제님이“예로부터 처녀나 과부의 사생아와 그 밖의 모든 불의아의 압사신壓死神과 질사신窒死神이 철천의 원을 맺어 탄환과 폭약으로 화하여 세상을 진멸케 하느니라” (2:68:3~5)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천지는 신명들의 원한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것은 도덕적으로 교화敎化를 한다고 해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닙니다. 이미 그 경지를 벗어난 것입니다. 물론 해결되는 경우도 있겠지만, 여름철 말까지는 대세가 이렇게 원한의 역사로 둥글어 갑니다. 결국 상제님이 오셔서 모든 인간 문제가 크게 한 번 정리되어야 새 세상을 열 수 있습니다.

 

역사상 가장 뿌리 깊은 원한은

 

그러면 그동안 이 세상을 살다간 신명들 가운데 누구의 원한이 가장 뿌리 깊으며, 역사에 가장 큰 영향을 주었을까요? 이것은 인류의 고통 문제를 역사적인 안목에서 볼 수 있게 해 주는 중요한 문제입니다.

상제님은 역사상 가장 큰 원한은 바로‘단주丹朱의 원한’이라고 하셨습니다. 단주는 누구일까요? 단주는 지금부터 4천3백 년 전, 요순시대 요堯임금의 맏아들로 왕위를 물려받을 왕자였습니다.

 

요순시대라 하면 일반적으로 요임금과 순임금이 성인의 도덕으로 나라를 다스린 태평성대라고 알려져 있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순자荀子』,『 한비자韓非子』,『 죽서기년竹書紀年』,『급총죽서』같은 고전에 그 실상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임금은 처음 왕위에 오를 때에도 무력으로 자기 이복형을 내치고 자리를 차지하였습니다. 당시 요임금이 천하를 무력으로 정벌하면서 사람을 워낙 많이 죽여 세상이 온통 피로 물들었다고 합니다. 그 무렵 9년 홍수라는 대홍수가 있었는데, 상제님은 그때 죽은 사람들의 저주와 피눈물로 9년 홍수가 일어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요임금은 단주의 정치 이념이 자신과 다르다고 해서 단주에게 왕위를 넘기지 않았습니다. 신하들이 단주를 후계자로 주청하였으나 요임금은 단주가 불초不肖하다고 하면서, 혈육이 아닌 순舜에게 왕위를 넘기고, 두 딸까지 주어 순을 사위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단주에게는 바둑을 만들어 주면서 ‘바둑이나 두며 세월을 보내라’하고 변방으로 쫓아 보냈습니다.


단주는 본래 동방족과 서방족을 하나로 통일하여 대동세계를 만들려는 원대한 꿈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 요임금 때문에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어 버리고 바둑으로 소일을 하며 살아야 했으니 그 원한이 얼마나 사무쳤겠습니까?


이에 상제님께서 ‘단주의 그 깊은 원을 누가 만의 하나라도 알아 주리오’하시고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원한의 역사의 뿌리인 당요의 아들 단주가 품은 깊은 원寃을 끄르면 그로부터 수천 년 동안 쌓여 내려온 모든 원한의 마디와 고가 풀릴지라. (2:24:4~5)


천지에 쌓인 원한을 끌러 내려면 원한의 뿌리인 단주의 원한부터 끌러야 한다는 것입니다. 단주의 원한을 끌러 주면 다른 원한도 자연스럽게 모두 해소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치유의 도道이며 구원의 도,‘ 해원’


이렇듯 상제님 진리는 그 바탕이‘해원解寃’입니다. 해解는 ‘푼다, 끌러 낸다, 해소한다, 해결한다’는 뜻이고 원寃은‘원통할 원 자’입니다. 해원이란 선천 상극 질서 속에서 생겨난 모든 원한을 끌러 낸다는 뜻입니다.


해원을 통해서 상극 세상이 완전히 극복됩니다. 그리하여 진정으로 모든 생명이 하나 되어 웃음으로 살고 서로 잘 되게 받들어 주는‘상생의 세상’이 열립니다. 상제님은 해원으로써 상생의 도를 열어 놓으신 것입니다.


해원은 본질적으로 인간 생명의 본체인 마음을 치유하는 길입니다. 그리고 인간이 살고 있는 사회, 역사, 문명의 모든 구석, 심지어 자연까지 치유하는 생명의 도입니다. 원통함을 끌러 내는 것, 이것은 참으로 강력하고 보편적인 구원의 도입니다!


선천 세상의 성자들은 우주의 상극 질서를 전혀 인식하지 못한 채‘서로 사랑하라, 자비를 베풀라’는 인간 삶의 방식에 대한 원론적인 가르침만 내려 주었습니다. 물론 그런 가르침도 필요하지만 그것만으로는 하추교역기에 인간이 안고 있는 모든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해 주지 못합니다. 상제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을 하신 연유가 바로 이 때문입니다.


공자가 알고 하였으나 원망자가 있고, 석가가 알고 하였으나 원억寃抑의 고를 풀지 못하였거늘. (2:95:3)


선천 성자들은 결코 중생의 한과 원통함을 못 풀었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도, 공자도, 석가도, 노자도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인류사에서 가장 크고 뿌리 깊은 원한이 아직 맺혀 있는데, ‘원수를 네 몸처럼 사랑하라!’또는‘마음을 닦으라!’고만 하면 되겠습니까? 이 문제는 오직“공자, 석가, 예수는내가 쓰기 위해 내려 보냈느니라”(2:40:6)고 선언하신 우주의 주권자 상제님만이 끌러 주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천 여름철 말에 상제님께서 인간 세상으로 내려오셨습니다.



twitter facebook kakaotalk kakaostory 네이버 밴드 구글+
공유(greatcorea)
도움말
사이트를 드러내지 않고, 컨텐츠만 SNS에 붙여넣을수 있습니다.
7개(1/1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