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진국(발해)와 통일신라의 남북국시대

2010.05.11 | 조회 5264

고조선 말기 여러 제후국들이 독립 세력으로 등장했던 이 시대를 ‘열국시대’라 일컫는데, 가장 유력했던 나라가 북부여, 옥저, 동예, 낙랑국, 원시 고구려(고리국), 남삼한(진한, 마한, 번한) 등이다. 이때는 명분상 가장 강한 나라가 고조선 왕실을 계승한 패자(영도국)로 군림했는데, 맨 처음 패자로 등장한 나라가 북부여 였다. 북부여는 BC 239년에 ‘해모수’에 의해 건국되었다. 해모수는 BC 195년까지 통치를 했으며, 북부여는 BC 58년에 고구려가 건국될 때까지 6명의 단군이 재위를 했다.

해모수는 중국의 진시황과 동시대인데, 당시 진시황이 만리장성을 쌓은 것은 흉노 뿐 아니라 북부여를 막기 위해서였다. 즉 만리장성 동쪽은 전부 우리 동방민족의 세력권이었던 것이다.  

북부여의 여섯 번째 단군인 고무서 단군에게는 아들이 없고 ‘소서노’라는 딸이 있었다. 소서노와 결혼한 사람이 바로 고구려를 건국한 고주몽성제다. 고주몽성제는 북부여를 계승해 오다가 BC 37년 ‘고구려’라고 국호를 바꾼다.『삼국사기』에 보면 고구려 건국이 BC 37년, 백제는 BC18년, 신라는 BC 57년이라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본래 고구려 건국은 BC 58년이며 처음에는 ‘다물’이라는 연호를 썼다. 그런데 BC 37년에 국호를 ‘고구려’로 바꾸고 ‘평락’ 이라는 연호를 쓰게 되면서 이때부터를 고구려 건국으로 잡은 것이다.  

열국시대를 지나 사국시대로 넘어가는데, 부여, 옥저, 동예는 고구려에 귀속되고, 남삼한 중 마한은 백제에, 진한은 신라에, 번한은 후에 가락국(가야)에 귀속된다. 그리하여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의 사국시대(삼국시대가 아님)가 열려 중국의 전국시대와 비슷한 양상을 보이게 된다.

사국시대 이후 시대를 우리는 통일신라라고 배웠다. 그러나 정확히 말하면 통일신라가 아니라 남(통일신라)과 북(발해)의 ‘남북국시대’로 이어진다. 신라의 통일은 사실상 대동강 이남으로 한반도의 2/3밖에 차지하지 못한 불완전한 통일이었다. 


반면 압록강 이북의 넓은 고구려의 고토(古土)에는고구려의 계승자인 대진국(大震國: 발해渤海, 669~926)이 건립되었다.  

AD 668년에 고구려의 수도가 나당연합군에 의해 함락되었지만 압록강 북쪽에는 항복하지 않은 고구려의 11개 성과 고구려 군으로 참전한 말갈족이 여전히 항거하고 있었다. 고구려의 유장 대중상(大仲象)과 대조영(大祚榮)은 고구려 유민과 말갈의 여러 부족을 거느리고 백두산 아래 송화강 유역에 새 나라를 세우고 나라 이름을 진(震, AD 669년)이라 하였으며, 신라에서는 북국(北國)이라 불렀다. 이후 국호가 발해, 해동성국으로 불리게 된 것은 다음과 같다.  

국초에는 나라의 국세가 아직 떨치지 못하여 당과 강화를 맺고자 했는데 국호를 둘러싸고 심각한 문제가 생겼다. 대진국은 기왕이면 대외적으로 고구려라 하고 싶었고 당은 말갈이라 부르려 했다. 옥신각신하다 서로 한발 짝 물러나 당에서 타협안을 내놓은 것이 발해(渤海)다. ‘해동(海東)은 당신들 땅이다’라는 뜻이다. 대진국은 이것을 일단 수용했으나 스스로 고구려의 후계자이자 부흥자임을 자임했다. 


발해 제3대 문왕 때 일본에 보낸 국서에도 ‘고구려왕’이라고 자칭했다. 훗날 대진국이 국세를 크게 떨쳐 마침내 당을 넘보게 되자 두려워진 당은 발해라 하지 않고 해동성국(海東盛國)’이라는 극히 호화로운 국호를 바쳤다. 대진국은 신라와 평화적 국교는 없었지만 반도의 방파제 구실을 하며 민족사의 마지막 전성기를 구가했다.  


반면 신라는 백제를 차지하고, 정복한 고구려를 당에게 헌상하는 파렴치한 민족반역죄를 범했다. 그래서 일각에서는 신라의 삼국통일을 ‘망국통일’이라고 부르고 또는 ‘통일이 아니다’는 과감한 주장도 한다. 또한 신라는 상고시대로부터 우리 민족이 전통적으로 믿어왔던 상제신앙을 버리고 외래종교인 불교를 국교로 받아들임으로써 민족의 전통을 무너뜨리고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겸손하게도 스스로 당의 신하가 되어 자주성마저 팽개쳤다.  


따라서 고조선의 국통은 북부여로, 북부여는 고구려로 그리고 이후 대진국으로 이어졌다고 봄이 가하다. 

통일신라 말기, 한반도는 후삼국으로 다시 분리되고 이를 고려 왕건이 다시 통일(AD 936년)했다.  
그런데 이에 앞서 대진국은 926년 수도 상경이 거란군에게 함락되면서 발해 백성이 수차례에 걸쳐 집단적으로 고려로 망명해갔다. 그리하여 고려가 후삼국과 발해 유민까지 받아들이면서 비로소 통일을 이룩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때 통일은 되었지만 요동의 옛 영토의 대부분은 남의 땅이 되어버렸다. 이것은 고려 태조 왕건이 오로지 후백제 정복에만 열을 올려 기울어가던 대진국을 돕는 데는 무심했기 때문이다. 반도통일을 달성한 뒤에 부랴부랴 북진정책을 한답시고 거란 사신을 귀양보내고 선물로 가져온 낙타는 만부교에서 굶겨 죽였으니 때늦은 후회일 뿐이다.  

발해가 멸망하면서 우리 한민족의 역사무대는 진(震)방에서 간(艮)방으로, 대륙사에서 반도사로 좁혀졌다.발해가 한민족(韓民族)으로서는 대륙의 마지막 주인이었던 것이다. 이후 우리 역사는 민족수난기로 접어들어 중세의 고려·조선과 일제강점기를 거쳐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우리 한민족의 역사는 환국시대로부터 배달환웅, 단군조선, 열국시대, 사국시대, 남북국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 일제강점기를 거쳐 대한민국으로 이어져 내려온 것이다. 그러니 과거의 국사 교과서에서 오로지 한사군, 신라 중심으로 배운 우리 국사가 얼마나 기만적이고 날조된 역사였는지를 알 수 있다.  

지금은 한반도 구석자리에 보잘 것 없는 나라로 위축되었지만 우리 선조들은 동북아의 광활한 영토를 호령하며 인류문명의 시원을 이루었던 웅대한 민족이었던 것이다. 이제 원시반본의 우주의 가을개벽시대를 맞아 우리는 반드시 우리의 역사를 되찾아야 하고 또한 되찾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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