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를 잇는 개척開拓과 창업創業 주周 문왕과 무왕

2015.04.15 | 조회 8431

대를 잇는 개척開拓과 창업創業 주周 문왕과 무왕


증산도의 진리 성전인 도전道典 말씀 속에는 천지공사의 진리 구성과 관련된 수많은 역사 인물들이 등장한다. 우리가 상제님 진리를 보다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역사 인물들에 대한 기본 정보와 더불어 시대와 사건의 배경 및 관련 공사 등을 종합해 입체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을미년에는 그러한 작업의 일환으로 ‘도전 인물열전’이라는 제하의 기사를 연재하기로 하였다. 이번 호에는 첫 순서로 개척과 창업의 상징인 주周나라 문왕文王과 무왕武王의 이야기를 다루어 본다. 


*상제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선천의 도정(道政)이 문왕(文王)과 무왕(武王)에서 그쳤느니라.” (道典 2:27:1)
*상제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문왕(文王)은 유리(羑里)에서 384효(爻)를 해석하였고 태공(太公)은 위수(渭水)에서 3,600개의 낚시를 벌였는데 문왕의 도술은 먼저 나타났거니와 태공의 도술은 이 때에 나오느니라” (6:9:1-3)
*상제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문왕(文王) 도수가 있으니 그 도수를 맡으려면 극히 어려우리라.” (5:207:3)


두 남자 이야기, 그 첫 번째


한 남자가 있었다. 그는 중원의 서북부 황토고원 일대를 다스린 지도자였다. 그의 할아버지인 고공단보古公亶父는 막내아들 계력季歷과 며느리 태임太任주1 사이에서 태어난 그에게 성인의 기운과 자질을 보았다. 그가 어렸을 때 입에 ‘붉은 글씨’를 문 주작朱雀이 집 문 앞에 떨어지는 일이 있었는데, 이는 그가 통치하게 되면 그의 족속이 크게 흥성할 것이라는 상서로운 징조였다. 이 일로 고공단보는 그를 특별히 아끼게 되고, 후계 자리를 그에게 넘겨주고자 했다. 이를 눈치 챈 큰아버지들인 태백과 우중은 그에게 자리가 돌아갈 수 있게 동생 계력에게 지도자 자리를 양보하고 남방으로 내려가 오나라를 세웠다. 그는 아버지 뒤를 이어 통치자가 되니 시조인 후직后稷(이름은 기棄, 동이족 출신인 제곡고신의 정비 소생)으로부터 15세손의 통치자가 되었다. 

그는 아버지 계력이 제정한 법도를 본받아 어진 정치에 힘쓰고 노인을 공경하며 젊은이들을 아꼈다. 어진 사람에게는 자신을 낮추어 예로 대하고, 한낮이 되도록 밥 먹을 겨를도 없이 선비들을 접대하니 많은 선비들이 그에게 귀의하였다. 그러나 이게 화근이 되었다. 그의 명성이 날로 높아지자 그를 시기한 이의 참소로 그는 유리ㅇ里(지금의 허난 성 탕음현)에서 기약 없는 유배생활을 하게 된다. 이에 후환을 없애기 위해 임금(상商나라 주紂왕)은 그의 큰아들 백읍고伯邑考를 인질로 삼은 다음 자신을 위해 수레를 몰게 했다. 하지만 얼마 뒤에는 그가 진짜 ‘성인聖人’인지 여부를 시험해본다며, 아들 백읍고를 죽여 가마솥에 넣고 푹 끓여서 삶은 국물을 마시게 했다. 그러면서 주위 사람들에게 “내 눈으로 직접 그가 성인인지 아닌지 확인해야겠다. 만약 성인이라면 자기 아들의 고기라는 것을 알 것 아닌가?”라고 말했다. 이에 그는 가슴 속 울분과 눈물을 삼키며 모른 척 아들을 삶은 곰탕을 다 먹었다. 그 뒤 그가 그동안 먹은 것을 모두 토해내니, 작은 무덤(토분吐墳)이 되었다고 한다. 생명이 위협받는 7년 유배 생활과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그는 태호 복희씨께서 그리신 8괘를 64괘 384효로 해석해 현재의 주역을 만들어내며(연역衍易)주2 문명의 빛을 열고 때를 기다렸다.

그는 더 큰 대업을 위해 뇌물로 여자와 준마, 진귀한 보물들을 바치고 풀려난 뒤 낙서 서쪽 땅(위수의 지류로 지금의 산시 성 함양 서쪽)을 바쳤다. 그 대가로 포락炮烙이란 형벌을 없애 줄 것을 원했다. 포락형은 충언을 하는 신하나 불만을 품은 백성들에게 가하는 것으로 아래에 불이 활활 타오르게 하고 그 위에 기름칠을 한 구리 기둥을 올려놓고서 죄수에게 기둥 위를 걷게 하는 형벌이다. 뜨거움을 참지 못하고 불덩이 속으로 떨어지면 타죽게 되므로 죄인은 숯불 위로 떨어지지 않기 위해 발버둥을 치면서 구차하고 치욕스럽게 목숨을 구걸하게 되는데, 주紂왕과 그의 애첩인 달기는 이를 보면서 조롱을 하는 잔인함을 보였다. 그의 형벌 폐지 요청에 대해 뜻밖에도 주紂왕은 이를 받아주었고, 그에게 활과 화살, 큰 도끼를 주며 주변 제후국을 토벌할 수 있는 권한도 주었다. 이에 그의 덕행은 또 한 번 크게 민심을 얻었고, 제후들이 그에게 달려와 그의 세력은 점점 커졌다.

치욕과 고통을 참아내며 그는 조용히 국력을 길러 나가고 점차 민심을 얻어갔다. 그는 물질적 욕망을 최대한 억제하고, 사치와 음탕은 물론 지나친 방종은 추호도 용납하지 않았다. 엄격하게 자신을 통제했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관대했다. 이렇게 하여 그가 다스리는 지역 인민들은 소박하고 근면한 미덕을 유지하면서 검소한 생활을 유지해갔다. 그는 조심스럽게 그리고 부지런히 자신의 나라를 다스렸다. 한 순간도 게으름을 피우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이런 그의 덕치를 보여주는 사례가 있다. 그의 세력이 강성해지니 제후들이 그에게 와서 공정한 판결을 청했다. 이때 우虞와 예芮 지역의 제후들 사이에 해결할 수 없는 송사가 발생해 그를 찾게 되었다. 그들이 주나라 영토에 들어서자 밭을 가는 사람들은 모두 밭의 경계를 서로 양보하고, 백성들은 나이 많은 사람에게 양보하는 풍속을 보고, 사사로운 욕심을 부리거나 사소한 이익을 놓고 다투던 그들은 그를 만나기도 전에 부끄러워하며 서로 양보하고 돌아갔다. 그는 말보다는 생생한 덕정德政을 베푼 결과로 제후들을 교육시켰고, 간단하게 영토분쟁을 해결했다는 소식이 천하에 널리 퍼져 그를 따르는 제후가 마흔이 넘었고, 사람들은 그가 천명을 받았다고 했다.

50년간 나라를 다스린 그는 생전에 조부인 고공단보를 추존하여 태왕太王이라 했고, 아버지인 계력을 높이어 왕계王系라고 했다. 또한 스스로의 법령과 달력 체계를 채용하였다. 내정을 개혁하고, 생산을 발전시키며, 인재를 중시하였고, 위수 이북인 반계磻溪에서 걸출한 군사, 정치전문가인 강상姜尙(태공망, 강태공, 강여상, 강자아라고도 불림)을 얻게 된다. 그는 생애 마지막 7년 동안 중원의 3분의 2를 차지하며 천명을 기다렸다. 서북의 소국들을 차례로 정벌하여 후방을 안정시킨 다음 힘의 중심을 동쪽으로 이동했다. 그는 도읍을 기산 아래에서 풍읍豊邑(지금의 산시 성 호현 동쪽)으로 이동하여 중원 통일의 마지막 준비 작업에 착수했다. 만반의 준비가 갖추어질 무렵 그는 큰 병을 얻고, 불행히도 세상을 뜨고 만다. 천명을 받고 천하를 안정시키려고 절치부심하던 그는 한 많은 인생을 남기고, 중원 제패라는 대업을 그 아들 대로 넘겨주고 만다. 그는 주周나라의 실질적인 창업자로 후에 주周 문왕文王이라 일컬어지는 서백西伯(서쪽의 맹주) 창昌이다.

두 남자 이야기, 그 두 번째


그리고 또 다른 남자가 있었다. 이제 이 밤이 지나 동이 트면 그는 아버지의 한을 풀고 중원을 제패하게 될 것이다. 그의 눈빛은 형형했다. 

형은 억울하게 참살을 당했고, 아버지는 그 형을 끓인 곰국을 먹어야 했다. 평생을 대업을 위해 울분과 치욕을 참아내며 국력신장을 해온 아버지의 바람을 이룰 때가 되었다. 이제 천하 만민을 편하게 할 것이다. 동쪽의 천자국으로부터도 승낙의 명이 내려 왔다. 나는 주周나라 창업자 무왕武王 희발姬發주3이다.

천하 만민의 삶을 위해, 동방 천제의 나라에 역逆한 상나라를 칠 것이다! 내 아비와 형의 원한을 갚고자 경검輕劍(주周무왕이 자살한 상商나라 주紂왕의 시신을 내리친 검)을 들었다. 칼이 울고 있다. 이제 천명은 상나라의 제신帝辛(주왕紂王)이 아닌 나에게 온 것이다. 11년의 세월을 기다렸다. 그동안 나는 태공망을 ‘사師’로 삼고, 동생인 주공周公 단旦은 ‘보補’로 삼았다. 다른 동생인 소공召公 석奭과 필공畢公 고高 역시 나를 보좌하여 아버지의 위업을 본받게 했다. 2년 전 우리는 아버지 주周 문왕文王의 피 맺힌 한을 한시바삐 풀어드리고자 필에서 제사를 올리고 동쪽으로 가서 군대를 사열하고 멍진盟津(지금의 허난성 뤄양시 동북쪽 황하 연변에 있음)에 이르렀다. 거기서 나는 문왕의 뜻을 받들어 정벌함을 밝혔고 군대를 일으켰다. 사상보師尙父주4는 제후들을 호령하였고, 강 중류에 이르렀을 때, 흰 물고기가 내 배 안으로 튀어 올랐다. 나는 몸을 숙여 물고기를 들어 제를 올렸다. 이 때 모인 제후의 수가 800으로 모두 주왕紂王을 정벌할 수 있다고 했으나, 동방 조선의 천제님으로부터의 천명은 이르지 않았다. 이에 군사를 되돌려 때를 기다렸다. 이제 그 때가 온 것이다. 상商나라의 제신은 어리석음과 포악함이 갈수록 심하여 직언하던 숙부 비간比干을 죽이고 기자箕子는 감금하였다. 이에 나는 제후 모두에게 “은殷(=상商)나라주5 주왕의 죄가 너무 무거워 정벌하지 않을 수 없다”고 알려 다시 한 번 회맹을 명령하였다. 출정 길에 고죽국 출신 백이伯夷와 숙제叔齊라는 늙은이들이 내 말고삐를 잡으며, 인과 의로 만류하였으나, 제폭구민의 대의에 불타 있었던 나에게는 한가한 도덕설에 불과하였다. 

이제 진군 뿐! 그런데 상나라의 저항은 만만치 않았다. 세찬 눈보라와 비바람처럼 우리의 행군을 방해하였다. 이 때 홀연히 동이의 족속들과 황하의 하백족이 천명이 우리에게 있음을 말하고는 도와주었다. 간신히 상나라 군대의 저항을 물리쳤다. 이 때 나는 태서太誓(주 무왕이 상의 주왕을 정벌하기에 앞서 제후들을 모아놓고 맹세한 문장으로 세 편이 있음)를 지어 모두에게 선언하였다. “이제 나, 발은 천벌을 삼가 집행하려 하오. 노력하시오. 서방의 병사들이여! 그대들의 창을 들고 방패를 맞추시오. 옛 사람들 말에 ‘암탉은 새벽에 울지 않는다. 암탉은 새벽에 울면 집안이 망한다’주6고 하였소. 지금 은왕 주는 오로지 부인의 말만 듣고 스스로 선조에 대한 제사와 신령에 대한 답례를 돌보지 않고 내팽개쳤으며, 자기 나라를 멸시하며 저버렸소. 이에 이 사람 발發이 여러분들과 함께 삼가 천벌을 대행할 것이오. 힘을 냅시다! 명령을 따르지 않을 시에는 그대들에게 죽음이 돌아갈 것이오!”라고. 이제 그 때가 되었다. 아버지의 유업을 이룰 때가. 우리 주나라가 천하를 제패할 때가.

상주商周 교체기의 진실, 목야대전牧野大戰과 그 이후


2월 갑자일, 멍진을 건넌 주의 군대는 상나라 교외의 목야牧野(지금의 허난성 치현 남서부 지역)에 진을 쳤다. 이때 주 무왕은 왼손에는 누런색 큰 도끼를, 오른손에는 소꼬리가 달린 흰색의 깃발을 휘두르며주7 진격을 명령했다. 주의 군대는 전차 300대와 군사 3,000명, 갑옷으로 무장한 병사 4만 5,000명. 상나라의 제왕 자수신子受辛(주왕紂王의 원래 이름)은 주무왕의 군대가 수도인 조가朝歌 근처에 이르자 가만히 앉아 있지 않고 70만 대군을 동원하였다. 이에 강태공은 100명의 용사로 싸움을 걸게 하면서 주력부대는 주왕을 향하여 돌격하게 했다. 드디어 천하 쟁패의 치열한 공방전이 목야들녘에서 벌어졌다. 

당시 중원의 패자는 성탕成湯이 세운 상나라였다. 초기 상나라는 단군조선檀君朝鮮을 문화의 조국으로 받들었으나, 12세 하단갑河亶甲 때부터 조공을 바치지 않았고, 22세 무정武丁에 이르러서는 급기야 단군조선의 변방을 침범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조선의 21세 소태蘇台 단군과 22세 색불루索弗婁 단군은 상나라를 쳐 대파하였다. 이 후 상나라는 국운이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마지막 임금인 31세 제신帝辛(주왕紂王)은 총명하고 말재간이 뛰어났으며 일 처리가 신속하고 맨손으로 맹수와 싸울 정도로 힘이 강해 문무를 겸비한 인재였다. 하지만 재능이 많아도 마음이 바르지 못하면 그 재능이 도리어 자신에게 해가 되는 법, 자신의 재능만 믿고 교만한데다 임금의 자리이다 보니 그 안하무인의 행동은 더욱 심해졌다. 스스로를 상제님에 비겨 천왕이라 칭하는 등 참람한 행동을 하며 단군 조선과 대립되는 행동을 취했다. 또한 술과 음악, 여색을 지나치게 좋아하였고, 특히 달기妲己를 총애하여 그녀의 말이면 무엇이든 들어주었다. 세금을 무겁게 부과하고, 유능하고 어진 자를 멀리하고 간사한 자를 중용하여 민심을 흩어놓고 원망이 들끓게 했다. 무리한 토목 공사를 벌여 녹대라는 궁궐을 7년에 걸쳐 지었다.주8 그 외에 경실瓊室과 요대瑤臺라는 아름다운 옥으로 치장한 궁궐에 사구沙丘라는 넓은 정원을 조성하여 그곳에 온갖 진기한 짐승들을 수집해 풀어놓았다. 하夏나라의 걸왕桀王을 본받아 바로 이 사구에 술로 연못을 만들고(주지酒池), 나무에 고기를 열매처럼 매달아 놓은(육림肉林) 뒤, 그 안에서 남녀가 벌거벗고 밤이 새도록 음란한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추며 음란한 짓거리를 일상적으로 하였다. 주왕은 자신의 뛰어난 능력을 백성들이 아닌 자신의 쾌락을 위해 발휘하였다. 여기에 충언을 하는 신하를 포락의 형으로 죽이는 잔혹함을 보였다. 이런 폭정은 결국 민심을 잃게 되었고, 다수의 동이인 들이 무왕의 대업에 협조하게 되었다.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강태공이었다. 

다시 천하의 대세를 판가름하는 당시 목야 전투로 돌아가 보자. 이 전투는 어찌나 참혹했던지 피가 강물이 되어 흘렀고, 그 위로 병장기가 둥둥 떠다닐 정도였다고 한다. 상나라 주왕紂王을 토벌하는 주무왕 연맹군은 일치단결한 정의의 힘이라면, 상나라의 군사들은 급조된 오합지졸에 불과하였다. 이에 상나라 주왕의 군대 수는 비록 많았지만, 모두가 싸울 마음이 없었고 오히려 무왕이 빨리 공격해 오기를 바라고 있던 터라 무기를 거꾸로 돌리고 무왕에게 길을 터주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무왕의 군대가 상나라 수도를 함락시킬 위기에 처하자. 상나라 군사들은 주왕의 곁을 떠나 모조리 흩어져 버렸다. 주왕은 도망가서 녹대의 꼭대기로 올라가 보옥寶玉으로 치장한 옷을 입고 불기둥 속으로 몸을 던져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로써 6백년을 이어온 상나라는 멸망하게 되었다.

무왕이 은나라 도성에 입성하기 위해 행군을 계속하자 백성들은 모두 성 밖으로 나와 무왕이 오기를 기다렸다. 그래서 무왕은 군신들로 하여금 상商나라 백성들을 향해 큰 소리로 알리게 하였다. 

“하늘에 계신 상제님께서 그대 백성들에게 큰 복을 내리셨도다!” 

무왕이 손으로 대백기大白旗를 흔들며 제후들을 지휘하였다. 제후들이 모두 무왕을 향해 배례拜禮를 드리자 무왕도 역시 두 손을 높이들이 읍을 하여 예를 취했다. 무왕은 하늘을 대신해 벌한다는 명분으로 주왕의 시신과 요부 달기의 시신에 활쏘기를 하고 군기에 그 목을 효수하고, 대업을 이루었음을 널리 알렸다.

이후 단군조선의 거수국(渠帥國: 단군조선의 제후국을 가리킴)주9 제도를 본 뜬 것처럼, 영토를 형제들과 공신들에게 분봉했다(세계 최초의 봉건제封建制). 동생인 주공은 곡부曲阜에 도읍을 정해 노魯나라를 건립하게 했고, 주왕紂王의 아들 무경武庚을 상나라 도읍에 남겨 은후殷侯로 책봉하여 상조의 유민들을 안정시켰다. 특히 신경을 쓴 점은 강태공을 영구營丘에 도읍을 정해 제齊나라를 건립하게 한 점인데. 이는 그의 공적에 대한 포상이기도 하지만 동이족 출신인 강태공이 주 왕실에 비협조적인 산동지역 동이족을 다스릴 적임자였기 때문이다. 무왕 이후 주나라는 이전 왕조들과 마찬가지로 단군 조선에 조공과 방물을 바쳐 예를 표하며 정치의 안정, 경제의 발전, 사회 문화의 번영을 이루어 나가 문왕과 무왕 2대에 걸친 개척과 창업의 역사는 그 결실을 맺게 되었다.

주1. 태임(太任)은 계력의 처로 주 문왕 창을 낳는다. 시어머니인 태강 太姜, 며느리인 문왕의 처 태사太姒와 함께 ‘삼현모’로 불린다. 3대에 걸친 현모들의 덕으로 주나라는 중원대륙을 통치할 수 있었다. 조선시대 율곡 이이의 어머니인 신사임당은 바로 이 태임을 본받기 위해 자신의 당호를 사임당(師任堂)으로 했다.

주2. 주문왕이 유리에 갇혔을 때 8괘를 64괘로 풀이하였다는 것을 전설로만 여겼는데, 최근 주의 갑골에서 역의 괘와 비슷한 숫자들이 발견되면서 문왕의 64괘설이 주목을 받고 있다.

주3. 희姬는 주나라 왕족의 성이다. 참고로 상나라 왕족의 성은 자子씨이다. ‘성’과 ‘씨’는 원래 두 개의 다른 개념이었다. 한 조상에서 나오면 같은 ‘성’이고, 같은 ‘성’을 어떤 이유 때문에 구분할 때 이를 ‘씨’라 하였는데 이후 구분이 모호해져 섞여 사용되었다.

주4. 강태공을 말한다. 당시 강태공은 군사와 정치 전반을 책임지는 ‘사師’라는 벼슬에 있었기 때문에 사상보로 불렸다. 여기서 상보尙父는 존칭으로 관중을 ‘중보仲父’라 부른 것과 같은 맥락이다.

주5. 은殷나라는 상商나라를 달리 부르는 명칭이다. 상나라는 여러 차례 수도를 옮겼는데, 반경왕이 마지막으로 옮긴 수도가 은殷이었기 때문에 ‘은나라’라는 명칭이 생겨났다. ‘은’이라는 이름도 많이 알려져 있기는 하나, 개국 이후 나라를 세운 부족 이름인 ‘상商’이라는 이름을 더 많이 사용했기 때문에 학계에서는 ‘상’으로 통일해 부르고 있다. 

주6. 古人有言曰, 牝鷄無晨, 牝鷄之晨, 惟家之索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 악명 높은 명언은 주周 무武왕이 상商의 주紂임금을 치면서 옛 속담을 인용하여 제후들에게 한 말이다. 이는 상 말기, 나랏일에 달기 등 아녀자가 간섭한 것을 비유하여 한 말로, 본 뜻은 주 임금에 대한 비난으로 여성에 대한 비하는 아니다. 

주7. 정벌에 따른 권위를 상징하는 기물로 큰 도끼는 죽음을, 오른손 깃발은 교령敎令을 나타낸다.

주8. 녹대鹿臺: 지금의 허난성河南省 허비시鹤壁市 치현淇县 차오거진朝歌镇 남쪽에 은나라 마지막 왕 주왕紂王이 지었던 대臺로 한나라 때 학자 가의가 쓴 [신서]의 묘사를 보면 주위가 3리(1.300미터), 높이가 천 척(尺:3백 미터)에 달해 구름이 내려다보일 정도였다고 한다.

주9. 거수제도는 단군 조선의 통치 제도 중 하나로, 단군이 직접 다스리는 영역(도읍과 인근지역)과 도읍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을 거수 즉 제후를 임명해 다스리게 했다. 단군 조선은 거수국 제도를 활용해 크게 세력을 넓히고 오랜 번영을 누렸는데, 부여, 고구려, 예, 맥, 청구 ,낙랑, 구다, 기자조선 등이 거수국에 해당한다. 즉 상(은) 왕실의 후예인 기자가 조선으로 망명해 조선후로 봉해진 것은 기자가 단군조선을 계승해 기자조선을 열었다는 의미가 아니고 단군조선 내에 있던 작은 제후국이었다는 의미이다. 



개척과 창업 - 문왕의 도수(도전 5:207:3)

문왕과 무왕의 이야기는 온갖 시련을 물리치고 대를 이어 마침내 대업을 이루는 개척과 창업의 정신을 담고 있다. 이는 난세의 고통에 처한 천하 만민을 살리고 새로운 세상을 여는 두 지도자의 역정이 인간으로서는 차마 견디기 어려운 고난과 역경으로 점철된 험로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상제님께서는 천지공사의 도업을 마침내 완성(11:19:10 추수도수)할 3변성도의 인사지도자에게 이 문왕의 도수를 똑같이 붙이셨다. 문왕은 상나라 주왕紂王에 의해 아버지와 자식을 잃고 갖은 고난을 당하였으나 이를 극복하고 주周의 천하통일 기반을 다졌고, 그의 아들 무왕에 이르러 대업을 이루었다. 그러므로 문왕의 도수(5:207:3)는 천지부모님이 정하신 천지공사의 도수가 3변 도운의 현실 인사로 완결이 될 때 그 인사人事의 대업을 맡은 일월日月의 두 분 지도자에게 그대로 적용되어 드러나게 된다. 즉 한 분은 극한의 시련과 고통을 백절불굴의 정신으로 극복하면서 마지막 추수도수를 이끌 대업의 기초를 닦고, 또 한 분은 광명한 새문화의 기틀을 열어가면서 개벽기 의통성업을 완결짓고 마침내 추수도운의 대업을 최종 성취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추수도운 인사지도자의 관계는 천지일월 4체도수(4:111:14~15)와 천명도수(4:29:1), 사람 둘 도수(10:27:3), 용봉도수(11:365:3) 등의 공사를 통해서도 확인해 볼 수 있다. 상제님께서 공사를 보실 당시 문왕도수를 맡은 분은 문공신文公信(1878~1954) 성도이다. 그는 외곬 성품 그대로 상제님의 운수를 참되게 받으려고 애쓴 인물이며, 도수 그대로 수많은 고초를 겪었다. 문왕이 유리羑里에 7년간 유배된 것처럼 문왕 도수를 맡은 문공신 성도는 조철제가 도굴한 상제님의 성골을 되찾아오는 과정에서 일본 경찰에게 붙잡혀 7년 동안 서대전 형무소에서 복역(10:140)하기도 했다. 

봉신연의封神演義의 주인공, 강태공

*선천 운수 궁팔십(窮八十) 달팔십(達八十)이요 (11:250:3)

문왕과 무왕의 주나라가 강력한 상나라를 제압하는 데 결정적 기여를 한 인물이 바로 강태공姜太公(강상姜尙, 여상呂尙, 태공망太公望 등으로도 불림)이다. 강태공은 흔히 낚시꾼의 대명사로 알려져 있는데, 바로 문왕에게 등용되기 위해 위수에 있는 반계磻溪가에서 날마다 미끼 없는 곧은 낚시를 하였기 때문이다. 당시 그는 80세로 매우 곤궁하게 살았다고 한다(궁팔십窮八十). 원래 상나라의 봉逢씨 귀족의 후예였지만, 상나라 말기 주왕이 대규모로 동이를 공략할 때 봉씨 후국이 멸망당하였고, 망국의 후예였던 강태공은 주나라로 찾아갔다. 거기서 그는 군사軍師로서의 존엄성을 보이는 제스처를 취하며 문왕과 운명적인 만남을 가졌다. 천하 경영을 둘러싼 문왕과 강태공의 정치적인 문답은 훗날 병법 7서 중 하나인 육도六韜로 내려온다. 그의 식견에 반한 문왕은 그 자리에서 군사軍師로 맞아 들였다. 이후 강태공은 자신의 포부를 마음껏 펼치게 되어 주나라의 내실을 굳건히 다졌다(달팔십達八十). 이후 문왕과 무왕을 보좌하여 상나라를 멸망시켰고, 후에 제나라 땅에 봉해져 여전히 옛 봉국을 이어갔다고 한다. 여기에서 기나긴 고난의 여정 끝에 그만큼의 영화를 맞이한다는 ‘궁팔십窮八十 달팔십達八十’의 고사가 유래되었다. 

16세기 명나라 때 봉신연의封神演義라는 소설이 있다. 마치 트로이 전쟁처럼 상나라를 지지하는 신들과 주나라를 지지하는 신들 사이의 전쟁을 그리고 있는데, 이 전쟁은 강태공이 신통한 도술로 상의 장군과 신들을 굴복시켜 마침내 상商-주周 교체를 이루고, 무왕이 여러 공신에게 봉토를 하사하는 것으로 끝난다. 봉신은 신神을 봉封한다는 의미이다. 이 소설로 강태공은 대중적으로 인기가 있는 인물이 되는데 병법과 도술이 뛰어난 인물의 전형이 된다. 이능화의 [조선도교사]를 보면 입춘 날에 집집마다 대문에 강태공재차姜太公在此 (강태공이 여기에 있다)는 글귀를 써 귀신이나 사악한 기운을 쫓아내는 풍습이 있었다 한다. 이는 도술이 뛰어난 강태공이 불행을 막아줄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다. 
『환단고기』 「신시본기」에 따르면 강태공은 치우蚩尤의 후손으로 치우가 강수姜水에 살았기 때문에 강姜씨가 되었다고 한다. 그는 도술을 닦고 천제를 올렸고, 제나라를 봉토로 받으면서는 팔신八神의 풍속, 즉 신교문화를 전파했다고 한다.

<참고문헌>
증산도 도전, 대원출판, 2003
안경전, 역주 환단고기, 상생출판, 2012
이인호, 이인호 교수의 사기 이야기, 천지인, 2007
김성재, 갑골에 새겨진 신화와 역사, 동녘,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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