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 지원의 심장부, 정읍 보천교 - 개벽문화 북콘서트 부산편16
참동학 증산도에서 알 수 있는 '다시 개벽'
그런데 동학 이후에 지금까지 ‘다시 개벽’의 구체적인 한 소식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기 쉽게 논리적으로 제기한 문화 담론이 거의 없었습니다.
이제 다시 개벽의 실체가 바로 동학의 꿈과 이상을 성취하는 참동학, 무극대도 증산도에서 체계적으로 전수됩니다.
그러면 개벽 문화 담론의 실제 근원이면서 중심지인 무극대도 증산도를 간단히 정리하면서 오늘 말씀을 이어갈까 합니다.
독립운동 지원의 심장부, 정읍 보천교
보천교가 독립운동 자금의 심장부였기 때문에 일제가 탄압을 했습니다. 교주 차경석車京石 성도가 세상을 떠나고 얼마 안 되어서 보천교 건물을 경매에 붙였습니다. 십일전을 뜯어다가 지은 것이 지금 서울 종로 2가에 있는 불교의 총본산 조계사曹溪寺의 대웅전입니다.
1920년대에 김좌진金佐鎭 장군이 청산리 전투에서 승리한 것도 보천교에서 거금 2만 원을 보내 줬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그 돈으로 무기를 사고 군 조직을 정비하여 대승을 거뒀어요.
조만식曺晩植 선생이 정읍 보천교에 잠입해서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받았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보천교를 부정적으로, 흠집을 내는 쪽으로 연구를 한 논문이 적지 않습니다.
실제 정읍은 어떤 곳인가? 이승만李承晩 박사가 1946년 6월 3일에 정읍에 내려와서 중대한 발언을 했습니다. ‘우리 남방(남한)만이라도 임시정부를 조직하자’고 했습니다.
김구金九 주석도 1945년 11월 23일 김포비행장에 들어오면서 ‘우리가 정읍 보천교에 많은 빚을 졌다’고 했어요. 보천교에서 많은 지원을 해 줬다는 것입니다.
정읍은 근대 독립운동의 고향입니다. 그런데 증산도의 초기시대, 6백만 구도자 시대가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서교 중심으로 또는 불교 중심으로 잘못 알려지거나 부정적으로 알려진 것입니다. 일제가 우리의 민족정신을 말살하기 위해서, 한민족 역사의 뿌리를 제거하기 위해서 한국의 자생 종교를 ‘유사종교’, ‘사이비似而非’라 했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한마디 때문에 오늘의 한국인들이 ‘아, 저거 사이비, 시원찮은 민족종교, 얘깃거리도 안 되는 국수주의자들이 9천 년이나 떠든다, 『환단고기』나 떠든다’고 말하고 있어요.
우리가 근대 역사의 전체 대세를 놓고 보면 오늘의 대한민국 역사를 만든 독립운동의 고향이 바로 정읍입니다. 정읍에서는 그런 역사를 제대로 밝히려는 운동이 일기 시작했습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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