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상의 음덕으로 증산도를 만나다

초립쓴30대 | 2009.10.21 11:33 | 조회 1319

김보성(남,26세) / 서울 서초도장 / 도기 133년 음력 8월13일 입문
  
 가끔 내가 걸어 왔던 길을 더듬어본 적은 있지만, 입도시험을 앞두고 이렇게 뿌리부터 더듬어본 적은 이번이 처음인 듯하다.
 지나온 날을 떠올리는 지금 이 순간, 터질 듯한 고통으로 내 뇌리를 스치는 기억들은 현재의 내가 존재할 수 있는 밑바탕이리라.
 
 ▶▶ 어룡도에서의 어린 시절
 어렸을 때 나는 전라남도 완도에서도 더 들어가는 작은 섬 어룡도에서 태어났다.


 그 섬에는 참 재미있는 전설이 내려온다. 먼 옛날 불을 먹는 개와 비를 다스리는 용이 크게 싸워, 결국 개에게 꼬리를 물려 싸움에서 패한 용이 바다에 떨어져 섬이 되었다고 한다.
 
 이 전설을 뒷받침이라도 하듯 섬 앞부분에는 용이 입을 벌린 듯한 작은 만이 형성되어 있고 그 앞에 원형의 작은 섬이 또하나 있는데 이것을 여의주라고 했다. 또한 몸통의 좌우측에는 날개 형상의 산맥이 있으며, 뒤쪽으로는 용의 꼬리와 같이 구불구불한 맥이 섬 전체의 2분의 1 정도의 길이로 형성되어 있을 뿐 아니라, 꼬리의 끝은 개에게 물려 잘린 듯이 밀물 때는 섬이 되고 물이 빠지면 본 섬과 연결되는 마치 모세의 기적과 같은 현상을 보여주는 작은 섬들이 20여 미터의 거리를 두고 존재한다.
 
 섬 주변에는 외부인의 출입을 거부하듯 해류가 섬을 감싸며 흐르고 있어 기계선이 아니면 갈 수 없는 신비한 곳이었다.


 학생수가 6명인 작은 분교에서 수업이 끝나면 친구들과 낚시를 즐기며 바닷가를 뛰어다녔고, 배가 고프면 소라나 미역줄기를 뜯어 먹으며 배고픔을 달랬던 추억들이 빛바랜 흑백사진처럼 내 기억 속에서 유일한 기쁨으로 남아 있다.
 
 아버지는 대단한 폭군이셨다. 할아버지 할머니, 모든 친척뿐 아니라 마을 사람들까지 아버지를 무서워했고 만나기를 꺼려했다. 그런 아버지와 같이 사셔야 하는 어머니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그야말로 하루하루가 고문이었으리라.
 
 상상할 수 없는 고통 속에서 세상과의 연을 끊기위해 약까지 드셨지만 아직 이생에서 이루어야 할 무언가가 남아 있으셨는지 목숨을 건지신 어머니를 생각하면, 지극정성으로 효도해야 한다는 생각이 가슴에 사무쳐 온다.
 
 초등학교 2학년때 아버지의 성격 때문에 섬에서 쫓겨나와 군산의 미군기지가 위치한 마을에서 2년여를 살았으며 4학년이 되었을 때 충남 서산으로 이사를 했다.
 
 
 ▶▶ 힘들었던 학창시절


 4학년이란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나는 시간이 갈수록 말이 없어졌다. 쉬는 시간과 점심때면 교실옆에 있는 호두나무 그늘에 앉아 황량한 운동장을 바라보며 괴로움을 달랬고, 식사를 끝낸 학생들이 운동장으로 쏟아져 나오면 그때서야 교실에 들어가서 점심을 먹었다. 수업이 끝나고 모두들 집으로 돌아가면 단군성조의 동상 옆에서 그네를 타거나 철봉에 매달려 혼자서 놀곤 했다.
 
 집에 들어가면 무서운 아버지가 기다리고 계실테니 되도록이면 집에 들어가기 싫었다. 집이 싫어 밖에서 혼자 시간을 보내야 하는 기분… 어두워지면 어쩔 수 없이 집에 들어가야 하지만, 무슨 일이 어떻게 벌어질지 모르는 공포 속에서 숨쉬기 힘든 하루하루를 살아야 하는 고통이란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것이다.
 
 1년이 지나 서울로 이사를 와서도 똑같은 생활의 연속이었다. 
 방 하나에서 5명의 가족이 생활하기엔 좁았기 때문에 어머니도 일을 하셔야 했고, 그때부터 집안일은 대부분 내 담당이 됐다. 밥, 설거지, 국이나 찌게 정도는 직접할 줄 알아야 했다.
 
 서울에 사시는 큰아버지는 TV와 비디오를 연결하는 잭을 만드는 공장을 운영하셨다. 동생과 나는 방학이 되면 공장에서 열심으로 일을 도왔다. 그때 나는 일반 어른들보다 많은 일을 소화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집에서 하는 일에 비하면 공장에서 하는 일은 쉽고도 재미있었다. 욕먹지 않아도 되고, 맛있는 것도 먹을 수 있었으며 특히 아버지를 안 보는 편안함이란 말로 다할 수 없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칭찬을 들어봤으니 얼마나 열심히 일을 했겠는가. 그후 오래지 않아 큰아버지의 사업도 점차 하향길로 접어들어 고1 이후로는 공장에 가지 않아도 됐다.
 
 어머니는 식당에서 일을 하셨고 아버지는 건축공사장의 목수로 일을 하시며 하루하루를 힘들게 사셨다.
  


 ▶▶ 목적없는 일상에 대한 회의


 어느덧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특허 법률사무소에 취직을 해 한사람의 일꾼으로 열심히 일을 하여 몇개월 지나지 않아 회사에서 인정받고 내 위치를 확고히 하였다.


 그때쯤 부모님의 싸움을 말리다 그만 코가 부러져 수술을 받게 되고 결국 나는 자취를 하게 되었다. 자취하기 전, 어머니가 흘리신 눈물은 아직까지 응어리로 남아 나를 괴롭힌다. 아들 아침밥은 챙겨 줘야 한다며 눈물을 흘리시며, 그릇에 국을 푸시고 밥을 담으시다가 바닥에 주저않아 오열하시던 그 모습을 어떻게 잊을 수 있으랴.
 
 창밖을 보면 가끔, 이 세상을 인간이라는 미개한 존재가 만들었을까 라는 생각이 들곤 한다. 저 멀리서 지나가는 전철에는 하루의 고난에 지친 몸을 이끌고,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야할지도 모르는 길을 운명의 수레바퀴처럼 반복해야 하는 나그네들만이 분주히 움직인다. 회색의 건물들이 즐비한 도심의 어느 작은 창문에서 새어나오는 백색의 빛은, 더이상의 돌파구를 찾지 못한 자들의 유일한 통로처럼 느껴질 뿐이다.
 
 고등학교 때부터 무한의 시간과 공간에 대해서, 사람이 왜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서 질문을 던지곤 했다. 그런 질문이, 가을의 밤잠을 설치게 했고 이 세상 어느 누구도 알 수 없을 듯한 슬픔으로 나를 인도했지만 인간의 영원한 수수께끼를 풀 수는 없었다.
 
 내 성격은 너무 조용하다. 어떻게든 성격을 바꿔야 한다는 생각이 들 때 군대라는 시련이 다가왔다. 해병대를 가면 성격이 많이 고쳐지리라는 생각에 지원하였지만, 순탄하지만은 않은 삶처럼 군대생활도 고난의 연속이었다.
 
 힘든 군생활 속에서도 집안 문제는 언제나 나를 괴롭혔다. 군생활만으로도 벅찬 상황에서, 집안 걱정까지 해야 하는 이중고 때문에 군생활의 목적을 상실하고 원래의 고립된 상태로 보내야만 했다. 하지만 사회에서 열심히 일해서인지 전역하기 전부터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와 그나마 행복한 마무리를 하고 나왔으나 세상은 전과 같이 나를 맞아주지 않았다.
 
 이유도 목적도 없는, 매일 똑같은 일상생활이 싫었으며 사람들이 싫었다. 필요하면 도와 달라 요구하다 더이상 필요성을 못 느끼면 등돌리는 사람들에 치이다 보니 끝모를 감정이 나를 더욱 힘들게 했다.
 

 ▶▶ 천도식을 올리고 진법의 도를 만나다


 이런 와중에 우연히 대순진리회를 만나 삶의 목적이 여기일지도 모른다는 착각에 빠져 이야기를 들었다. 아! 이런 세상도 있구나. 이런 것이 현실 속에서 가능하구나.


 그런데 일주일을 듣고 10여일을 들어보니, 조상님들의 음덕이었을까, 오감을 초월한 육감에서‘이건 가짜다’라는 신호가 왔다. 더이상 대순을 다니고 싶지 않았다. 어떻게 하면 이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날수 있을까? 1년이란 시간이 지나서야 전화번호와 직장을 바꾸고 인연을 끊었다. 지금 생각하면 고마운면도 있다. 그들에 의해 상생의 대도가 있다는 걸 알게 됐으니 말이다.
 
 그후 천도식을 알고 천도식이 조상님과 자손에게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큰 지를 알게 되었다. 그래서 거금을 투자해 천도식을 올렸는데, 그 덕이었을까? 몇개월 후 인터넷을 통해 부산에 사시는 한 성도님을 만나 진법의 진리인 증산도를 만났다.
 
 인간이 찾아왔던 근본적인 물음에 대한 답을 알게 된 순간, 그동안의 고통이 씻기는 듯한 환희와 온몸을 감전시키는 전율을 느꼈다. 어떻게 하면 상생의 대도 증산도를 일심으로 잘 닦아, 작으나마 천하사의 일꾼이 될지에 대한 고민만이 지금 내 가슴속에서 용솟음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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