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목동도장] 계미년은 증산도의 해

초립쓴30대 | 2010.02.23 16:19 | 조회 4564

지난해 2002년 12월 1일, 서울 목동도장은 전철역에서 불과 1분 정도 걸리는 교통요지로 이전을 했다. 목동 지하 전철역에서 도로 위로 올라오면 바로 목동도장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제 전철역이 위치한 목동 5거리를 지나는 모든 차량과 서울 시민들은 ‘증산도 목동도장’이라는 간판을 자연스럽게 마주치게 되는 것이다. 알다시피 양천구 목동은 대단위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 있는 주택의 핵심 요지.
 
 건물 임대료 등 모든 것이 강남 못지 않게 비싼 곳이며 전국에서 가장 금싸래기의 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대망의 2003년 계미년을 맞이하여 한점의 후회 없이 상제님의 대업에 유종의 미를 거두고자 목동도장 성도들은 힘을 모았다.
 
 일방 상제님의 집 증산도교육문화회관 건립에 힘을 쏟는 한편 도장을 서울 시민 모두가 찾을 수 있는 곳으로 옮기기로 뜻을 모았던 것이다. 이 지면을 빌어 어려운 조건을 극복하고 도장을 옮기느라 고생한 박완선 포정 이하 목동 성도들에게 찬사를 보낸다.
 
 그리고 목동도장이 태사부님과 사부님의 명을 받들어 숙구지 새울도수를 인사로 실현하는 견인차가 될 것을 기대하며 이곳 성도들의 신앙담을 들어본다.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는 힘은 오직 일심정성”
 - 목동도장의 도약을 일깨우며 -
 
신숙희(31세)/ 천록포감, 집정/ 도기 125년 12월2일 입도

 
 학창시절에 고대문화나 미스테리 같은 데에 관심이 많던 저는 세상의 수수께끼들을 한꺼번에 풀 수 있는 연결고리가 어디 있을 텐데, 내가 크면 그 열쇠를 한번 찾아보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세상의 수수께끼를 푸는 핵심고리
 저의 부모님은 종교적인 환경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그래서 혹시 그 열쇠가 기독교나 불교 같은 종교에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보기도 했지만, 수업시간에 배운 기본상식만으로도 그 쪽엔 길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주위에 교회 다니는 친구들이 많아서 권유를 꽤 많이 받았습니다. “우린 제일 친한 사인데 같이 교회 나가자”“너도 어서 하느님의 자녀가 되길 바란다”등. 하지만 저는 이리저리 둘러대며 친구들의 기대를 저버렸습니다.
 
 어렸을 땐 그저 알 수 없는 거부감이 있었고, 커서는 창조론이나 마녀사냥, 종교재판 등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사실들이 너무 많았습니다. 억울하게 죽은 수많은 영혼들이 기독교가 흥하도록 가만 있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너희는 언젠가 망하고 말 거다’. 그런데 사람들은 왜 교회에 다니고, 못된 인간들은 왜그리 잘사는지, 세상은 온통 수수께끼였습니다.
 
 중학교때 선생님이 ‘휴거’에 대해 자세히 얘기해 주셨는데, 너무나 충격적이었고 무섭다 못해 슬펐습니다. 다들 아실 겁니다. 한마디로 예수천국 불신지옥이었지요. 며칠 밤을 뒤척이며 그것이 사실인지, 사실이라면 나는 그때 어떤 선택을 할 것인지 고민하다가, 마침내 결론을 내렸습니다: ‘아니다, 그건 하느님의 뜻이 아니다. 분명 다른 계획이 있을 것이다. 휴거가 아니더라도 만약에 그런 종말적인 상황이 와서 사람들이 많이 **야 한다면, 하느님, 그때 꼭 저를 불러 주십시오. 이 한 몸 **서 사람들을 살릴 수 있다면 기꺼이 하겠습니다. 절대로 저를 잊지 말고 불러 주십시오.’
 
 그런 기도를 여러 날 동안 간절히 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일들을 까마득히 잊고 살다가, 증산도를 신앙하면서 불현듯 그날의 일들이 되살아났습니다.
 
 
 방황의 끝에서 배운 것
 “誓者는 元天地之約이니 有其誓하고 背天地之約하면 則雖元物이나 其物이 難成이니라”(도전 8편 22장). 이 성구를 볼 때마다 지금의 나태한 제가 부끄러워 얼굴이 화끈거림을 느낍니다.
 
 고등학교 진학하면서 중학교 때까지의 순수함은 다 잃어버리고, 한참 예민한 사춘기에 자만심으로 가득 찬 감정을 그만 걷잡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성적으로는 ‘나 이러면 안 되는데, 미쳤나봐’하면서도, 생각과 행동은 이기적으로 나타났습니다. 세상 무서운 게 없고 모든 것이 나를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착각하여, 내가 제일 잘난 줄만 알았습니다. 오죽하면 ‘일인지하 만인지상’이란 말이 나를 위해 존재한다고 믿었으니까요.
 
 하지만 극과 극은 통한다 했던가요. 그러던 제가 한순간에 날개 꺽인 새처럼 추락하고 말았습니다. 언제부턴가 ‘이게 아닌데, 내가 왜 이렇게 살고 있지?’하는 회의감으로 고민하다 스스로 날개쭉지를 꺽어 버렸습니다. 제 자신의 오만함을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고 너무 화가 났습니다.
 
 그리하여 다시는 날지 못하도록 족쇄를 채워버리고 마음의 문을 굳게 닫아버렸습니다. 그때는 그것이 감정을 억제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건 또 한번 나 자신을 죽이는 일이었습니다. 우울증에 빠졌습니다. 『도전』속에 나오는 노처녀처럼, 정말이지 ‘아무것도 싫다’는 심정이었습니다.
 
 대학 때는 대학문화에 어울리지 못했고, 억울해서 그냥은 못 죽는다고 하루하루를 오기로 버텼습니다. 그러다 하루는 너무 힘들어서 ** 버려야지 했는데, 아마 조상님이나 보호신명이셨나 봅니다. 죽지 말라고, 좋은 날이 오니까 기다리라는 부드러운 음성이 저를 위로해 주었습니다.
 
 그때 비로소 혼자가 아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제 삶에 한 줄기 빛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모든 걸 용서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렇게 세상과 조금씩 화해하면서 학교와 직장생활도 무난히 할 수 있었습니다.
 
 
 『다이제스트 개벽』이 눈에 들어온 그날
 제가 상제님 진리를 만난 것은 1995년 12월입니다. 아침에 사장님 책상을 정리하는데, 못 보던 조그맣고 파란색 책이 놓여 있었습니다. 바로 『다이제스트 개벽』이었지요.
 
 무슨 책인가 하고 대충 훑어보니 예언, 종교, 영혼에 관한 내용인데, 며칠간 책상 위에 있더니 어느 날엔가는 책장에 꽂혀 있었습니다. 마침 직장일이 비수기라 빌린 책을 틈틈이 읽고 있었는데, 제 책상 맞은편 책장 속에 있는 그 파란책이 자꾸만 눈에 들어왔습니다.
 한번 볼까하고 이틀 정도 읽다가 내용이 너무 엄청나 순간적으로(!) 책을 덮어 버렸습니다. 지금까지 제가 갖고 있던 의문들이 모두 명쾌하게 설명이 되어 있었습니다! 책을 덮고 나 자신과 약속을 했습니다. 이번 주 금요일까지 다 읽고, 토요일에 증산도라는 데를 한번 가보자고 말입니다.
 
 상제님 진리가 너무나 명확하긴 했지만, 한편으로는 증산도가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혹시 사이비 아닌가?’하는 의문이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마지막 페이지를 읽을 때까지.
 
 事之當旺사지당왕이 在於天地재어천지요 必不在於人필부재어인이라.
 然연이나 無人무인이면 無天地故무천지고로
 天地生人천지생인하여 用人용인하나니
 以人生이인생으로 不參於天地用人之時불참어천지용인지시면
 何可曰人生乎하가왈인생호아. (도전 8편 54장)
 
 뒤통수를 맞은 것처럼 정신이 번쩍 났습니다. 아, 내가 인간으로 태어나서 증산도를 알았는데 나도 여기에 참여해야겠구나!
 
 
 속전속결로 세상일을 정리하고
 약속대로 토요일이 다가왔습니다. 퇴근 후, 직장인 명동에서 제일 가까운 신촌도장을 방문했습니다. 어색함도 잠시, 오랫동안 떠나 있던 집에 돌아온 것처럼 편안한 느낌이었습니다.
 
 당시 총무로 있던 차영준 수호사님과 면담하고 일주일간 정성수행을 한 후, 도기125년 12월2일 입도를 했습니다. 눈물이 다 말라버린 줄 알았는데, 배례하고 수행하면서 얼마나 울었던지….
 
 우울증 때문에 버스를 타도 맨뒷자리 구석에 앉아야만 안심이 되고 편안했었는데, 입도하고 1년이 지나자 그런 일은 없어졌습니다. 그동안 수호사님께서 원주로 가시기 전까지 올바른 신앙관과 종통관을 심어주셨습니다.
 
 직장일이 다시 성수기가 돌아오고 가락동으로 옮기면서 2년 정도는 한달에 한번 치성 참석하기도 힘들었습니다.
 
 1998년 여름,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진행중인 납품건만 끝나면 직장을 옮겨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마침 당시 광역책임자로 있던 윤여완 수호사님께서 갑자기 직장근처로 찾아오신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같은 서울시내라도 가까운 거리가 아니었는데(약 2시간 걸림) 무슨 일로 오시는지 긴장이 되더군요. 혹시 내가 잘못한 게 있나, 아니면 성금 때문에?
 
 그러나 뜻밖에도, 상임포감에 지원해서 이제는 일꾼의 길을 가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직장을 옮기려고만 했지, 거기까지는 생각을 못했는데…. 직장에서도 집에서도 모두 반대할 건 뻔한 일이었습니다.
 
 그날이 5월8일 어버이날이었는데, 토요일까지 결정을 내려서 말일까지 모두 정리하고 6월부터 도장에 나오라고 하셨습니다.
 
 언젠가 해야할 일이었는데, 저에게 기회가 온 것 같았습니다. 토요일쯤 수호사님께 그러겠다고 약속을 드렸습니다. 주말, 공휴일도 없이 업무에 매달리던 터에 직장을 그만둔다는 일이 엄두가 났겠습니까? 하지만 작정하고 밀어붙이니까 되더군요. 정말 속전속결이었습니다.
 
 그후 강남도장을 거쳐 작년 도기131년 1월, 지금의 박완선 포정님과 함께 화곡도장으로 발령을 받아왔습니다. 현 목동도장의 전신인 화곡도장은 사부님께서 ‘그것도 도장이냐, 지방의 포교소만도 못하다’고 수차례 말씀하셨던 바로 그 도장입니다. 치성때는 분향명촉할 신도가 항상 부족하고 성전 벽 뒤로는 PC방이 있어서 사람들 떠드는 소리, 게임소리가 그대로 다 들렸습니다.
 
 강남도장에서 신앙할 때, 한번은 집 근처인 화곡도장에서 치성참석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당시 본부 서울담당이셨던 김옥준 성도님이 오셔서, 고광선 포정님, 대포 성도님과 함께 네 사람이 밤 12시가 넘도록 화곡도장의 이전문제에 대해 토론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 상황을 타개하고 이전을 해야하는데, 너무나 막막해서 무거운 마음으로 밤길을 밟으며 집으로 돌아갔던 기억이 납니다.
 
 
 목동도장의 3변 역사를 되돌아보며
 그후 함께 발령받은 박완선 포정님과 제일 먼저 한 일이 도장이전이었습니다. 짐은 일단 영등포도장 옆 빈 사무실에 옮겨놓고서 새로 마련할 공간을 알아보고 이전을 추진하느라 두 달이 걸렸습니다.
 
 한달이 넘도록 아무런 진전이 없자, 전입 온 주부 성도님 두 분과 함께 3일간 작정하고 돌아가며 제물을 올리고 매일 천배례씩 했습니다. 마지막 삼일째 저녁, 드디어 성금문제가 해결되고 일이 풀려가기 시작했습니다.
 
 정말 어렵사리 목동도장으로 개칭 이전하면서,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힘은 오직 일심정성에 있음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번 두 번째 이전은 아주 빠른 시일내에 많은 성도님들의 관심과 참여 하에 진행되었습니다.
 
 지금의 목동도장이 있기까지 3변을 거쳤습니다. 맨처음 신촌도장에서 분가한 강서도장, 그리고 화곡도장을 거쳐서 현재 목동도장이 양천구 목 좋은 곳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약 2년의 시간 동안 두번의 이전치성을 올린 셈이죠.
 
 이제 사오미 개명 마지막 해인 계미년에 포교의 불을 붙여 성장과 동시에, 또 한가지 강서구 쪽에 도장을 개창해야 하는 큰 임무가 남아 있습니다. 그전 같으면 도저히 불가능해 보였겠지만 지금은 자신 있습니다.
 
 
 세 가지 특수한 복을 가진 우리 일꾼들
 상제님 진리를 만나 증산도를 신앙한 지 어느 새 7년이 되어갑니다. 세월이 언제 이렇게 흘렀나 싶고, 뒤돌아보면 부끄럽기만 합니다.
 
 자신과의 싸움으로 만신창이가 되었던 20대의 세월이 너무 원통하지만, 돌이켜보니 모나고 날카로운 저의 심성을 갈고 다듬는데 필요한 시간이었나 봅니다. 증산도를 만나서, 궤도를 이탈한 제 인생에 브레이크를 걸어주고, 방향을 바로잡아 주었습니다.
 힘이 들고 마음이 흔들릴 때마다, 태사부님께서 하신 말씀을 생각합니다. ”나를 포함해서 상제님을 신앙하는 우리 일꾼들에게는 특수한 복이 세 가지 있다. 고생복, 욕복, 일복이 바로 그것이다.” 평생을 상제님 천하사를 위해 다 바치신 태사부님 사부님이 계신데, 이 정도 힘들다고 흔들리면 안 되지 하고 마음을 다잡곤 합니다.
 
 저희 목동도장이 새로 깨어나고 있습니다. 많은 일꾼들이 새로운 출발선상에서 다시 뛰기 시작했습니다. 지금까지 잔뜩 움추렸던 몸을 쫙 펴고 높이 도약할 것입니다.
 
 내년 계미년이 너무나 기다려집니다. 모두들 개벽책을 들고 나가 그 옛날 여동빈처럼 세상 사람들에게 ‘개벽’을 알릴 것을 생각하니, 가슴이 벅차 오릅니다.
 
 오직 일꾼들만 보고 계시는 상제님 태모님, 태사부님 사부님이시여. 저희들을 믿고 지켜봐 주십시오. 천지공사 100주년에 마침내 완공되는 상제님의 집에서, 일꾼들이 푹푹 쪄지고 새롭게 성숙되어 상제님 천하사를 마무리짓는 의통구호대로 거듭날 것입니다.
 또한 부족한 저를 개벽기에 일꾼으로 써 주심에 감사 드립니다. 남은 시간 동안 육임을 완수하고, 천하 사람 한 사람이라도 더 살리도록 신명을 다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함께 신앙하면서 힘든 일 들어주고 고민하며 많은 충고를 해준 여러 성도님들께 지면을 빌어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도장은 도솔천의 분신”
 - 도장이전 치성에 즈음한 상념 -
 
이영재(33세)/ 3구역 포감/ 도기 128년 9월29일 입도

 
 우리가 도장을 이전하는 일이 신도들의 재력이나 참여면에서 탄탄한 기반을 갖춘 것이 아닌 만큼 순탄하게 이루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자축거리면서도 꼭 가야할 길을 가는 것이 우주의 원리라면, 우주원리를 집행하는 우리 도장의 일도 순탄하지는 않지만 반드시 이루어지고 말 것이다.
 
 그렇다면 이왕 해야할 일을 겁을 먹고 소극적으로 할 것이 아니라 큰맘을 먹고 반드시 된다는 확신 속에 일단 저지르고 보자. 이것이 서울 목동도장 이전을 결정할 때 신도회의에서 나온 의견이다. 결국 이 의견이 채택됨으로써 새 도장 건물로의 이전에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사실 현재의 상황으로 보면 보증금과 월세가 만만치 않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로 합심단결하여 결국 아름다운 도장을 건설하고 오늘 뜻깊은 이전치성을 모시는 것이다.
 
 오늘 새로운 목동도장의 이전치성은 개인적으로 큰 감회를 느끼게 한다.
 
 작년 4월, 서울 강남도장에서 전출하여 새로이 전입한 목동도장은 이제 막 개창하는 단계였고, 처음 방문하여 수요치성을 모시는 날은 공사판 속에 상제님 태모님 어진도 없는 간이신단에 청수만 모신 채, 바닥 정리가 안되어 베니어판을 깔고 네 명이 치성을 모셨다.
 
 분향명촉도 없이 작업복 차림의 포정님과 함께 사배심고를 드리는 순간, 나도 모르게 하염없이 눈물이 쏟아졌던 기억을 잊을 수가 없다. 아! 이렇게 황량한 사막 같은 곳에서부터 상제님의 일을 시작하는구나. 이는 단지 도장과 치성의 초라한 모습에서 오는 설움만은 아니었다. 새우주를 열고 우주촌을 건설할 웅지와 비전을 가진, 증산도 목동도장의 험난한 출발에서 느끼는 비장한 마음의 발현이었다는 게 옳으리라.
 
 뜨거운 눈물로 다짐한 것이 있다. ‘나는 이 도장을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는 일류 도장으로 발전시키는데, 당당히 한 몫을 하고야 말겠다.’
 
 그리고 1년 반의 시간이 흘렀다. 그 기간은 서울 목동도장이 어려움 속에서 멀리 뛸 수 있도록 잔뜩 움츠린 재도약의 발판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오늘, 우리는 그 에너지를 발판으로 목동의 요지에 위치한 가장 좋은 건물에 아름다운 도장을 짓고 이전하는 데 성공하였다.
 
 “도장은 도솔천의 분신이다.” 지난 9월18일 봉직자 교육때 사부님께서 해주신 말씀이다.
 
 “도장에 강의나 행사가 있으면 일단 참여하는데 의의를 두어라. 함께 1∼2시간 같이 하면서 천하사 방향을 공유하고 함께 호흡하는데 의미가 있다”고도 말씀하셨다.
 
 사부님의 이 말씀을 그대로 받들어, 오늘의 도장을 이루어 놓은 모든 신도들께 감사드린다. 특히 교육관 완공을 앞둔 시점에서, 도장이전을 결정하고 성금을 끌러내느라 매일같이 고민하고 멸사봉공하신 포정님께 진심어린 존경과 감사를 드린다.
 
 도장이전은 이 자체가 완성이 아니라, 비로소 대세를 돌리기 위한 터전을 마련했다는 의미인 것이다. 이제야말로 천하사의 시작이라는 점을 깊이 새겨, 사오미 개벽장터에 숙구지 도수의 실현을 위해 일로매진해야 함을 절실히 느낀다.

“백절불굴의 정신으로, 대동세계를 건설하는 그날까지 매진하겠습니다”
 
박용주(38세)/ 4구역 포감/ 도기 120년 6월8일 입도

 
 저는 어려서부터 시골에서 자라서인지 판소리나 농악을 좋아하며 자랐습니다. 어머니는 절에 다니시며 언제나 자식들의 건강을 위해 불공을 드리셨지요. 집에서는 아침마다 거르지 않고 새벽에 정안수를 모시고 손을 부비시며, 객지로 떠난 자식들의 건강을 비셨습니다. 지금도 그 기억이 생생합니다.
 
 고등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시(詩)와 철학 등 책을 좋아하여 공부를 하던 중, 유교에서 말하는 ‘대동세계’라는 말이 가슴에 와 닿았습니다. 그 말이 너무 좋아 달 밝은 밤에 시골 동네 소나무밭에 가서 달을 쳐다보며, 언제가 되어야 모든 사람이 대동세계에서 살 수 있을까 하며 고민했던 적도 있었습니다.
 
 대학에 들어가서 유교, 불교, 기독교 관련 책들을 읽으며 종교에 관심을 가져봤습니다. 그렇지만 그 중에 유교 진리가 제일 낫구나 하는 생각뿐, 별로 깊이 공부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군대를 가기 위해 휴학을 하고 시골에 있을 때, 친구한테서 빌려온 김지하의 『남녘땅 뱃노래』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 책 맨뒤에 ‘강증산’이라는 세 글자가 있었는데, 이상하게도 그 글자가 머리 속에 각인되어 잊혀지지 않았습니다.
 
 군대를 마치고 복학하기 위해 그 친구집을 방문한 후 헌책방에 들러 책이나 한권 사려고 들어갔습니다. 작은 서점 꼭대기에서 『한민족과 증산도』라는 책을 발견했습니다. 저 책이 강증산이라는 분과 연관이 있나보다 하고 얼른 천원을 주고 사서 순식간에 읽어 내려갔습니다.
 
 그 내용인즉, 충격적이었습니다. 이 정도 스케일에 이 정도의 진리라면, 내가 평소에 바랐던 대동세계를 이룰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요.
 
 인천 동부도장을 찾아가 공부를 하던 중 우연히 학교에서 증산도 강연회를 한다기에 강연을 듣고, 마침내 수원에서 입도를 하였습니다. 제가 이렇게 자연스럽게 증산도를 만나 입도한 건 어머니와 아버님의 정성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진리가 제대로 여물지 않은 채 회사일로 세상사를 헤쳐 나가느라 3년여 동안이나 도장에 거의 나오지 못했습니다. 그후 인천으로 이사를 하였는데, 우연히 길을 가다 아내가 부평도장을 발견하고 제게 전해주었습니다.
 
 이로써 제2의 증산도 인생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진리가 어떤 것인지 알고 어떻게 해야하는지도 알았지만 도장에 충실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서울로 이사하여 목동도장에서 신앙하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예전과는 마음이 틀리다는 것을 스스로 느낍니다.
 
 태사부님 사부님을 뵐 때마다 한없이 부끄럽습니다. 인간적으로 두분의 인생을 생각해보면, 너무나 가슴이 아픕니다.
 
 하루에 두세 시간밖에 못 주무시며 불쌍한 중생들을 한명이라도 더 살리시기 위해 애쓰시는 태사부님, 몇시간 동안 온 힘을 다해 도훈 말씀을 내려주시고 우유 한모금에 목마름을 달래시며 단 10분이라도 더 말씀해주고 싶어하시는 태사부님의 정성스런 모습.
 
 오직 일꾼을 기르시기 위해, 손주의 재롱이나 보시며 편안하게 지내실 연세에도 불구하고 고군분투하시는 태사부님의 붉은 마음이 가슴에 저려옵니다.
 
 또한 오로지 일군들의 자질을 높이기 위해 수많은 시간 마다 않으시고 새벽녘까지 목청을 돋우시는 사부님, 마음처럼 움직여지지 않는 신도들의 신앙심을 끌어올리고자 애타게 신도들을 채찍질하시는 사부님.
 
 어엿한 중년 가장이 될 연세에, 천하사라는 큰 업보 때문에 운신조차 못하실 정도의 고통을 감내하시는 사부님의 크나큰 은혜를 되새겨 봅니다.
 
 저는 이미 어려울 때마다 많은 이들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우연은 아니겠지요. 앞으로 태사부님 사부님의 명을 받들어, 진정 천하창생을 한명이라도 더 살려내는 진정한 도인으로 거듭 태어나라는 신도의 명이라 생각합니다. 백절불굴의 정신으로 매진 또 매진하겠습니다.
 
 조용한 이 밤에 태사부님의 애타는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합니다.
 
 ‘왜 그렇게 포교를 안혀? 얼마 안남았어, 이 사람들아. 한 사람이라도 살려야 헐 것 아녀!’-이 말씀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진정한 성인을 만나게 해주신 선영신께 감사하며”
 
이영옥(32세)/ 도기 129년 12월24일 입도

 
 출산과 함께 진리를 만나 입도하고
 1999년 겨울, 둘째 아이 출산을 위해 전주 큰언니 집에 내려가게 되었습니다.
 
 처음 거실에 들어서니 태을주 액자가 눈에 들어왔고 방안 한쪽 공간에는 어진과 청수가 모셔져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10여년간이나 증산도 신앙생활을 하고 계신 것을 그때서야 자세히 알 수 있었습니다.
 
 건강한 남자 아이를 출산한 후 언니의 간호로 제 몸이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올 즈음. 진리 말씀을 들었지만 생소하고 쉽게 받아들이기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큰언니 내외 두분은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에게 모범이 되는 분이셨으며, 서로 존중하고 불화 없이 사시는 모습을 접할 수 있었습니다. 이에 확실한 믿음이 생겨 입도를 했습니다.
 
 서울에 올라와 두 아이를 키우면서 자영업을 하는 남편일을 틈틈이 도왔습니다. 그렇게 의식없이 2년이란 시간이 흘려갔습니다. 가끔 청수만 모셨을 뿐 도장에 나가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언니의 정성이 닿았는지, 어느 날 심정의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도전』책을 펼쳐보았죠. 충격적인 내용과 잘 해석할 수 없는 말씀들이 궁금증을 유발했습니다. 그후 도장으로 발걸음을 옮기게 되었습니다.
 
 
 태을주 수행을 통해 산후 통증을 치유하다
 포정님과 성도님들이 친절하게 맞아주시고, 경험담과 진리말씀도 전해 주셨습니다. 수행해 보라는 권유에, 낮 시간 태을주 수행과 도공을 하면서 친숙하게 도장을 방문했습니다.
 
 수행과정 속에서 광명 빛과 기의 흐름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출산 후 저리던 팔,다리가 치유되었으며, 부기도 많이 빠져서 몸이 건강해졌습니다.
 
 진리에 눈 떠가던 기쁨도 잠시, 처음 치성에 참석했는데 공교롭게 남편이 알아 버렸습니다. 얼굴 표정부터 달라지며 무조건적으로 신앙반대를 하기 시작하니까 심리적으로 위축이 되더군요.
 
 하지만 여기서 멈출 수는 없었지요. 기본 생활에 충실하면서 시댁 천도식을 해 드리기로 결심하고, 정성수행에 들어갔습니다. 하루는 신명세계를 잘 보시는 성도님과 수행을 함께했어요. 그런데 끝난 후 성도님이 말씀하기를, 조상님이 오셔서 함께 수행하셨다는 얘기였습니다. 인상착의를 들으니 시할아버님이셨습니다.
 
 천도식을 무사히 치르고 마음이 홀가분했습니다. 저의 정성을 받아주셨던지, 남편의 태도가 조금씩 달라졌고 저녁 치성에도 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다음은 증대에 가고 싶은 욕심이 생겼어요. 간절한 소망을 심고 드렸는데 꿈 속에서 응답을 주시더군요.
 
 9월에 1박2일은 아니었지만 처음으로 증대에 참석했습니다. 전국 도장에서 많은 성도님들이 참석하신 것을 보았고, 긴장감도 생겼습니다.
 
 태사부님 사부님 도훈 말씀을 들을 때는, 진정한 성인을 만나게 해주신 선영신께 감사의 마음이 저절로 우러났습니다. 그때 친정어머님께서 하신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외할아버님께서 살아생전, ‘앞으로 좋은 세상이 오는데 10리에 사람 하나 보기 힘들다’고 늘 말씀하셨다고 전해 들었습니다(천주교를 믿던 친정어머니는 언니의 인도로 입도하셨습니다).
 
 임오년은 힘들고 제 자신의 내실을 다지는 한 해였다면, 계미년은 상생의 정신으로 참진리를 전하는 천하사 일꾼으로 뛰겠습니다. 남편도 살리고, 또 많은 사람들이 증산도를 만나 가을개벽을 극복하고 후천 5만년 새 세상 운수의 길로 함께 걸어갈 수 있도록 말입니다.

“조상의 음덕과 천지정신에 보은해야 ”
 
고대우(39세)/ 재정/ 도기 127년 1월9일 입도

 
 지금 곰곰이 생각해보면, 고등학교 학창시절에 깊이는 없었지만 머릿속에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던 것은 노스트라다무스의 ‘지구종말론’이었습니다.
 
 그때 친구였던 조남인(현재 일본 고베도장 포정) 신도는 안동민 씨의 심령과학에 관심을 두었고, 우리 둘은 지식적 한계를 가지고 있었지만 순수 감정으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1996년 초였습니다. 일본에 있던 그 친구가 가끔씩 말하는 우리 고대사의 충격적 단절과 신명에 관한 이야기들이 상당히 새롭게 느껴졌었습니다. 그때 증산도를 처음 접했는데, 일종의 민족종교처럼 느꼈습니다. 개인적으로 불교의 한계를 느끼고 있던 터라, 관심을 갖게 되었고 『이것이 개벽이다』를 읽었습니다.
 
 그러던 중 1996년 말쯤. 오래 전부터 내림굿을 받고 동자신을 받들던 처고모님이 시골에서 오시면 며칠씩 계시다 가시곤 하셨는데, 그때마다 제 아이에게 불길한 징조가 있다며 직장을 나간 낮에 집에 오셔서 조그마한 굿을 수차례 한 것 같았습니다.
 
 내 자식을 위해서, 또 신명이란 무엇이길래 라는 의문과 여러 격정적 감정 속에서 친구가 말해주었던 증산도 도장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내가 직접 알아내서 해결해 보겠다는 충동적 욕구가 생겼습니다.
 
 그래서 1997년 2월 입도를 하고 봉청수를 모시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초발심의 정성이 간접적 체험이 되고, 아이의 불길한 징조까지 깨끗이 치유하게 되었습니다. 옛날의 불길한 징조가 이제는 신령스런 도인이 저희를 지켜주는 꿈으로 바뀌었다는 처고모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렇게 치유의 체험을 통해 신명과 생명의 정신에 대해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제 생명을 죽이는 계절에 한 생명이라도 더 살려야겠다고 생명의 소중함을 절절히 부르짖고 다녀야 함을 실감합니다.
 
 어릴 적 노스트라다무스에 대한 관심도, 아이의 일도 결국은 조상 선영신들의 백조일손의 애타는 심정으로 저를 도문에 인도하기 위한 음덕이 아니었나 생각하게 됩니다.
 
 조상의 음덕과 천지일월의 은혜로 타고난 이 생명을, 나 혼자만의 개인적 영달을 위한 삶으로 국한한다는 것은 그 은혜를 저버리는 욕된 삶이라고 느껴집니다. 조상의 음덕과 천지정신에 보은을 해야 하겠습니다.
 
 ‘천지도 일월이 없으면 빈껍데기요, 일월도 사람이 없으면 빈그림자라’는 말씀처럼, 천지일월이 사람이 없으면 무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중요합니다. 그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천지일월이 한 순간도 쉬지 않듯이, 저 또한 열심히 달리겠다고 다짐해 봅니다. 그것이 보은이기 때문입니다.

존경하는 부모님을 모시고 신앙하는 기쁨
 
김기영(16세)/ 도기 127년 10월17일 입도

 
 반가워요! ^^* 서울 목동도장의 청포 김기영입니다.
 
 제가 처음 도장에 간 것은 5살 때였습니다. 어머니를 따라…. 정확히 말해 끌려다녔다고 할 수 있겠죠. 동생과 성전에서 말썽만 피웠다는 사실을 지금도 많은 분들이 기억하고 계신 줄 압니다. 이 자리를 빌려서 죄송하다는 말씀 올립니다. ^^;
 
 7살 때 아버지의 직장일 때문에 저희 가족은 요르단에 가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어머니가 이 사람 저 사람을 만나, 상제님 진리를 전하시려 애쓰던 모습을 기억합니다. 저는 그것이 포교였는지도 몰랐어요. 그저 어느 순간 우리 가족 말고도 다른 사람들이 함께 태을주를 읽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뿐….
 
 우리 집에는 신단이 모셔져 있고 항상 향냄새가 나니, 이웃 한국 사람들은 뒤에서 많이도 쑥덕거렸습니다. 따돌림을 당하지 않을 수 없었겠지요. 그렇지만 그 와중에도 상제님 진리를 만나게 되어 함께 치성을 모시는 분들이 생겨서 즐거웠고, 우리 가족에게는 그분들이 아주 소중하답니다.
 
 제가 아무리 어리다 해도 어머니가 청수 모시고 기도하시는 모습이 은연 중에 교육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어느 날 한밤중에 잠이 깼는데, 집에 혼자 있다는 것을 알고 두려워서 울었습니다. 낯선 나라의 커다란 집에서 덩그러니 한밤중에 혼자 있자니 막막하고 초조했습니다. 한참을 소리치며 울다가, 신단 위의 촛불을 켜고 향을 피우고 청수 뚜껑을 열고 기도했습니다.
 
 “엄마, 아빠가 교통사고 안 나게 해주세요….”그때 왜 하필 교통사고를 걱정했는지 저도 모르겠습니다. =_=; 어머니께서 돌아오셔서 안아주고 칭찬해 주셨습니다.
 
 시간이 흘러 초등학교 4학년 때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정식으로 입도하게 되었지요. 하지만 말이 입도지, 진리도 잘 모르고 도장에는 어쩌다 한번 가는 정도였습니다.
 
 중1이 되자, 어머니께서 동생과 함께 도장에 다니라고 하셨습니다. 솔직히 내키지 않았지만, 좋은 언니가 도장에서 잘해줄 거라고 하시길래… -_-; 그 언니가 바로 부천 심곡도장의 정해자 포감님이었습니다.
 
 이제 와서 고백하는데 포감님이라 부르기가 쑥스러워서 한동안 정해자 언니라고 불렀어요. 하하핫! 그후 포감님의 도움으로 도장생활에 흥미를 가지게 되었고, 상제님 진리의 맛을 알게 되었습니다. 항상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
 
 중학교 2학년이 되자 서울로 이사를 가게 되었습니다. 마침 제가 포교도 한명 해서 자신감도 있었고 신앙이 자리잡혀 가는 때였어요. 당장 도장을 옮기는 것은 좋지 않겠다고 생각하고, 부천 심곡도장에 청포가 하나둘 늘어날 즈음인 중학교 3학년이 되어서야 가까운 목동도장으로 옮겼습니다.
 
 목동도장에는 청포가 자리잡지 못해서 막막했습니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나 스스로 열심히 해서 청포를 일으켜 보리라 마음먹었습니다.
 
 하지만 외국어 고등학교에 진학하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학업에 열중하다 보니 치성과 교육에 곧잘 빠지곤 했습니다. 본의 아니게 포감님들과 청포 성도님들께 심려를 끼쳐드리게 되었지요. 제 마음이 변한 것도 아니고 저는 국제포교사가 되겠다는 한층 불타는 의지를 가지고 첫발자국을 떼고 있었는데…. 제가 마치 잘못되고 있는 것처럼 다른 사람들이 이야기할 때는 화가 나기도 하고 울고 싶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께서, 저를 잘 모르는 다른 사람의 이목이나 결과가 두려워서 해보고 싶은 일을 못하는 것은 평범한 사람들이나 하는 짓이라고 격려해 주셨습니다. 해보고 싶다는 자신의 뜻이 확고하다면 실패한다 해도 분명히 얻는 것이 있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게다가 상제님 태모님이 언제 ‘신앙이냐 공부냐, 양단(兩斷)간의 선택을 요구하셨냐’고 반문하셨습니다.
 
 신앙도 잘하고 공부도 잘한다는 것이 비록 어렵기는 하지만, 진정한 일꾼의 길이니 노력은 해야 되지 않겠느냐고 어머니는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에 힘을 얻어서, 공부도 열심히 하는 한편 상제님 태모님께 제 마음과 진실을 고하면서 기도하였습니다.
 
 만날 사람은 만난다더니…. 그 정신없이 바쁜 와중에 같은 반 친구 현주가 8월에 입도하게 되었습니다. 3학년에 올라와서 사귄 친구인데 마음이 곱고 처음부터 제 말을 경청해서, 별 어려움 없이 도장에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8월… 그 친구의 생일이 며칠 지난 후 입도라는 큰 선물을 안겨 주었습니다. 요즘은 함께 정성수행 중-* ^^
 
 ‘사람을 살려야겠다’는 생각은 항상 제 마음 속 깊이 있습니다. 제 주변 친구들에게 진리를 전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제 꿈은 외국인 포교입니다. 외고 진학은 좌절되었지만, 입시를 준비하는 동안 영어에 상당한 진전이 있었습니다. 실패 속에 더욱더 제 꿈을 굳히게 되어 지금은 즐거울 따름입니다.
 
 신앙에 있어 제일 존경하는 분은 어머니입니다. 제가 힘들어할 때면, 어머니는 말 몇마디로 저의 짐을 가볍게 해주셨습니다. 때로는 충격을 주셔서 약이 올라 스스로 힘을 얻게 만들기도 합니다. 일에만 집중하셔서 인간적으로는 섭섭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무엇보다 제게 상제님 태모님을 만나게 해주신 장본인이 아닙니까? 하핫!
 
 그런 어머니께서 외국인 포교 일을 하는 것을 보고 저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예전에 함께 공부했던 여러 나라 선생님들과 아이들을 생각해보면, 저도 모르게 살리고 싶다는 마음이 불쑥불쑥 솟아올라 콧등이 찡해집니다. 부족하지만 많이 배우고 외국어 공부도 열심히 해서 꼭 외국인 포교를 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저희는 지금 온 가족이 신앙을 합니다. 어느 날 뜬금없이 아버지께서 치성참석을 하시겠다고 공표하시더니, 12월초부터 도장에 나오십니다. 저희 식구는 그때 깜짝 놀라 서로 눈짓을 하면서 몰래 쿡쿡 찌르며 무척 기뻐했습니다. 저희 포정님과 도장 성도님들께서도 함께 기뻐해 주셨지요.
 
 목동도장이 더 좋은 곳으로 새로 이전했습니다. 새 도장을 둘러보면 제 마음도 새로워지면서 새로운 꿈이 그려집니다. 그럼 새로운 마음과 꿈으로 다시 열심히 사람을 살리러 나가볼까요?! *^^*
증산도라는 상제님의 길 위에 서서
 
김남우(32세)/ 도기 128년 7월1일 입도

 
 제 자신을 한번 돌아봅니다. 저 뒤에서 헐떡거리며 뛰어오고 있는 제 모습. 출발점은 남들보다 많이 앞섰지만, 지금은 맨뒤를 달리고 있습니다. 얼굴색이 안 좋아 보이고 달리는 것도 힘들어 보입니다. 앞에 가던 사람이 보이지 않습니다.
 
 이 길이 맞나? 왜 힘이 안 나지? 사람들은 다 어디 갔을까? 무엇이 잘못되었지? 무엇이 문제지?
 
 뛰면서 스스로에게 묻고 또 묻습니다. 그래도 무작정 뛰어 봅니다. 한참을 뛰다 보니 어느새 쉼터에 도착해 있었습니다. 그곳에 앞서가던 많은 사람들이 또한 쉬고 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살펴보니 저하고 무언가 차이가 있습니다.
 
 처음에는 모두 같은 모습으로 출발했었는데? 지금 보니 그 사람들은 등에 배낭을 매고 손에는 물통을 지니고 있으며, 발에는 튼튼한 육상용 신발을 신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물었습니다.
 
 “도대체 그런 거 다 어디서 구했는지요?”
 사람들이 제게 되묻습니다.
 
 “당신은 도대체 왜 뛰고 있나요?”
 “이 길을 뛰면서 무엇을 보았나요?”
 “가지에 걸려 있는 신발이랑 외투랑 물이랑 배낭 같은 것들을 보지 못했나요?”
 
 저는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습니다. 무슨 말인지조차 몰랐습니다.
 이것은 결국 제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의구심일 것입니다.
 
 증산도란 길을 뛰면서 그 말씀의 나뭇가지에 걸려 있는 물통과 외투와 배낭과 지팡이와 신발을 보지 못했던 건, 내 자신의 자만과 안일함 때문이었습니다.
 
 하루 중 얼마나 상제님과 천하사를 생각하는지… 지나가는 사람들이 모두 상제님의 진리를 만나게 해 달라는 간절한 기도를 얼마나 한 적이 있는지….
 
 같은 모습으로 출발한다는 건 누구에게나 처음의 마음가짐은 같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결승점에 도달하는 것은 일단 출발하고 난 다음부터의 과정에 의해 크게 영향을 받습니다.
 
 저는 증산도라는 상제님의 길을 뛰고 있습니다. 출발하기 전에 어떤 목적을 가지고 출발할지, 그 목표가 명확한 것인지, 생각합니다. 뛰면서 또 많은 생각을 합니다. 이 길이 맞는지, 내가 지금 어느 위치에서 달리고 있는지, 어디서 잠시 쉬어야 할지, 이 산을 넘어야 할지 아니면 산을 돌아가야 할지.
 
 가장 두려운 건 그냥 뛰라고 하니까, 뒤쳐지는 게 두려워서 무작정 뛰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들 때입니다.
 
 이렇게 힘들 때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때, 태사부님과 사부님께서 뒤쳐지는 사람들에게 더 다가가시어 때로는 호통치시며 때로는 달래시며 이끌어 주십니다.
 
 ‘이리로 오너라’ ‘저리로 가야지’
 ‘이걸 잡고 건너라’ ‘이 때는 돌아가야지’
 ‘그리 가면 벼랑이다. 죽는다 이놈아!’
 ‘팔은 이렇게 하고 뛰어야지’ ‘다리는 이렇게 하고’
 ‘힘들 땐 이렇게 쉬고’ ‘힘들지? 조금만 더 가자!’…
 그분들은 더 힘이 드실텐데… 더 목이 마르실 텐데.
 
 증산도를 만난 이래로 어떤 목적의식을 가지고 신앙 해왔는가를 반성해봅니다. 잦은 해외출장과 가정에서의 신앙 반대, 주위에서 듣고 보는 많은 체험신앙과 나와의 비교, 포교한 사람의 수, 거기서 오는 상대적 불안감.
 
 하지만 좀더 내 자신에 솔직해지고 그러면서 냉철하게 자신을 되돌아보니 결국 해답은 간단했습니다. 바로 태사부님 사부님께서 늘 강조하시는 일심신앙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취약한 부분을 찾아 포교용 자료를 정리해가니, 공부도 되고 마음도 새로워짐을 느낍니다.
 
 신앙하고 포교하는 방법에는 근본을 지키면서 다양한 방법으로 시도해 보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저희 서울 목동도장.
 어느 도장과 비교해도 전혀 손색이 없는 훌륭한 도장으로 거듭났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이 커다란 도장 내부를 사람의 물결로 가득 채워, 후천 선경세계 건설에 주춧돌이 되어 보겠다고 다짐해 봅니다.
 
 넓고 깨끗하고… 무엇보다도 포정님을 비롯한 서울 목동도장 여러 성도님들의 따뜻한 배려에, 상제님 태모님께서 조용히 웃어 주십니다. 태사부님 사부님의 말씀이 귓가에 들리는 듯합니다. ‘열심히 해봐! 이상.’
 
“밤을 꼬박 새우며 『개벽』책을 읽고는 곧바로 도장을 방문하였습니다.”
 
박완선 포정(42세)/ 도기 121년 10월 19일 입도

 
 『개벽』책을 읽고 도장을 방문하면서 신앙을 시작
 서울 덕수상고를 나온 후 은행에 들어가 행원 생활을 죽 했습니다. 상제님 신앙은 도기 121년에 『이것이 개벽이다』를 읽고 도장을 찾아가면서부터입니다.
 
 상제님 진리와의 인연은 소설 『단』이라는 책이 한 계기입니다. 그 책을 읽고는 ‘우리나라 역사가 이렇게 되는 것이구나’하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후 수행에 관심을 갖고 권태훈 옹이 운영하는 광화문 근처의 연정원에서 일주일을 한 코스로 두 번 수련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당시 수행에 관련한 책을 주로 읽었는데 어느 날 종로서적을 가서 몇 권의 책을 사 가지고 돌아왔습니다. 거기에는 『개벽』책이 섞여 있었는데 정작 살 때는 몰랐다가 집에 와서야 ‘내가 이런 책을 사 가지고 왔구나’ 하는 것을 알고 놀랐습니다. 무슨 기운에 이끌렸는지 저도 모르게 『개벽』 책을 샀던 것입니다.
 
 그날 밤을 꼬박 새우며 『개벽』책 상(上)권을 독파하였습니다. 큰 충격을 받은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다음날 하(下)권을 사서 읽고는 곧바로 가까운 신촌도장을 방문하였습니다. 당시는 입문제도가 있었는데 입문식후 삼개월 만에 입도를 했습니다.
 
  저에게는 도장 옮기는 일복이 있었습니다
 IMF 초창기인 1999년 2월 무렵 다니던 은행을 그만두고 상제님 일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습니다. 그때 상임포감 제도가 나올 시점과 맞물렸는데 퇴직과 함께 쉴 틈도 없이 곧바로 포교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얼마 후 도장 책임자 명을 받아 고양 원당도장에서 봉직하다가 2000년 3월 서울 시흥도장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당시 시흥도장은 너무도 누추한 수준이었습니다. 당시 전국적으로 도공 수련을 열심히 할 때였는데 도장이 비좁아서 도공 수련을 할 수가 없었고, 소리가 세어나가서 주변 사람들의 항의가 들어왔습니다. 이곳에서는 도저히 대세를 돌릴 수 없다고 판단하고는 6월부터 이전준비를 해서 10월에 새로운 곳으로 옮겼습니다.
 
 새로 옮긴 도장에서 채 3개월 정도 있었는데 다시 2001년 1월에 화곡도장으로 전출을 명(命)받았습니다. 그러나 화곡도장도 예전의 시흥도장 못지 않게 누추한 수준이었습니다. 발령과 더불어 화곡도장의 건물이 나갔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새 도장 자리는 구하지 못한 채 짐을 영등포 도장 곁방으로 옮겨 놓고 두 달 동안 강서구와 양천구를 돌아다니며 건물을 알아보았습니다. 당시 추운 겨울에 도장도 없는 상태에서 수행도 제대로 못하다가 그나마 목동에 도장 자리를 구하여 목동도장을 만든 것도 당시 수준에서는 무리를 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번 2002년 12월에 다시 목동에서 가장 목이 좋은 전철역 오거리로 도장을 옮기게 되었습니다. 이번에 새로 옮긴 도장은 먼저 도장보다 두 배정도 크고 무엇보다도 교통의 요지에 자리를 잡은 것이 특징입니다. 드디어 상제님 태모님을 목동에서 가장 좋은 곳에 모시게 되었습니다.
 
  정성을 모아준 성도님들게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도장을 여러 번 옮기면서 여러 성도님들이 몸과 마음으로 많은 고생을 하였습니다. 상제님 살림살이 하나하나 모든 것을 챙기느라 건강이 나빠지신 성도님들을 뵈면 너무도 감사하고 한편으로 죄송한 마음이 듭니다.
 
 이번 개벽지에 글을 쓰지는 않으셨지만 정말 물심양면으로 지극한 정성을 헌성하신 여러 성도님들이 계십니다. 모든 것을 내 몸과 같이 아껴주시고 함께 해 주신 우리 목동 도장 성도 여러분께 큰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이제 밝아오는 계미년과 함께 동방 삼팔 목의 출발하는 상서로운 기운을 가진 우리 목동도장이 숙구지 새울 도수를 힘차게 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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