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해 천곡도장] 천하사 일꾼들이 모여 있다

초립쓴30대 | 2010.02.23 16:08 | 조회 4980

동해 천곡도장은 지난 상제님 어천치성절에 올해 상반기 우수도장 부문에서 중형도장 전국 2위 한 여러 도장을 제치고 당당히 2위를 한 저력은 무엇일까?표창을 받은 모범도장이다. 과연 동해도장에서 신앙하는 성도들은 어떠한 각오와 자세로 신앙하고 있을까? 전국의 쟁쟁
사오미 개명 도수를 인사로 성취해야 하는 전국의 모든 성도들에게 동해 천곡도장 성도들의 꾸밈없는 신앙담은 유익한 메시지를 던진다. 이제 천곡도장 성도들의 신앙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보자. 그리고 우리 자신의 신앙을 살찌우는 자양분을 삼자.

나도 살고 남도 살리는 길이 바로 증산도!”


 신유선 성도 (60세)/도기 130년 7월 28일 입도/7구역 부포감(수행담당 부)
 
 집사람 신병 관계로 강릉 옥천도장 이원옥 포감으로부터 신유의 능력을 보고 증산도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 동안 각종 진리 책자, 월간 개벽지, 우리 나라 9천년 역사에 관한 팜플렛 등을 전해 받아 보았습니다. 그 당시 저는 약간의 침술을 익히고 있었습니다. ‘나도 입도하여 수행하면 능력을 얻게 되고 많은 사람들에게 활인지술(活人之術)을 펴면 얼마나 좋을까’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혼란한 개벽 세상에 나도 살고 남도 살리는 길이 바로 증산도다.’라고 판단하여 입도를 결심하였습니다.
 
 처음에 집사람이 반대하였습니다. 요즘 흔히 나오는 무슨 사이비 단체면 어쩌나 하고 말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일심동체 한 부부니까 나하는 대로 믿고 한번 해보자고 설득하였습니다. 그후 우리 부부는 함께 입도하여 지금까지 3년 가까이 도장을 나가며 열심히 수행하고 있습니다.
 그러던 중 아버님을 도문으로 인도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버님은 올해 87세 되시는 순박한 농촌 촌부이십니다. 말씀 드리니 우리 두 내외를 불러놓고 만류하시면서 “과거 내가 어릴 적에 보천교란 교가 있었는데 큰 갓 쓰고 도포입고 도통한다고 가산 다 팔아서 전라도 어디에 가서 몇 년씩 있다가 거지가 되어 온 사람들 많이 보았다. 네가 말하는 것이 그런 곳이 아니냐.”하시며 화를 내셨습니다.
 
 저는 도장에 가서 포정님께 이러한 사실을 말씀드렸습니다. 포정님은 과거에 그런 사실이 있었다며 예전 책자를 펴 보이고 설명해 주셨습니다. 일제 시대에 보천교 신도들의 성금으로 독립자금을 대었던 일, 일제의 민족 문화 말살정책에 의해 탄압 받던 일, 상제님 천지공사의 동학 원신 해원공사 등 갖가지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들으니 이해가 갔습니다. 저는 다시 아버님께 조목조목 설명을 해 드리고 “태을주를 많이 읽으시면 건강해지고 무병장수하며 개벽 때 병을 이길 수 있습니다.”라고 말씀 올렸습니다. 그리고 운장주, 진액주 등 여러 주문을 알려드리며 입도를 권하였습니다. 그후 아버님은 입도를 하였고 저는 조상님 천도식과 일찍이 빛 못 본 아이들의 영아 천도식을 해주었습니다.
 
 신앙하면서 겪은 수행 체험을 몇 가지 적어보겠습니다. 입도를 앞두고 21일 정성공부 중에 백회가 열리는 등 몇 가지 체험을 하였습니다. 처음에는 무릎 꿇고 5분도 못 앉아서 다리를 고쳐 앉고 고쳐 앉고 했는데 여러 날 지나다 보니 제법 20분도 30분도 이길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백회, 인당, 얼굴 곳곳에 하물며 혀 가운데에도 기가 들어오는 것을 체험하였습니다. 이제는 눈만 감고 앉으면 기가 백회와 인당으로 들어오는 것을 느낍니다.
 
 한번은 일요치성 태을주 수행중의 일입니다. 갑자기 내 몸이 무슨 큰 공처럼 팽팽히 부풀어 손, 발, 가슴, 배가 성전크기만큼 커졌는데 내가 나를 보니까 입만 움직이며 주문을 읽고 있었습니다. 참 신기했습니다. 또 한번은 도장에서 저녁 수행 중 칠성경을 읽는데 내 몸이 아주 작아지더니 아주 가벼워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정신이 혼미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칠성경 삼독 후 진법주 삼독, 개벽주 삼독을 마친 후에 몸을 움직여 보았는데 무게를 전혀 못 느낄 정도였습니다. 또 한번은 집에서 청수 모시고 수행을 하는데 어느 계곡 옆 넓은 밭 같은데 그 골짜기 가득 아주 부드러운 기운이 꽉 차서 막 휘젓고 구르고 하여도 너무 기분이 좋고, 행복했습니다. 수행 중에 물 따르는 소리도 들었습니다. 도공 수련 중에는 솜뭉치처럼 가볍고 부드러운 기운이 양손을 크게 감싸고 있는 듯했습니다.
 
 저는 당뇨혈당 수치가 높았는데, 지금은 완치는 아니지만 거의 평균 수치에 가까이 되었습니다. 또한 발톱무좀이 심해서 발톱이 심하게 망가져 발가락 중 여섯 개가 흰 발톱이었는데 이제는 완치되었고 오른발 엄지가 조금 덜 나았을 뿐입니다. 그것도 곧 완치되리라 믿고 있습니다. 피부도 고와지고 특히 손을 보면 젊은 사람들과 거의 같다는 느낌이 들 정도랍니다.
 
 앞으로 내 주위에 가까이 지내는 친구들을 입도시켜야 하는데, 다들 아는 친구들이라 한 명만 입도하면 다들 우르르 하고 몰려들어올 것 같습니다. 지금은 서로 눈치만 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 매월 개벽지를 전하고 있으니 곧 좋은 결과가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우리 아이들을 빠른 시일 안에 입도시킬 예정입니다. 감사합니다.
 
 
 “수행 6일째 태을주 기운을 체험했습니다”
 이지홍 성도(38세)/도기 131년 4월 9일 입도/2구역 포감
 
 제 고향은 강원도 삼척시 원덕읍 임원이라는 작은 마을입니다. 어릴 적 뒷산에서 밤새도록 반딧불이 오가고 헬리콥터에서 얼룩무늬 옷을 입은 새까만 군인 아저씨가 내려오고…. 이런 짧은 기억들이 있습니다.
 나중에 알게 되었는데 저는 울진 무장 공비사건 때 그 한가운데서 살았습니다. 경찰관이셨던 아버지의 잦은 전근으로 한곳에 3년 이상은 머물지 못한 것이 저를 상상의 세계에 빠지기 좋아하는 내성적인 성격으로 만들었습니다.
 
 어릴 적부터 삶과 죽음, 내가 무엇을 위해 태어났고 무엇을 위해 살아가야 할 것인가라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제겐 무척 심각했기에 별명도 ‘애늙은이’,‘울할미’그 중에 제일 맘에 드는 건 ‘문학소녀’였습니다.
 
 저의 집안은 고모가 스님이고 언니가 독실한 기독교 신앙을 한 탓에 저는 두 곳에 다 적을 두고 신앙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의 마음속에 일어나는 의문들을 잠재우기엔 턱없이 부족했던 허구의 진리 속에서 뛰쳐나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돌아보면 유난히 평범치 못한 삶의 연속에 지쳐버린 어느 날, 모든 것이 희망으로 바뀌는 순간이 다가왔습니다. 작년 3월 작은 식당을 개업했는데 강릉 옥천도장 이상권 성도님이 들르셨고, 친구의 선물로 벽에 걸어둔 달마도 액자로 인해 기(氣)에 대한 대화를 시작하였습니다.
 
 저는 철학, 기, 수도, 등에 관심이 있었기에 대화는 길게 이어졌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이상권 성도님이 참으로 지혜로운 포교방법을 선택하신 것 같습니다. 이전의 신앙 탓에 마음속에 자연스럽게 남아 있었던 기독교의 그림자때문에 아마 첫 대화에 상제님 말씀부터 나누었다면 저는 외면했을 것입니다. “일주일 동안 매일 한시간씩 시간을 내어달라. 직접 기를 체험하게 해주겠다.” 일종의 내기와도 비슷한 약속이었습니다.
 
 일주일 동안 한가한 영업시간에 한 시간씩 수행을 했습니다. 처음엔 성전을 보는 것도 어색하고 미신 같아 내키진 않았습니다. 하지만 약속을 지키기 위해, 또 기(氣)에 대한 호기심도 있었기에 벌써 6일째 수행 중이었습니다. 저의 속마음은 ‘이제 하루만 하면 된다. 괜한 약속을 해서 이 고생을…’하면서 태을주를 작게 따라 하는데 갑자기 변화가 왔습니다. 머리 위에서 개울물 흐르는 것도, 소나기가 오는 것도 아닌 무어라 형언 할 수 없는 것이 쏟아져 내리면서 온몸에 전율처럼 번져갔습니다. ‘이것이 무엇인가? 내가 미신에 빠진 것일까?’의심하면서 태을주를 따라하는데 신기하게도 그 힘은 태을주 스물 석 자마다 틀리게 느껴졌습니다. ‘훔’에서는 크게 ‘치’에서는 조금 작게, 그리고 ‘태을천 상원군’에서는 주체하지 못할 정도의 큰 기운을 느꼈습니다. 이렇게 주문의 글자마다 서로 다른 기운이 계속 규칙적으로 반복되었습니다. ‘아! 여기 무언가 있구나’ 저는 곧바로 21일 정성수행에 들어갔고 팔관법 공부를 병행하였습니다. ‘우주일년, 빙하기...’ 이런 것은 이해가 되었지만 ‘상제님이 이 땅에 오셨다 가셨고, 9년 천지공사로 이미 이 세상을 다 설계해놓으셨다.’라는 곳에서는 받아들이지 못하였습니다.
 
 수행 때 느끼는 기(氣)와 신명들의 수행소리를 들으며 호기심에 일과처럼 도장을 오가던 중 성지순례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버스가 어느 휴게소에 섰을 때의 일입니다. 그날도 이상권 성도님이 저를 챙기느라 식사를 하자고 깨우는데, 저는 너무나 큰 기운에 눌려 겨우 눈만 한번 뜰 수 있었을 뿐 손가락 하나도 움직일 수 없었습니다. 그 힘은 보통 수행 때와는 전혀 다른 큰 기운이었고 거대한 파도처럼 밀려왔습니다. 한참동안 몸을 가눌 수 없을 정도였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삼척 성내도장의 어느 신안이 열린 성도님이 그 시간에 버스에서 관운장이 함께 계셨다고 한 말을 전해들었습니다.
 
 성지 순례 중 다시 새벽 시간을 내어 천배례와 수행을 하였고, 오후 시간을 내어 진리공부를 병행하며 21일 정성수행 후 천도식을 올렸습니다. 가족들의 불행한 죽음 직후여서 무척 감격스럽게 눈물을 흘리며 천도식을 올려드렸는데 신안이 열리신 성도님이 보니 깊은 계곡에서 가족들이 못나오고 있다며 무슨 사연이 있는 집안 같다고 하였습니다.
 
 포정님께서는 정성수행이 더 필요하다고 하셨고, 저는 다시 21일 정성수행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21일째 수행날 아버지도, 오빠도, 큰어머니까지 만나게 되었습니다. 아버지도 세 번 오셨고 오빠도 세 번 찾아왔는데, 세 번째엔 신사복에 예쁜 아가씨를 데려와서는 제게 소개시키려고 같이 왔다고 했습니다. 아마 천상에서 장가를 든 것 같아서 기뻤습니다.
 
 요즘에는 사부님께서 우주변화원리에 반도통 하라는 말씀대로 저녁에 세 시간쯤 포감들과 함께 우주변화원리를 공부하고 있습니다. 얼마전에는 수행 중이었는데 머리에 네모난 갓을 쓰고 처음 보는 옅은 황색 옷을 입으신 분이 우리 성도님들께 책을 펼쳐서 한 분 한 분 보여주시고 제게도 보여주시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공부를 가르쳐주실 때 도와주시는 신명이신 것 같았습니다.
 체험과 진리공부를 함께 하면서 상제님의 진리가 얼마나 거짓됨 없고 완전한 것인지를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상주를 시작한지 이제 5개월 되어갑니다. 개인적인 일이야 누군들 어렵지 않겠습니까마는 저는 군령에 참석하여 태사부님 사부님의 귀한 도훈 말씀을 아로새기며 세상에 태어난 목적과 내게 주어진 사명이 상제님 일밖에 없음을 깨닫습니다. “너희는 손에 살릴 생(生)자를 쥐고 다니니 득의지추가 아니냐, 천하창생의 생사가 너희들 손에 매여 있느니라.” 오늘도 상제님의 피 맺힌 절규가 생생한데 부족하지만 저는 코밑에 닿은 이 천지개벽기에 오로지 상제님의 일꾼으로 또한 앞으로는 천록포감이 되어서 더 열심히 일할 것을 다짐합니다. 사부님의 우주변화원리 강훈과 포정님의 열성 어린 우주론 강의를 여러 성도님들과 함께 공부하면서 참으로 하루하루가 새롭게 깨어지는 것을 절감합니다. 태사부님 사부님의 명을 받들어 육임완수는 물론 단 한 생명이라도 더 구하기 위해 온 힘을 다하겠습니다.
 
 
 “항상 깨어있는 일꾼이 되고자 오늘도 기도합니다”
 추교승 성도(29세)/도기 128년 9월 9일 입도/구역포감, 동해대 써클장
 
 중학교 2학년 때 『丹』이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이상하게도 그 내용이 허황된 것이 아니라 사실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후의 학창시절은 동양사상과 수행에 대한 관심과 탐구의 시간이 되었습니다.
 고교 3학년에 들어 평소 자주 가던 도서대여점 주인 아저씨로부터 “자네, 증산도라고 들어봤나?” 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도가 서적을 자주 찾던 저를 눈여겨보셨던가 봅니다. 그 아저씨는 한 책을 권해 주었는데 바로 『이것이 개벽이다』이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수험준비에 바빴기에 ‘이런 단체도 있구나! ’하는 정도로 지나쳤습니다.
 
 그후 대학에 진학한 후 학생회관을 둘러보던 중 낯익은 이름의 서클을 발견하였습니다. ‘증산도학생회’였습니다. 그리고 한달 후 써클룸을 방문하였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서던 순간 코를 스치는 향내음이 이채롭게 느껴졌고, 마치 다른 세계에 첫발을 내딛는 느낌이었습니다.
 동아리 가입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태전 본부의 대치성에 참석하였습니다. 도기 124년 태모님 성탄치성은 태사부님께서 처음으로 도공을 내려주시는 날이었습니다. 아직 사상신앙을 정립하지 못한 저로서는 도공수행은 감당하기 어려웠습니다.
 
 ‘아이쿠! 이거 혹시 발을 잘못 딛는 것이 아닌가!’하는 우려가 들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교정님과 서클장의 교육을 통해 의혹을 말끔히 씻고, 치성참석 다음주에 입도식을 봉행하였습니다. 그후 학업과 신앙생활을 병행하다가 군대를 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2년여의 군생활을 무사히 마치고 도장을 다시 찾게 된 저는 의외의 소식을 접하였습니다. 군 생활 중 도장에 연락을 안했던 불찰로 구역 제외가 되었던 것입니다. 저의 짧은 생각이 재입도라는 불명예스런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재입도를 하게 되면서 새로 시작한 신앙생활은 순탄치 않았습니다. 1년 후 신상문제로 대학을 중도에 그만두면서 도장을 원고지인 동해도장으로 옮기면서 일반부에 편입되어 신앙생활을 계속하였습니다.
 
 그후 도장에 상근하며 어느 정도 신앙이 궤도에 오르는가 싶었는데 도중에 포정님이 바뀌었고, 개인 문제로 직장을 다니게 되면서 신앙생활에 부진한 나날이 계속되었습니다. 그 무렵의 기간이 길지 않은 신앙기간 중 가장 큰 시련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하지만, 김광철 포정님의 진심 어린 심방을 통해 다시 한번 일어설 수 있었습니다. 그후 포정님과 매일 도전공부를 하며, 조직신앙과 일꾼신앙으로 도약할 수 있는 힘을 길렀습니다. 그러한 노력의 결실이었는지 어머님과 누님을 도장에 인도하면서 가족신앙의 틀이 마련되었고, 집안의 지원 하에 떳떳하게 상제님 일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도장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되면서 일꾼으로서의 일복도 찾아들게 되었나봅니다.
 
 동해도장에 난제가 하나 있었습니다. 동해대학교에 적을 두고 있는 일꾼이 없어서 포교활동에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동해대에 상제님 일꾼들의 산실을 마련하고자 올해 초 29살의 나이에 다시 대학문을 두드리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다시 시작하게 된 대학생활은 쉽지 않았습니다. 저와는 다른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신세대 학생들과 의식의 격차를 줄이는데 많은 시간을 할애하였습니다. 이렇게 조금씩 친분을 쌓게된 학내 지인들에 대한 포교활동으로 활발한 홍보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후반기 들어 천하사에 종군하고자 하는 결의로 8월부터 도장상주를 하게 되었습니다. ‘천하사를 하는 자는 항상 생각이 멀고 깊어야 하고, 불시의 일에 대비하여야 하며, 경계함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하느니라’(道典 8:31:5) 하고 경계하여 주신 상제님 말씀을 쫓아 항상 깨어있는 일꾼이 되고자 오늘도 기도합니다.
 
 
 ‘개벽기에 반드시 세상사람을 살려야 한다’
 박귀애 성도(27세)/도기 127년 11월 21일/천록포감, 수석포감, 집정
 
 저의 집은 부모님과 저 이렇게 셋입니다. 아버지는 제가 중학교 때까지 원양어선을 타셨고, 어머니는 뭍에서 분식집, 과일장사, 호떡장사 등을 하며 저를 키워주셨습니다. 그러다 고등학교 3학년 때 어머니가 고혈압으로, 그리고 얼마 후 아버지가 뇌졸중으로 쓰러지셨습니다. 그것은 저에게 너무도 큰 시련이었습니다. 그 시련은 외동딸로 커서 혼자밖에 몰랐던 저에게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것과 내 가족에 대한 강한 책임감을 갖게 하였습니다. 이것은 후일 상제님 진리를 접하면서 개벽기에 반드시 세상사람을 살려야 한다는 인간으로서의 대의명분과 나는 꼭 증산도를 해야한다는 강한 의지로 발전하였습니다.
 
 상제님과의 인연은 대순진리회가 먼저였습니다. 고등학교 졸업후 23살 때, 부모님 병을 고치려면 조상 천도제를 지내야 한다는 20대 후반의 어떤 언니의 말을 믿고 대순진리회에 가서 3만원을 내고 천도제를 올렸습니다. 그런데 3일 후 우연히 택시기사를 하던 오영환 성도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성도님의 명함에 태을주가 적혀 있었고 그것을 계기로 저는 대순진리회를 버리고 증산도로 올 수 있었습니다.
 
 입도 후 1년 정도, 직장에서 퇴근한 후에는 개벽이 올 수밖에 없는 이치와 제가 수행하며 체험한 것을 부모님께 지속적으로 말씀드렸습니다. 처음엔 걱정하시다가 몇 개월 지나자 네가 꼭 증산도를 신앙하겠다면 어쩌겠냐 하셨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부모님의 생각도 존중해야 하지만 무조건 입도 시켜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자식인 저를 믿지 못하신다면 도장 건물 3층에서 떨어져 죽겠다고 강력하게 밀어 부쳤습니다. 그렇게 하여 두 분은 같은 날은 아니지만 입도식을 올렸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부모님과 함께 직선조 외선조 천도식을 올려드렸습니다. 천도식 날, 배에 물이 차서 돌아가실 때까지 고생하셨던 외할머니와 6.25전쟁 당시 10남매를 키워오시며 고생하셨던 할머니 생각에 한없이 눈물을 흘리시는 부모님을 보았습니다. 저는 조상님들에게 보은한 것 같아 기쁘기보다는 이제껏 살아 생전 말못하신 부모님의 마음속 응어리를 조금이나마 풀어드린 것 같아 정말 효도를 한 것 같았습니다.
 
 신앙 3년째 되던 해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고민을 했지만 무엇보다 자신의 의지가 중요하다는 생각에 부모님과 상의하여 천록포감에 지원하였습니다. 그리고 도장에 상주한 지 1년만에 제 자신의 신앙성숙을 위해, 부족하지만 태사부님 사부님 전에 내 모든 것을 바친다는 각오로 성녀포교단에 입단하였습니다.
 
 짧고도 아쉬웠던 포교성녀단 교육을 마치며, 우리 신도들과 개벽기에 처한 인류를 생각하시는 바다와 같이 크신 태사부님과 사부님의 은혜에 백분의 일이라도 보답하기 위해서는 상제님 태모님 태사부님 사부님 말씀으로 신앙해야겠다는 신앙의 주관이 확고히 섰습니다. 이제 다시 1년이 흐른 지금 제 개인적인 포교실적은 없지만 포정님 그리고 여러 포감님들과 함께 노력하여 132년 상반기에 동해 천곡도장이 중형도장 2위라는 평가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제 태사부님과 사부님의 명으로 생명구원의 500일 작전을 시작하였습니다. 저는 이 글을 마치면 바로 부산에 있는 제 조카를 포교하러 갑니다. 9월호 개벽지가 나올 때쯤 조카가 대포 여러분들과 함께 증대교육에 참석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태사부님 사부님 말씀처럼 모든 일에 정성스러움을 잃지 않는 신앙인이 될 것을 다짐 합니다.


“육임완수, 기필코 이루리라”
 김진원 성도(37세)/도기 122년 10월 28일 입도/5구역포감, 재정
 
 저는 1966년 삼척에서 태어나 고등학교까지 다녔습니다. 직장과 군복무를 마치고는 1990년에 남쪽지방 마산에 가서 직장생활을 시작하였습니다. 제가 어릴 때 집에서 점을 보았는데 제가 살려면 남쪽으로 가야한다고 말했답니다. 그것이 항시 제 마음속에 있었고 커서 저는 마산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낯선 타향살이는 모든 것이 뜻대로 되지 않는 너무도 힘든 삶이었습니다. 직장 여건도 그리 좋았고 만성 위염이라는 병이 있어 7개월마다 발병하였습니다. 정말로 이 세상 살기가 싫어지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같이 일하는 분의 소개로 부산에 있는 기아서비스 전기과로 취업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몇 개월 동안 창원에서 부산으로 출, 퇴근을 하였는데 어느 날 아침에 저는 교통사고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한달 정도 병원에 입원하였고 제가 없는 사이에 누군가 제자리를 맡아 주었습니다. 퇴원 후 다시 직장에 복귀하자 그 분은 다른 회사로 취업을 갔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그 분이 놓고 간 증산도 책자를 우연히 보게 되었습니다. 읽어보니 우리 나라 역사를 비롯하여 평소 궁금히 여기던 내용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증산도라는 생각은 미처 하지 못하고 그저 ‘아, 이런 것이 있었구나.’하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회사동료가 와서는 선배 집에 놀려가자고 하여 가게 되었습니다. 그 선배는 예전에 같은 회사를 다녔던 관계로 잘 알고 있었고 또 저를 부산에 있는 회사로 소개해준 분이었습니다. 동료와 같이 그 선배 집에 가서는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원래 그 선배는 함께 간 동료를 포교하려고 하였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옆에서 이야기를 듣던 저는 예전에 읽은 책 내용과 너무도 비슷한 것이 많아 적극적으로 물어보았습니다. 저는 대화를 통해 그것이 바로 증산도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선배는 결국 그 사람을 포기하고 저를 포교하게 되었습니다.
 그 분의 이름은 지금 마산 중앙도장에서 신앙하고 있는 윤병호 성도님입니다. 저는 항상 그 분한테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물론 그 분이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증산도에 들어왔겠지만 그 분 때문에 일찍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결국 91년에 창원도장에 제가 마지막으로 입문을 하였습니다. 그 후로는 입문 제도가 완전히 없어지고 바로 입도 제도로 바뀌었습니다. 그후 개인사정으로 고향으로 가게 되었고 도기 122년 음력 10월 28일에 드디어 입도식을 올렸습니다.
 
 입도후 부모님의 반대로 인해 매우 힘든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고 부모님과의 마찰을 피해 포항도장으로 갔습니다. 80평이 넘는 도장생활은 또 다른 도전이었고 상주생활은 기쁨 그 자체였습니다. 상주 6개월만에 총무 일을 담당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도장책임자를 교정이라고 불렀는데 저는 교정님을 보필을 하면서 나름대로 자부심을 가지고 생활하였습니다. 포항도장에서는 97년 5월까지 있었습니다. 그리고 97년 1월에 결혼을 하였고 그해 5월 다시 동해로 이사를 왔습니다. 이사온 후 한동안은 집안사정으로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도 못했습니다. 이곳에 와서사부님의 가르침을 잘 받들고 천명(天命)인 육임완수를 기필코 이루어내어 많은 사람들을 살리는 신도의 한사람으로 다시 한번 태어나겠습니다.
 
 
 “태을주 수행 한달 후, 90%나 헐었던 위(胃)가 완전히 정상으로 돌아왔습니다”
 이재록 성도(49세)/도기 126년 5월 22일 입도
 
 증산도 도문에 입도하기 전 대순진리회에 다녔습니다. 평소 알고 지내던 친구가 일주일 먼저 대순진리회에 들어갔고, 그 친구가 조상을 모시는 좋은 곳이라고 하여 아내와 함께 그곳 가정 살림방 같은 회관에 갔습니다. 첫날 제사를 모시라고 하여 바로 입도를 하였습니다. 그후 한 달에 한번씩 회관에 갔는데 체계적인 교육은 없고 그냥 음료수 한잔 놓고 몇 마디 말하고 나오는 정도였습니다. 이렇게 일년 반정도 대순진리회에 다녔습니다.
 그러던 중 대순신도들 상호간에 방면이 다르면 전혀 만나지 못하게 하는 것을 알았습니다. 만나도 절대 교리 얘기를 하지 못하게 하고 경계하게 하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만일 우연히 만나기라도 하면 간부가 호되게 나무랐습니다. 저는 뚜렷한 이유도 없이 진리를 논하지 못하게 하고, 서로를 이간시키는데 회의를 품게 되었습니다.
 
 어느날 거리에서 수행하는 모습의 증산도 포스터를 보았습니다. 아내와 함께 한번 찾아가 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던 중 옆집 아주머니와 우연히 증산도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그 분이 증산도를 신앙한다고 하여 같이 도장에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증산도는 대순진리회와는 전혀 달랐습니다. 각 도장 신도들 상호간 누구와도 교류할 수 있고 전국 어느 도장 성도님들과도 마음이 열려 있었습니다. 저는 대순진리회와는 너무도 다르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며칠 후 아내와 함께 증산도에 입도하였습니다.
 
 입도후 더욱 확신이 드는 계기가 있었습니다. 저는 간과 위, 십이지장에 많은 문제가 있었습니다. 간장만 해도 정상 수치를 훨씬 뛰어넘었으며 위와 십이지장을 내시경으로 봐도 회생이 불가할 정도로 헐어있었습니다. 그래서 이곳 동해에 있는 작은 병원에서는 고칠 수 없으니 서울의 큰 병원에 가서 조직검사를 하라고 의사는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서울에 갈 경제적 형편도 못되었고, 이상하게 가고 싶은 마음도 없었습니다. 증산도 도장에 다니며 태을주 수행을 하면 병이 낫는다는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그래서 무작정 수행에 들어갔습니다. 병원에서는 밖에 나가지 못하게 했지만 저는 고집을 피우고 저녁만이라도 시간을 달라고 하여, 저녁 7시 이후부터 새벽 7시까지 도장에 와서 수행과 배례를 지속하기를 한달 정도 하였습니다.
 
 어느날 음식물을 섭취해도 쓰리거나 거부반응이 없어서 재조사를 하였습니다. 모든 장부가 아주 깨끗하게 정상으로 돌아왔고 다만 위에 깨알 것은 점 세 개만 붙어있었습니다. 90%나 헐었던 위가 완전히 정상으로 돌아왔던 것입니다. 의사도 놀랐고 저도 또한 놀랐습니다. 그 의사가 뭘 먹고 나았냐고 물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만 해도 입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증산도를 잘 모를 때고, 또 믿어줄 것 같지도 않아서 그냥 이산 저산 약초 뿌리 캐서 즙을 내어 먹었다고 말했습니다. 만약 지금 정도만 상제님 진리를 공부했더라면 자신있게 ‘증산도 도장에서 태을주 수행해서 나았소!’ 라고 말했을 텐데, 지금 생각하면 참 아쉽습니다.
 
 그후 저는 상제님을 마음속에 모시기 시작했습니다. 지금은 세 딸과 아들이 모두 입도를 하여 가족 신앙을 하고 있습니다. 제가 이렇게 상제님을 모시게 된 것도 조상님의 음덕임을 알고 감사의 마음으로 늦었지만 작년에 천도식을 올렸습니다. 제가 상제님을 바로 알고 모실 수 있도록 도와주신 여러분께 감사드리고, 아직까지도 증산도를 모르고 계시는 분들을 보면 안타까운 마음으로 한 명이라도 더 상제님 진리를 전하기 위하여 노력하고 있습니다.
 
 
 “21일 수행 마지막 날, 저의 조상님을 뵈었습니다”
 허순옥 성도(46세)/도기 132년 2월 17일 입도
 
 제 고향은 부천이고 저는 칠남매 중 둘째 딸입니다. 딸 여섯에 아들이 하나로 아들이 귀한 집입니다. 어렸을 땐 몰랐지만 나이 들면서 제가 딸이면서도 집안 일에 아들 못지 않은 신경을 써야 했습니다. 저의 집안은 종교가 없습니다. 제 밑으로 세 번째 동생만이 교회에 열심히 다닙니다. 저는 산이 좋아 등산 다니며 우연히 절을 지나칠 때면 두 손 모으고 합장하곤 했습니다.
 
 95년 12월말쯤 저는 동생이 머물고 있던 외국에 나가게 됐는데, 96년 1월부터 6자와 관련된 안 좋은 일을 계속 겪게 되었습니다. 60만원을 잃어버리고, 한국에 돌아와서 쉬면서 남동생으로부터 6자와 관련된 돈을 빌리게 되고, 또 저희 외삼촌이 병환으로 누워 계셨는데 4월 6일 날 어머니를 모시고 병 문안을 다녀왔습니다. 한달 후 6일 날은 큰 삼촌이 돌아가시고, 어느 날 꿈을 꾸었는데 검은 소 한 마리가 나를 향해 달려와 피했는데 누군지는 알 수 없지만 두 사람을 향해 달려가는 꿈을 꾸었습니다. 그러자 몸이 아파 저희 집에 머물던 작은삼촌마저 한달 후인 6월 6일에 돌아 가셨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두 사람의 방문을 맞았는데, 바로 대순진리회 사람들이었습니다. 조상님 얘기하면서 우리 집안에서는 제가 풀어줘야 한다면서 많은 얘기를 했습니다. 제사를 지내야 한다고 하길래 조상님 위한 일이라면 좋은 일이니까 하는 생각에 그 사람들을 따라가 시키는 대로 했습니다. 따라간 곳은 부천 어느 건물 2층이었는데, 한쪽 조그만 방에 가보니 제를 올릴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었고, 양쪽에는 촛불이 켜져 있었고 여러 명의 여자들이 하얀 한복을 입고 있었습니다.
 
 시키는 대로 제를 올리고 집으로 왔지만 식구들에게는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뚜렷하게 뭐라고 해야 할지 몰라서였습니다. 밤에 낯선 사람 따라나가서 조상님 운운하면 어느 누가 이해할까 싶어서였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전화로 계좌번호를 불러주면서 조상님께 촛불이라도 켜놓게 조금이나마 돈을 보내달라고 했습니다. 진리를 알려 주는 것 없이 계속해서 전화로 얼마를 보내라고 자꾸 전화가 왔습니다. 시간이 흐를 수록 이상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진정으로 조상님을 위한 일이라면 후회가 없겠지만 이상한 생각이 자꾸 들었고, 뚜렷한 이유나 목적도 없던 터라 그 사람들을 멀리 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6년이 지나 2002년이 되었습니다. 제가 울진에서 근무할 때 제 밑으로 네 번째 동생인 순정이의 권유로 강릉에서 개최하는 증산도 개벽 대강연회에 가게 되었습니다. 처음으로 듣는 말씀들이었지만 거짓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부님 말씀이 처음에는 어려웠고 무슨 뜻인지를 이해가 안됐지만 동생이 전해준 월간 『개벽지』와 『다이제스트 개벽』 등 여러 종류의 책을 접하게 되면서 또 한번의 강연회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강연회 끝나고 같이 동행했던 식구들과 식사 중에 육임조란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 순간 6자가 문뜩 생각이 났습니다. 96년도에 6자와 관련된 일, 6년 후인 올해 증산도를 알게된 일. 저는 더욱 열심히 사부님 말씀 테이프도 듣고 책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동해로 직장을 옮기면서 천곡도장을 나가게 되었습니다. 도장에 계신 김광철 포정님과 박귀애 포감님 그리고 여러 성도님들의 친절하고 자세한 말씀에 더 자세히 진리를 알게됐고 편안한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21일 정성 수행에 들어갔습니다. 새벽 6시에 일어나 준비하고 6시 50분쯤에 도장에 도착해서 청수 올리고 30분 수행하고 30분 진리 공부에 임했습니다. 아는 것이 없어 처음에는 어색했지만 포정님은 자세하고 알기 쉽게 우주원리와 팔관법을 교육하셨고, 나름대로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새벽에 일어날 때 몸은 힘들었지만 수행에 임할 때만큼은 마음이 편하고 즐거웠습니다.
 
 한편 새벽 수행 중에 오로라 현상을 느끼게 되었고, 머리는 있지만 몸은 사라지고 없어지는 느낌도 받았습니다. 오색 불빛도 보게 되고 모든 것이 신기하게 느껴졌습니다. 21일 수행 끝나는 마지막 날에는 저의 조상님을 뵈었습니다. 도복을 입으시고 좌정하신 세분이셨습니다.
 그 중 한 분이 제 앞에서 딱 멈춰 서는데 저는 그분을 기억했습니다. 포정님께 말씀 드렸더니 조상님이라 하셨습니다. 저는 아버지께 전화로 확인했는데 아버님 말씀과 저의 얘기가 일치했습니다. 21일 정성공부 마지막 날에 제게 보여준 그 자체도 신기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21일 정성 공부를 마치는 132년 2월 17일에 확신을 가지고 입도하게 되었습니다. 마치 큰 일을 해낸 영웅이나 된 것처럼 말입니다. 많은 성도님들의 환영 속에 저는 상제님을 만난 기쁨에 눈물을 흘리고 말았습니다. 상제님의 말씀을 깊이 되새기면서 어긋남 없이 천하사의 일꾼이 되기 위해 8월초부터 도장에서 상주하고 있습니다. 도장에 상주하면서 포정님과 포감님 그리고 여러 성도님들과 더불어 열심히 배우겠습니다.
 
 
 “상제님 대업을 펴는 최선봉에 서겠습니다”
 김상겸 성도(33세)/도기 128년 7월 30일 입도/4구역 포감, 서점담당
 
 동해의 물 맑은 무릉계곡, 그곳이 바로 제가 태어난 유명한 관광지, 강원도 동해시 삼화동입니다. 4년 전쯤으로 기억합니다. 꿈에서 선명하게 봉황 7마리를 처음 본 곳도 바로 그 곳입니다. 그것은 상제님 신앙을 하는 제게 큰 힘이 되었던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상제님 신앙을 하게 된 과정을 되돌아보면 조상 선영님의 음덕에 힘입어 마치 양치기가 양몰이 하듯 저를 한곳으로 몰아온 듯한 느낌입니다. 상제님 신앙을 하게 된 것은 둘째형이 단학을 하면서 각종 책을 사 가지고 온 것이 첫 계기를 이루었고, 셋째형이 그 책을 보고는 대학에 들어가서 증산도 서적에 접하게 된 것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 후 고3 때 단학 수련을 직접 해봤고, 89년도 강릉대학에 입학한 후, 제일 먼저 찾아 간 곳이 증산도 도장이었습니다. 이처럼 저는 증산도 도장에 꼭 가보고 싶었습니다. 당시 강릉도장에서 저를 맞이한 성도님이 많은 자료들을 보여주며 열정적으로 가르쳐주었고, 신앙의 본보기가 되어 주었습니다. 그 이후 10년이 넘게 상제님을 신앙해 오고 있습니다.
 
 올해 들어 별다른 일이 없다면 새벽 일찍 무조건 도장에 나가 상제님 태모님 전에 사배하고 수행과 함께 하루 일과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근래에는 사부님의 우주변화원리 강의를 인터넷을 통해 1시간 시청하고 김광철 포정님의 주도로 다시 1시간 이상 공부에 열중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 새벽수행을 마치고 너무 피곤해서 7시에 넘어 잠깐 집에 들어와 눈을 붙였는데 돌아가신 아버지가 나타나셨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신명계에서 상제님 일을 하고 계시며 아들인 저를 날카롭게 주시하고 계심을 확인하는 체험을 하였습니다. 그 후부터는 한순간도 허술하게 보내서는 안되겠다고 결심하고 더욱 열심히 도전과 진리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낮에 시간이 나면 도서관에 가서 공부하고, 한 시간도 방심하지 않고 포교에 열중하였습니다. 지난 3월에는 신연석 성도를, 6월에는 김관호 성도를 입도시키고 그리고 7월에 김동균과 같이 21일 정성공부를 하였습니다.
 
 직선조 보은치성과 외선조 천도식을 올린 얼마 뒤에 있었던 일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새벽 수행 후 7시 무렵 잠시 눈을 붙였는데 어딘가를 헤매다 저승에 올라간 적이 있습니다. 그곳에 누군가를 찾기 위해 간 걸로 기억하는데, 저승 관문에는 엄청 키가 큰 두 명의 장군 같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내는 3가지 질문을 맞히고 저승문을 통과하여 들어갔습니다.
 
 그곳은 지옥 같은 곳이었는데 잔혹한 광경이 눈에 펼쳐졌습니다. 한참을 바라보다가 제 앞 책상에 명부록 같은 것을 펼쳐 있길래 제 이름을 대고 제가 아는 누군가를 찾아 달라고 했습니다. 명부록이 뒤적여지는 것을 보다 문득 꿈에서 깼는데, 명부록에는 얼마 전에 천도식을 올린 조상님 명단이 제 이름을 중심으로 거꾸로 적혀 있었습니다. 참으로 생생하고 충격적이었습니다.
 
 천도식을 한 뒤 집안에 큰 문제가 없고 제가 상제님 천하사에만 집중할 수 있게 되어 너무 좋습니다. 더욱 열심히 정진해서 천하사의 ‘큰 일꾼’이 되라는 신명계의 메시지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만약 제가 이에 부응하지 못한다면, 큰 후회를 남길 것입니다. 전 어리석고 싶지 않습니다. 제가 걸어야 할 길이 무엇인가? 성녀포교단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저는 이를 위해 준비하며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제 도장상주를 첫걸음으로 해서 신명을 다 바쳐서 천하사에 종군하며, 포교단 입단으로 한걸음 더 전진하여 상제님 대업을 펴는 최선봉에 서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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