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벽 실제상황」고구려유적 및 백두산 답사

2010.03.17 | 조회 3330

한중일(韓中日) 역사의 진실과, 미래의 대변혁 소식을 대도의 가르침으로 전하는 『개벽 실제상황』! 이 책을 발간한 대원출판은 얼마전 독자들을 위한 특별한 이벤트를 마련했다. 중국의 동북공정과 일본의 독도침탈로 한·중·일 삼국의 역사전쟁이 치열해지고 있는 이 때에, 우리 선조들의 기상이 서린 옛 고구려땅으로 독자들을 초대하는 뜻깊은 행사를 준비한 것이다.



지난 8월 한달간 전국 서점과 인터넷에서는 ‘고구려 문화유적 및 백두산 답사’ 독자 응모 이벤트가 펼쳐졌다. 비록 짧은 기간이었음에도 많은 독자들이 참여해 뜨거운 관심과 열기를 느끼게 했다. 드디어 추첨일인 9월 3일. 인터넷으로 추첨현장이 생방송되는 가운데, 행운의 열쇠를 손에 쥔 20명의 주인공이 탄생했다. 그리고 대학가 등에서 역사바로세우기 운동을 이끌어 온 증산도 대학생·청년연합회 회원들이 함께 답사에 동참하게 되어, 최종 130여명에 달하는 대규모 답사단이 구성되기 이르렀다.

이번 답사의 주무대는 우리나라와 국경선을 맞대고 있는 중국 만주 일대. 흔히 동북3성(요녕성·길림성·흑룡강성)이라 불리는 이 지역은 고대국가 형성기부터 우리 조상들의 활동 무대였고, 고구려의 영토였던 곳이다. 현재에도 이 지역에는 우리 민족의 피가 면면히 이어져오고 있으며, 소중한 민족의 문화유산이 적지않게 남아 있어 역사적인 가치가 매우 큰 곳이기도 하다. 또한 고구려 유적지 외에도, 민족의 성산 백두산 천지와 일제시대 항일운동 유적지 등을 답사하는 코스가 더해져 이벤트의 의미는 더욱 배가되었다.




낮 12시경 인천공항을 출발한 비행기는 1시간 30여분 뒤 중국 심양에 도착했다. 심양(瀋陽)은 중국에서 다섯 번째로 큰 도시이자, 요녕성(遼寧省)의 정치·교육·문화의 핵을 담당하는 제1의 도시. 과거에도 요동지역 교통의 요지였으며 한민족의 흥망과 수난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본래 배달·조선·북부여·고구려·대진국(발해)에 이르기까지 이 일대는 우리의 영토였으나 대진국이 망하고 요동∼만주의 땅을 상실한 후 거란(요), 여진(금), 몽골족(원)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답사단은 4대의 버스에 나눠 타고, 첫 번째 목적지 심양 고궁을 향해 출발했다.

┃심양고궁·북릉공원
심양 고궁(古宮)은 북경 자금성(紫禁城) 다음으로 큰 중국의 대표적인 궁전건물로 손꼽힌다. 후금(청)을 세운 누루하치가 1625년에 짓기 시작해 130년이 걸려 완성된 만주족 황제의 건축물로, 고궁의 동로(東路)로 접어들면 고궁을 대표하는 대정전(大政殿)을 만나게 된다. 그 좌우로는 황제를 보좌했던 두 왕의 거처인 좌익왕정(左翼王亭) 우익왕정(右翼王亭)이 자리하고 있고, 아래로는 차례로 팔기군 수장들이 거했던 여덟 개의 정자가 늘어서 있다. 대정전 앞에서 역사 가이드는 한민족의 역사와도 관련이 깊은 청나라와 만주족에 얽힌 역사 한토막을 들려주었다.

“누루하치가 세운 후금은 옛 금(金)나라를 계승한다는 뜻에서 지어진 국호입니다. 그런데 《금사(金史)》에 의하면 금 태조 아구타의 선조가 함보(函普)라는 인물로 그가 신라인 마의태자였다는 것이 거의 정설화되어 있습니다. 누루하치가 애신각라(愛新覺羅, 신라를 사랑하고 잊지 말자)라는 성(姓)을 썼던 것에서도 알 수 있듯 만주족은 우리와 같은 피가 흐르던 한민족의 한갈래였던 것입니다.”

가이드는 이어 좌우익왕과 팔수령 제도 등이 단군조선시대부터 있었으며 우리 한민족 고유의 삼신오제사상과 음양팔괘에서 유래한 것임을 설명하고, 대정전 계단난간에 새겨진 삼태극 무늬 등에서는 신교의 삼신사상의 자취가 남아있음을 일깨워 주었다.
고궁을 돌아본 뒤 다음 코스인 북릉공원으로 향했다. 북릉(北陵)공원은 누르하치의 넷째 아들이자 청조 2대 황제인 황태극과 황후의 능묘가 있는 곳. 청대 황가의 왕릉과 현대적 공원이 합쳐진 관광 명승지로 하늘을 덮고 있는 고송림 사이로 우뚝선 위엄있는 건축물들을 만날 수가 있었다. 이어서 연길로 가기 위해 다시 심양공항으로 발길을 돌렸다.



┃일송정·해란강
연길에서부터 2일차 일정이 시작되었다.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북한의 남양땅과 마주한 곳 도문(圖們)을 거쳐 다음 행선지인 용정으로 향했다.

용정(龍井)은 겨레의 희망과 한이 서린 항일독립운동의 요람지로, 3·13만세운동이 일어난 용정중앙소학교를 비롯해 시인 윤동주의 시비와 선구자에 나오는 일송정, 해란강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곳이다. 용정으로 가는 길목에 차창밖으로 멀리 일송정(一松亭)이 보였다.
잠시 뒤엔 용 조각상이 일품인 용문교가 나타났다. 다리 아래로는 두만강의 지류인 해란강(海蘭江)이 흐르고 있었는데, 해란강은 지금도 조선족의 상징과도 같은 강으로 여겨지고 있다. 해란강 평강벌은 100년 전까지만 해도 황무지였으나 구한말부터 조선족들이 이곳에 이주하여 황무지를 개간, 오늘의 옥토로 만들었다고 한다.

┃용정중학교
버스가 멈춘 곳은 일제시대에 건립되었던 민족학교 용정중학교. 1921년에 대성중학교로 처음 설립된 이 학교는 당시 약 300여명의 학생이 재학하며 항일 민족 해방교육을 받았다고 한다. 일본의 끈질긴 탄압에도 불구하고 우리 가곡과 조선 역사·지리를 줄기차게 가르쳐 온 항일운동의 요람과도 같은 곳이었다. 학교 건물 일부는 전시관으로 개조되어 있었는데, 전문교육을 받은 조선족 안내인의 설명으로 김좌진, 윤동주 등 민족열사들의 삶과 독립항쟁사를 들을 수 있었다.
용정중학교를 떠나와 내일의 백두산 답사일정을 위해 버스는 백두산 아래 첫 동네인 이도백하로 향했다.


┃백두산 천지
3일차 일정의 목적지는 모두가 고대하던 민족의 성산 백두산. 증산 상제님께서 김형렬, 김호연 성도를 데리고 백두산 천지의 봉우리에서 공사를 보셨던 곳이기도 해서 증산도 신도들에게는 더욱 각별한 곳이기도 하다[道典 4:43 참조].

백두산 산문(山門)에서 천지 아래까지는 별도 운행하는 전용버스를 타고 30여분을 더 올라가야 했는데, 꼬불길을 올라가면서 차즘 백두의 정상이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서 조금씩 탄성이 터져나왔다. 정말 말 그대로 흰머리산이었다. 정상부가 흰색을 띄는 것은 알고 보니 그럴만한 까닭이 있었다. 천지 주변 반경 70㎞내에는 백색의 부석(浮石)이 뒤덮혀 있어서 마치 눈이 내린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었다.

버스에서 내려 다시 천지가 위치한 곳까지 30여분 이상 계단을 올라가야 했다. 해발 2,744m 백두산 정상에 위치한 천지(天池). 산정에 가까워질수록 구름과 강수일수가 높아 일기를 예측하기 힘들며, 천지 주위가 맑은 날씨는 연중 40일 정도라고 한다. 답사단 일행이 천지에 오른 그날, 날씨는 너무도 청명했다. 천지물을 바라보는 눈이 시릴 정도다. 옆에서 근 오십번 가까이 천지를 올랐다는 현지 가이드가 이렇게 청명한 날은 지금껏 본적이 없다고 감탄할만큼 그렇게 좋은 날씨였다. 답사단 일행은 천지를 청수삼아 사배심고를 올리고 태을주를 낭랑히 읽었다.

버스를 타고 백두산 중턱을 내려오는 길에 잠시 들른 곳은 금강대협곡. 천지의 용암분출이 만들어낸 동양의 절경이다. 깊이가 100m에 달하는 그 협곡을 보면서 자연의 손길에 경이로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백두산을 내려와 다음날 일정이 예정된 통화시로 향하는 길. 내려온 지 몇 시간이 채 안되어 벌써 주위에는 짙은 안개가 끼며 날씨가 흐려지고 있었다.

호텔에서 아침을 먹고 통화시를 출발, 집안시로 향했다. 집안(集安)은 고구려의 세 번째 수도가 있던 곳으로 424년간(3∼427) 정치·문화의 중심지였던 곳이다. 4세기가 넘도록 고구려는 이 소도시(현 인구 20만 명)에서 중국의 침략을 저지하면서 대제국을 건설했는데, 국내성을 비롯한 성곽과 수많은 고분, 고분벽화들이 남아있는 군사도시이자 문화의 집산지이다.

┃광개토태왕비·태왕릉
가장 먼저 우리 역사의 자존심, 광개토태왕비를 찾았다. 멀리서부터 태왕비를 둘러싼 눈에 익은 전각이 보였고, 가까이 가자 일대가 공원으로 조성된 것을 알 수 있었다. 공원내는 잔디가 아닌 토끼풀이 넓은 면적을 덮고 있었는데, 세계문화유산으로 급하게 등록을 추진하느라 잔디를 조성할 시간조차 없었다는 현지 가이드의 설명이다. 전각 주위로는 군견 두 마리와 여러 대의 감시카메라가 태왕비를 둘러싸고 있었으며, 전각 내부에까지 동행하는 중국 공안들은 관광객들 사이에서 감시의 눈초리를 놓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태왕비 아래에 던져진 지폐, 동전에 눈독들이는 아이들에게 주의를 주면서 말이다.

광개토태왕릉은 광개토태왕비에서 도보로 10여분이 걸리는 가까운 거리에 자리하고 있었다. 고구려의 기단식 적석총으로 지금은 많이 내려앉아 거대한 돌무지와 흡사한 형태를 하고 있었지만, 원래는 기단의 한변이 66m를 넘고 높이가 14.8m 가량 되는 장수왕릉보다도 훨씬 큰 규모의 능이었다고 한다. 흥미로운 것은 최근 몇 년 전 왕릉 앞에서 새로이 발견된 제단(祭壇)이었다. 왕릉 전면에 집 여러채를 덮을 만큼 넓은 면적에 걸쳐 있었는데, 그 동안은 수풀에 가려져 있어 몰랐다는 것이다. 고구려 계승 의지를 표방했던 대진국(발해)도 이 능에 제를 지내며 고구려 태왕릉 보존에 힘썼던 것으로 여겨진다. 광개토태왕의 능에서 대진국시대의 기와가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장수태왕릉
이어서 찾은 장수태왕릉은 고구려 고분 중 건축술의 완성도에서 단연 으뜸가는 유적으로, 학계에서는 ‘동방의 금자탑’, ‘동방의 피라밋’이라는 격찬을 받는 고구려의 대표 유적이다. 주위에는 세계문화유산을 의미하는 마크가 거대한 수목 조형물로 구현돼 있었고, 목조 구조물로 묘실안까지 관람할 수 있도록 난간과 층계가 만들어져 있었다. 왕릉 앞 표지석에는 장군총이라는 이름이 선명히 새겨져 있었는데, 이에 대한 역사 가이드의 추가 설명이 이어진다.

“국내성에서 동북쪽으로 4.5km 떨어진 이 왕릉은 일반적으로 장군총으로 불리고 있는데, 이는 약 100여년 전 현지 촌부들이 중국 변방의 한 장군의 무덤이라 여기고 불러오기 시작한 데서 유래합니다. 하지만 이 묘는 위치와 규모 등의 면에서 볼 때 장수왕의 능으로 확실시 되는데, 그렇다면 장수태왕릉으로 불러야 마땅합니다. 묘나 총, 능이 모두 무덤을 일컫는 말이자만 제왕의 무덤만을 능이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국내성·환도산성
이어서 집안시 인근에 있는 환도산성과 국내성 성터를 찾아갔다. 고구려의 세번째 수도였던 국내성은 사각형의 총 길이가 2700m에 달하는 평지성이며, 수도 방어의 요지 환도성은 국내성 서북쪽에 자리잡은 산성이다. 평지성에는 국왕만 살고 나머지 주민들은 궁성 주변의 넓은 지역에 살고 있다가, 외적이 쳐들어오면 왕궁을 비우고 산성으로 들어가 싸웠다고 한다.
환도산성(丸都山城) 아래에는 수십기의 대형 고분들이 모여 있는 유명한 산성하 고분군도 만나볼 수 있었다.

┃오회분 5호묘
이어서 찾아간 곳은 고구려 고분벽화가 그려져 있는 오회분 5호묘. 벽화고분으로는 유일하게 개방된 곳으로 한번에 약 10명 정도의 일행만이 들어가 관람할 수 있도록 제한하고 있었는데, 이미 무분별한 개방으로 심하게 습기가 차고 벽화도 많이 바랜 모습이었다.

안으로 들어가 보니, 천장의 벽화를 돌벽 위에 그대로 그린 사신도가 가장 먼저 들어왔다. 동벽에는 청룡이, 서벽에는 백호를 중심으로 화염문과 연꽃무늬가 연결되어 있으며, 사이사이에는 여인상과 귀인상이 있다. 북면에는 거북과 뱀이 엉킨 현무도가 있으며, 남면에는 큰 날개를 쳐든 주작이 그려져 있다. 5호묘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천장벽화는 일월신(日月神)·신농신(神農神)·제륜신(製輪神)·수신(燧神) 등이 사방 천장벽화를 장식하고 있었다.

4일차의 마지막 일정으로 집안 박물관을 들렀다. 실로 다양하고 우수한 고구려의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정교한 무기들과 장신구 등, 어떤 것들은 현대의 공예품이라 해도 손상이 없을만큼 정교한 솜씨였다. 그럼에도 마음 한켠이 불편했던 것은 박물관 설명글 곳곳에 고구려 문화를 중국 변방민족의 문화로 표현한 내용들 때문이었다.


┃오녀산성
“시조 추모왕(鄒牟王,주몽)께서 처음으로 기틀을 세우시고… 비류곡(沸流谷) 홀본(忽本) 서쪽에서 산위에 성을 쌓고 도읍을 세우셨다.”
광개토태왕비문중에 나오는 내용인데, 여기에 등장하는 산 위의 성이 바로 5일차에 답사한 오녀산성이다. 광개토태왕비문의 기록과 또한 산 정상에서 발견된 궁궐터를 근거로 이 산성을 홀본성으로 추정하는 것이다.

산성을 오르는 길은 돌계단으로 잘 닦여져 있었는데, 안개비가 적당히 내려 운치를 더해주고 있었다. 해발 820미터의 오녀산 산꼭대기에 길이 1,000m, 너비 300~500m에 달하는 넓은 평지에 자리한 천혜의 요새 오녀산성. 그곳엔 소천지(小天池)라 부르는 마르지 않는 작은 못이 있었고, 궁궐터와 병사들이 거주했던 병영터 여러 개가 지금까지 남아있었다. 바닥에는 온돌을 설치했던 흔적까지 남아있어 놀라움을 더했다. 산성의 점장대 위에서 압록강의 지류인 혼강(渾江)이 태극모양으로 휘돌아가는 모습을 내려다보는 경관은 무엇보다 장관이었다.

오녀산성을 내려와 마지막 6일차의 목적지인 단동을 향해 버스로만 4시간여를 달렸다. 낮은 구릉지대로 드넓게 펼쳐진 만주벌판을 보며 이곳을 말달리며 호령했을 고구려인들 기상이 그려지는 듯 했다.


┃호산장성(박작성)
일정의 마지막 날, 호산장성을 향해 가는 길에 차창밖으로는 단동의 명소인 압록강 철교가 보이고, 또 멀리 위화도가 보이고 있었다.
잠시 뒤 도착한 호산장성(虎山長城). 분명 고구려의 유적으로 알고 왔는데 와 보니 최근에 복원한 흔적이 역력한 중국 명나라풍의 장성이 앞을 막고 서 있었다. 그리고 곧이어 격앙된 역사 가이드의 설명이 이어졌다.

“몇 년 전 일본 방송국에서 제작한 <만리장성>이란 프로에서 만리장성의 동쪽 끝을 잠깐 보여준 것이 바로 이 호산장성이었습니다. 그런데 사실 이 호산장성은 만리장성이 아닌 고구려의 박작성입니다. 역사기록을 보면 보장왕 7년(648) 당나라가 쳐들어 왔을 때 ‘박작성은 산을 이용하여 요새를 세웠고, 압록강으로 튼튼하게 막혀 있었기 때문에 함락시키지 못하였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지금까지 압록강 입구에서 발견된 고구려 성은 애하첨고성과 이 호산산성 뿐인데 애하첨고성은 평지에 쌓은 성이기 때문에, 유일한 산성인 호산산성이 바로 박작성인 것입니다.”
너무도 엉뚱하게 왜곡·날조된 고구려의 박작성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둘러보고, 중국역사 일색으로 도배된 박물관을 견학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찾아간 곳은 몇 미터밖에 안되는 강폭을 사이에 두고 북한땅 방산마을과 마주하고 있는 일보과(一步跨). 어딘가에서 불쑥 나와 악수를 청할것만 같은 북녘땅 동포들과의 불가능한 대면을 한번쯤 상상해보며, 길고도 짧았던 답사여행의 일정은 그렇게 막을 내리고 있었다.

『개벽 실제상황』을 펴낸 대원출판은 앞으로도 일본 및 러시아로 떠나는 한민족 역사유적기행 등의 독자 이벤트를 꾸준히 이어갈 예정이라고 한다.

-월간개벽 2006년 11월호 www.greatopen.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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