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의 길, 일어일묵(一語一默)

2011.11.03 | 조회 3668


김래호 / 칼럼니스트


198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동화 당선작가,

『문화에게 길을 묻다』(2009.7)의 저자이며 칼럼니스트.

현 STB상생방송 PD.


우주의 삼라만상 중에 오직 인간만이 ‘말’을 한다. 즉 언어적 인간, 호모 로쿠언스(Homo Loguence)인 것이다. 물론 지속적인 훈련을 통해 일부 침팬지나 새들도 ‘언어’를 구사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경우에는 자발적인 생각과 상황을 상정한 ‘말’이 아니다. 그저 특정한 단어를 흉내내거나, 물리적 자극에 대한 반응에 지나지않는다. 사실 인간도 사물을 이해하는 생득적인 인지능력이 없다면 ‘언어’를 쓸 수 없다.


J. 피아제는 이 문제를 <인지발달론>으로 설명했다. 아기는 ‘성숙-물리적 경험-사회적 상호작용’이라는 큰 틀에서 인격체로 성장한다. 그런데 아기의 인지력은 4단계(감각운동기->전조작기->구체적 조작기->형식적 조작기)로 발달하고, 감각운동기(0-2세)는 전(前) 언어시대다. 이 시기의 영아들은 ‘동물’과 다름없이 단지 ‘빨고, 울고, 반사 활동’만 반복할 뿐이다. 2단계인 전조작기에 가서야 본격적인 ‘언어 및 신체 활동’에 나선다. 사라진 공을 찾고, 개념을 설정하고, 축적된 경험으로 ‘말’을 하게 된다. 이로써 활동과 언어의 한 주체로서 사회적 상호작용이 가능한 것이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이 말문이 트이고 말귀를 안다는 것은 이제 가족과 지역, 민족의 구성원으로서 권리와 의무를 함께 진다는 뜻이다. 그러면 인간이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즉각적으로 대답하는 것은 어느 시기부터 일까? 그 누구도 몇살 무렵인지 정확하게 제시할 수 없다. 부모나 친지들이 수없이 불러대어 각인된 이름. 그 결과 단 하나의 성명으로 대변되는 ‘나’를 인식하고 평생 살아간다. 아마도 어떤 이름의 주체가 자신임을 깨닫는 그 즈음이 소위 ‘정명(正名)’의 출발점일 것이다.


언어는 소통의 매개체

<논어>의 “자로편”에 자로가 공자에게 ‘위나라 임금이 정치를 맡기면 무엇부터 하시겠느냐’고 묻자 ‘반드시 이름부터 바로잡겠다’(必也正名乎)고 대답하는 내용이 나온다. 공자의 정명은 정위(正位)다. ‘이름’이 다르다는 것은 ‘위치’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 이름에 대한 실질적 책임에 따라 모든 사람들이 그 위치에서 직분을 다해야 한다는 것이다. 임금이 임금답지 못하고, 신하가 신하답지 못하고, 아들이 아들답지 못하여 이름이 혼란하게 되면 ‘위(位)’가 서로 침해받아서 국가와 사회는 자연히 혼란스럽게 되는 것이다.


<주역>은 이 ‘위’문제를 대단히 중요하게 여긴다. 주역에 따르면 만물이 형태를 드러내는 것에는 똑같은 ‘시간’은 있으나 똑같은 ‘위’는 없다. 똑같은 ‘위’가 없기 때문에 만물은 각각의 입장을 갖는다. 또한 만물이 자신의 입장을 갖고 있기 때문에 제각각 생존활동의 근거를 가질 수 있게 된다. 공자가 말한 정명은 바로 이 ‘입장’을 명확히 하는 것이다.


그런데 각각의 ‘입장’은 소통해야만 하는데 ‘말’이 바로 그 매개체 역할을 한다. 도가에도 일가견이 높은 독일 철학자 하이데거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규정했다. 한 사람의 존재는 언어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주역이 말하는 ‘입장’과 하이데거의 ‘존재’는 일맥상통하는 개념이다.


성스러운 침묵을 동반한 말

최근 사람들의 ‘말’이 전달되는 ‘장(場)’들이 증가하고 있다. 이미 메일과 싸이월드는 구세대 수단이고 스마트폰에 트위터, 페이스북이 등장했다. 특히 페이스북은 온세계 사람들을 ‘친구’로 맺어주고 끊임없이 ‘소통’시키고 있다. 그런데 이 페이스북의 ‘담벼락’은 여러 가지 생각을 갖게 한다.


일반적으로 담이나 벽은 구획과 단절의 상징이다. 동시에 보호나 울타리 같은 의미도 있다. 그런 담벼락에 사람들은 부리나케 쏘다니며 흔적을 남긴다. 한 담벼락에 올린 말은 번개같은 속도로 수백, 수천 명의 담벼락으로 날아간다. 상대방의 처지나 기분은 아랑곳 하지 않는다. 첫 만남에서 오는 두근거림이나 설렘도 없다. 그저 냅다 내뱉으면 그만이다. 이제 담벼락은 단절이 아니라 난장판과 장터의 상징이 되고 마는 것일까. 무엇이 진실인지 모른 채 말의 주체를 상실하고 그저 퍼가고, 나르기에 바쁜 시대가 되어버린 것이다.


언어는 성스러운 침묵에 기초한다(괴테의 일기). M. 피카르트는 <침묵의 세계>에서 ‘말이 그치는 곳에서 침묵이 시작된다. 그러나 말이 그치기 때문에 침묵이 시작되는 것은 아니다’라고 했다. 침묵할지 스스로 알아야 한다는 뜻이다. 넘치고, 스치고, 쏠리고, 흘러다니는 말의 성찬(盛饌). 우주에서 짐승들은 말이 없고, 신은 침묵하고 오직 인간만이 떠들고 있다. 이런 세상에서 증산도 도전 속의 다음 한 구절이 더욱 마음을 이끈다. “천하의 이치를 잘 살펴서 일어일묵이 정중하게 도에 합한연후에 덕이 이루어진다.”(道典 4:95:12) 여기서 말하는 ‘일어일묵’이 바로 하늘과 땅, 사람 모두가 소통하는 말의 길이요 법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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