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송가, 태을주

1. 수행과 건강

서양 의학의 아버지 히포크라테스는 "가장 좋은 건강의 비결은 발은 따뜻하게 머리는 차갑게 하는 것"이라 했습니다. 우주원리를 기반으로 한 동양 의학에서는 누구라 할 것 없이 적용시키고 있는 방법입니다. 도대체 '발은 따뜻하게 머리는 차갑게'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일까요? 우리는 흔히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을 때 속된 말로 "열 받는다"고 말합니다. 이는 극심하게 분열된 몸 속의 화기(火氣)가 상체로 (머리 끝까지!) 솟아오른 상태를 감각적으로 표현한 말입니다.

우리 몸에는 수기(水氣)와 화기가 서로 작용하며 순환하는데 위로 솟아 오르기 좋아하는 화기가 밑으로 가라앉고, 가라앉기 쉬운 수기가 상체로 올라가야 신체가 활력을 갖게 됩니다. 이를 수승화강(水昇火降)이라 합니다. 이 수승화강 작용이 잘 되지 않거나 뒤집혀 있을 때 우리의 건강은 위협받게 됩니다. 태을주를 꾸준히 읽으면 등뼈가 따뜻해지는 것을 느끼게 되는데 바로 수승화강 작용 때문입니다.

수행을 하면 할수록 눈빛이 더욱 맑아지고 얼굴빛이 환해지는데, 이를 확인할 때마다 소박하지만 큰 기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심장병, 암등과 같은 성인병은 수승화강이 잘 이루어지는 육체에서는 번져나갈 수 없습니다. 또 수기의 작용은 면역 체계의 활동을 활발하게 만들기 때문에 병원균의 침투에 의한 질병도 수행 기운으로 다져진 몸에서는 곧 퇴치됩니다.

몸이 병들었을 때에는 청수 모시고 허물을 뉘우치고 지성껏 태을주를 읽으십시오. 태을주 수행을 통해 병마를 물리치고 재난을 극복한 사례는 수 없이 많습니다.

2. 진정한 마음의 자유

복잡한 현대 사회는 정신적 피로를 가중 시킵니다. 혹 복이 많아 다람쥐 체바퀴 돌 듯하는 생활에서 벗어난 사람일지라도 안팎으로부터 받는 정신적 부대낌과 갈등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습니다.

모두 잊고 살면 마음이 편하겠지요. 그래서 사람들은 '잊기 위해서'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고 갖은 노력들을 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잊혀지지도 않을 뿐더러 진정한 마음의 평화란 잊어버림으로써 얻을 수 있 는게 아니지 않습니까?

태을주는 찌든 마음의 때를 벗겨내고, 죄를 사하게 하는 권능을 지니고 있습니다. 잊어서 편하기를 추구하지 말고 태을주 수행을 통해 정신의 자유를 누리십시오. 태을주는 도피함으로써가 아니라 마음을 맑고 강하게 함으로써 자유를 줍니다.

3. 밝은 지헤의 샘물

무엇보다도 태을주는 영적인 능력을 성숙시키는 탁월한 힘을 발휘합니다. 그리하여 태을주 수행은 영적인 체험을 가능케 하고 진리의 깊숙한 본질을 깨뜨려 알 수 있는 밝은 지혜를 줍니다. 이는 사리(事理)의 외면에 대한 정보인 지식과는 다른 세계지요.

태을주 수행을 하면 양눈썹 사이 인당에 기운이 모여 그 부위가 꿈틀꿈틀거리는데 영적 감수성이 예민한 사람은 처음 주문을 배워 읽기 시작하는 바로 그날 이것을 느끼기도 합니다.

수행의 단계가 깊어감에 따라 수행중에 눈 앞이 환하게 열리는 광명현상을 겅험하고, 옆에서 함께 수행하는 신명들의 소리를 듣게 되고, 신명계를 실제로 체험하기도 합니다.

4 . 재난과 질병으로부터 생명을 지켜 준다.

태을주는 모든 불의의 재난과 질병으로부터 해방시켜 줍니다.

어지러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언제 닥칠지 모르는 사고와 재난에 휩싸여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지난 3년간 이 나라에서 교통사고로 죽은 사람의 숫자는 6.25 전쟁 때의 사망자 수보다 많습니다.

또 우리 사회를 충격의 도가니로 넣고 있는 묻지마살인 등 범죄행위는 우리가 사는 오늘이 선천 내내 쌓여온 원한의 불구덩이가 터져나오는 선천 말대의 해원(解寃) 시대라는 생각을 갖게 했습니다. 태을주는 이러한 모든 갑작스러운 재난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줍니다.

5. 후천세계를 이룩하는 힘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태을주 수행의 목적이 일상적 행복의 추구에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이와 같은 효력은 수행을 열심히 하면서 부산물로 얻어지는 것에 불과하며 이것을 목적으로 삼아 오로지 자기 한 몸만 잘 되기를 바라면 문제가 생깁니다.

수행의 목적은 자기완성에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행복이 우선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함께 행복해질 수 있는 세상을 바라고, 남을 잘되 게 해주려는 마음가짐에서 비롯됩니다.

개인적인 복을 구하고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주문을 읽을 수행 있지만, 수행을 하는 사람은 수행에 임하는 문제의식의 차원을 끊임 없이 열어 나가지 않으면 안됩니다. 나혼자만 잘 될 것이 아니라 우리 이웃 모두가, 이 사회 성원 전체가, 이 민족 모두가, 세계 인류 한사람 한사람이 진정한 화평과 복락을 누리고, 완성된 인간이 되어 진리의 정상에 서서 사는 세상, 그러한 세상을 추구하고 그것을 위해 헌신하려는 수행 의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인류는 지금까지 과학이라는 도구를 이용하여 비약적인 생활상의 발전 을 이루어 왔지만 지금 인류는 오히려 더 살기 벅차고 서로 믿을 수 없는 현실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사람들은 진지한 가치와 다른 사람에 대한 진정한 도움에 관심을 갖기 보다는 가벼운 웃음과 싸구려 감동, 경박한 쾌락만을 즐기려 합니다. 스스로의 줏대를 가진 사람은 찾아 보기 힘들고 유행의 물결을 따라 이리 쏠렸다 저리 쏠렸다 갈피를 잡지 못합니다.

남아프리카의 초원지대에 사는 스프링벅(springbok)이라는 동물을 아십니까? 영양과 비슷한 생김새에 성질은 유순하고 몸놀림이 재빠른 짐승인데, 이 스프링벅의 생태에는 우리가 눈여겨 봐야 할 의미심장한 대목이 있습니다. 스프링벅들은 초원 위를 펄쩍펄쩍 뛰어 다니다가 한 두마리씩 모이다 보면 어느덧 수십만 마리로 무리가 불어납니다. 그런데 그 무리 중의 한 마리가 갑자기 뛰기 시작하면 그 수십만 마리가 덩달아 뛰는 것입니다. 어디로 가는지, 왜 뛰는 것인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정신 없이 쫓아 가다가 절벽에라도 이르게 되면 수없이 떨어져 죽어버립니다.

떨어지기 직전에 바로 앞에 절벽이 있다는 것을 깨달아도 이미 때는 늦어 수만 마리 틈바구니에서 멈출 수행 없기 때문이지요.

문제의식 없이 하루하루를 쉽게 쉽게 살기만 바라는 현대인들의 운명은 저 스프링벅의 최후처럼 비참할 것입니다. 지금은 정신 차려야 할 때입니다. 마약 중독자처럼 세속적인 욕망과 쾌락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숱한 사람들 사이에 밝은 등불을 밝혀야 할 때입니다. 겉으로만 화려하게 성장한 문명의 알맹이를 끄집어내어 진정한 복락과 평화를 누리는 데 기여하도록 해야 할 때입니다.

선천(先天)이란 지금까지의 인류 역사를 말합니다. 이 선천시대에 인류는 투쟁과 반목 속에서 성장만 해 왔습니다. 아직 한참 자라나는 어린애였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앞으로 곧 열릴 후천(後天)이란 우주 자연이 어른이 된다는 것입니다. 철부지 어린 시절에는 싸우면서 자라 왔지만 성숙한 어른, 안팎으로 조화된 어른은 서로 잘되는 길을 모색합니다. 우주만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인간도 완성됩니다.

태을주는 후천을 건설하는 힘의 원천입니다. 후천 인간, 완성된 인간을 만들어주는 보약이 바로 태을주입니다. 태을주의 참 모습은 후천 기운을 쌓게 하고 후천을 열게 하는 데 있습니다. 물론 태을주 수행을 하면 재난과 질병과 온갖 고통 등으로부터 우리를 지켜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수행에 정진할 때 부수적으로 주어지는 선물일 뿐이지 거기에 촛점을 둘 만한 것은 못됩니다.

6. 생명의 송가, 태을주

하루 하루를 살아가기 위해 세끼 밥이 필요하듯이 우리 영혼도 밥을 먹어야 삽니다. 영혼의 밥을 먹어보지 않은 사람은 그 소중함과 간절한 필요를 알지 못합니다.

태을주의 세계는 이론으로 파고 드는 자리가 아닙니다. 순결한 마음과 겸손한 자세, 변하지 않는 일심으로 꾸준히 정진하여 체험해야 열리는 자리입니다.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태을주는 인간을 최고도로 성숙시켜 완성시키는 주문이며, 하느님(상제님)께서 인정해주신 주문이고, 인생사의 크고 작은 모든 문제를 광범위한 차원에서 풀어주는 절대적 권능을 가진 주문입니다. 그러기에 상제님께서는 ‘오는 잠 적게 자고 태을주를 많이 읽으라’(道典2:119:7) 고 명하셨던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 마음이 열려 있는 만큼만 볼 수 있습니다. 더 이상은 보지 못합니다. 부디 크게 열린 마음으로 진리를 탐구해 나가시기 바랍니다.

이제 당신에게는 그 열린 마음으로 실천하고 체험하는 일만 남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