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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역사 보천교 1부

2018.08.27 | 조회 570 | 공감 0

이 글은 상생방송 책으로 만나는 가을개벽 문화 -잃어버린 역사 보천교 편을 편집하였습니다.

 


 

<진행자>일제 강점기 대한 독립과 민족의식 선양에 앞장선 단체가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증산 상제님을 신앙한 보천교는 후천개벽과 지상 선경 도래를 전하며 대한의 백성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주었는데요.

 

오늘 이 시간엔 중원대학교 종교문화학과 김철수 교수님을 모시고 <잃어버린 역사 보천교>를 통해 보천교의 참역사와 진면목을 알아보는 시간을 가지겠습니다.

 

교수님 안녕하세요. 교수님께서는 일본의 고대 역사와 한민족의 관계, 우리 나라의 민족 종교 등에 대해 연구해 오신 것으로 알고있는데

 


Q.이 분야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가 있으시다면?

 

 

<김철수 교수> 많은 사람들이 그런 질문을 참 많이 합니다.

 

첫번째 관심을 가졌던 부분은 일제 강점기 사상통제에 대한 것입니다.

 

그 당시만 하더라도 일제 강점기를 다룬다고 하면 정치적인 침략이나 경제적인 침탈에 관심을 가졌는데요.

 

저는 사상 통제에 관심을 가지면서 일제가 어느정도로 정신적인 침략을 해왔는가 이것에 관심을 참 많이 가졌습니다.

 

이 부분을 찾으며 저의 주된 관심 대상이 뭐였냐면 남산에 세워졌던 조선신궁에 대한 관심이었습니다.

 

조선신궁朝鮮神宮 - 일제가 한국 식민지배의 상징으로 서울의 남산 중턱에 세운 신사

 

 

당시만 하더라도 한 두편을 제외하면 조선신궁에 대한 연구들이 거의 없었습니다.

조선신궁에 대한 관심은 일본의 신도와 연결되었습니다.

신도神道: 일본 민족 사이에서 발생한 고유의 민족신앙

 

일본의 신도는 일본의 고유한 하나의 종교 형태이기 때문에 일본 고대문화하고 연결이 될 수밖에 없었죠.

 

그래서 한동안 일본 고대사, 고대문화, 또 신도문화와 신사 이런것에 관심을 많이 가졌습니다.

 

 

그와 동시에 종교에 대한 것입니다. 사회 격변기에 대부분의 사회 시스템이 붕괴된 상황에 민족적인 원천을 갖고 있는 것을 바로 종교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요.

 

특히 제가 관심을 가졌던 것은  일제강점기라는 사회 격변기에 사람들에게 사회혼란을 해결할 수 있고, 사람들이 갈 수 있는 길을 제공하는데 상당히 효과적인 대안이 종교라고 봤습니다.

 

그래서 연구 과정에서 당시 기독교도 있었고 불교도 있었고 민족종교라 하면 동학을 이어받은 천도교도 있었습니다만

 

그중에 보다보니 우리 국민들이 잘 모르는 보천교가 있더란 말입니다. 그런데 보천교는 그 당시에는 엄청난 지지자를 확보하고 있었습니다.

 

보천교는 교주가 사망하면서 전체적인 상황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에 이후 민중의 관심을 아주 크게 잃었습니다만 저희에겐 주요 관심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후천개벽으로 새 시대가 열린다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다

 

<진행자>예 그러셨군요. 특히 일제 강점기의 민족 종교는 대한의 백성들에게 민족적 자긍심과 대한 독립의 꿈을 불어넣지 않았습니까.


 

Q.그 당시 민족종교에서 주장했던 주요내용과 역할은 무엇인가요?

 

<김철수 교수>당시 살았던 사람들에게 일제강점기라하면  이건 도저히 생존 자체가 힘든 상황이었죠. 상당히 당혹스러운 상황을 맞이했던 겁니다. 어떻게 본다면 존재 조건 자체가 생존이었습니다.

 

당시 민족이라던가 독립, 이것을 누구나 지향하고 있던 시대라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1910년 8월 말에 강점이 되면서 일제가 처음부터 내세운 것은 동화정책인데요.


동화정책이란 좋은 의미도 가질 수 있겠지만, 식민지에서 동화정책이라는 것은 우리 민족의 고유한 모든 것들, 사상이나 이런 모든 것들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만큼 그 당시에는 사면초가의 상황이었고 절망적인 상황이었습니다. 이런 절망적 상황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개벽에 대한 알림입니다. 우리가 흔히 민족 종교를 이야기 하면 그 효시를 동학으로 잡는데요.

 

동학의 다시개벽이라던가 후천개벽, 이것은 새로운 나라를 건설한다는, 새로운 나라가 열릴 것이라는 머시지를 전해 주고 있었죠.

 

새로운 나라의 건설이라는 것은 멀리도 아닌 지금 이땅에서 조선민중들이 중심이 된 그런 사회가 열릴 것이라는 희망을 전해주었다는 것. 그건 커다란 메시지로 볼 수 있습니다.

 

 

 

<진행자>네, 교수님 말씀처럼 일제강점기에 민족 종교가 중요한 역할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활발히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어서 참 안타까운데요. 오늘 책의 제목처럼 보천교도 그 중 하나인데요.


 

Q.보천교는 어떤 단체인가요?


<김철수 교수>한국 국민들중 보천교를 아는 사람들이 어느정도 될까 상당히 궁금합니다. 1%나 될까요. 아마 그 정도도 안될 것입니다. 그래도 최근보면 상생방송이라던가 각종 매스컴에서 보천교가 다루어지면서 이름을 아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다고 봅니다.

 

저는 책에 잃어버린 역사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는데  지금까지보면 보천교에 대한 논문들도 많지 않습니다. 우리 연구의 어떤 흐름상 본다면 제가 볼때 30여편 정도 학위논문 2편정도, 학회의 경우도 보천교라는 타이틀을 내걸고는 두번정도 밖에는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만큼 아직도 우리 한국사회에서는 보천교에 대한 인식이 거의 전무한 상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래서 제가 여기서 지금 현재 보천교는 이것이다라고 딱 말씀드리기는 어려운 부분이 있습니다. 다만 가볍게 제가 말씀을 드린다면 증산 상제님께서 1901년에서 1909년까지 천지공사를 마치시고 난 직후 세상을 떠나신 다음, 제자 중 한사람인 월곡 차경석이 열어간 교단입니다.

 

 

그런데 사실 여기서 조금 오해가 되는게 뭐냐면 보천교라는 명칭입니다.

 

보천교라는 명칭은 그때부터 곧바로 사용되어졌다기 보다는 1922년 1월에 들어서 등록을 하면서 보천교라는 명칭이 나타났기 때문에 그전에는 보천교라는 명칭보다는 선도교라던가 태을교라던가 훔치교라던가 이런 기록으로 현재 남아있습니다.

 

당시 보천교가 택했던 교리들은 신화, 일심, 해원, 상생, 후천선경 등 인데요. 이런 것들은 많이 들어봤을 겁니다.

 

그런데 저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보천교가 뭡니까 이렇게 질문을 하면 지금으로부터 100여년 전에 민족의 절망적인 상황에서 사람들에게 삶의 의미를 제공해 주었고 독립운동을 추진하고 있었던 단체다 이렇게 설명을 하는 편입니다.

 

 

<진행자>강증산 상제님을 신앙하는 신앙단체였던 보천교는 지금은 많은 사람들이 그 이름조차 모르고 있는 것이 사실인데요. 당시 이 보천교의 규모는 상당히 어마어마했다죠.



 

Q.당시 보천교의 규모는?


<김철수 교수>보천교는 우리가 처음 맞닥드렸을 때 제일 논란이 되고 반신반의하고 의심을 많이 하는게 숫자 문제입니다.


그래서 저는 자칭 타칭 600만 이란 말을 항상 쓰고 있습니다. 자칭이란 말은 당연히 보천교 교단의 모든 기록들에는 6백만이라고 나오고 있고요.

 

 

타칭이라는건 당시 식민 권력의 보고서들 고등경찰 요사라던가 보천교 일반이라던가 이런 식민권력의 보고서에서 6백만이라고 이야기를 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600만을 갖고 어떻게 볼것이냐를 가지고  어떤 사람들은 상징적인 숫자로 봐야하지 않나 이야기 합니다.


그러나 저는 그것과 견해가 다른입장입니다. 두가지로 말씀을 드리면, 6백만이라는 숫자는 일단 어떤 숫자 근거에서 나온거죠.


보천교 조직의 가장 일반적인게 60방주 조직입니다.

60방주는 뒤에 이야기할 기회가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수화금목의 사정방위가 있고요. 그 밑에 6임 12임 8임 15임 이렇게 쭉 구성이 됩니다

 

 

이게 보천교의 간부조직이 되는데 이 인원을 계산해서 다 합하게 되면 55만 7천 7백명이 나옵니다.

 

여기에 이제 신도 수를 계산을 하게되며 600만이 나오고요. 그런데 이런 주장을 해도 사람들은 그런 기록도 없다며 믿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몇가지 제시를 하고 있는게 종교사회학적으로도 중요한 하나가 소속되지 않은 믿음입니다.

 
자꾸 소속을 갖고 신도 수를 추정하려고 하는것, 이건 이미 종교를 근대적 개념으로 봐 버렸기 때문에 생기는 오해라고 저는 보고 있는데요..

 

왜냐하면 당시만 하더라도 간부들은 그렇게 소속이 확인이 된다고 하더라도 일반민중들은 꼭 어떤 소속이라는 개념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당시에 가장 민중들에게 호소력 있는 이런거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러한 경우들을 우리가 반드시 고려해 줘야 된다는 겁니다. 그당시에 보천교 신도, 천도교 신도, 불교신도 이런 구분 자체가 많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이 더 공부하다 보면 보천교 본소가 자리했던게 정읍 대흥리인데요. 대흥리는 보천교 신도로 구성된 마을인데도 그안에 살았던 사람들 나중 기록을 보면 기독교 신자들도 거기에 들어가 있다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소속이라는 개념을 갖고 자꾸 생각을 하면 그 숫자에 대한 오해가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런 것들은 조금 고려해주셔야 합니다.

 

 

<진행자>당시 인구가 2000만명이었으니까 600만 이상이 신앙을 했다면 가족까지 환산했을 때 거의 전 인구의 절반 정도가 보천교를 신앙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것 같은데요. 이런 조직력을 바탕으로



Q.보천교가 새로운 국가를 선포하고 궁궐도 짓지 않았습니까?

 
<김철수 교수>예, 맞습니다. 그 당시 조선 인구를 1천 800만에서 2천만으로 잡는다면 우리 연구자들 사이에서는 세 명중 한명이 보천교를 신앙했다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까 말씀하신대로 만약 가족까지 합한다면 인구의 절반 정도가 신앙을 했다해도 과언이 아닌것 같습니다.

 

이러한 보천교가 제시했던 새로운 나라는 보통 대시라고 해서 시국건설이라고 흔히 하고 있는데요. 새로운 나라 시국을 제시합니다. 이 시는 이제는 새로운 나라 건설의 때가 되었음을 선포했던 거죠.

 

그런데 또 독특한건 뭐냐면 나라의 국호만을 제시했던게 아니고 그 터전을 마련했다는 겁니다. 궁궐이라도 해도 좋고 성전이라 해도 좋습니다.

 


1924년 기록들을 보면 보천교가 상당히 고민을 하게 되는데, 고민중 나타났던 하나의 방책중 하나가 1924년에 성전을 건립하는거였습니다.

 

정읍대흥리에 2만여평의 부지를 확보하고 100만원을 들여 사십여개 건물을 지었습니다. 서울의 왕성하고 똑같은 모습을 띄고 있습니다. 100만원이면 엄청난 돈입니다.

 

비교를 하자면 당시 서울에 천도교당 그 건물하나만이 아니고 일대를 축조하는데 27만원이 들었다고 합니다. 그걸본다면 정읍대흥리에 100만원이 들어갔다하는건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액수입니다.

 

 

그중에는 십일전과 같은 보기드문 큰  건물도 있고요. 십일전 건물을 증축 할 때는 거기에다 황와라고 하는데 황색기와를 올리다가 당시에 아무래도 일제강점기라 일본으로 부터 한소리 듣죠.

 

그래서 황와를 못올리고  청색기와(청와)를 올리게  됐다던가 국화모양 건물지붕 끝에 국화 모양을 했다가 국화모양도 일본황실의 문양이라고 때내고 덧칠을 하는 그런 모습도 많이 보입니다.

 

그만큼 당시 새로운 나라 건설은 보천교에선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가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3.1 만세운동 이후 새로운 나라 건설과 후천개벽 선포로 민중에게 희망을 준 보천교

<진행자>꿈이 사라진 암울한 시기에 보천교의 사상과 가르침이 민중들에게 새로운 희망이 됐을거 같은데요 .

 

하지만 당시 보천교 외에도 다양한 민족 종교가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Q.유독 보천교 신도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이유가 있을까요?

 

<김철수 교수>그렇죠 그걸 우리가 관심있게 봐야 되는게 당시 종교 지형을 보면 기독교 불교 천도교 대종교 이렇게 있습니다.

 

보천교를 제외하면 기독교 불교는 자기 나름대로 가고 있었고 대종교는 1909년에 중강이라고 하죠. 이제 만들어졌지만 일제강점과 더불어 아 도저히 이쪽에서는 운동을 할 수 없다해서 만주로 나가버립니다.

 

그렇게 보면 천도교가 있는거죠. 그런데 천도교는 아시다시피 3.1운동으로 큰 타격을 받습니다.  3.1운동 이후에는 세력이 위축되고 있었죠.


그리고 이 와중에 보천교는 이름을 갖고 있진 않았지만 앞서 말한 여러가지 요인들로 인해 교세를 넓혀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3.1운동 이후 새로운 나라 건설이라던가 당시 길을 잃었던 민중들에게 큰 희망을 줍니다. 의지할 곳을 만들어 준것이라고 해도 맞고요. 계속 조선 전부터 꿈꿔왔던 개벽에 대한 어떤 희망이 열림을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있었죠.


따라서 민중들이 의지할 곳은  보천교쪽 밖에는 없었던 거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3.1 운동 이후  보천교에 신도들이 엄청나게 몰려드는 그런 상황이 됐다고 볼 수 있습니다.

 

 

 

<진행자>그와 더불어 1918년에 스페인 독감이 전세계에 퍼져 나갈 때 이것이 우리 나라에도 들어와서 14만명 이상의 백성이 죽었다고 하는데요.


그 때 수많은 사람이 태을주를 읽어 치유의 은혜를 입었다고 들었습니다.



Q.태을주를 읽어 독감을 치유한 것이 보천교 성장의 분기점이 되었나요?

 

<김철수 교수>예, 맞습니다. 세계사적인 흐름과 연결을 시켜 이해한다고 하면 1914년 제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고 이게 결국 끝막음이 되고 18년에 스페인 독감이 전세계에 창궐하게 됩니다.

스페인 독감 - 1918년 발생해 2년 동안 전 세계에서 5000만 명의 목숨을 앗아 간 독감

 

그러한 스페인 독감은 일본이라든가 조선이라든가 중국 대륙까지 휩쓸고 있었죠. 여기에 이제 앞서 증산상제님께서 이런 일이 오면 태을주를 통한 치유를  말씀했지 않습니까. 

 

"태을주는 만병을 물리치는 구축병마의 조화주라." [도전 2편 140장]

 

그래서 당시 조선 곳곳에서도 심지어 도서 지방에서도 태을주를 읽는 소리가 울려퍼졌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이런것은 분명히 보천교 성장에 많은 도움을 줬다 말씀 드릴 수 있습니다.

 

 

<진행자> 네, 지금까지 잃어버린 역사 보천교에 대해 말씀 나눠봤는데요.


후천가을개벽으로 열리는 후천선경의 도래를 외친 보천교가 꿈을 잃은 대한의 백성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심어 주었다는 것을 알수 있었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일제 강점기 보천교의 독립운동사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교수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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