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신문기사중에서 (2020년8월25일 화)

선기옥형 | 2020.08.25 10:35 | 조회 2611

목차

1..[단독] "은진미륵' 새까만 눈동자의 비밀..못난이 아닌 볼매였네"

2."차세대 에너지는 지오박터, 전기를 생산하는 미생물"

3.십자군 전쟁의 시작 [주경철의 히스토리 노바]

4.한국 개신교의 유통기한은 남아있을까?[장대익 칼럼]

5.오래된, 또 새로운 '복합 위험 시대' [김호기칼럼]

6.간추린 뉴스

7.코로나 19확산현황


1.[단독]'은진미륵' 새까만 눈동자의 비밀…‘못난이 아니라 볼매였네’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못난이 은진미륵의 재발견

경향신문 2020.8월25일



고려 초 광종 때 제작된 것으로 알려진 은진미륵(오른쪽)은 통일신라 시대인 8세기 중엽 제작된 석굴암 본존불(왼쪽)과 곧잘 비교되었다. 석굴암 본존불이 ‘완벽한 신체비율, 비불비인(非佛非人)의 표정, 불타의 신비와 자애’ 등 극찬을 받았다. 하지만 은진미륵은 중국의 5대10국과 한반도의 나말여초 혼란기에 쇠퇴한 불교조각을 반영했다는 평을 들었다. 그 때문에 은진미륵은 조각품이 아닌 한낱 돌기둥으로 폄훼되어 ‘최악의 졸작’이니 ‘못난이 불상’이니 하는 혹평을 들었다.



“이걸 어떻게 새겨 넣은 거지?” 지난 2007년 충남 논산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은진미륵)의 정비사업에 전문가로 참여한 최선주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관(현 학예실장)은 두 눈을 의심했다. 아파트 6층 높이(18.12m)의 은진미륵 불상에 비계를 설치해 올라간 것도, 얼굴을 코 앞에서 친견한 것도 처음이었다. 그런데 은진미륵의 눈과 마주친 순간 최선주 학예연구관은 숨이 멎는 듯했다.


밑에서 보기엔 눈을 돌(화강암)에 새긴 뒤 눈동자와 눈의 양 옆 내외안각 주름 부분을 검은 색으로 채색한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막상 올라와 보니 그게 아니었다. 따로 흑색 점판암에 눈동자와 내외안각 주름을 제작한 뒤 미리 파놓은 원판(화강암)의 눈 모양에 정교하게 끼워넣은 것으로 확인됐다.


전율, 경외감을 느꼈습니다. 따로 조각한 점판암 눈동자는 물론 눈 양 옆의 (내외안각) 주름까지 디테일하게 표현했다니….”


“이렇듯 거대한 불상의 눈을 코앞에서 찍은 사진이라 뭔가 두려움을 느낀다”는 최실장은 아직 학계에도 보고하지 않은 은진미륵의 눈 사진을 촬영 13년 만에 처음으로 필자에게 공개했다. 공개한 이유가 있다. 이 정도 디테일한 은진미륵의 눈이 어떻게 이 불상이 ‘못난이’의 오명을 떼고 ‘국보’로 거듭났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는 것이다.


높이 18.2m에 달하는 거불인 충남 논산 관촉사의  ‘석조미륵보살입상’. 흔히 은진미륵으로 통한다. 좌대와 상·하체, 덮개 등을 각각 다른 돌에 새겨 이어붙였다. ‘전신의 반쯤 되는 거대한 삼각형 얼굴은 턱이 넓어 일자로 다문 입, 넓적한 코와 함께 가장 미련한 타입으로 만들고 있다’는 평을 들었다. | 최선주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실장 제공


혹평에서 극찬까지


“…전체적인 균형미는 없다. 머리부분이 지나치게 크고 면상(面相)이 평범하며 의상의 수법이 간결하다.”(세키노 다다시·關野貞)


“3등신에, 전신의 반쯤 되는 거대한 삼각형 얼굴은 턱이 넓어 일자로 다문 입, 넓적한 코와 함께 가장 미련한 타입으로 만들고 있다…한국 최악의 졸작이다.”(김원룡)


지독한 ‘얼평’(얼굴평)이다. 삼등신, ‘얼큰이’(얼굴 큰 사람), 삼각형 턱, 미련남, ‘패테’(패션테러)도 모자라 ‘한국 최악의 졸작’이라니…. 일제강점기 세키노 다다시(1867~1935)만 그랬다면 몰라도 한국 고고 미술사학의 개척자라는 김원룡 전 서울대 교수(1922~1993) 역시 그런 평가를 내렸으니 어쩔 것인가.


최선주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실장이 10여년전 아파트 6층이 넘는 높이의 은진미륵을 실사하면서 찍은 눈동자 사진. 밑에서 보기에는 눈동자와 내외안각 주름을 검은 색으로 채색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막상 올라가 보니 원판 화강암을 파내고 흑색 점판암으로 조각한 눈동자와 내외안각 주름을 정교하게 끼워넣은 것으로 확인됐다. | 최선주 실장 제공


바로 은진미륵에 쏟아진 악평들이다. 소위 ‘불격모독’일 수 있지만 김원룡 등의 평가를 더 살펴보자.


“은진미륵은 (불상이라기 보다는) 그저 돌기둥(石柱)에 불과하고 그 위에 의미없는 선이 옷주름을 표현하고 있다…신라의 전통이 완전히 없어진….”


그러면서 김원룡은 “이 불상에 한국인이 놀란다면 그 사이즈(18.12m) 때문이고, 외국인이 감탄한다면 그 원시성 때문일 것”이라고 했다. 심하게 표현하자면 외국인의 눈에 원시인처럼 보인다는 소리가 아닌가. 이렇게 세키노(<조선미술사>·1932년)와 김원룡(<한국미의 탐구>·1978년) 등 영향력있는 학자들의 공개적인 험담 탓에 ‘은진미륵’은 최근까지도 ‘못난이 불상’이니 ‘최악의 졸작’이니 하는 오명을 뒤집어 쓰고 있었다. 아무런 변명도 못한채…. 그나마 못생기기는 했지만 국내에서 가장 크고 조성시기(968년·고려 광종)가 알려진 불상이라는 점 덕분에 인심 쓰듯 까짓 것 보물(제218호·1963년)로 대접해준 인상이 짙다.


그런데 2년 전인 2018년 2월8일 문화재위원회 국보심의 회의에서 대반전이 일어난다.


문화재위원들이 “중후하고 역강한 힘을 느낄 수 있는 조형미를 갖췄고 통일신라와는 완전히 다른 파격과 신비의 미적 감각을 담은…가장 독창성 짙은 불교조각”이라고 입을 모은 것이다. 이에 은진미륵은 만장일치로 보물에서 국보(제323호)로 승격 지정됐다.


은진미륵과 석굴암 본존불의 전신 비교. 예전에는 석굴암 본존불(오른쪽)과 비교되어 ‘못난이’ 딱지를 얻은 은진미륵(왼쪽)이지만 최근들어 파격과 신비의 미적감각을 지닌 가장 독창성 짙은 작품으로 재평가되고 있다. ‘못난이’에서 ‘상남자’의 부캐를  얻은 셈이다.



■석굴암 본존불과 비교된 외모


대체 어떤 일이 있었기에 은진미륵은 이와같은 극과 극 ‘얼평’의 주인공이 되었을까.


이 은진미륵의 외모를 석굴암 불상, 특히 본존불과 비교했기 때문이었다. 8세기 중후반(751~774년) 완성된 석굴암을 두고 세키노 다다시는 “완전히 신라의 장인들의 창의로 이뤄졌고…일본은 물론 중국에서도 견줄 만한 것이 없다”고 극찬했다. 김원룡은 “석굴암 불상은 당나라 불상(천룡산 석굴·보경사 석불)을 기본으로 하면서 숭고·청순한 정신미의 절정으로 이끌었다”고 했다.


“특히 석굴암 본존불은…완벽한 신체비율, 비불비인(非佛非人)의 표정, 석면을 흐르고 있는 생명력을 통해 불타의 신비와 자애로 보는 이를 감싸주고 있다.”


여기서 ‘외모 비교’가 들어간다. 김원룡은 “그러나 신라멸망 후 고려의 불공들은…예술가 기백이나 기술을 완전히 잊어버린다”고 전제하면서 그 중에서도 은진미륵을 콕 집어 ‘디스’한다.


“그 단적인 예가 유명한 논산의 미륵불이다. 조각이 아닌 돌기둥(석주), 불공(佛工)이 아닌 석공(石工)의 작품이 신라 이래 석불 전통의 종지부와 같은 기념비로 남게 되는 것이다.”


은진미륵은 원통형 보관을 쓰고 있다. 보관의 중간에 세로 일렬로 달린 철제 고리 3개가 심상치 않다.이곳에 금동불상이 설치되어있었는데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탈취했다고 한다. 둥그런 미간 가운데는 커다란 백호(白毫·수정 같은 보석을 끼워 넣는 부분이다. 1960년 백호에서 지름 30.5㎝ 크기의 커다란 원형동판이 발견됐다. 백호의 지름이 30㎝가 넘을 정도로 불상의 규모가 엄청나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 최선주 학예실장 제공



■촌티나는 못난이 불상


‘은진미륵’은 왜 이런 비교를 당했을까. 김원룡의 석굴암 평에서 단서를 찾을 수 있다.


“8세기 신라불상의 얼굴은 숭고·청순한 정신미 등…석굴암 불상은 실재하는 인간에서 볼 수 있는 가장 숭고한 얼굴을 가지고 있다.”


요즘이라면 석굴암 본존불을 ‘꽃미남’이라 일컬었을 것이다. 그런 ‘꽃미남’에 견주면 은진미륵은 우락부락하고 거친 ‘삼등신 얼큰이’였으니 가차없이 폄훼된 것이다.


1872년(고종 9년) 제작된 ‘은진지도’에 표시된 은진미륵의 보관에 불상이 표시되어 있다. | 신은영의 논문에서



이 ‘못난이’는 곧 ‘촌티’로 치부됐다. 즉 나말여초의 혼란기에 세력을 떨치기 시작한 지방 호족들이 곤경에 빠진 백성들의 불안감을 없애려고 은진미륵과 같은 거대불상을 조성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향토색이 강한 불상이 되었고, 따라서 통일신라의 양식과는 단절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1980년대 들면서 평가가 조금씩 달라진다. 불교미술학자인 황수영 전 동국대 총장(1918~2011)의 평가가 주목할 만 하다.


“18m 거불이니 몸체의 균형을 이루지 못했고 또 토속적이라서 학자에 따라서는 혹평을 가하고 있지만 기념비적인 작품임에 틀림없다.”


그러면서 황수영은 “고려시대 조각 기법의 퇴조 때문에 뛰어난 작품을 만들지 못했지만… 일고의 가치도 없다며 무시해버리려는 태도는 성찰돼야 한다”고 재평가했다. 그러나 이것도 은진미륵은 기념비적인 작품이기는 하지만 석굴암처럼 뛰어나지는 않다는 평가였다. 한마디로 꽃미남 주연배우는 아니고, ‘토속적인 용모를 갖춘 성격배우’ 정도로 보았던 것이다.


이마 정면에 존재했던 금동불상 말고도 4면에 관을 고정한 흔적이 남아있다. 보관의 4면은 금동제 화관을 둘렀던 것으로 보인다. 보관 4면에는 금동제 화관을 둘렀고, 정면에는 정면의 철제 고리에는 금동불상을 걸어두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맨 위에는 임금이 쓰는 면류관 형태의 덮개가 의미심장하다. 최선주 실장은 이것을 은진미륵을 조성한 고려 광종과 연결시킨다. | 한정엽 사진작가 촬영


■“원초적인 힘이 보인다”


그러나 2000년대 들어 은진미륵은 완전히 다른 평가를 받게된다. 은진미륵에게서 “거대하고 묵중한 괴체(塊體)로 단순화됐지만 양감이 느껴지고…강한 원초적인 힘이 보인다”는 것이었다.


“자비로운 보살이 아닌 강한 신비감을 담고 있는 위압적인 모습이다. 이제까지 관촉사 보살상을 설명해왔던 쇠퇴양식으로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매우 강렬하게 그 시대의 상황을 반영한다.”


어떤 연구자는 한발 더 나아가 “우미(優美·뛰어나게 아름다움) 그 자체가 미의 기준이 아니”라면서 석굴암 불상과 은진미륵을 새롭게 비교한다.


“8세기 중기 이후의 통일신라 조각이 조화와 통일성을 추구했다면 고려 전기 충남 거석불은 시대상황과 시대정신을 표출하고 있다. 아름답지 않다던가 비례에 맞지 않는다던가 하는 단순논리는 재고돼야 한다.”(조수진의 ‘충남지역 거석불에 대한 고찰’ 논문에서)


은진미륵은 이 즈음부터 석굴암 불상과 같은 ‘꽃미남’은 아닐지언정 원초적인 힘을 갖춘 카리스마 넘치는 ‘부캐’(부캐릭터)인 ‘상남자’로 재평가됐다. 어찌보면 다양한 캐릭터를 인정하는 시대흐름에 은진미륵이 당당하게 합류한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은진미륵의 긴 귀 중간에 걸쳐 3줄로 길게 늘어뜨린 보발(寶髮)의 곡선처리가 정교하다. 귀 중간으로 보배로운 머리카락이 지나가는 표현장식이다. 거대한 불상의 규모와 대비되는 조각가의 섬세함이다. 오른손은 철제 연화 가지를 들었다.



■솟아오른 바위에 새긴 키다리 불상


이제 은진미륵을 찬찬히 뜯어보자.


“여기엔(관촉사) 크나큰 석상 미륵존이 있으니(有大石像彌勒尊) 내 나간다 나간다며 땅속에서 솟았다네(我出我出湧從地) 눈처럼 하얗게 우뚝이 큰 들을 임하니(巍然雪色臨大野) 때로는 땀 흘려 군신을 경계도 시키는데(時時流汗警君臣)….”


고려말 문신인 목은 이색(1328~1396)의 <목은시고>에 등장하는 ‘관촉사’ 시이다. 목은의 시에 등장하는 ‘땅속에서 솟았다”는 싯구는 무얼 가리키는 것일까. 절의 역사를 기록한 <관촉사 사적기> 등에 따르면 고려 광종 19년(968년) 한 여인이 충남 논산 은진현의 반야산에서 고사리를 꺾다가 아이가 우는 소리를 듣고 그쪽으로 가보았다. 그랬더니 아이는 없고 큰 바위가 땅 속에서 솟아나오고 있었다.


이 소식을 들은 광종은 혜명 스님에게 “그 바위에 불상을 조성하라”는 명을 내렸다. 왕명을 받은 혜명은 기술자 100여명을 데리고 현장에 가서 970년부터 37년에 걸쳐 불사를 마무리했다.(1006년·목종 9년)


이외에도 은진미륵이 국가가 태평하면 불상의 몸이 빛나고 국란(國亂)이 생기면 온몸에서 땀이 흐르고 손에 쥔 꽃도 빛을 잃었다는 등의 다양한 설화가 전해진다. 이 불상은 화강암 자연 암반을 발로 조각한 대좌 위에 거대한 2개의 돌로 상하체, 즉 머리와 팔각형 보관, 몸과 어깨를 조각하고, 면류관 형태의 보개(덮개)를 따로 만들었다. 전체적으로 4개의 커다란 석재를 짜맞추어 거대한 불상을 만든 것이다.


은진미륵은 두 팔뚝을 겨드랑이에 붙여 허리부분에서 두 손을 위로 들어올리고 있다. 왼손은 허리와 평행을 취하면서 손목만 꺾어 엄지손가락과 가운데 손가락을 맞댄 수인(手印)의 형태를 취했다. 오른손은 철제 연화 가지를 들었고, 손바닥은 안쪽으로 향하고 있다. 손가락에는 손톱까지 새겼다.


불상의 높이 18.12m, 둘레 9m에 달하고 귀 길이와 미간의 폭이 1.8m씩이고, 머리 위에 쓴 보관 높이가 2.43m나 된다. 그렇다면 불상의 발로 조성한 대좌 위에 각각 조각한 상체와 하체, 그리고 면류관 형태의 보개 등을 어떻게 옮겨 하나로 짜맞췄을까. <관촉사 사적기>에 따르면 완성된 은진미륵 몸체를 옮기는데만 1000여 명이 동원됐다. 여기서 관련 설화가 등장한다.


즉 무거운 각각의 부위를 짜맞출 묘안을 고민중이던 혜명 스님이 마을 앞 강가를 걷고 있는데 두 동자가 탑 쌓기 놀이를 하고 있었다. 두 동자는 하나의 돌을 놓고 그 주변에 흙과 모래를 채운 뒤 또 다른 돌을 굴려 기존의 돌 위에 포갰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혜명 스님은 손뼉을 쳤다.


불상 쌓기의 깨달음을 얻은 것이다. 그러자 일순 두 동자가 사라졌다. 혜명스님은 아이들의 탑 쌓기 놀이에 착안해서 불상을 세웠다. 사람들은 혜명스님에게 지혜를 알려주고 홀연히 사라진 두 동자를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의 화신이라고 했다.


은진미륵의 하체. 발아래로는 바람에 펄럭이는 천의 자락과 이에 상응하게 힘차게 흘러가는 구름이 조각되었다. 이 불상을 조성했다는 혜명 스님의 표현력과  독창성을 반영한다. | 문화재청 제공


볼수록 매력덩어리


최선주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실장의 논문(‘고려 초기 관촉사 석조여래입상에 대한 연구’)을 통해 은진미륵의 매력을 살펴보자. 은진미륵의 이마는 보관을 쓰고 있는데, 그 보관 밑에 굵직한 머리카락이 곱슬의 형태를 이룬다. 그 머리의 한 끝이 3단을 이뤄 커다란 귀의 중앙부분을 걸쳐 어깨 뒤로 늘어져있다. 둥그런 미간 가운데는 커다란 백호(白毫)가 있다. 백호는 부처의 양 눈썹 사이에 난 희고 부드러운 털을 일컫는다. 수정 같은 보석을 끼워 넣는 부분이다. 1960년 은진미륵의 백호에서 지름 30.5㎝ 크기의 커다란 원형동판이 발견됐다. 백호의 지름이 30㎝가 넘을 정도로 불상의 규모가 엄청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은진미륵의 발부분. 양발은 몸통을 이루는 돌과 별개로 자연석 암반 위에 직접 조각했다. 그 위에 몸통을 올린 것이다. 통통한 발가락에는 거대한 조형과는 어울리지 않게 잘 다듬어진 발톱이 잘 표현되어 있다.


얼굴을 보자. 이마가 좁고 양쪽 볼이 넓은 삼각형 형태인데 눈·코·입이 꽉 차게 표현됐다. 눈은 미간의 선을 따라 옆으로 길게 표현됐고, 눈동자와 내외안각 주름은 앞서 밝혔듯이 검은색 점판암을 조각해서 끼워넣었다. 코는 둥그런 미간에서 길게 내려져 낮게 삼각형을 그리고 있다. 이 얼굴은 대중적으로는 ‘삼등신 얼큰이’라며 손가락질 받았던 부위다.


하지만 최선주 실장은 달리 보았다. 꽉찬 눈·코·입을 두고 ‘평면적인 얼굴의 이미지를 완전 극복했다’고 했다. 긴 눈과 검은색 눈동자를 두고는 ‘위엄있게 보인다’고 했다. 또 입술의 면처리는 ‘매우 원만하고 치밀하게 표현돼있다’고 했고, 깊게 파진 인중을 두고는 ‘장대한 분위기를 연출한다’고 했다.


이 뿐이 아니다, 3줄로 길게 늘어뜨린 보발(寶髮)의 곡선처리를 두고는 ‘어색한데 없이 머리카락을 정교하게 다듬었다’고 극찬했다. 또 두툼한 띠로 표현된 ‘천의(天衣)’ 끝단을 두고는 ‘마치 바람에 날려 젖혀진 듯 하다’고 치켜세웠다. 왼손은 허리와 평행을 취하면서 손목만 꺾어 엄지손가락과 가운데 손가락을 맞댄 수인(手印)의 형태를 취했다. 오른손은 황금색(혹은 자금색) 연화 가지를 들었고, 손바닥은 안쪽으로 향하고 있다.


관촉사와 은진미륵의 전경. 압도적인 은진미륵의 크기 때문에 절이 오히려 작아보인다. | 문화재청 제공


■일제가 빼앗아간 금동불상·화관


이마 위에 표현된 원통형 보관도 매력덩어리다. 보관의 중간에 세로 일렬로 달린 철제 고리 3개가 심상치 않다. 또 보관의 4면에 걸쳐서도 관을 고정했던 철제흔적이 남아있다. 1743년(영조 19년) 기록인 <관촉사사적기> 등과 후대의 증언을 토대로 살펴보면 보관의 4면은 금동제 화관을 둘렀고, 정면(철제 고리)에는 금동불상을 걸어두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논산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한 동호회(죽암문인협회)가 쓴 <관촉사유적기>(1949년)에는 관련 증언이 등장한다. 즉 “보관의 4면을 둘렀던 금동제 화관은 1881년(고종 18년) 민비(명성황후)의 명에 의해 제거됐고, 정면의 금동불상은 1907년 어느날 일본인들이 그물을 타고 올라가 탈취해갔다”는 것이다.


하지만 명성황후가 무엇 때문에 논산 지역에 있는 은진미륵의 금동화관을 제거하라는 명을 내렸겠는가. 일본인들이 금동불상과 금동제화관을 다 훔쳐가면서 ‘민비’ 운운하는 헛소문을 퍼뜨렸을 가능성이 짙다. 1907년이면 일본의 궁내대신(장관)이라는 자(다나카 미쓰야키·田中光顯·1843~1939)가 백주에 개경 인근에 우뚝 서있던 경천사 10층석탑을 뜯어갔던 바로 그 해다. 일국의 장관이 남의 나라에 와서 멀쩡한 고층탑까지 뜯어가버린 무법천지였으니 은진미륵의 금동불상 및 화관을 탈취하는 일도 여반장(如反掌)이었으리라.


관촉사 은진미륵의 앞면과 측면, 그리고 뒷면. 크기가 워낙 커서인지 가까이서 보나 멀리서 보나 그 규모를 실감하기가 어렵다.  | 문화재청 제공


■면류관 쓴 은진미륵?


또하나 은진미륵의 특징 가운데 이중 사각형 형태의 보개(덮개) 또한 심상치 않다. 이 보개의 형태가 임금이 쓰는 면류관과 비슷하다는 것에 주목하는 연구자가 있다. 여기서 말하는 임금은 광종을 지칭한다.


광종(재위 949~975년)은 고려의 건국 과정에서 크게 성장한 호족세력을 억누르려는 이른바 왕권강화책을 쓴 임금이다. 나말여초 혼란기에 양인에서 억울하게 노비로 전락한 이들을 조사해서 다시 양인으로 되돌리는 노비안검법을 시행하고(956년) 과거제를 실시했다(958년). 바로 이 과정에서 왕의 권위를 크게 부각시키려고 은진미륵과 같은 거대불상을 조성했다는 것이다.


태조 왕건(877~943·재위 918~943)은 936년(태조 19년) 논산 인근의 연산에서 신검(재위 935~936)의 후백제군과 최후의 일전을 벌여 항복을 받아냈다. 태조는 이 역사적인 승전을 기념하려고 연산에 개태사와 삼존불상(높이 4.51m, 3.84m, 3,72m)을 세웠다. 광종은 그런 태조의 기상을 이어받아 후백제의 옛 영역인 논산·연산 지역의 호족 앞에서 존재감을 과시하려고 개태사 삼존불상보다 4배 이상 큰 거불(은진미륵)을 조성했다는 것이다. 임금의 면류관 형태의 이중 사각형 보개는 바로 광종의 ‘왕즉불(王卽佛)’ 관념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해석이다. 충남지역에는 은진미륵과 양식과, 제작시기가 비슷한 불상이 더 있는데, 부여 대조사 석조미륵입상(보물 217호)가 바로 그것이다.


은진미륵과 비슷한 시기에 조성된 충남 부여의 대조사 석조미륵보살입상(보물 제217호).미래세계에 나타나 중생을 구제한다는 미륵보살을 형상화한 것으로 높이가 10m나 되는 거구이다. 관촉사 은진미륵과 비슷하다. |문화재청 제공


■‘배역의 땅’ 다스리려고?


물론 다른 해석도 있다. 후백제의 서기 어린 땅과 원한 품은 백성들의 결합을 차단하기 위해 ‘비보(裨補)’ 차원에서 18m가 넘는 은진미륵을 조성했다는 견해이다(신은영의 ‘관촉사 석조보살연구’ 논문에서).


‘비보’는 산천지세의 결함을 보완하기 위해 절이나 탑을 세워 나쁜 땅을 진압하거나 부족한 부분을 채워넣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 ‘비보사탑풍수’라 한다. 태조 왕건의 ‘훈요십조’의 8번째는 ‘차현 이남과 금강 바깥쪽은 배역(背逆)의 땅’이라 규정해놓았다.(<고려사> ‘세가’) 북쪽을 향해 흘렀다가 서쪽으로 방향을 트는 금강의 모습이 마치 고려의 도읍인 개경을 향해 활을 당기는 모습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런 ‘배역의 땅’을 진압하고 다스려야 했다. 이렇게 ‘비보사탑풍수’의 차원에서 조성한 것이 은진미륵과 같은 거대불상이라는 해석이다.


2007년 은진미륵의 상황을 점검하는 연구자들. 대략 아파트 6층 높이의  아찔한 곳에서 불상의 눈부위를 조사하고 있다.|최선주 실장 제공


■‘상남자 미륵’


필자는 최근 오랜만에 은진미륵을 친견했다. 죄송한 말씀이지만 아무리 잘 봐줘도 ‘꽃미남’ 소리는 못하겠다. 그러나 1000년 이상 꼬리표처럼 붙었던 ‘못난이’의 오명은 이제 털어버려도 좋을 듯 싶다. 굳이 남자로 표현하자면 시쳇말로 ‘상남자’가 꼭 어울리는 것 같다. 그래도 이왕 만들 거 시쳇말로 꽃미남으로 조성했으면 어땠을까. 태조 왕건의 ‘훈요10조’ 중 4조에 그 해답이 나와 있는 것 같다.


“우리 동방은 중국 풍습을 본받아 문물 예악 제도를 모두 그대로 준수했다. 그러나 지역이 다르고 사람의 성품도 각각 같지 않으니 구태여 억지로 맞출 필요가 없다.”


그래서 고려 ‘장삼이사(張三李四)’ 얼굴을 조각한 것일까.


2.“차세대 에너지는 지오박터, 전기를 생산하는 미생물”
전영기 칼럼니스트의 눈
중앙일보 2020.8.25 화
김영훈 대성그룹회장의 '신재생이후'

지오박터

지오박터

지난 30년 김영훈 회장의 에너지 실천을 따라가다 보면 과거의 원전, 현재의 배터리, 미래의 바이오에너지가 연결되어 있다. ‘지오박터(Geobacter·사진)’라는 전기를 생산하는 미생물의 존재가 요즘 김 회장의 주요 관심사다. 지오박터가 기후변화에 대응해 안전성, 환경성, 지속가능성 모두를 충족시키는 차세대 에너지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지오박터는 1987년 미국 워싱턴 포토맥강 진흙에서 매사추세츠주립대의 데릭 러블리(Derek Lovley) 교수가 발견했다. 이 미생물은 산소가 없는 곳에 살면서 자체 생화학 작용으로 전기를 일으킨다.
 
러블리 교수의 수십년간 연구 결과는 2019년 7월 1일자 뉴욕타임스가 “전기를 발생시키는 박테리아가 긴 생체 전선을 통해 우리 행성에 전류를 흘리고 있다”는 내용의 특집 기사(과학 저술가 Carl Zimmer 작성)를 실으면서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 뉴욕타임스 기사가 나가기 열흘 전인 2019년 6월20일, 김영훈 회장은 자신이 서울에서 주최한 ‘대성해강 미생물국제포럼’에 러블리 교수를 초청해 해당 내용이 한국의 독자에게 먼저 전달되도록 했다. 이 일은 김 회장이 에너지 세계의 첨단 동향에 얼마나 신속하고 민감하게 접근하는지, 특히 미생물을 활용한 에너지 분야에 얼마나 큰 관심을 쏟는지 보여주는 사례다. 김 회장은 “미래 에너지는 오염된 토양을 복구하면서 전기 에너지를 생산하는 지오박터같은 미생물에서 나올 수 있다. 바이오 경제의 초점은 미생물 기반의 폐기물 에너지로, 현재 실험실에서 산업화로 이동하는 단계”라고 말했다.

[출처: 중앙일보] [전영기 칼럼니스트의 눈] “에너지에 좌가 어딨고 우가 어딨나…효율이 있을 뿐”



2.보안 우려 증폭시키는 ‘줌 폭탄’ 한국도 안심 못 해
최병일의 이코노믹스
미국 실리콘밸리에 둥지를 튼 지 이제 10년에 가까운 줌. 이용자가 2019년 12월 하루 1000만명 수준에서 2020년 3월 2억명, 4월 3억명으로 폭증했다. 주가는 하늘을 찔렀고, 코로나 팬데믹의 초기 대유행이던 지난 4월에는 줌의 시장가치가 세계 유수의 7대 항공사의 시장가치를 합한 것보다 더 많았다.
 
줌 천안문 사건 이전에도 줌은 논란의 대상이었다. 논란의 전선은 두 곳이다. 첫째는 해킹 우려, 둘째는 데이터가 중국 정부 손에 넘어갈 수 있다는 우려다. 줌 화상회의에 초대받지 않은 사람이 들어와서 정치적, 반사회적 문건, 동영상을 살포하고, 참석자들의 사생활 관련 동영상·사진을 뿌리는 행위는 ‘줌 폭탄(Zoom bombing)’으로 명명될 만큼 빈번해졌다.
 
더 심각한 것은 중국으로 정보가 유출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캐나다 보안업체 시티즌 랩(Citizen Lab)이 폭로하면서 수면 위로 떠올랐다. 시티즌 랩은 북미에서 진행된 화상회의 데이터의 전송경로를 실험해 보았다. 그 결과, 회의에 참석한 사람 중에서 중국에 있는 사람이 없는데도 데이터가 중국에 있는 서버로 전송됐다는 것을 그들은 발견했다. 데이터와 함께 이를 해독하는 암호키까지 중국 베이징에 있는 한 서버로 전송된 정황이 포착됐다고 한다 (최병일, 『미중 전쟁의 승자, 누가 세계를 지배할 것인가 - 미국편』, 개정증보판, 2020).
 
중국당국이 외국에서 벌어지는 화상회의의 자료를 자기 집 안방 들여다보듯이 한다는 것은 보안이 뻥 뚫려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재택근무 중인 공공기관 직원이 회의에 사용한 자료가 ‘줌’을 타고 중국당국의 책상 위에 실시간으로 올려지는 상황은 악몽이다.
 
독일 외교부, 영국 국방성,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등이 공식회의에서 줌 사용 금지령을 내렸다. 미국의 뉴욕시·네바다주·로스앤젤레스 등 학교에서도 줌은 금지됐다. 스탠다드차타드는 글로벌은행 중 최초로 ‘줌 금지령’을 내렸다. 한국은 어떤가?

[출처: 중앙일보] [최병일의 이코노믹스] 중국이 ‘만리방화벽’ 쌓아올리자 미국도 맞대응 본격화


3.[주경철의 히스토리아 노바] 십자군 전쟁의 시작

[22] "기독교도 창자 끝을 말뚝에 묶고…" 교황 연설에 기사들이 봉기했다

조선일보 주경철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  2020.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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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95년 11월 27일, 프랑스의 클레르몽 공의회에서 교황 우르바누스 2세가 십자군 원정을 선포하는 장면. 당시 교황은 예루살렘 성지를 회복하자고 호소했고, 그곳에 모인 사람은 모두 ‘하느님께서 원하신다’고 외치며 호응했다고 한다. 이탈리아 밀라노의 갤러리 디 피아자 스칼라 소장. /게티이미지코리아


1095년 11월 27일, 클레르몽 공의회에서 교황 우르바누스 2세가 십자군 원정을 선포했다. 이 회의에서 교황이 어떤 연설을 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다만 공의회에 참석했던 인물들이 후대에 쓴 기록으로 추론할 수 있을 뿐이다. 예컨대 로베르 수사가 1107년에 쓴 연대기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튀르크족은 하느님의 교회를 완전히 파괴했다. 그들은 기독교도에게 할례를 행하고 그 피를 제단에 바르거나 성수반에 붓는다. 또 희희낙락하며 기독교도들의 배를 갈라 창자의 끄트머리를 꺼내서 말뚝에 묶고는 채찍으로 때려 말뚝 주위를 돌아 내장이 쏟아져 죽게 만든다. … 여자들을 겁탈하는 일에 대해서는 더 이상 무슨 말을 하랴."


기독교 세계 통합하려는 교황의 야망



주경철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

교황은 이런 선동적 연설을 통해 하루빨리 예루살렘 성지를 회복하자고 호소했고, 그곳에 모인 사람은 모두 '하느님께서 원하신다(Deus vult)'고 외치며 호응했다. 동방 원정에 참여할 사람들은 1096년 8월 15일에 퓌(Puy) 지역에 집결하여 콘스탄티노플로 가서 다른 순례자들과 합세한 후 함께 예루살렘으로 진군하자는 계획도 발표했다. 200년 가까이 지속될 십자군 운동은 이렇게 시작했다.


그런데 셀주크튀르크가 팽창해 오면서 중동 지역에 살던 기독교도들이 위험에 빠지고 성지순례를 방해받았다는 것은 사실일까? 결코 그렇지 않다. 예루살렘은 서기 638년 이래 무슬림 지배하에 있었지만 이곳 기독교도들은 관용적 취급을 받았고, 성지순례도 충분히 가능했다. 그렇다면 비잔틴제국 황제가 원군을 요청했기 때문에 십자군 운동이 시작되었는가? 이는 절반 정도만 맞는 설명이다. 셀주크튀르크가 1084년 안티오크, 1087년 에데사를 점령했고, 위협을 느낀 비잔틴제국 황제 알렉시오스 1세 콤네노스가 1095년 피아첸차 공의회에 사절을 보내 원군을 요청한 건 사실이다. 그렇지만 비잔틴제국이 원한 건 소수 정예 용병이지 광신자 집단이 떼로 몰려오는 건 아니었다.


교황 우르바누스 2세는 기독교 세계 전체를 다시 통합하려는 야망을 품고 있었다. 교황은 동방정교의 세계인 비잔틴제국을 군사적으로 도움으로써 가톨릭 교회의 영향력을 확대하려 했다. 사실 이전 교황 그레고리오 7세도 5만 병사를 끌고 성지를 탈환하려고 계획했지만 실행에 옮기지 못한 적이 있다. 우리가 주목해서 살펴볼 점은 이와 같은 군사 원정의 의도가 역설적으로 평화 회복이었다는 점이다.


유럽 봉건 기사 폭력의 배출구



1095년 예루살렘으로 출병한 기독교 사상 최초의 십자군 운동 당시 유럽 봉건 기사 초상화. /게티이미지코리아


당시 유럽 세계는 폭력이 넘쳐나는 위험한 세상이었다. 오랫동안 바이킹과 마자르족 그리고 이슬람 세력의 침공을 받아 유럽은 마치 전쟁터처럼 되었다. 사방에 성채가 들어섰고, 기사와 보병 부대가 할거하여 통제하기 매우 힘들었다. 교회는 폭력 사태를 줄이기 위해 '하느님의 평화(Peace of God·비전투원에 대한 공격 금지)'와 '하느님의 휴전(Truce of God·일요일과 성인의 날에 전투 금지)' 운동을 펼쳤지만 큰 효과를 얻지 못했다. 


클레르몽 공의회를 소집한 이유 중 하나도 봉건 기사들의 파괴 성향을 통제하는 방책을 찾으려는 것이었다. 기사들에게 아무 때나 칼을 휘두르지 말고 기독교 전사로서 규칙을 지키며 싸우고, 무엇보다 신앙을 지키기 위해 무력을 행사하라고 주문했다. 최선은 신앙의 적들과 싸우는 것이다. 십자군은 유럽에서 가장 광포한 세력을 외지로 내몰아 튀르크인들과 싸우게 함으로써 폭력의 배출구를 확보하는 방식이었다. 12세기 초 기베르 드노장(Guibert de Nogent)의 표현을 옮기면 같은 편끼리 서로 죽이지 말고 나가서 이방인을 죽이라는 것이다.


교황의 의도는 그렇다고 해도 당시 사람들은 왜 그토록 열광했는가? 십자군 운동 참가자들은 고향에서 기회를 얻지 못한 가난한 사람들, 잃을 것 없는 사람들이 군사 모험을 통해 한밑천 잡자는 불순한 의도가 있었다는 것이 종전 주장이었다. 그렇지만 최근 실증 연구 결과는 정반대 사실을 말해 준다. 십자군 전사들은 잃을 것이 아주 많은 부자였다. 사실 물질적 이익을 노리고 참전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동방 원정에는 엄청난 비용이 들기 때문에 재산을 팔거나 저당 잡혀서 돈을 구해야 했다. 반면 전투로 큰돈을 벌 가능성은 극히 낮다. 혹시 승리를 거두어 토지를 획득하더라도 그 땅은 원론적으로 비잔틴 황제에게 귀속된다고 교황이 선언했다. 실제 전쟁을 마치고 돌아온 사람은 대개 궁핍을 피하지 못하고 빚에 시달리곤 했다. 이 시절에 돈을 번 사람은 십자군 참전 기사들에게서 땅을 사들이거나 전쟁 물자를 판매한 상인들로서, 다시 말해 십자군 운동에 참가하지 않은 사람들이다.


聖戰과 참회를 연결한 십자군 운동


기사들은 돈 벌러 간 게 아니라 구원을 얻기 위해 간 것이다. 당시 사람들은 죄를 참회하고 저세상에서 영원한 보상을 구하는 열정이 들끓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현세적 가치를 부정해야 한다. 단적으로 두 가지를 금해야 한다. 무기와 성기(性器)를 남용하지 말라! 구원을 얻으려면 폭력과 성적 쾌락을 멀리하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두 가지 죄를 많이 범하는 집단은 주로 기사들이다. 그런 만큼 이들에게는 참회할 기회가 필요하다. 세상을 버리고 수도원으로 들어가든지 콤포스텔라, 로마, 예루살렘 등지로 순례에 나서야 했으니,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기사 집안 출신이면서 클뤼니 수도원을 거친 교황 우르바누스 2세는 누구보다도 수도원 이상과 기사 이데올로기의 갈등에 대해 잘 아는 인물이었다. 기사들은 영원한 구원에 대한 갈망이 크지만, 현실적으로는 전사라는 지위 때문에 흔히 죄의 길로 들어선다. 이때 우르바누스 2세가 불안과 죄책감에 빠진 사람들에게 새로운 길을 열어주었다. 이 세상을 등지지 않아도 될뿐더러, 칼을 놓는 게 아니라 오히려 칼을 휘둘러 하느님을 기쁘게 할 수 있다. 예수 성묘를 앗아간 무슬림들을 축출하는 신의 전사(milites Dei), 그리스도의 전사(milites Christi)가 되면 가능하다.


우르바누스 2세의 창의적 해법은 성전(聖戰)과 순례를 통합한 데 있다. 성전 개념은 전례가 있었다. 8~9세기에 이탈리아 해안 지역을 습격하는 무슬림과 싸우는 기사들에게 죽으면 하느님이 천국에서 맞아줄 것이라고 한 바 있다. 교회 편에 선 전사들의 죄를 사면하고, 전장에서 죽으면 순교자로 친 것이다. 우르바누스 2세는 신앙의 적과 싸우러 가는 행위가 순례라는 놀라운 해석을 제시했다. 십자군 운동은 개념적으로 전투 이전에 순례 행위다. 기사들은 자신을 순례자로 칭했다. 다만 칼을 가지고 순례에 나선 점이 달랐을 뿐이다. 성스러운 전투와 참회, 이 두 가지를 연결한 것이 십자군 운동이었다.


[기사도 문학, 무슬림을 악마 묘사]


롤랑의 노래 "죽더라도 순교자 되어 천국에서 왕관을…"


십자군 운동은 조만간 문학적으로 정당성을 얻게 된다. 기사도 문학은 무슬림 적들을 '악마화'하고, 그 때문에 그들과 싸우는 전투는 정당할 뿐 아니라 성스러운 행위이며, 영적 보상이 이루어지는 임무라고 해석했다. 대표적 작품이 '롤랑의 노래'다. 십자군 운동 시대에 탄생한 이 작품은 전투에 임하는 기사들에게 죄의 사면과 축복, 구원을 약속한다.




기사들의 영웅적 행위를 예찬하는 서사시 ‘롤랑의 노래’ 여덟 장면을 묘사한 그림. 십자군 운동 시대에 탄생한 이 작품은 전투에 임하는 기사들에게 죄의 사면과 축복, 구원을 약속했다. /위키피디아


"튀르팽(Turpin) 대주교는 설교를 시작했다. … 당신들은 곧 전투에 임할 것이니/ 하느님께 죄를 고해하고 은총을 빌라/ 당신들 영혼의 구원을 위해 내가 죄를 사면할 것이며/ 죽더라도 순교자가 되어/ 천국에서 왕관을 받으리라."


여기에서 확인하듯 우르바누스 2세가 제시한 십자군 운동의 이념은 이데올로기 혁명이었다. 초기 교회의 평화와 비폭력은 이제 전투를 부추기는 방향으로 전환했다. 이전에는 칼을 맞고 희생당한 사람이 순교자였지만, 이제는 칼을 휘두르는 사람이 순교자가 되었다. 이슬람의 지하드(이슬람 성전·聖戰)와 십자군 운동은 사실 같은 내용이다. 조만간 이 두 운동은 서로 충돌하게 된다.

출처 : //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20/08/25/2020082500054.html



4.[장대익 칼럼]한국 개신교의 유통기한은 남아있을까?

장대익 서울대 자유전공학부 교수 2020.08.25


“누군가 망상에 시달리면 정신이상이라고 한다. 다수가 망상에 시달리면 종교라고 한다.” 세계적 베스트셀러 <선(禪)과 모터사이클 관리술>의 저자가 무심히 던진 이 돌직구는 어디를 향해 날아가고 있는 것일까? 지금 우리 사회는 망상에 사로잡힌 일부 종교 집단들 때문에 국가적 대혼란에 빠졌다.


사랑제일교회의 전광훈 목사는 한국 개신교의 극보수 목소리를 내는 한기총의 대표로서 이번 광화문집회 사태의 주역이다. “중국 우한 바이러스로 우리 교회에 테러를 했다. 집회에 참석하면 성령의 불이 떨어져 있던 병도 낫는다”는 그의 발언은 상상력과 ‘근자감’의 결정판이다. 엎드려 사과한 신천지의 이만희씨가 작아 보일 지경이다.


어디 전 목사뿐인가? 물리적(사회적) 거리 두기 2단계 발효와 행정명령에도 기어코 대면 예배를 강행한 교회가 엊그제 부산에만 270여곳이란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집단감염 사태를 막아야 하는 이 엄중한 시국에 종교의 자유를 외치며 저항하는 그들은 과연 어떤 정신의 소유자들일까? 타자의 고통에 함께 몸부림쳤던 예수가 살아있다면 어디 편이었을까? 유치원을 비롯한 모든 단체가 방역의 끈을 다시 조여 매고 있는 상황인데 한국의 개신교는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을까?


괴물은 갑자기 태어나지는 않는 법이다. 2007년 한 개신교 교회에서 파견한 아프가니스탄 단기 선교팀이 탈레반의 무장 세력에 납치돼 40일 만에 풀려난 악몽 같은 사건이 있었다. 탈레반은 결국 두 명을 살해했으며 한국 정부가 지불한 거액의 몸값을 챙기고 나머지를 풀어줬다. 그런데 전 국민을 충격과 공포에 빠뜨린 이 비극이 채 끝나기도 전, 그 교회의 담임목사는 두 청년의 죽음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피를 뿌린 사건.”


하지만 이 깔끔한 정리는 ‘선교가 불법인 곳에 청년들을 파견한 것 자체가 잘못’이라고 생각했던 많은 이들을 소름끼치게 했다. 지금은 익숙한 ‘개독교’라는 신조어가 등장한 것도 그때다. 타인(타집단)에게 피해를 주면서까지 자신의 신념을 관철해온 한국 개신교의 역사는 짧지 않다.


광화문집회에 참여한 사랑제일교회 신도들과 대면 예배를 고집하는 교인들의 행태도 같은 선상에 있다. 국가 전체에 피해를 주면서 자기 자신에게도 치명적일 수 있는 행동을 하기 때문이다. “예배는 생명이기에 목숨 걸고라도 대면 예배를 드려야 한다”고 강변하는 교인들에게 ‘당신 목숨이나 거세요. 타인에게 피해주지 말고’라고 소리치고 싶은 사람은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대체 왜 한국의 개신교인들은 세상의 걱정거리가 되었을까? 자신의 목숨마저도 가벼이 여기면서 말이다.


2001년 미국 9·11테러 발생 직후, 영국의 진화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는 한 일간지 칼럼에 다음과 같이 썼다. “만일 모든 사람이 ‘죽으면 모든 게 끝’이라고 생각한다고 치자. 그러면 자살테러 같은 만행은 지금보다 훨씬 더 줄어들 것이고, 어떻게든 협상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 들 것이다. 내세를 가르치는 종교는 사람들을 언제든 살인 무기로 만들 수 있는 정신 바이러스의 일종이다.” 이 기고문으로 그는 수많은 종교인들의 반발을 사기도 했지만 종교 없는 세상을 꿈꾸는 많은 사람들의 영웅이 되었다. 그의 문제작 <만들어진 신>은 그렇게 시작된 프로젝트였다.


종교가 ‘정신 바이러스’라는 주장은 비유를 넘어선다. 인간은 모방의 귀재로 진화했다. 인간의 독특성은 특출한 모방 능력에서 왔다고 해도 무방하다. 이에 도킨스는 유전적 방법이 아닌 모방을 통해 한 개체에서 다른 개체의 기억 속에 복제될 수 있는 문화 전달 단위를 ‘밈(meme)’이라 명명했다. 베스트셀러 서적, 영화, 광고, 구호 등이 모두 성공한 밈의 사례들이다. “사람은 책을 만들고 책은 사람을 만든다.” 어디서 많이 본 문구 아닌가?


그렇다. 밈을 만든 것은 인간이지만 밈은 인간을 숙주처럼 이용해서 자신의 운반자로 인간을 이용하기도 한다. 이념이나 종교가 대표적 예다. 자유, 평등, 민주주의를 위해 군사정권과 싸우다 자발적으로 목숨을 버린 사람도 적지 않다. 자신의 종교적 이념을 마음에 새긴 채 자살테러를 저지르는 사람도 있다. 세상 어떤 종도 이런 식으로 행동하지 않는다. 오직 인간만이 유전자에 대항하는 밈을 가지고 있고 밈의 힘에 의해 자신의 목숨까지 바칠 수 있는 존재이다. 청소년이 왜 담배를 피우는지 아는가? 그들이 소비하는 것은 ‘담배 피우는 게 멋지다’라는 밈이다.


수많은 전국의 개신교인들이 광화문에 집결해 정권을 규탄했다. 마스크를 끼고 모였어도 시원찮을 판에 호기롭게 집단적으로 구호도 외치고 밀착해서 음식도 나눠 먹었다. 대절 버스를 타고 다시 고향으로 가서 일상에 복귀했다. 그래서 우리의 일상이 엉망이 되었다. 다시 말하지만, 어떤 다른 동물도 이런 무모한 행동은 하지 않는다. 도킨스가 유신론적 종교를 박멸해야 할 정신 바이러스라고 규정하고 인류가 하루빨리 ‘신이라는 망상’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하는 데에는 이런 이유가 있는 것이다. 코로나19 바이러스는 우리를 보살피지 않는다. 그저 자신의 복제만을 위해 인간 숙주를 무차별 공격할 뿐이다. 도킨스는 종교도 마찬가지라고 말한다. 그러니 자기 자신을 신념의 ‘주인’이라고 착각하면 안 된다.


물론 한국의 개신교와 교인들을 싸잡아 비난할 수는 없다. 하지만 적지 않은 그들이 자신의 밈에 사로잡혀 우리 사회의 진보를 가로막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창조론을 과학교과서에 집어넣으려 온갖 꼼수를 부리고, 상식적 인권이라 할 수 있는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며, 아직도 빨갱이 얘기로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사실의 영역뿐만 아니라 가치의 영역에서도 꼰대가 된 지 너무 오래다. 역사가 증명해주는바, 지식과 가치에도 유통기한이 있다. 과연 한국 개신교의 유통기한은 남아있을까?

//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2008250300065&code=990100#csidx29a97b2d06eb711ae02014c02473b5f 



5.[김호기 칼럼]오래된, 또 새로운 ‘복합 위험 시대’

김호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2020.08.25

-생략

코로나19는 사회학자 울리히 벡이 <위험사회론>에서 말한 위험의 하나다. 위험사회론의 핵심 테제는 두 가지다. 현대사회의 가장 큰 문제가 위험이라는 것과 위험에 맞선 안전이 기존의 평등이라는 가치에 앞선다는 것이다. 후자의 테제는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전자의 테제에 대해선 이견을 제시하기 어렵다. 벡이 <글로벌 위험사회>에서 제시한 기후변화, 금융위기, 테러리즘만큼 21세기 우리 인류에게 직접적 위험을 안기는 것은 없다. 여기에 이제 팬데믹이 새롭게 더해지는 낯선 시대의 문턱을 인류는 넘어서고 있다.


물론 벡이 전하려는 메시지 가운데 하나는 인류가 직면한 위험의 현재적 성격이 과거와는 다르다는 점에 있다. 현대사회 이전 ‘오래된 위험’은 자연재해·전쟁 등에서 비롯됐지만, 20세기 후반 인류가 마주한 ‘새로운 위험’은 과학기술에 기반한 사회발전이 낳은 결과라는 것이다. 지구적 기후위기와 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태는 대표적인 사례들이다. 벡이 강조하려는 핵심 메시지는 근대화가 가져온 우리 삶의 사회적 조건이 변화됐고, 이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적극적 대응이 요구된다는 데 있다.


이러한 벡의 위험사회론에 나 역시 동의한다. 여기에 더해 내가 주목하고 싶은 것은 위험으로서의 코로나19 팬데믹이 갖는 특징들이다. 먼저 오늘날 오래된 위험과 새로운 위험의 구분은 큰 의미를 갖지 않을 수 있다. 전염병과 같은 오래된 위험도 세계화 및 정보사회와 결합하면 단숨에 ‘지구화된 위험’으로 부상한다. 그 위험은 새로운 위험에 결코 못지 않은 충격과 공포를 안긴다. 게다가 이 팬데믹의 원인 중 하나로 지목되는 기후위기를 고려할 때, 오래된 위험과 새로운 위험의 경계는 점점 불분명해지고 있다. 이 팬데믹이 낳고 있는 미증유의 경제위기를 지켜볼 때, 이제 인류는 오래된 위험과 새로운 위험이 결합하는 ‘복합 위험 시대’로 들어서고 있다.


이하생략

//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2008250300045&code=990100#csidx23d7ed982021c539c5ab975c5ed2e05 


6.간추린뉴스


□문대통령 방역 올인, 기본권 제한 꺼냈다.

□트럼프의 백신도박? 임상 건너뛰고 내달 승인 가능성

NYT"미국인 대상 임상 안할듯"


□그린피스"10년 뒤 한반도 태풍으로 332만명 침수피해"

□"일본에 끌려간 조선의 도공들이 메이지 유신의 바탕이 됐다"  조선 도공들의 노래 '조선가'출간

□바이든 낙관론 아직 성급하다-반 트럼프 성향이 강한 미 기성언론이 잘 전하지 않는 대목도 함께 봐야 한다는것

미국 정치 전문가들은 이번 대선의 최대관건중 하나로 적극 지지층들의 투표참여를 꼽는데 큰이견은 없다.


□코로나 증상순서'고열->기침->구토>설사'-미국 연구진 분석  독감은 기침부터

미국 서던캘리포니아대 연구진


7.코로나 19 확진현황

전세계확진자 23,809,462(+170,551) 사망822,626(+3,582) 발병국214개국(-)

국내확진자 17,945(+280) 사망310(+1)


주요국가현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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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 오늘의 신문기사중에서 (2020년9월7일 월) 첨부파일 선기옥형 1636 2020.09.07
201 오늘의 신문기사중에서 (2020년9월5일 토) 첨부파일 선기옥형 1522 2020.09.05
200 오늘의 신문기사중에서 (2020년9월4일 금) 첨부파일 선기옥형 1100 2020.09.04
199 오늘의 신문기사중에서 (2020년9월3일 목) 첨부파일 선기옥형 1660 2020.09.03
198 오늘의 신문기사중에서 (2020년9월2일 수) 첨부파일 선기옥형 1274 2020.09.02
197 오늘의 신문기사중에서 (2020년9월1일 화) 첨부파일 선기옥형 1135 2020.09.01
196 오늘의 신문기사중에서 (2020년8월31일 월) 첨부파일 선기옥형 1643 2020.08.31
195 오늘의 신문기사중에서 (2020년8월29일 토) 첨부파일 선기옥형 1438 2020.08.29
194 오늘의 신문기사중에서 (2020년8월28일금) 첨부파일 선기옥형 1188 2020.08.28
193 오늘의 신문기사중에서 (2020년8월27일 목) 첨부파일 선기옥형 1339 2020.08.27
192 오늘의 신문기사중에서 (2020년8월26일 수) 첨부파일 선기옥형 1325 2020.08.26
>> 오늘의 신문기사중에서 (2020년8월25일 화) 사진 첨부파일 선기옥형 2612 2020.08.25
190 오늘의 신문기사중에서 (2020년8월24일 월) 첨부파일 선기옥형 1339 2020.08.24
189 오늘의 신문기사중에서 (2020년8월22일 토) 첨부파일 선기옥형 2337 2020.08.22
188 황당하고 무책임한 코로나 음모론 관리자 1649 2020.08.21
187 오늘의 신문기사중에서 (2020년8월21일 금) 첨부파일 선기옥형 1359 2020.08.21
186 오늘의 신문기사중에서 (2020년8월20일 목) 첨부파일 선기옥형 1641 2020.08.20
185 오늘의 신문기사중에서 (2020년8월19일 수) 첨부파일 선기옥형 1318 2020.08.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