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신문기사중에서 (2020년8월13일 목)

선기옥형 | 2020.08.13 11:26 | 조회 1354

목차

1.미래를 기억하는 사회 - 칼럼이란 무엇인가?

2.일본 자위대 창설 70주년-  일본군의 정체성

3.일본 대신 우리가 분단된 까닭 [정병호의 기억과 미래]

4.간추린뉴스

5코로나 19확산현황


1.[중앙시평] 미래를 기억하는 사회, 칼럼이란 무엇인가

[중앙일보]  2020.08.13 강남순 텍사스 크리스쳔 대학교 브라이트 신학대학원 교수


칼럼의 홍수 시대다. 도처에 칼럼이 넘쳐난다. 그런데 칼럼이란 무엇인가. 무엇이 칼럼을 칼럼이게 하는가. 칼럼의 의미와 과제는 무엇인가. ‘뿌리 질문(root question)’이라고 부르는 이러한 방식의 질문하기는, 특정한 주제에 대하여 사전이 주는 단순성을 넘어서서 복합적 시각을 가지게 한다. ‘뿌리 질문’에는 ‘예, 아니오’와 같은 단순한 답이 불가능하다. 단순하게 생각했던 특정 주제가 지닌 복합성을 볼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뿌리 질문은 심오한 사유 세계로 우리를 초대한다. 칼럼에 대하여 다층적인 ‘뿌리 질문’을 하는 것은, 도처에 등장하는 칼럼의 사회적 기능은 물론 그 책임과 과제를 새롭게 조명하는 데에 필요한 인식 확장의 장치로 기능한다.

 

인식확장을 위한 뿌리질문 해야

칼럼은 지식생산의 공간

자유·평등·정의의 확장을 위하여

미래를 기억하는 사회만이 희망


웹스터 사전에 따르면, 칼럼이란 “특정한 저자가 특정한 주제에 대하여 정기적으로 신문이나 잡지에 쓰는 글”이다. 그런데 이러한 사전적 정의가 알려주는 것은 무엇인가. 별로 없다. 외형만을 전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칼럼의 내부 세계를 알고 싶다면, 뿌리 질문을 하여야 한다. 새로운 통찰은 ‘사전-너머의 세계’에 치열하게 개입함으로써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이 지면에 칼럼을 시작하면서, ‘칼럼이란 무엇인가’라는 뿌리 질문과 마주한다. 뿌리 질문을 통해서 칼럼의 사회적 의미와 그 과제를 재구성하고자 함이다.

 

칼럼은 사회에 대한 지식을 생산하는 ‘권력 공간’이다. 한 사회에서 지식 생산 과정의 한 부분이 된다는 것 자체가 ‘권력’이다. ‘칼럼 권력’을 지닌 이는 한 사회에 등장하는 무수한 주제 중에서 특정한 주제를 골라서 ‘중요한 것’으로 제시하는 선택권을 가진다. 그리고 자신의 가치관·인간관·세계관·정치관 등을 반영하면서, 그 특정 주제에 대한 지식을 생산한다. 


이러한 지식 생산의 칼럼 권력을 가지는 사람은 뿌리 질문을 하여야 한다. 나는 ‘어떠한 지식’을 생산하는가. 그 지식은 ‘누구의 이득’을 확장하는 데 기여할 것인가. 또한 그 지식은 어떠한 미래 사회를 지향하게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사람마다 각기 다르며, 절대화할 수 있는 답이란 없다. ‘나에게’ 칼럼의 의미는 무엇인가를 말할 수 있을 뿐이다.

 

첫째, 칼럼 권력을 지닌 이는 ‘주변부에 머무는 비판자’가 되어야 한다. 정치·경제·교육·문화·종교 등 한 사회를 구성하는 권력이 집중된 중심부와 ‘비판적 거리 두기’를 해야 한다. 중심부와 주변부라는 다층적 축을 늘 동시적으로 보아야만, 우리가 어떠한 사회를 만들어가야 하는가를 짚어낼 수 있다. 여기서 중심부·주변부라는 두 축은 고정되어 있지 않다. 언제나 특정 정황과 연계되어 있다. 한 사람이 어떤 정황에서는 중심부가, 또 다른 정황에서는 주변부가 되기도 한다. 특정한 주제에 대한 복합적 조명이 언제나 필요한 이유이다.

 

둘째, 지식 생산 공간으로서의 칼럼은 특정한 부류의 사람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자유·평등·정의의 확장을 위한 지식을 창출하는 과제를 지닌다. ‘모든’ 이란 추상적 의미가 아니다. 개별성을 지닌 구체적인 개인들이다. 그 어떤 근거에 의해서도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보장받지 못하고 다층적 차별과 배제를 경험하는 개별인들이 없는, ‘모든’ 사람에게 정의로운 사회를 모색해야 한다. 칼럼은 이러한 인식 확장을 위한 지식을 담아내야 한다. 칼럼을 쓰는 이들이 현대사회의 다양한 차별과 배제 문제에 대한 복합적 이해를 지속적으로 학습해야 하는 이유이다.

 

셋째, 칼럼은 ‘대변의 공간’이다. 어떠한 사람들을, 어떠한 가치를, 어떠한 세계를, 그리고 어떠한 미래 사회를 대변할 것인가. 칼럼의 저자와 독자가 씨름해야 할 책임적 과제이다.

 



넷째, 칼럼은 ‘설득의 공간’이다. 칼럼은 특정인 또는 특정 집단의 권력 비호나 확장을 위한 공간이 아니다. 젠더, 인종, 계층, 학력, 장애, 성적 지향, 국적, 종교 등 그 어떤 조건에 의해서 그 어느 누구도 차별받지 않는 평등사회를 만들기 위한 가치에 동조하도록, 사회 구성원들을 설득하는 공간이다. 그 설득의 공간은 사회 구성원들이 ‘변혁의 주체’가 되도록 하는 초대장으로 기능할 수 있다.

 

다섯째, 칼럼은 ‘미래를 기억하는 공간’이 되어야 한다. 미래를 기억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지금의 세계’에 치열하게 개입하면서, 우리 사회가 일구어 나가야 할 ‘도래하는 세계’를 기억해야 한다. 모든 인간의 자유, 평등, 정의, 연대의 의미가 제도화되고 확산되는 세계는 ‘아직 아닌 세계’이다. 


인류의 역사는 이러한 다가올 미래를 기억하는 소수들에 의해서 그 평등과 정의의 원이 확산되어왔다. 미래를 기억하는 사회만이 희망이 있다. 미래에 대한 기억은 현재보다 나은 세계를 향한 변혁에의 열정을 살아나게 하기 때문이다. 칼럼의 막중한 사회적 책임이다.

 

한 편의 칼럼이 보여주고 담아내고자 하는 미래 사회는 어떠해야 하는가. ‘지금의 세계’와 ‘다가올 세계’ 사이에서 비판적 성찰의 끈을 놓지 말고, 미래 세계를 기억하면서 지금 세계에 개입하는 것, 칼럼의 필자·독자 모두의 과제이다.

 

강남순 텍사스 크리스쳔 대학교·브라이트 신학대학원 교수

[출처: 중앙일보] [중앙시평] 미래를 기억하는 사회, 칼럼이란 무엇인가


2.軍? 재해 지원조직? 日자위대 창설 70년, 흔들리는 정체성

박형준 도쿄 특파원  2020-08-13 

[글로벌 현장을 가다]

걸프전-9·11 후 해외활동 본격화… 日 트럼프 압박 재무장 기회로 삼아

항공자위대, 금기 ‘작전’ 부대 이름

재해지원 적극 나서 인식도 개선


도쿄 육상자위대 홍보센터에 전시된 코브라 헬기와 같은 전투 장비를 갖춘 ‘군’의 얼굴이다. 도쿄=박형준 특파원 lovesong@donga.com


박형준 도쿄 특파원

6일 일본 도쿄 내리마구 육상자위대 홍보센터. 1층 전시실 한가운데에 일명 ‘코브라’로 불리는 대전차 공격용 헬기 AH-1S가 있었다. 코브라 조종석을 본 초등학생 관람객이 “운전대가 없다”고 했다. 안내하던 자위대원은 웃으며 “게임할 때 사용하는 조이스틱처럼 생긴 조종간이 바로 운전대다. 이 헬기는 수송용이 아니라 공격용이어서 몸통이 날렵하고 좌석이 2개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건물 밖으로 나가자 전차, 장갑전투차, 기관포, 원격 조종 무인기, 중거리 다목적 유도탄 등이 일렬로 전시돼 있었다. 모두 육상자위대가 사용하는 실물 전투장비였다. 누가 봐도 군대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홍보센터 어디에도 ‘군대’라는 단어는 없었다. 제2차 세계대전의 패전국인 일본인들은 과거 전쟁을 떠올리게 만드는 군대라는 용어에 매우 민감한 반응을 보인다. 국내외에서 자위대의 활동 반경이 갈수록 넓어지고 주변국이 우려의 시선을 보내는데도 “자위대는 군대가 아니다”라는 기존 입장을 고수한다. 자연재해가 많은 일본의 특성상 자위대가 국내 재해 복구 사업에 대폭 투입되면서 군대에 대한 일반 일본인들의 거부감도 대폭 누그러졌다. 일본 압제를 겪은 한국인 입장에서 결코 편할 수 없는 대목이다.



사실상 군대지만 군대라 불릴 수 없는 자위대. 일본의 패전일인 이달 15일을 앞두고 자위대 70년 역사를 되짚어봤다.



○ 위기 때마다 활동반경 넓혀

1945년 8월 15일 2차대전이 끝났을 때 미국 연합군총사령부(GHQ)의 더글러스 맥아더 사령관은 “일본을 태평양의 스위스로 만들겠다”고 밝혔다. 일본의 무장과 군수산업을 완전히 해체해 스위스 같은 영세중립국으로 만들겠다는 의미였다.


1950년 6월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이 계획이 틀어졌다. 미국은 일본 내 미 육군 4개 사단을 모두 빼내 한국에 투입했다. 두 달 후 맥아더 사령관은 미군이 빠진 일본의 치안 공백을 우려해 7만5000명 규모의 경찰예비대 창설을 지시했다. 바로 자위대의 전신인 경찰예비대다.


1950년 8월 출범 당시 경찰예비대는 경찰을 지원하는 조직이었다. 그럼에도 M1 소총과 헬멧 같은 실전 무기와 용품을 지급받았고 전차를 몰았다. 임무는 경찰 지원이지만 외형은 누가 봐도 군대였다. 패전 후 만들어진 일본의 평화헌법이 교전권 및 군대 보유를 금지했기 때문에 군대라는 이름을 붙일 수 없었을 뿐이다. 이처럼 자위대는 태생부터 일종의 모순을 내포하고 있다.


경찰예비대는 그 후 보안대, 경비대 등으로 이름을 바꿔 달다가 1954년 공식적으로 자위대라는 이름을 달았다. 홍보센터 내 자위대 활동 연표는 1950년부터 90년까지 거의 비어 있었다. 별다른 활동이 없었다는 말이다. 하지만 1990년대 들어 활동 내역이 빽빽하게 채워지기 시작했다.


걸프전이 끝난 직후인 1991년 4월 일본은 기뢰 제거를 위해 해상자위대 소해(掃海)부대를 중동 페르시아만에 파견했다. 자위대의 첫 해외 원정이었다. 당시 야권은 “헌법정신을 짓밟는 폭거”라고 강하게 반대했다. 하지만 집권 자민당 정권은 “평화 시기에 기뢰를 제거하는 것은 무력행사가 아니고 해외 파병에도 해당되지 않는다”며 해외 파견을 강행했다.


일본은 1992년 6월 국제평화협력법을 통해 자위대의 해외 진출에 대한 법적 근거도 마련했다. 한마디로 평화 유지를 위해서라면 해외 활동도 가능하다는 의미다. 이에 캄보디아 모잠비크 동티모르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등에 자위대를 적극 파견했다.


2001년 9월 9·11테러 여파로 자위대의 활동 반경이 더 넓어진다. 일본은 당시 조지 W 부시 미 행정부의 테러 대응책을 강력하게 지지하면서 ‘테러 대책 특별조치법’을 만들었다. 특별법은 테러 근절을 위한 국제 협력이란 명분을 내세워 자위대가 해외 주둔 미군의 후방 지원을 할 수 있게 했다. 평화 유지가 아닌 군사 활동 지원을 가능하게 한 셈이다. 활동 반경도 기존 해외 공해와 그 상공에서 타국 영토로 넓어졌고 무기사용 제약도 대폭 완화됐다.


70년 전 7만5000명으로 시작된 육해공 자위대의 수는 현재 22만3000여 명으로 3배 가까이로 늘었다. 미국의 최신 스텔스 전투기 ‘F-35A’ 18대, 호위함 48척, 잠수함 19척 등 첨단 장비도 갖췄다. 김대영 한국국가전략연구원 연구위원은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가 재집권에 성공한 2012년 12월 이후 매년 방위비를 늘리고, 공격용으로 분류되는 무기 구매도 진행하면서 갈수록 첨단화하는 추세”라고 분석했다. 최근에는 위성정보를 늘리고 우주 공간까지 활용하려는 움직임도 두드러진다.


○ 재해복구 적극 나서며 거부감 누그러뜨려

정작 일본 내에서는 아직까지 자위대 활동에 상당한 제약이 있다. 아직도 ‘작전’이라는 군대 용어 대신 일반 회사에서 쓰는 ‘운용’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정도다. 패전 후 일본인들이 군대를 일종의 ‘악(惡)’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일본 자위대는 두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 지난달 7일 후쿠오카현 오무타시에 폭우가 쏟아졌을 때 피난민을 구조했던 것처럼 ‘재해 지원’의 얼굴을 갖고 있다. 아사히신문 제공


이런 상황에서 주목받기 시작한 것이 자위대의 재해 지원 활동이다. 지난달 4일 규슈 남부 구마모토현에서 폭우가 쏟아지면서 수십 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때도 주요 언론은 연일 자위대원들의 구조 모습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이들은 억수같이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노약자를 태운 고무보트를 밀었고, 도로에 산처럼 쌓인 흙과 모래를 치웠다.


내각부의 2018년 조사에 따르면 79.2%의 응답자들이 자위대 활동 목적으로 ‘재해 대처’를 꼽았다. ‘국가 안전 확보’(60.9%), ‘국내 치안 유지’(49.8%)보다 훨씬 높았다. 자위대는 2011년 동일본 대지진 때도 대규모 구호활동을 벌이면서 국민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올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방역 대책 현장에도 일부 자위대가 투입됐다.


올해 방위백서에 따르면 지난해 자위대원은 총 447차례 국내 재해현장에 파견됐다. 당시 동원된 자위대원 수만 약 106만 명이다. 이에 따라 일본인들이 전투복에 헬멧을 쓴 자위대 모습에 거부감을 느끼지 않고 일부는 상당한 호감을 지니기 시작했다는 분석이 제기된다.


자위대의 행보도 갈수록 과감해지고 있다. 자위대는 2012년 6월 재해 대비 훈련을 명목으로 완전무장을 한 채 도쿄 도심 행진을 감행했다. 항공자위대는 올해 5월 우주 전문 부대인 ‘우주작전대’를 창설했다.


○ 아베, 트럼프 재정 압박을 재무장 기회로 삼아

미국과 일본은 1960년 1월 안전보장조약을 통해 일본의 안보를 미국이 책임지는 대신, 미국은 일본 안에 미군 기지를 설치해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거점으로 삼기로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미국은 이 일방적 의무에 불만을 표했다. 한마디로 일본을 지키기 위해 미국이 많은 희생을 하는데도 부자 나라인 일본의 재정 기여가 낮다는 의미다.



미국 우선주의를 내세운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2017년 출범하면서 이런 현상이 더 두드러졌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해 6월 “일본이 공격받으면 우리는 생명을 걸고 일본을 보호한다. 하지만 미국이 공격을 받으면 일본은 소니 TV로 공격을 지켜보면 된다”고 토로했다. 더 많은 돈을 내든지, 아니면 직접 안보를 책임지라는 노골적인 압박이었다.


아베 총리는 직접 안보를 책임지는 쪽을 택했다. 그는 재집권 후 줄곧 “일본이 국제사회에 더 많은 기여를 해야 한다”며 노골적인 재무장을 시도하고 있다.


아베 내각은 2014년 ‘무기 수출 3원칙’을 47년 만에 전격 폐지해 일본의 무기 수출을 허용했다. 한 해 뒤에는 미군 등 아군이 공격당했을 때 일본이 공격을 받은 것으로 간주해 반격에 나설 수 있는 ‘집단 자위권’을 행사할 수 있게끔 했다. 많은 시민들이 “헌법에 있는 전수방위(專守防衛·공격을 받았을 때만 방어 차원에서 반격)을 위배했다”며 대규모 반대 시위를 벌였지만 개의치 않았다. 최근에는 적 기지를 선제공격할 수 있는 ‘적 기지 공격 능력’ 체제까지 갖추겠다는 의사를 드러냈다.


교도통신의 최근 조사에서 응답자의 76%는 “전수방위 원칙을 지켜야 한다”고 답했다. “헌법을 개정해 자위대에 군(軍) 지위를 명기해야 한다”는 답은 17%에 불과했다. 하지만 “돈을 더 내든지, 안보를 직접 책임지라”는 트럼프 행정부와 집권 후 줄곧 “전쟁 가능한 보통국가를 만들겠다”고 공공연히 밝히고 있는 아베 정권의 이해관계가 정확히 맞아떨어지고 있어 언제 자위대의 역할이 군대로 바뀔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엄습한다. 자위대가 ‘군대’와 ‘재해 지원조직’ 사이에 애매하게 존재할 시간조차 얼마 남지 않았을 것 같아 점점 두려워진다.

 

박형준 도쿄 특파원 lovesong@donga.com


3.[정병호의 기억과 미래] 일본 대신 우리가 분단된 까닭

한겨례 2020-08-13 

기억과 미래



정병호|한양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왜 패전국 일본이 아니라 조선이 분단되었을까? 한민족 누구나 한번쯤은 가졌을 의문이다. 8월15일을 해방의 날로 기념하기에는 바로 그날부터 시작된 분단이 너무 억울하기 때문이다. 민족의 말과 글은 되찾았지만, 천만 가족이 생이별하고 온 나라 땅이 세계적인 전쟁터가 되었던 역사가 억울하고, 오늘날까지 계속되는 긴장과 갈등이 억울하다.


 이 역사의 아이러니는 우연이었을까? 최근 연구들은 비밀해제 기록을 통해 당시 정황을 밝히고 있다.


전쟁에 승리한 연합국은 패전국 독일처럼 일본을 분할 점령하기로 했다. 1945년 6월 독일의 분할통치가 시작되었고, 일본이 다음 차례였다. 7월 포츠담 회담에서 미·영·중·소 연합국은 일본 분할점령에 합의했다. 미국이 간토와 간사이, 소련이 홋카이도와 도호쿠, 영국이 규슈와 주고쿠, 중국이 시코쿠를 각각 차지하고 도쿄는 베를린처럼 4개국이 분할통치하는 점령계획이 논의되었다. 8월13일 미 국무부는 “일본 점령을 위한 국가별 무력구성안”을 마련했다.


일본 분할계획이 왜 그대로 시행되지 않고, 엉뚱하게 조선이 대신 분단되었을까? 그 며칠 사이에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마지막 한 사람까지 싸운다던 일본은 왜 서둘러서 8월15일에 항복했나? 지금까지는 주로 원폭 투하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나 재미 일본학자 하세가와 쓰요시 교수는 원폭 투하보다 소련 참전이 더 결정적이었다고 한다. 소련이 참여하는 일본 분할을 피하고, 천황제를 지키기 위해서였다는 것이다. 


원폭 때문에 항복했다는 주장은 미국의 일본 열도 단독 점령을 뒷받침했다(<종전의 설계자들>, 메디치미디어).


다른 한편으로 고시로 유키코 교수는 일본 군부가 미국과 소련의 충돌 지점이 일본 열도가 아니라 중국 대륙이나, 만주, 조선이 되도록 유도하려 했다고 한다. 패전 후 일본이 재기하는 데 유리한 상황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조선의 38도선 부근도 일본군이 꼽은 유력한 미·소 대립 지점 중 하나였다. 소련은 8월9일 개전하자마자 만주와 남사할린으로 진격하고, 하루 만에 함경북도 웅기를 점령했다.


 다음날인 10일 일본은 항복 의사를 알려왔다. 미군 소령 딘 러스크는 하룻밤 사이에 조선의 38도선을 분할점령선으로 제안했다. 소련군의 홋카이도 상륙은 시간문제였다. 일본 천황은 8월15일 ‘종전(패전도 항복도 아닌) 선언’을 했다. 일본이 가장 두려워했던 소련이 참여한 일본 열도 분할점령은 피할 수 있을 만큼 빠른 항복이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소련을 동아시아로 끌어들이고, 원자탄 같은 인류적 재앙을 불러온 너무 늦은 항복이었다. 1945년 2월, 얄타에서 연합국 정상이 소련의 대일전쟁 참전을 논의하고 있을 때 일본의 고노에 후미마로 전 총리는 “패전 불가피론”을 주장했다. 패전 이후 공산혁명을 피하고 천황제를 유지하려면 조속히 영·미 쪽과 교섭해서 전쟁 종결을 추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쇼와 천황은 그래도 종전 협상을 유리하게 하려면 적에게 확실한 타격을 주어야 한다고 했다. 그렇게 시작된 것이 4월의 오키나와 전투였다.


“출혈작전”이라고 했다. 목적은 전투에서 이기는 것이 아니라 적의 출혈을 최대한 야기해서 항복 조건을 완화하는 것이었다. ‘출혈’은 맞서 싸우는 일본군과 모든 민간인에게도 요구되었다. 가미카제 자살특공대도 투입됐다. 일본 본토를 지키는 ‘방파제’, ‘버리는 돌’이라고 했다. 오키나와 전투는 참혹했다. 직접 전투를 한 양쪽 군인 사상자도 많았지만, 주민 46만명 중 12만명이 죽었다. 긴급 동원된 1만명에 이르는 조선인 ‘군부’와 ‘위안부’도 함께 희생되었다.


무모하고 잔혹한 “출혈작전”과 마주친 미국은 소련의 참전을 재촉하면서 동시에 원자폭탄 개발을 서둘렀다. 폭탄이 만들어지자 전쟁을 빨리 끝내려고 수십만 인구의 도시에 두차례나 원폭을 투하했다. 신무기의 위력을 과시해서 전후 패권을 다지려는 목적도 있었다. 소련은 침공 날짜를 앞당겨서 일본 점령의 지분을 챙기려 했다. 천황제를 지키려고 항복을 늦춘 일본과 동아시아 질서를 자기 쪽에 유리하게 만들려 한 강대국의 전략 때문에 수백만이 희생되고 민족의 운명이 갈렸다.


일본의 항복 소식을 듣고 김구 선생은 그 교묘한 시점에 한탄했다. 중국에서 오랜 국공내전을 겪으며 국제정치의 냉혹함을 지켜본 망명정부 수반은 ‘해방’을 그냥 반기지 못했다. 해방과 함께 온 분단이 어언 75년, 남북 대립과 전쟁 공포는 아직도 이 땅을 억누르고 있다. 분단의 아픔을 딛고 우리는 선생이 그토록 바라던 ‘문화의 힘’을 쌓아 올렸다. 국제 정세는 다시 이 땅을 미·중 초강대국 충돌의 최전선으로 떠밀고 있다. 자주외교의 지혜를 모아야 할 때다.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957597.html#csidx3e5dd2d9589a10484d26fc657263ccb 


4.간추린뉴스


4대강 공방만하다 중소하천 무너졌다.

미국 유색인종 여성부통령 후보 WP"해리스 대통령감"

롯데리아종각역 서울역사 건대역점등 매장7곳 폐쇄..집단감염비상


5코로나 19확산현황

전세계확진자 20,804,545(+208,848) 사망752,511(+5,290) 발병국214개국(-)

국내확진자 14,770(+56) 사망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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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 오늘의 신문기사중에서 (2020년8월1일 토) 첨부파일 선기옥형 1298 2020.08.01
169 오늘의 신문기사중에서 (2020년7월31일금) 첨부파일 선기옥형 1192 2020.07.31
168 오늘의 신문기사중에서 (2020년7월30일 목) 첨부파일 선기옥형 1283 2020.07.30
167 오늘의 신문기사중에서 (2020년7월29일 수) 첨부파일 선기옥형 1308 2020.07.29
166 오늘의 신문기사중에서 (2020년7월28일 화) 첨부파일 선기옥형 1215 2020.07.28
165 오늘의 신문기사중에서 (2020년7월27일 월) 첨부파일 선기옥형 1022 2020.07.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