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익필과 파주 심학산

신상구 | 2022.03.19 02:25 | 조회 4531


                                          송익필과 파주 심학산

경기도 파주시 심학산 정상에서 내려다본 한강 하류. 심학산은 조선시대 정략가 송익필이 머문 곳이다. [사진 김정탁]

  자유로를 타고 일산을 지나면 오른쪽 멀리에 나지막하게 누운 산을 발견한다. 파주출판문화단지 뒤쪽의 심학산(尋鶴山)이다. 이 산 중턱에 최근 음식점이 줄줄이 들어서고 둘레길까지 생겨나 많은 사람이 즐겨 찾는다. 심학산 높이는 200m가 채 안 되는데 주위에 큰 산이 없어 멀리서도 눈에 잘 들어온다. 산 정상에 오르면 탁 트인 시야로 한강 하류의 물줄기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또 정상에서 바라보는 서해의 낙조도 아름다워 이 산을 찾는 사람들의 마음을 설레게 한다. 반대편 동북쪽으로 눈을 돌리면 교하가 눈앞에 들어오는데 광해군이 한때 새 도읍지로 정했던 곳이다.

   이 산의 원래 이름은 구봉산(龜峰山)이다. 이 산을 자유로에서 보면 거북(龜) 모양을 하고, 서쪽 봉우리(峰)도 거북 머리와 같아서이다. 이 산 이름이 심학산으로 바뀐 건 조선 숙종 때다. 숙종이 애지중지하던 학 두 마리가 궁궐을 도망쳐 여기서 찾았다고 해 그 후로 학(鶴)을 찾은(尋) 산으로 불리었다. 그런데도 구봉산 이름이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는 건 이 산 밑에 살았던 송익필(宋翼弼·1534~1599)의 호가 구봉이어서다. 구봉 송익필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조선의 정치이념 주도한 송익필

왜란·호란 이후 예법 강화 주창

심학산에 살며 주변 서인 이끌어

‘당쟁기획자’‘노론설계자’ 비판도

이념·형식만 남은 주자학의 폐해

지금 한국정치 비추는 거울 같아

                                                정도전 버금가는 이데올로그 평가

                                      자유로에서 바라본 심학산 정경. [사진 김정탁]

   그는 조선 예학(禮學)의 창시자로 정도전에 버금가는 조선의 이데올로그이다. 그의 예학은 제자 김장생으로 이어지면서 17세기 이후 내리 조선의 정치 이념을 주도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양난을 겪고 난 후 조선을 이끈 선비들은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기보다 국가기강이 해이해지고 사회질서가 혼란해진 것을 오히려 문제 삼았다. 그리고 이 문제를 예법의 강화를 통해 해결하고자 했다. 이런 두 차례 난이라면 왕조가 무너지는 게 당연하다. 그런데도 조선왕조가 300년 가까이 더 지속할 수 있었던 건 예학 말고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다.

   그런데 조선의 예학은 얼마 가지 않아 권력투쟁의 도구가 됐다. 현종과 숙종 때 벌어진 예송논쟁이 단적인 예다. 이에 예의 참뜻은 사라지고 예의 형식만 남았다. 중국 예학을 집대성한 주자도 예를 “자연의 원리가 적절하게 행해진 것이고, 인간 만사의 의식과 법칙이다(天理之節文 人事之儀則)”라고 정의하면서 인위적인 형식보다 자연스러운 실질을 중요시했다. 그런데 주자를 신봉했던 송시열과 송종길 그리고 이들을 추종했던 서인, 그중에서도 노론은 주자의 예학 정신과 다른 태도를 보였다. 이는 예학이 권력투쟁의 도구로 변질됐다는 증거다.

심학산 아래 송익필이 살았던 곳으로 추정되는 지역. 현재 175년 된 정읍 김동수씨 작은댁의 사랑채가 옮겨와 있다. [사진 김정탁]

   예학의 이런 일탈은 송익필이 죽은 뒤 벌어졌기에 그로선 억울할 수 있다. 그렇지만 씨앗은 이미 송익필에 의해서 뿌려졌다. 송익필은 살아생전 정철·이이·성혼 등과 가깝게 교유했는데, 이들은 초기에 서인 당론을 이끌던 핵심인사들이다. 이들끼리 긴밀한 교유가 가능했던 건 심학산이 위치한 파주에 모두 모여 살아서이다. 이이는 임진강변 율곡리가 고향이고, 성혼은 그 근처 파주읍에 살았고, 정철은 여기서 멀지 않은 고양에 살았다. 그리고 임진강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화석정(花石亭)은 이들의 단골 모임터였다.

                                                               송강 정철

   화석정 모임의 주인공은 단연 송익필이다. 서인의 제갈공명이란 소리를 들을 정도로 글과 지략은 물론이고 인물과 자태도 뛰어났다. 송익필의 지략은 이순신조차 탄복해 마지않았다. 율곡의 소개로 구봉산으로 송익필을 찾아갔을 때 이순신은 방안 병풍 속 학이 자신이 상상했던 거북선의 모양과 비슷해 여기에 네 개 구멍을 뚫었다. 외출에서 돌아온 송익필이 화를 내기는커녕 총 48개의 구멍이 필요하다고 제안하자 이에 느낀 바가 있어 이순신은 밤새 용병과 진법을 물었다고 한다.

평생을 음지에서 보낸 서얼 출신

                   심학산 정상에 있는 정자. 이곳에서 보는 서해 낙조가 일품이다. [사진 김정탁]

   그런데 송익필은 서얼 신분이라 거의 평생을 음지에서 보내야 했다. 송익필의 외증조할아버지 안돈후는 고려 말 성리학을 처음 소개한 안향의 직계 후손으로 좌의정을 지낸 안당의 아버지이다. 안돈후는 노비에게서 딸을 낳고, 그 딸은 평범한 군인과 결혼해 아들을 낳았는데 그 아들이 송익필의 아버지 송사련이다. 그러니 송사련의 노비 출신 어머니와 안당은 배다른 남매간이다. 안당은 송사련을 서얼이라 차별하지 않고 그가 정5품 벼슬인 관상감 판관까지 지낼 수 있도록 배려했다.

   그후 송사련은 안당의 아들이자 자신과는 외사촌 형제인 안처겸·안처근 형제를 역모죄로 고발했다. 송사련의 고변으로 안당과 세 아들은 처형되고, 집안의 재산과 노비는 모두 송사련이 차지했다. 또 송사련의 벼슬도 정3품 당상관에 올랐다. 이런 일은 송익필이 태어나기 전에 일어났으므로 그는 아무것도 모른 채 당상관 자제로 유복하게 성장했다.

                                                            송시열

   그런데 명종 말 사림파가 힘을 쓰면서 송익필에게 화가 미쳤다. 안당 일가의 억울함을 풀어주자는 공론이 사림을 중심으로 형성되어서다. 결국 안당 집안에 잘못이 없음이 밝혀지면서 신원이 복권되고 직첩도 환급됐다. 반면 송익필 일가에게는 재앙이 되어 재산은 안당 집에 환수되고, 집안 식구들은 안당 일가의 노비로 전락했다. 이때 송익필은 동인 이산해로부터 율곡을 비난하면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권유를 받았는데 이를 거절하고 그를 풍자하는 시를 지어 이산해의 분노를 샀다. 이로써 송익필은 동인에게 공공의 적이 됐다.

                                         파주시 임진강변에 위치한 화석정. [사진 김정탁]

  서인의 반전은 곧이어 터진 정여립 역모와 관련한 기축옥사로 이루어졌다. 기축옥사로 1000명 가까운 동인과 그 관련자가 희생되면서 동인은 서인과 경쟁에서 크게 패퇴했다. 이 옥사를 진행한 사람은 정철이었는데, 정철의 배후에 송익필이 있다는 설이 파다했다. 또 송익필의 개인적 원한이 옥사를 더욱 참혹하게 만들었다는 말도 있었다. 송익필을 두고 당쟁의 기획자, 노론 집권을 설계한 책략가라는 부정적 시각은 이래서 생겨났다. 이에 송익필의 처지는 양지로 바뀌었는데 이런 양지도 오래가지 못했다. 서인이 선조의 아킬레스인 건저 문제를 잘못 건드려서 실각했기 때문이다.

  송익필의 복권은 그가 죽은 지 24년 후에 일어난 인조반정으로 이루어졌다. 인조반정은 사실상 서인에 의한 쿠데타였다. 게다가 인조반정의 두 주역 중 하나인 이귀는 송익필 제자였으며 또 다른 주역인 김류는 송익필에게 잠시 글을 배웠고, 그의 아버지 김여물도 송익필 제자였다. 더욱이 인조반정의 명분이 영창대군을 죽게 하고 인목대비를 유폐한 광해군의 패륜 행위를 바로잡으면서 명나라에 대한 사대를 분명히 하는 거였다. 이에 따라 예법이 강조되며 송익필의 예학도 주목을 받았다.

                                            모난 데 깎다가 모를 더 낸 당쟁

                 파주 화석정 시비. 이율곡이 8살에 지었다는 한시가 새겨져 있다. [사진 김정탁]

   이런 분위기에 힘입어 산림에 있으면서 서인의 구심적 역할을 했던 김장생은 인조에게 건의해 자신의 스승인 송익필을 복권시켰다. 또 김장생의 제자 송시열은 송준길과 의논해 그의 묘비문을 짓고 비석을 세웠다. 그 후 영조 때 송익필은 정5품 사헌부 지평에 증직되고, 급기야 1910년에는 종2품 홍문각 제학에 추증되면서 문경(文敬)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이는 조선왕조가 망하기 한 달 전 일인데 노론이 앞세운 예학이 권력투쟁의 선봉에 있었음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사계 김장생

  장자는 “도(道)와 인(仁)은 원통 자재한데 모난 데를 깎아 둥글게 하다 보면 더욱 모가 난다”라고 말한다. 예도 마찬가지여서 부족하다고 더욱 받들면 본질이 사라지고 형식만 남는다. 조선의 예법도 이런 길을 걸었다. 이는 당쟁에 앞장선 선비들이 저지른 모순된 행동이다.

  이런 모순됨이 과거로만 제한될까. 지금 정치권에서도 ‘예법’이 ‘이념’으로만 바뀌었을 뿐 이런 모순됨을 끝없이 만든다. 오로지 옳고 그름의 잣대로 판단하기에 극단적 주장만이 활개를 펴서이다. 모난 데를 깎아 둥글게 하려다 더 모난 원을 만드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심학산


  구봉산 정상에서 한강 하류로 굽이쳐 흐르는 물길을 바라보면서 물의 여유로움과 원만함으로 내 마음이 넉넉해진다. 그러면서 송익필은 어떠했을까 하는 의문도 좀체 가시지 않는다.

​                                                              < 참고문헌>


  1. 김정탁, "지략 뛰어난 조선의 제갈공명, 권력투쟁 불씨 뿌려", 중앙일보, 2022.3.18일자. 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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