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우암 송시열 선생 탄생 413주년을 경축하며

신상구 | 2020.12.31 02:26 | 조회 3101

                                                   [특별기고] 우암 송시열 선생 탄생 413주년을 경축하며
            

    


    

        
                
                    
 
                    
                    
신상구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국학박사, 시인, 문학평론가)
신상구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국학박사, 시인, 문학평론가)

2020년 12월 30일은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문신이자 유학자인 우암 송시열 선생이 탄생한지 413주년이 되는 경사로운 날이다.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1607-1689년)은 1607년(선조 40년) 12월 30일 충북 옥천군 이원면 구룡촌 외가에서 은진 송씨 송갑조(宋甲祚)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은진(恩津). 아명은 성뢰(聖賚). 자는 영보(英甫), 호는 우암(尤菴) 또는 우재(尤齋)이다.

봉사(奉事) 구수(龜壽)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도사(都事) 응기(應期)이고, 아버지는 사옹원봉사(司饔院奉事) 갑조(甲祚)이다. 어머니는 선산 곽씨(善山郭氏)로 봉사 자방(自防)의 딸이다.


               국보 제239호 송시열 초상. 사진=신상구 소장 제공/굿모닝충청 황해동 기자       
                                                                  국보 제239호 송시열 초상

   우암 송시열은 어려서부터 총명해 세 살에 스스로 문자를 알았고, 7세에 형들의 글 읽는 소리를 듣고 이를 받아썼다 한다. 아버지는 항상 주자는 공자의 후계자요 율곡은 주자의 계승자임을 강조하면서 송시열에게 주자를 열심히 배우라 권했다.

   이후 8세가 된 송시열은 이종인 송이창(宋爾昌)의 문하에서 그의 아들 송준길(宋浚吉)과 함께 학문을 닦기 시작했다. 두 사람이 후일 평생 뜻을 같이한 계기가 이때 마련된 것이다. 12세 때에는 아버지로부터‘격몽요결(擊蒙要訣)’·‘기묘록(己卯錄)’ 등을 배우면서 주자(朱子)·이이(李珥)·조광조(趙光祖) 등을 흠모하도록 가르침을 받았다.

송시열 시문집‘송자대전’. 사진=신상구 소장 제공/굿모닝충청 황해동 기자
                                 송시열 시문집‘송자대전

우암 송시열은 1625년(인조 3) 19세 때에 도사 이덕사(李德泗)의 딸과 결혼했고, 22세 때에 아버지를 여의었다. 삼년상을 마친 뒤, 충남 연산에 은거하던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의 문하에 들어가 수학했다.

우암 송시열은 27세 때인 인조 11년인 1633년에 생원에 장원급제하여 봉림대군(추후 효종)의 사부를 역임하고 인조, 효종, 현종, 숙종 네 임금을 모시며 이조판서, 우의정 두 차례, 좌의정을 역임한 정통관료로 사색당쟁의 주역으로 활약해 조선왕조실록에 이름이 무려 3,000번이나 올랐다.

한편 우암 송시열 선생은 동방 18현 중의 한 사람으로 공자(孔子), 주자(朱子), 정몽주(鄭夢周), 조광조(趙光祖), 송익필(宋翼弼), 이황(李滉), 이이(李珥), 조헌(趙憲), 김장생(金長生), 김집(金集)으로 이어지는 기호학파의 학통을 이어받아 조선 후기의 지배적인 정치·철학·사회사상인 이기일원론(理氣一元論)을 확립한 당대 최고의 성리학자이다. 우암 송시열 선생의 성리학의 핵심은 직(直)과 예(禮)이다.

송시열 선생이 성리학을 연구하면서 제자들을 양성하던 암서재 전경. 사진=신상구 소장 제공/굿모닝충청 황해동 기자
송시열 선생이 성리학을 연구하면서 제자들을 양성하던 암서재 전경


    우암 송시열 선생은 공자와 주자를 잇는 ‘송자(宋子)’로, 산림(山林)의 종장으로, 북벌과 예치를 국가 대의로 내걸고 시대를 이끌어간 대로(大老)로 추앙되었고, 사후에는 학덕으로 문묘와 70여 개의 사우에 배향되는 최고의 영광을 누렸다. 그래서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은 송준길(宋浚吉), 이유태(李惟泰), 윤선거(尹宣擧), 유계(兪棨) 선생과 함께 '충청오현'으로 꼽히고 있다.

        

   우암 송시열은 문학에 대한 열정이 대단하고 문장력이 뛰어나 일평생 한시 860여 수와 역사적 유명인사 묘비 600편을 남겼고, 서예론과 여성교육론에도 조예가 깊었다. 대표적인 저서로는 ‘주자대전차의’, ‘주자어류소분’, ‘송자대전’ 등을 들 수가 있다.

    우암 송시열의 수제자로는 수암(遂菴) 권상하(權尙夏), 장암(丈巖) 정호(鄭澔), 노봉(老峯) 민정중(閔鼎重), 농암(農巖) 김창협(金昌協), 명재(明齋) 윤증(尹拯) 등을 들 수가 있다.

송시열 선생 탄생 413주년를 기리는 숭모제. 사진=신상구 소장 제공/굿모닝충청 황해동 기자
송시열 선생 탄생 413주년를 기리는 숭모제

   우암 송시열 선생이 7군데 생거지, 6군데 적거지, 인생 만년에 22년간 거주하던 화양구곡에 남겨 놓은 유물과 유적은 관광자원과 창의융합교육 자료와 한국과 중국의 문화와 관광교류를 활성화하는 매개체로 활용되고 있다.

특히 대전광역시 동구 우암사적공원에 마련된 유물관에는 우암 송시열 선생의 영정과 인장, 효종이 우암에게 북벌을 당부하며 하사했다는 담비털옷, 글씨와 장서 등 그 당시 역사적 배경을 살필 수 있는 것들이 전시되어 선생의 흔적을 쫓아 사적공원을 찾은 이들의 눈길을 끌고 있다.

   우암 송시열 선생은 서인 중에서 강경파였던 노론 세력의 중심인물로 고집불통이고 독선적인 당쟁의 화신이라는 부정적인 평가를 받아 초당적인 존숭을 받지는 못했다. 그러나 우암 송시열 선생의 검소하고, 예의 바르고, 부모님께 효도하고, 상부상조하고, 학문을 숭상하는 참선비적 삶과 산림활동은 오늘을 사는 우리 모두에게 상당한 귀감이 되고 있다.

   우암 송시열 선생은 26세까지 구룡 마을에서 살아서 생가 터에 충청북도 기념물 제45호인 유허비가 건립되었다.

옥천군과 옥천문화원은 그의 생일인 음력 11월 12일을 전후해 해마다 구룡마을에서 숭모제를 열고 있다. 탄생 413주년을 기리는 숭모제는 지난 2020년 11월 16일 그의 고향인 옥천군 이원면 용방리 구룡마을에서 지역 유림과 은진 송씨 후손 등 3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엄숙하게 거행되었다.

   국립청주박물관이 우암 송시열 선생 탄신 400주년을 기념하여 2008년 1월 청명관에서 우암 송시열 선생 기획 특별전시를 열고, 대전광역시 동구청과 동구문화원이 해마다 10월 말에 우암사적공원에서 우암 송시열의 높은 학덕과 대의를 기리는 우암문화제를 개최하고 있어 언론의 주목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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