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대주의로 사익 추구, 개혁 막아 망국길 걸어

신상구 | 2020.11.06 05:38 | 조회 3221


                                                             사대주의로 사익 추구, 개혁 막아 망국길 걸어


   조선 후기 지배 당파 노론의 영수 송시열(宋時烈:1607~1689)은 청주 화양동에 명나라 신종과 의종을 모시는 만동묘(萬東廟)를 세우게 했다. 신종은 임진왜란 때 군사를 보냈고, 의종은 명나라 마지막 임금이다. 송시열의 제자인 민정중(1628~1692)이 베이징에 갔다가 의종이 쓴 ‘비례부동(非禮不動)’이란 유필(遺筆)을 구해 왔는데, 송시열은 그 글자를 본떠 바위에 새기고 원본은 만동묘 곁에 있던 환장암(煥章庵)에 보관하게 했다.
   조선 후기 구수훈이 지은 ‘이순록(二旬錄)’에는 환장암에 주석하던 승려는 만동묘를 지나는 사대부의 거동만 봐도 당색을 맞췄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만동묘에서 몸을 굽히면서 극도로 존경하는 태도를 보이면 노론(老論), 만동묘를 바쁘게 지나가면 소론(少論), 만동묘에 근신하는 뜻이 없으면 남인(南人), 존경하는 뜻이 없고 바쁘게 지나가지도 않는 자는 소북(少北)이란 것이다.
   조선 후기 사대부의 무덤에 쓴 묘비명을 봐도 당파를 맞출 수 있다. ‘유명조선(有明朝鮮)’으로 시작하는 묘비는 노론 계열의 무덤일 확률이 높다. 송시열의 묘비는 ‘유명조선좌의정’으로 시작한다. 유명(有明)은 명나라에 속한 제후국이란 뜻이니 송시열이 명나라 제후국 조선에서 좌의정을 지냈다는 뜻이다. 반면 소론이었던 강화학파의 대부 정제두(1649~1736)의 묘비는 ‘조선의정부우찬성’으로 시작한다. 조선국의 의정부 우찬성을 지냈다는 뜻이다. 같은 소론이었던 박세당(1629-1703)의 묘비도 ‘조선숭정대부행이조판서’로 시작해 독립국인 조선국의 숭정대부인 이조판서를 지냈다고 썼다.
   노론의 전신인 서인은 광해군이 후금(청나라)과 명나라 사이에 등거리 외교를 한다는 이유로 인조반정(1623)을 일으켰다. 서인은 임진왜란 때 망할 뻔한 나라를 명나라가 군사를 보내주어서 살아났다면서 재조지은(再造之恩)이라고 높였는데 이를 배신했다는 논리였다. 문제는 송시열을 비롯한 노론 사대부들이 ‘유명(有明)’ 운운할 때는 명나라가 이미 망한 후였다는 점이다. 이미 망한 명나라를 추종하던 이들은 만주족의 청나라가 중원을 차지해서 중원의 중화가 무너졌으니 조선이 중화를 계승한다는 소중화(小中華)를 자처했다. 강대국 중심 국제 질서를 따르겠다는 나름대로의 실용주의 노선인 사대주의가 이미 망한 명나라를 사모하는 극도의 사대주의인 사대모화(事大慕華)로 전락했다. 몸으로는 매년 청나라에 사신을 보내면서도 마음 속으로는 망한 명나라를 섬겼다. 이런 노론의 마지막 당수가 나라를 일본에 팔아먹은 이완용이니 결국 이들의 사대모화는 정권 유지 수단임을 잘 알 수 있다.
   사대주의 자체가 정권 유지 수단이니 정파의 이익을 국익보다 앞세우게 된다. 권력은 이들의 사익 추구 수단이었고 민생은 뒷전이었다. 인조반정 이후 조선은 임금이 약하고 신하는 강한 군약신강(君弱臣强)의 나라로 전락했다. 노론 정파의 이익에 반하는 개혁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노론은 명나라 황제를 섬긴다는 명목으로 조선왕을 제후라고 압박하면서 모든 개혁을 막았으니 종국에는 나라가 망할 수밖에 없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2대 대통령 박은식(1859-1925) 선생은 조선이 왜 망했는지를 깊게 성찰했다. 그 결과 유학의 중화 사대주의 때문에 망했다는 결론에 도달하고 ‘꿈에 금나라 태조를 뵙고 절하다’는 뜻의 ‘몽배금태조(夢拜金太祖)’을 썼다. 노론에서 오랑캐라고 업신여겼던 만주족 금나라 시조 아골타를 뵙고 절했다는 뜻이니 노론으로서는 상상도 못할 인식의 전환이었다. 이 글에서 박은식 선생은 조선 유학의 종장이 중화를 섬긴 만큼 조선을 섬겼다면 나라가 망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갈파했다. 극심한 사대모화가 망국의 근본 원인이라는 지적이다. 박은식 선생 자신은 저명한 유학자였지만 나라가 망하는 지경에 이르자 사대모화에서 벗어나 단군을 대황조라고 높이며 평생을 대일항쟁에 헌신했다.
   모화사상이 지배이념일 때는 ‘유명조선’으로 시작하는 묘비를 세운 선조가 가문의 영광일 수 있었겠지만 지금 이를 자랑으로 여길 수는 없다. 막중한 국사를 결정하는 직위에 있는 사람은 개인과 정파의 이익이 아닌 국익을 먼저 생각해야 역사의 평가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 광복 후 우리나라는 남북 분단, 6.25 전쟁, 군부 독재, 민주화 투쟁 등 수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이런 과정에서 주변 강대국의 영향을 받았다. 이제 세계 10대 경제 대국이 됐고, 민주화도 이룩했다. 그러나 주변 강대국의 영향력은 여전하다. 우리와 주변 강대국 이익이 일치할 수 있지만 상충할 수도 있다. 빛나는 역사에서 희망을 보고 고난의 역사에서 교훈을 얻는 지혜가 필요하다. 앞으로는 유미국(有美國) 유중국(有中國) 유일본(有日本) 등으로 시작하는 묘비를 세우고 싶은 사람이 없어야 한다.
                                                                                      <참고문헌>
   1. 허성관, " 유명조선(有明朝鮮)과 조선국(朝鮮國) ", 국제신문, 2020.10.28일자.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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