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보안법의 단초가 된 '여순사건'의 비극

신상구 | 2020.11.10 02:12 | 조회 3357


                                                               국가보안법의 단초가 된 '여순사건'의 비극


여순사건으로 희생된 가족의 시신을 확인하고 울고 있는 여인들. 칼 마이던스 미국 기자의 사진을 여수지역사회연구소가 2019년 '라이프 타임'지와 협의해 책으로 엮어 공개했다.


   여수·순천(여순)과 제주. 모두 남쪽에 있는 대표적인 관광지다. 남해를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 보고 있지만 별다른 관계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 않다. 이 두 지역은 한국현대사에 아주 밀접하게 관련돼 있다. 두 지역의 대표적 비극인 제주의 4·3과 ‘여순사건’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이기 때문이다.

   “애국병사 여러분! 우리가 총부리를 같은 형제인 제주도민에게 겨뤄서야 되겠습니까? 우리는 동족상잔과 제주도 출병을 결사반대해야 합니다.” 1949년 10월 19일 밤, 제주도 출병을 위해 대기하고 있던 여수 14연대 병사들은 갑자기 들려온 비상나팔 소리에 연병장으로 달려 나왔다. 이들에게 연단에 선 한 하사관이 기염을 토했다. 역사적인 ‘여순사건’이 시작된 것이다.


여수의 형제묘 근처에 세워진 여순사건 희생자 위령비. 소녀 그림 옆에 쓰인 '아 여순이여!"라는 글이 가슴을 친다.


여순의 비극은 제주 4·3에서 시작됐다. 제주에서 1948년 4월 3일 좌파들이 이승만 정부의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단독선거에 저항해 들고 있어났다. 이승만 정부는 이를 진압한다며 제주도민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하는 작전에 나섰고, 14연대에게 제주도로 출동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에 지창수 상사 등 14연대에 침투해 있던 남로당 당원들은 무장봉기를 일으켰다. 이들은 가담 거부 지휘관들을 사살하고 시내로 나가 여수시를 장악한 뒤 항쟁 이유를 대대적으로 알렸다. 일부 좌익 청년들은 “친일파, 민족반역자, 경찰관을 철저히 소탕한다”며 인민재판을 통해 일제 강점기부터 자신들을 괴롭혔던 경찰을 비롯해 부자, 목사 등 우익세력을 처단했다.


주력부대는 순천으로 진격해 친일 경찰 등을 처형했다. 여수에서 약 150명이, 순천에서는 경찰관 70명 등 900여명이 학살당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들은 순천에서 지리산으로 들어갔다. 빨치산의 원조인 ‘구빨치’의 주력군이 탄생한 것이다. 이 봉기와 처형은 남로당 중앙과는 무관한 돌출행동이었다. 소식을 들은 지리산의 빨치산 사령관 이현상은 이 같은 처형을 "당적 오류이자 죄악“이라고 비판하고 이후 민간인은 물론 교전이 아닌 이상 포로로 잡은 군인이나 경찰도 죽이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


김종원부대에 학살당한 125명을 함께 묻고 형제처럼 잘 지내라고 '형제묘'라고 이름을 붙였다.


놀란 이승만 정권은 여순 지역에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대규모 진압군을 파견했다. 여순의 ‘진짜 비극’은 여기에서 시작됐다. 진압군, 그리고 살아남은 경찰들과 서북청년단 같은 우익단체들이 잔인한 피의 복수를 전개한 것이다. 이들은 여수, 순천 시민들을 모아놓고 부역자를 색출한다며 무차별로 양민을 학살했다. 특히 ‘백두산 호랑이’라고 불리기를 좋아했던 ‘살인마’ 김종원 대위가 악명 높았다. 그는 군사작전에는 무능하면서도 양민학살에는 잔인하기 이를 데 없어서 ‘학살에는 귀신, 작전에는 등신’이라고 불릴 정도였다.


일본군으로 동남아에서 전투에 참가했던 그는 진압군을 데리고 여수에 상륙하려다가 잘못된 작전으로 실패했다. 2차 공격 때도 포격장소를 잘못 지시한 결과 자기 부하들을 폭격해 다수 죽였으며 여수 시내에 대화재까지 냈다. 연이은 실패에 화가 난 그는 초등학교에 젊은이들을 모아놓고 일본도로 무차별하게 목을 베는 등 광란의 복수극을 벌여 주민들의 치를 떨게 했다.


한 자료는 이 같은 민간인 학살이 6,000명에 달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정확자 수는 알 수 없지만, 확실한 것은 진압군이 ‘반란군’보다 훨씬 많은 민간인을 학살했다는 것이다. 게다가 여순 주민들은 자신들이 아니라 여수 주둔군이 ‘봉기’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여수와 순천 사람들이 ‘반란’을 일으킨 것처럼 ‘여순반란’이라는 빨갱이 누명을 쓰고 수십년을 살아야 했다.


'살인마' 김종원 대위가 여수주민들을 모아놓고 광란의 복수극을 벌린 중앙초등학교 앞에는 그의 만행을 고발한 설명판이 설치되어 있다.


다행히 진실화해위원회(진화위)는 2009년 진압군이 협력자를 색출한다는 이름 아래 즉결처분을 남용해 사실상 양민을 학살했다며 정부의 사과와 유족의 명예회복 및 위령사업지원을 권고했다. 일부는 이를 근거로 정부를 상대로 피해배상소송을 제기해 배상을 받았다. 그러나 그 수가 유족과 관련단체들이 주장해온 희생자 수보다 턱없이 부족해, 이들은 국회에서 입법이 끝난 제2기 진화위 조사에 희망을 걸고 있다. 또 제주 4·3이 특별법 제정을 통해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이 이뤄지고 국가추념일까지 지정된 것처럼, 여순사건도 특별법 제정이 필요하다고 요구하고 있다.


여순사건은 중요한 유산을 우리에게 남겼다. 첫째 국가보안법과 극단적인 반공주의이다. 여순을 계기로 이승만 정권은 반공체제를 강화하는 한편 비상계엄 하의 비상조치로 국가보안법을 제정했다. 이 법은 70년 이상이 지난 지금까지도 우리를 옥죄고 있다. 두 번째는 박정희다. 일본군 장교로 근무하다 일제가 패망하자 귀국 후 국군에 입대한 그는, 구미 지역 남로당의 핵심으로 1946년 대구 10월 항쟁 때 사살당한 형 박상희와 관련해 남로당에 가담했다가 여순사건 후 군내 좌익색출작업에 걸려 사형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군내 남로당 명단을 속속들이 자백하고 같은 일본군 출신인 백선엽 등의 구명운동 덕으로 목숨을 구한 것은 잘 알려져 있다. 그는 이 사건으로 군복을 벗고 민간인 신분으로 군에 근무하다가 한국전쟁 때 군에 복귀한 뒤 훗날 5·16쿠데타를 일으키게 된다. 박정희는 여순 때문에 전향했고, 그 결과 한국현대사가 달라지게 된 것이다.


진압군의 주둔지였던 순천대학교. 당시의 민간인 학살지에 팻말(오른 쪽 끝)이 세워져 있다.


여수엑스포를 지나 북쪽으로 올라가면 마래터널이 나온다. 이 터널을 지나면 오른쪽으로 파란 여수바다가 나타나는데 바다를 즐기기도 전에 바로 왼쪽에 형제묘라는 표시판이 보인다. 표시판을 따라 조금 올라가면 작은 무덤 앞에 ‘형제묘’라고 쓰인 작은 비석을 만나게 된다. 이 작은 묘가 무려 125명 형제들의 무덤이다! 김종원 부대가 부역자로 분류한 125명을 이 곳으로 데려와 집단 학살한 것이다. 시신을 찾을 수 없게 된 유족들은 이들이 “죽어서라도 형제 같이 지내라”는 뜻으로 ‘형제묘’라는 이름을 지어줬다고 한다. 근처 작은 희생자 위령비에 그려 있는 한 소녀 옆의 글귀처럼, ‘아 여순이여!’

여수 중앙초등학교 정문 앞에는 커다란 표시판에 이곳 운동장에서 벌어진 김종원의 만행을 자세히 고발한 글이 쓰여 있다. 이 앞을 지나 등교하는 학생들은 글을 읽으며 무슨 생각을 할까. 김종원이 진압군을 이끌고 상륙하려다 실패한 신항에는 이에 대한 이야기가 설명돼 있다. 왼쪽으로 구부러져 인구부라고 부르는 언덕에는 송호상 진압군총사령관이 진격해 오다가 14연대군의 저격으로 부상당해 차에서 떨어지는 등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사연을 잘 설명해 놓았다.


순천 팔마실내체육관 뒷편에 설치되어 있는 '여순항쟁탑'. 여순의 명칭논쟁과 관련해, 항쟁이란 표현이 눈길을 끈다.


반란군이 지리산으로 들어가기 위해 지나간 순천에도 곳곳에 비극의 현장들이 남아있다. 반란군이 기차를 타고 진격해온 순천역은 이제 KTX가 지나가는 고속철역으로 변모했다. 반란군과 진압군의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던 순천교에선 한 할머니가 무심하게 다리를 건너고 있었다. 순천에서도 학살 장소는 주로 초등학교였다. 사람들을 모을 운동장이 있어서였다. 부역자를 심사했던 북초등학교에는 그 같은 사연을 모르는 어린 학생들의 밝은 미소가 넘치고 있다. 여기서 멀지 않은 순천대는 진압군이 주둔하며 많은 시민들을 고문, 취조한 곳으로 대학본부 뒤편의 학살지에는 이를 설명한 기념판이 설치돼 있고 그 옆에는 여순연구소가 있다. 순천은 단순한 추모를 넘어 ‘항쟁탑’을 세웠다. 팔마실내체육관 뒤편에선 커다란 탑이 나를 맞았다. 2006년 세워진 이 탑의 왼쪽에는 사건의 개요를, 오른 쪽에는 명예회복을 위한 역사적 과정과 과제들을 쓴 표시석이 설치돼 있다.


눈길을 뜨는 것은 ‘여순항쟁탑’이라는 명칭이다. ‘여순항쟁’이라는 표현을 써야한다는 측은 5·18 광주 민주화운동을 언급한다. 일선부대가 시민들에게 총을 쏘라는 지시에 항명하고 봉기했다면 그것이 ‘정당한 항쟁’이듯, 죄 없는 제주민에게 총을 겨누는 것을 거부했으니 여순도 ‘항쟁’이라는 것이다. 일각에선 ‘여순반란’은 말이 안 되는 표현이지만 여순항쟁 대신 ‘여순사건’이라고 불러야 한다고 주장한다. 여순 봉기가 ‘여순시민’들이 아니라 ‘여수주둔군’의 항쟁이었고 이들이 기독교도 등 무고한 민간인들을 적지 않게 학살했기 때문이라는 이유에서다. 보다 심도 깊은 논쟁이 필요한 문제다. 다행스러운 것은 지난달 19일 사건 72년 만에 민·관·군·경과 피해자의 유가족들이 처음으로 모두 한자리에 모여 합동추모식을 올렸다는 사실이다.

                                                                                         <참고문헌>

   1. 손호철, "국가보안법의 단초가 된 '여순사건'의 비극", 한국일보, 2020.11.9일자.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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