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재논쟁

신상구 | 2021.05.06 18:07 | 조회 6995


                                                                                            독재논쟁

 

    "우리를 괴롭히는 것은 우리가 모르고 있는 것들이 아니다. 우리를 괴롭히는 것은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것들이다." 미국 경영학자 프리츠 로슬리스버거의 말이다. 이는 기업경영에서뿐만 아니라 보통사람의 인간관계, 더 나아가 정치적 갈등에도 타당하다. 특히 오해에 의한 싸움만큼 비극적인 것도 없으니 말이다.


    언제부턴가 야당은 문재인 정권을 향해 '독재'라는 비판을 하기 시작했다. 반(反)독재 투쟁을 한 민주화 투사들이 실세인 정권을 향해 그런 말을 하다니, 그게 말이 되는가?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독재'의 개념을 재정의하면서 타당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들 사이에 빚어진 상호 오해는 풀리지 않은 채로 정치적 공방 속에 묻히고 말았는데, 지난 4월 9일 유시민 노무현재단 이사장이 이 문제를 거론하고 나섰다.

     유 이사장은 유튜브 방송 '알릴레오'에서 미국 하버드대 교수 스티븐 레비츠키와 대니얼 지블랫의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를 소개하면서 "야당이 민주주의가 무너졌다, 독재라고 하는데, 어떤 기준과 판단으로 현 한국 정부를 민주주의 위기라고 하는지 (이 책을 읽고) 약간 이해가 됐다"고 말했다. "이 책이 한국 정부에 대한 것은 아니지만, 이걸 읽다보면 어떤 맥락에서 (야당이) 그러는지, 국민의힘을 이해하는데 아주 이해가 됐다"는 것이다.

     물론 유 이사장은 야당 비판을 위한 서론 격으로 이 말을 한 것이지만, '독재' 개념을 둘러싼 오해를 풀 수 있는 물꼬를 터주었다는 점에서 반갑고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특히 민생을 돌보는 선의의 경쟁을 하면서 협치를 지향하는 정치를 위해서 말이다.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라는 책의 관련 내용을 좀 살펴보기로 하자.

    저자들은 노골적인 형태의 독재는 전 세계적으로 점차 종적을 감추고 있지만, "오늘날 민주주의 붕괴는 다름 아닌 투표장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한다. 미국에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재임 중에 벌어진 정치적 아수라장을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이들이 왜 독재의 개념을 재정의하려는 시도를 했는지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게다.

     이 책은 민주주의를 수호하는 핵심 규범으로 성문화된 규칙보다 '상호 관용'과 '제도적 자제'를 꼽으면서 탄탄한 역사적 증거들을 제시한다. 그간 우리가 이해해 온 독재는 성문화된 규칙 중심이었던 바, 문 정권을 독재로 보는 건 저질의 정치공세로 여겨지기 십상이다. 그러나 '상호 관용'과 '제도적 자제'를 독재 판별의 근거로 삼는다면 이야기는 좀 달라진다.

     저자들은 "상호 관용이란 정치 경쟁자가 헌법을 존중하는 한 그들이 존재하고, 권력을 놓고 서로 경쟁을 벌이며, 사회를 통치할 동등한 권리를 갖는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는 개념"이라며 이렇게 말한다. "물론 경쟁자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거나, 그 주장을 혐오할 수 있다. 그럼에도 그들을 정당한 존재로 인정해야 한다. 경쟁자가 올바르고, 국가를 사랑하고, 법을 존중하는 시민임을 인정해야 한다. 다시 말해 그들 역시 우리와 마찬가지로 나라를 걱정하고 헌법을 존중한다고 가정하는 것이다. 비록 그들의 생각이 어리석고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해도, 그들을 위협적인 존재로 바라보지 않는 것이다."

    저자들은 '제도적 자제'를 '지속적인 자기통제, 절제와 인내', 혹은 '법적 권리를 신중하게 행사하는 태도'로 정의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또한 법을 존중하면서도 동시에 입법 취지를 훼손하지 않는 자세를 말한다. 자제 규범이 강한 힘을 발휘하는 나라에서 정치인들은 제도적 특권을 최대한 활용하려 들지 않는다. 비록 그게 합법적인 테두리 안에 있는 것이라고 해도 기존 체제를 위태롭게 만들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자, 어떤가? 꼭 문 정권을 염두에 두고 한 말 같지 않은가? 제19대 대선에서 문 대통령이 얻은 득표율은 41.08%에 불과했지만, 이에 어울릴 법한 관용과 자제는 없었다. 제21대 총선은 의석 수 기준으론 더불어민주당이 거의 더블스코어 압승을 거두었지만, 지역구 득표율은 더불어민주당 49.9%, 미래통합당 41.5%로 두 정당의 격차는 8.4% 포인트에 불과했다. 이 작은 차이에 어울릴 법한 관용과 자제 역시 없었다.

     오히려 문 정권은 야당을 일방적으로 밀어 붙이는 게 '준엄한 촛불 민심'이라며 인사에서부터 입법에 이르기까지 일방적인 독주를 감행했다. 야당 지지자들도 적잖이 포함돼 있는 '촛불 민심'을 그렇게 자의적으로 독식하면서 편의적으로 해석하는 건 파렴치한 행위라는 문제의식조차 없었다. 착하고 선하고 인자하다는 문 대통령의 얼굴이 관용과 자제의 이미지는 풍겼는지 몰라도 문 정권의 정치 행태는 이른바 '헌법적 강경 태도' 일변도였다.

     저자들의 해설에 따르자면, "이 말은 규칙에 따라 경기에 임하지만, 규칙의 테두리 안에서 최대한 거칠게 밀어붙이고 '영원히 승리를 빼앗기지 않으려는' 태도를 의미한다. 이러한 접근방식은 민주주의라고 하는 경기가 계속 이어질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걱정하지 않고, 오로지 정치 경쟁자를 없애버리기 위한 전투 자세다."

    문 정권의 강성 지지자들, 그리고 이들의 인정을 받으려고 애쓰는 여권 정치인들의 언행은 야당을 정당한 경쟁자로 인정하지 않으면서 수시로 비난하고 모욕하는 독선과 오만 그 자체였다. '민주주의'와 '정의'의 이름으로 말이다. 나는 문 정권을 독재로 부르고 싶진 않지만, 그렇게 무시와 모욕을 당한 야권이 문 정권을 독재(연성 독재)라고 부르는 것엔 나름의 근거가 있다고 생각한다.

     만약 문 정권 사람들이 야당의 분노를 '정권 발목잡기'를 위한 악의적인 것으로만 이해하고 있다면, 부디 이 책을 읽으면서 관용과 자제의 필요성을 느껴보면 좋겠다. 지난 4·7 재보궐 선거의 패배도 그런 관점에서 이해해야 한다. 야당도 마냥 큰소리를 칠 입장은 아니다. 야당 역시 집권 시절에 저질렀던 '헌법적 강경 태도'에 대해 성찰하면서 관용과 자제의 자세를 가져야 한다. 양쪽 모두 행여 이미 늦었다고 할 게 아니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는 말은 이 경우에도 유효하다. 과거에 대한 복수의 악순환은 이제 끝장내야 한다. 여야 정당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국민과 나라를 위해서다.

                                                                                           <독재논쟁>

    1. 강준만, "독재논쟁을 어떻게 볼것인가", 충청투데이, 2021.5.4일자.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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