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종 리더십

신상구 | 2021.07.13 12:47 | 조회 3763


                                   태종 리더십

   “이 정권이 끝날 무렵 우리나라 사람은 태종을 그리워하게 될 거예요. 태종을 지금 연구하는 것은, 말하자면 미리 가서 길목을 지키는 것과 같아요.” 얼마 전에 만난 지인의 얘기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장차 태종을 그리워하게 될 거라는 말인데, 대체 태종의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얼핏 떠오르는 것은 ‘위기 돌파 리더십’이다. 태종은 왕위에 오르기 전에 다섯 번가량 큰 위기를 만났다. 1388년 5월 위화도 회군 때부터 1400년 1월 ‘제2차 왕자의 난’(이방간의 난)까지 12년 동안 곤경에 처할 때마다 이방원은 노련한 외과 의사처럼 위험 요소를 제거하여 사태를 반전시켰다. 하지만 그가 정몽주와 정도전 등 정적을 척살하는 과정에서 보인 결단과 실행력은 감탄할지언정 우리가 그리워할 대상은 아니다.

   재위 말년에 세자 교체를 단행하고 66일 만에 전격적으로 왕위를 물려준 다음, 세종의 정치 멘토로 말년을 보낸 것 역시 세계 역사상 찾아보기 힘든 사례다. 하지만 우리 국민들이 그런 리더십을 바라는 건 아닐 것이다. 그보다 더 중요한 태종의 리더십이 있는데, 그것은 기강을 바로 세워 ‘나랏일이 돌아가도록 만드는’ 리더십이다.

   강거목장(綱擧目張), ‘벼리[綱]를 들어 올리면 그물눈[目]이 저절로 펼쳐졌다.’ 세종이 평가한 태종 시대 국정 운영 모습이다. 나라 구성원들에게 일일이 지시하거나 설득하지 않고도 태종은 어떻게 스스로 움직이게 만들었을까? 그 비결은 각자 장점을 발휘하는 나라를 위한 기초 세우기에 있다. 태종의 표현대로 ‘가족같이 화합하고 잘사는 나라’, 즉 ‘소강(小康)의 나라’를 만들려면 무엇보다 나라 기강 정립이 우선되어야 했다.(태종실록 7년 4월 18일)

   이를 위해 태종은 우선 인재를 뽑고 배치하고 보호하는 데 온 마음을 기울였다. 재위 기간 18년 내내 과거시험 제도를 개선했고, 신상필벌(信賞必罰)로 공직 기강을 바로 세우려 노력했다. ‘태종실록’을 보면 20여 차례 인재 선발 및 처우 개선 조치를 취했다. 사병 혁파 뒤 나라에서 역점을 뒀던 13차례의 군제 개혁 및 군 기강 정립 조치보다 더 많다.

   인재 보호를 위해 태종은 모든 관리가 대간(臺諫·사헌부와 사간원) 동의를 받는 서경(署經) 절차를 거쳐야 한다는 신하들의 요구를 거절했다. 그럴 경우 유능한 인재를 쓸 수 없게 만든다는 게 태종의 판단이었다. “성질이 까다롭고 급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인부를 재촉했기 때문에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모두 괴롭게 여긴” 목수 박자청은 물론, 훗날 ‘태종 재상 3인방’ 중 한 명인 조준조차 과거 정도전과 가까웠다는 이유로 서경을 통과 못해 쩔쩔맸다. 태종의 노력이 없었더라면 장차 세종 시대를 이끌어갈 숱한 인재들도 길거리에 버려져 있었을 것이다.

   태종은 또 언로 개방을 중시했지만 언관에 휘둘리지 않았다. 그가 생각하는 언관의 역할은 “권력을 사사롭게 쓰려는” 외척 등 권세가를 견제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당시 언관들은 국정을 농단하려 드는 권세가 견제는 하지 않고, 민생과 무관한 뜬소문에 휘둘리고 있다는 게 태종의 판단이었다. 일의 득실(得失)을 살피지 않고 허황한 이념 논쟁에 골몰하거나 말 자체를 위해 말하는 사람, 왕에게 간언했다는 명성을 얻으려[釣名·조명] 왕명을 거역하거나, 권력에서 밀려난 자에게 몰려가 짓밟는 듯한 언행을 경멸했다.(태종실록 1년 9월 21일)

   태종은 백성 눈치 보며 나랏일 못하는 관리도 멀리 했다. “백성에게 편리한 대로만 하려 하면[皆欲便於民] 세금 거두는 일 등을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라면서 태종은 “하는 일이 바르면” 결국 백성들도 믿고 따를 터이니 각자 맡은 책무를 수행할 것을 강조했다.(태종실록 17년 10월 23일)

   태종의 국가 기강 바로 세우기는 한마디로 말과 일의 질서를 세워 나랏일이 돌아가게 하는 정치로 요약된다. 정치가는 물론이고 관료들조차도 인기에 영합하는 우리나라 상황에서 나라의 기강 잡기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국운이 쇠퇴해 가는 600여 년 전 태종 이방원이라는 강명(剛明)한 지도자가 나타나 사회 기운을 청신하게 만들고 국운을 융성하게 한 경험을 생각해 볼 때, 나라의 벼리에 해당하는 지도자를 뽑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새삼 생각하게 된다. 올여름 나라 곳곳에 ‘태종실록’ 읽는 분위기가 만들어지길 소망한다.
                                                         <참고문헌>
   1. [박현모, "능력으로 인재 뽑고 바른 정책은 뚝심 있게… ‘태종 리더십’", 조선일보, 2021.7.13일자. A2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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