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의 시인, 박용래 선생님께

신상구 | 2020.05.18 03:35 | 조회 3688

 

                                                                              두 번 세상을 산 듯합니다

                                                                                      ― 눈물의 시인, 박용래 선생님께

   박용래 선생님. 그동안 평안하셨는지요? 참 오랜만에 선생님 이름을 불러봅니다. 선생님 떠나신지 33년. 어느새 저는 선생님 세상 뜨시던 연세보다 훨씬 많은 나이의 사람이 되어버렸습니다. 머리카락은 다 빠져 대머리가 되었고 눈은 침침해서 돋보기를 고쳐 써도 활자가 흐려 보이는 그런 나이가 되었습니다. 글쎄 제 나이가 벌써 만으로 69세입니다. 한 해만 더 견디면 저도 이제 고희의 나이가 된다 하겠습니다. 참 이건 꿈인가 아닌가 그런 생각을 다 하게 됩니다.
   선생님 세상 뜨신 것은 1980년. 선생님이 1925년생이시니까 만으로 55세. 제가 고향 서천에서 공주교육대학교 부속국민학교로 전근 와 공주에 살기 시작하던 그 다음 해였습니다. 약주를 자시고 철도 건널목을 건너다가 지나가는 택시에 받친 일이 빌미가 되어 끝내 병상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세상을 뜨셨지요. 선생님 세상 뜨셨다기에 부랴부랴 공주사범대학교 교수로 계시던 조재훈 시인과 함께 오류동 선생님 댁을 찾던 일이 그야말로 어제만 같습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와 있었습니다. 대전이나 충남의 문인들은 물론이고 서울서도 많은 문인들이 이미 와 있어서 집안은 발을 들여놓을 틈이 없을 지경이었습니다. 아슴한 생각입니다만 선생님 댁은 슬라브 지붕 건물이었던 것 같은데 옥상에 차린 술청에도 사람들이 가득 차 있던 기억입니다. 이미 박두진 선생님이 다녀가셨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정한모, 박재삼, 박성룡, 이문구, 이근배, 이건청 선생 등이 자리에 함께 했던 기억입니다.
   선생님의 유택은 대전교외 산내 천주교인묘지. 방에서 선생님 관이 나올 때 많은 젊은 시인들이 앞 다투어 선생님을 모셨지요. 이건청 선생이 관의 맨 앞자리 끈을 잡았던 기억이고 산에 가서는 선생님 말년에 쓰셨던 침구와 집기들을 태우는 일을 이문구 선생이 맡아서 했었지요. 이문구 선생은 나무막대를 사용하여 선생님의 유품이 마지막까지 타서 재가 되도록 뒤적거리고 있었습니다. 그 손길을 보면서 선생님에 대한 이문구 선생의 존경의 일념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말씀드리고 보니 그것도 참 옛날 일이구나 싶은 생각이 듭니다. 이렇게 이름을 불러본 분들 가운데도 벌써 세상을 뜨신 분들이 많습니다. 물론 세상이 몇 번 바뀌고 말았지요. ‘10년이면 강산이 바뀐다’고 옛날 말씀에 그랬는데 이건 어쩌면 인간의 일이 10년 주기로 바뀌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선생님 가신 뒤로 우선 20세기가 나지고 21세기가 되었습니다. 수없이 많은 정치적 사회적 변혁이 있었고 문화적인 변화도 뒤따랐습니다.
   아마도 선생님 다시 오시면 전혀 딴 세상이라는 생각이 드실 것입니다. 삐삐와 핸드폰을 지나 스마트폰이란 것이 나와 카카오톡으로 소식을 주고받는 시대가 되었고 많은 문인들이 컴퓨터로 글을 쓸 뿐더러 트위터, 페이스북이란 것까지 나와 나이든 사람들까지 열광하는 세상입니다. 생각해보면 저부터 몇 세상을 거듭 산 것 같은 착각에 빠질 때가 없지 않습니다.
   그런데요 선생님. 이렇게 변한 세상 가운데서도 가장 믿음직스럽고 변하지 않는 것은 아무래도 인간의 마음이고 진정성이고 그 가운데서 꽃으로 피어나는 詩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제가 세상에 사람으로 태어나 선생님을 만난 것이 시 때문이었으며 지금껏 제가 선생님을 생각하는 사람 가운데 한 사람으로 존재하는 것도 시를 통해서이기 때문입니다. 만천하가 아는 바와 같이 선생님은 전설적인 시인이었습니다. 어쩌면 마지막 시인의 표상 같은 분이었습니다.
   선생님도 기억하시지요? ‘북에는 소월이요 남에는 목월’이란 말. 본래 이 말씀은 정지용 선생이 <문장>지에 박목월 선생을 신인으로 내보면서 쓰신 추천사의 한 구절인데 한 시절 사람들은 여기에 더하여 ‘북에는 소월이요 남에는 목월, 그리고 中都에는 용래'란 말을 하기도 했습니다. 여기서 중도란 대전을 이르는 말인데 그만큼 선생님의 시가 서정시의 본류였으며 그 핵심이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였다 할 것입니다.
   선생님 가신 뒤로 선생님 시를 가지고 대학원에서 공부하여 석사학위를 받은 사람이 여럿 나왔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어떤 연구자는 백석의 시와 선생님의 시를 비교분석하여 학위를 받았다고 하고, 박영우란 사람은 중앙대학교에서 선생님 시를 연구하여 박사학위를 받은 사실도 있다 합니다. 이것만 봐도 선생님의 시가 얼마나 인기가 있는 시이고 문학적 가치가 높은 시인가 하는 것을 알 수 있는 일이겠습니다.
   선생님 생전이나 지금이나 이 땅에 선생님 시를 좋아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은 아주 많습니다. 저도 그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선생님 생전에 내신 시집은 모두 세 권. 『싸락눈』,『강아지풀』,『백발의 꽃대궁』. 이 가운데 『싸락눈』은 선생님이 시단에 데뷔하여 13년 만에 낸 처녀시집이었지요. 그리고 『靑蛙集』은 한성기, 임강빈, 최원규, 홍희표 등 대전에서 거주하는 시인들과 함께 낸 5인 합동시집이었고요.
   제가 선생님을 처음 안 것은 바로 이『청와집』이란 공동시집이 나오던 바로 그해였습니다. 제가 그해에 《서울신문》이란 신문의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했었거든요. 제 얘기라서 쫌은 쑥스럽습니다만 실상 저의 신춘문예 등단은 사뭇 이색적인 것이었습니다. 저의 등단작품이 전혀 신춘문예 스타일이 아니었고 또 충남지역에서는 신동엽 시인의 등단 이래로 처음 있는 신춘문예 등단 시인이었기 때문입니다.
   신춘문예에서 저의 시를 심사하고 당선시키신 분은 박목월 선생과 박남수 선생이었는데 수상식이 있은 뒤 댁으로 찾아뵈었을 때 박목월 선생은 대뜸 ‘대전의 박용래란 시인에게 부탁해놓았으니 자주 찾아가 만나 시의 원고를 보여주고 공부를 하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래 저는 박목월 선생님의 말씀을 좇아 대전의 오류동에서 사시던 선생님을 찾아뵈었던 일이 생각납니다.
    그 시절만 해도 대전까지의 길이 수월치 않았습니다. 버스로 가야 했는데 살고 있던 고향 서천에서는 장항에서 배를 타고 금강을 건너 군산으로 가서 거기서 대전으로 가는 버스 편이 차라리 좋았습니다. 아마도 4월쯤이었을 겁니다. 얼음 풀리고 봄이 오고 비가 몇 차례 내려 들판에는 청렁하니 물이 고여 일렁이고 있었습니다. 논에 물을 대기 위한 수로에는 또 물이 가득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옥구들판. 군산 시내를 벗어나 함열과 황등으로 이어지는 옥구들판은 참으로 눈부시게 아름다운 새싹과 물빛의 나라였습니다. 그런 봄의 풍경을 눈빛에 담으면서 선배시인을 처음 만나러가는 어린 시인의 가슴은 더욱 눈부시고 찬란하기까지 한 것이었습니다.
   새몰새몰 눈가에 눈물이 어린다 그럴까요! 아, 그 시절 스물여섯 살의 나는 어디에 있으며 처음 만난 젊은 시인을 앞에 두고 부들부들 떨면서 술잔을 잡아 권하던 아직은 40대 중반의 박용래 선생은 어디에 계실까요? 선생님은 그 때 막 당신의 시인 생애의 황금기를 열고 계셨습니다. 선생님이 시단에 나간 것은 1956년, 31세 때. 그리고 첫 시집 『싸락눈』을 낸 것은 1969년, 44세 때. 그 해에 선생님은 명편 「저녁눈」이란 작품으로 제 1회 현대시학 작품상을 받아 한창 유명세를 타고 있었습니다.
   한동안 선생님은 잊혀진 시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첫 시집 출간과 문학상 수상이 다시금 선생님을 문인들 관심 속으로 끌어들인 것이지요. 발표되는 작품마다 월평에 오르고 평론가들의 글에 들어갔습니다. 그건 매우 눈부신 부활이었지요. 그래서 선생님은 일약 인기시인이 되었습니다. 거기다 더하여 선생님의 음주행각과 눈물은 사람들을 놀라게 했고 또 감동시키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에겐 ‘눈물의 시인’이란 닉네임이 붙게 되었지요.
   선생님은 일단 술을 자시면 눈물을 흘리며 울기 시작하십니다. 어떤 때는 술의 양보다 더 많은 눈물이 나오지 않나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그러면서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는 온갖 이야기를 하시고 또 춤을 추십니다. 반백의 시인이 옷소매로 눈물을 훔치며 덩실덩실 추는 춤. 그것은 서러운 세상의 강물을 건너가는 학춤이었습니다. 특히 한국시인협회 세미나 때마다 볼 수 있었던 그것은 특별한 연희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어쩌다 선생님이 세미나에 빠지면 시인들이 선생님을 찾곤 했지요.
   따져보면 선생님과 만나 함께 한 세월은 고작 10년. 그런데도 아주 많은 세월을 함께 했다는 그런 느낌. 이것도 하나의 매직 같은 것일까요? 선생님 돌아가신 연세와 같은 나이 55세에 선생님 이름으로 제정된 박용래 문학상을 제가 두 번째로 받았다는 사실. 이것도 한 특별한 인연일까요? 선생님 세상을 뜨신 게 강산이 세 번이나 바뀐 세월인데도 지금도 선생님이 대전 어디쯤 살고 계신 게 아닌가 하는 착각.
   선생님 알고 계시지요. 선생님 가시고 4년 뒤에 한성기 선생이 세상을 뜨시었습니다. 그리고 정한모 선생을 비롯하여 박재삼, 박성룡, 이문구 선생이 그 나라로 가시었고요. 최근에는 홍희표 시인이 또 세상을 버리고 저희들 곁을 떠났습니다. 홍희표 시인은 박사학위도 받고 대학에서 교수도 했었는데 대학에서 정년퇴임을 하자마자 바로 병을 얻어 끝내 일어서지 못하고 그렇게 되었습니다. 홍희표 시인은 생전에 선생님을 무척 따랐던 시인으로 선생님도 「산문에서」란 시를 써서 줄 정도로 절친했던 사이였지요. 어떻게 홍 시인을 만나 막걸리라도 한 사발 나누셨는지 모르겠습니다.
  홍희표 시인은 선생님 가신 뒤로도 자주 ‘용래 성님’이란 말을 하면서 『눈물점 박용래』란 시집을 내기도 했지요. 그리고 선생님의 시비가 대전 보문산 사정공원과 논산공설운동장 두 곳에 세워진 것 아시지요? 「저녁 눈」과 「겨울밤」이 각각 시비에 새겨져 있습니다. 대전에 세워진 시비는 아주 명품의 시비입니다. 조각을 역시 선생님 생전에 좋아했던 최종태 조각가가 맡았고 글씨는 김구용 선생이 썼는데 시비 제막식이 있던 날 이문구 소설가의 노력으로 선생님의 시전집 『먼 바다』가 창작과비평사에서 나왔었습니다. 그 책의 표지화는 선생님이 그리도 자랑스러워했던 따님 박연 씨가 그린 그림이구요.
   그리고 또 몇 가지 소식 전할 일이 있습니다. 그동안 설왕설래하던 대전문학관이 지난 해 12월에 개관을 했다는 소식입니다. 예전 같으면 연락이 오고 그랬을 텐데 대전과 충남이 행정구역이 갈라진 뒤로는 딴 동네처럼 되어서 연락조차 오지 않아 사후에 언론을 통해서 겨우 안 일입니다만 어쨌든 잘된 일입니다. 다섯 분의 문인이 모셔져 있다고 그럽니다. 선생님을 비롯하여 정훈, 한성기 시인과 권선근, 최상규 소설가가 그 분들입니다.
   그리고 ‘한국대표시인 100인 선집’이 다시 나온다 그럽니다. ‘한국대표시인 100인 선집’은 이미 20년도 훨씬 전인 1991년 미래사란 출판사에서 나왔던 기획입니다. 거기에 선생님의 시집이 『저녁눈』이란 제목으로 들어갔었지요. 그런데 이번에 이근배 선생이 차린 출판사인 시인생각이란 데서 다시금 ‘한국대표시인 100인 선집’을 기획 출판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엊그제 서울의 이근배 선생한테서 선생님의 유족을 찾는 전화가 왔기에 묵은 수첩에서 대전에 사는 선생님의 큰 따님 노아 씨의 전화번호를 찾아내어 통화를 했었습니다. 매우 반가워하면서 대전문학관 개관식 때 왜 오지 않았느냐 묻더군요.
   선생님. ‘사람이 죽으면 책도 죽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의 시집만은 여전히 서점에서 팔리고 있고 또 다시금 출간이 되는 걸 보면 참으로 놀랍고 감사한 생각이 듭니다. 그런 의미에서 시인은 죽어도 죽지 않는 사람이 아닌가 생각을 해봅니다. 시가 있어서 시인을 영원히 죽지 않는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겠지요. 그런데 선생님, 선생님께 한 가지 섭섭한 말씀을 드리려 하겠습니다. 그것은 박용래 문학상에 관한 것입니다.
   그 상은 대전일보사에서 제정하여 아주 말 운영되어오던 상입니다. 허만하, 서정춘, 함민복 시인, 그리고 제가 그 상을 탔지요. 상이 좋은 상인가 아닌가를 알려면 수상자의 면면을 보면 아는데 수상자들의 이름이 그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무슨 까닭인지 그 상이 중간에 폐지되었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문학상이란 것도 그렇습니다. 세상을 떠난 시인을 다시금 살아서 숨 쉬는 시인으로 만들기 위해서 문학상을 제정하고 운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왕에 만들어진 상을 없앤 일은 이유가 어디에 있든 매우 섭섭한 노릇입니다. 다시금 시작하려면 그만큼 노력이 들겠지요.
   선생님. 끝부분에 조금은 언짢은 말씀을 드렸나 봅니다. 이것은 어차피 아직 육신을 버리지 못한 저희들의 일일 뿐입니다. 부디 그 나라에서 평안히 계시기 빕니다. 한 사람 두 사람 선생님 가신 나라로 주소지를 옮기니 저도 그다지 오래는 이곳에서 버티지 못할 것입니다. 이제는 선생님을 직접 뵙고 사귀었던 사람들도 이 땅에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아직은 임강빈 선생과 최원규 선생이 대전에서 버티고 계시고 공주에는 조재훈 선생과 제가 있을 뿐입니다. 언제 또 이렇게 긴 편지를 드릴 날이 있을는지요. 다시 뵈올 때까지 안녕히 계십시오.

                                                                                     2013년 1월 15일
                                                                                  공주에서 나태주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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