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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에세이] 기억하고 감사하며 (2)

2020.11.23 | 조회 3448 | 공감 0

존재가 우리를 기억하고 감사하게 한다


상생문화연구소 황경선 연구위원


지난 번 논의에서 하이데거에서 본래적 의미의 사유는 기억과 감사의 사유로서 드러났다. 그렇다면 그렇게 사유하도록 하는 것 혹은 그러한 사유를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은 무엇인가?


전통 형이상학에 따르면 인간을 비롯한 모든 것들은 ‘우연유偶然有’. 무슨 말이냐 하면 모든 존재하는 것들은 없을 수도, 있을 수도 있는 데 ‘우연히’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우연유들은 자신이 왜 무가 아니고 오히려 존재하는 것인지 그 원인을 스스로 설명하지 못한다.


그것들은 존재의 근거를 자기 바깥에 두고 있다. 이 설명되지 않는 ‘있음’에 대한 놀라움이 철학의 시작이었다고 한다. 말하자면 저 존재는 ‘사유하게 하는 것’이었다. 이제 있음을 두고 서양 전통의 철학적 사유는 다음과 같이 질문한다.


없지 않고 있게 되었다면 그 존재의 근거는 무엇인가? 존재의 최종 근거이려면 그것이 어떻게 불리든, 최상의 존재자로서 현실적인 모든 것들과는 다르게 스스로가 자기 존재의 원인이어야 한다. 이 최상의 존재자가 신적 존재자, 형이상학의 신이다. 그래서 존재에서 신으로 가는 길을 ‘하이웨이’(highway)라고 한다. 그 길은 그 만큼 빠르기도 하지만 높은 데로 향하기도 할 것이다. 창조주나 조물자에 기대면 존재는 경이로움을 잃고 그렇고 그런 일이 된다.




수운水雲 최제우崔濟愚(1824~1864)가 「불연기연不然其然」(그렇지 않고 그렇지 않고 또 그렇고 그렇다)에서 하는 말도 같은 뜻이라 여겨진다. 만물은 각기 형상도 있고 이룬 바도 있어서 보이는 바로는 설명 못하고 이해 못할 게 없다. 다 그렇고 또 그런 듯하다.


나는 부모가 있어 나고 또 나를 이어 자손이 있게 될 것은 얼마든지 미루어 알 수 있는 기연이다. 그러나 사람이 처음 생긴 바는 멀고도 아득하여 헤아리기 어렵다. 그렇지 않고 또 그렇지 않다. 그러나 조물자에 부쳐 보면 그렇고 그렇고 또 그러한 이치이다.


이밖에도 존재는 전통 철학에게 이렇게 사유하도록 한다. 우리 눈앞에 있는 것들, 다시 말해 차이와 구별이 있고 변화를 겪고 사라지는 것들 말고 불에 타지도 않고 썩지도 않는 진짜로 있는(really real) 게 무엇이냐? 존재는 어떻게 구성되었는가? 등.


하이데거에서도 ‘사유하게 하는 것’은 존재이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존재를 전통 형이상학과는 다른 평면에서 사유한다. 그에게 ‘없지 않고 있다’에서 있음 자체, 즉 존재로서의 존재는 알레테이아(Άλήθεια), 비은폐非隱蔽이다.


이는 ‘[없지 않고] 존재하는’ 존재자에서 존재란 어둠과 은닉隱匿으로부터 우리를 향해 밝게 드러나는, 즉 발현이란 것이다. 존재의 발현은 ‘스스로부터 그 자체를’ 드러내는 것이기에 참[진리]이다. 하이데거가 ‘사유하게 하는 것’으로 가리키는 것은 이런 의미의 존재 발현이나 진리 혹은 그렇게 ‘있는’ 존재다.




이와 같은 존재의 근본 특성은 서구 시원의 희랍인들이 ‘einai’, ‘eon’, ‘ousia’ 등으로 부르며 이해한 존재 의미인 ‘현존現存(Anwesen)’ 개념을 통해 보다 용이하게 파악될 수 있다.


여기서 ‘현現’에 해당하는 독일어 ‘an’은 존재 발현의 터와 관련돼 있다. ‘an’은 ‘여기 가까이’를 가리킨다. 그런데, 이때 ‘가까이’는 대상이 우리에게 접근하는 뜻이 아니라 우리에게로 환하게 드러남, 즉 “밝아옴의 가까움”(WhD 143/144)을 말한다.


그리고 ‘wesen’은 본래 ‘머물다’, ‘체류하다’를 의미한다. 이런 이유로 하이데거에서 주요 개념의 하나인 동사 'wesen'은 ‘본래적으로 머물다’, ‘현성現成하다’로 주로 번역된다. 후자의 경우 불가에서 자주 쓰이는 용어로서, ‘사실이 현재 이루어져 있거나 또는 지금 있는 그대로이다’(『표준국어대사전』)를 의미한다.


이로써 현존의 존재는 자신을 환하게 밝히며 우리들 자신인 인간 가까이 머무는 ‘동사적’ 사태를 의미함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발현은 언제이든 다시 은닉으로 달아날 수 있다. 그래서 존재란 발현의 이행, “비은폐로 도래하면서, 거기 남아 있는 것의 머묾”(Vorträge und Aufsätze)이라고 말하는 것이 보다 사태에 맞갖은 규정이 될 것이다.




하이데거에게 존재는 실체적으로 존재하는 ‘어떤 무엇임’이 아니다. 명사로서 붙잡을 수 있는 게 아니다. 그에 따르면 오히려 존재는 ‘존재자가 아님’이란 의미로 무無와 같다. 비은폐로서의 존재는 자신을 열어 밝히며 그 밝게 트임 안에 존재자를 감싸 존재자를 그 자체로서 존재하도록 하는 사건적 성격을 갖는다.


이렇게 존재는 자신을 열어 밝히며 그 안에서, 그리로부터 끊임없이 존재자에게 존재하도록 수락하고 베푸는 방식으로, 존재자에게 존재를 부여한다. 따라서 여기서의 존재하게 함은 창조나 제작, 산출 등 인과론적 사건으로 이해될 수 없다.


이는 존재란 형이상학적 의미의 근거와 같은 게 아니란 사실을 말하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무엇은 무엇을 낳고 그 무엇은 다시 또 무엇을 낳는 방식으로 존재의 역사를 얘기하지 않는 데 오히려 존재 물음에 올바로 들어서는 첫 걸음이 있다고 말한다.


하이데거의 존재에 대한 이 간략한 설명에 지난번에 언급된 또 다른 규정을 보탤 수 있다. 사유가 기도와 포괄적인 본질 연관을 갖는다는 것은 사유하게 하는 것인 존재 자체에서 성스러움을 경험할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하이데거에서 ‘사유하게 하는 것’인 존재가 이러하다는 점은 그로부터 요구되는 사유의 성격을 이미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1. 존재는 어떤 무엇이 아니기에 그에 상응하는 사유는 존재자를 하나의 대상으로서 주체에 맞세우는 표상적 사유일 수 없다.


표상적 사유는 사실 모종의 셈법 아래 존재자를 대상화하여 파악하고 이용하고 장악하려는 형이상학적 기도로부터 추동된다. ‘사유하게 하는 것’인 존재가 스스로부터 우리를 향해 밝아오는 비은폐일 때, 이에 상응하는 사유는 ‘뒤로’ 물러나는 동시에 마음을 끊임없이 모아 존재의 발현을 향해 ‘앞으로’ 나아감으로써 스스로를 개방하는 것이다.


사유는 그렇게 트인 자리에서 존재의 발현을 받아들이고 머물도록 하는 것이다. 사유는 존재의 발현을 받아들이면서 또한 동시에 자신을 감추며 우리를 매혹하는 존재의 끌림 안으로 들어서는 것이다.


2. 존재의 본질이 발현인 한, 그에 부합되는 사유는 존재의 비은폐를 담을 수 있는, 그것이 머물 수 있는 개방성이어야 한다.


존재는 발현이라는 자신의 본질로 있기 위해서, 말하자면 그것을 받아들이는 ‘그릇’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인간은 그 존재의 부름에 상응하여 열린 개방성인 사유를 바친다.


3. 이제 존재자의 존재가 ‘사유하게 하는 것’의 자리에 들어서면서, 다시 말해 사유가 존재의 사유로 드러나면서, 앞서 형식적으로 규정한 기억과 감사의 사태는 구체화된다.


존재는 가장 사유되고자 하는 본성으로부터 인간의 사유를 불러 세워 거기에 자신을 내맡기고 사유는 기억함으로써, 즉 그것에 마음을 모아 간수하고 지킴으로써 자신을 바친다. 이로써 존재는 스스로 불러 세운 사유에서 본래적으로, 진리로 머문다.


동시에 그러한 사유는 진정한 의미의 감사며 답례로서 수행된다. “존재의 진리에 유의하면서 그 진리의 존재가 역사적 인간됨에서 그의 자리를 찾도록”(Wegmarken) 돕는다. 그럼으로써 사유하도록 자신을 내준 존재에 감사하는 것이다.


4. 기억과 감사의 사유는 모종의 계산적 관점 아래 모든 것을 규정하고 그럼으로써 자신의 자유를 확장하는 형이상학의 사유에 비하면 차라리 ‘아무 것도 하지 않음’이다.


“존재의 사유는 진리를 귀찮게 하지 않는다. 진리가 본질로 있도록 돕는다. 이 도움은 어떤 결과도 낳지 않는다. 단순한 거기에-존재로서의 도움이다. 사유는 존재에 순종하면서 존재에게서 말을 구한다.”(Aus der Erfahrung des Denkens)


그러나 그런 방식으로 존재가 본질, 즉 비은폐의 밝음으로 현성하게 함으로써 모든 존재자를 그 자체로서 존재하게 하기에 그 무위는 또한 최상의 유위이다.


5. 존재가 비은폐로 현성하는 개방된 여지는 그것을 제 것으로 삼아 탈은폐에서 자신을 내주는 존재에 속하는 열린 장場으로서 존재 자체이다. 


하이데거는 형이상학적, 또 통상적 사유와 구별될 이같은 자신의 ‘또 다른 사유’를 'andenken', ‘besinnen' 등으로 표현한다. 영어권에서는 이를 명상(meditation), 명상적 사유(meditative thinking)로 옮긴다.


하이데거에서 명상으로서의 사유는 무엇보다 존재가 밝게 트이는 저 장에 대한 자각으로써 시작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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