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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에세이] 파르메니데스 (2)

2020.12.04 | 조회 3890 | 공감 0

시원의 사상가 파르메니데스 

 - 존재와 사유는 동일하다 (2)


상생문화연구소 황경선 연구위원


에온 엠메나이의 이중성은 존재가 “비은폐로부터 비은폐된 것으로” 들어서며, 존재자는 그 존재의 밝게 드러남에서 “이미 비은폐된 것으로”(Was heißt Denken?) 존재하는 사태였다. 이런 사정은  『동일성과 차이』(Identität und Differenz)에서 다음과 같이 말해진다.


“존재는 [존재자를] 넘어, 자신을 열어 밝히며 [존재자로] 넘어오고, 존재자는 그러한 넘어옴을 통해 비로소 그 스스로부터 비은폐된 것으로서 도래한다(ankommen). 이때 도래란 [존재의] 비은폐 안에 감싸임, 그렇게 간수된 채 가까이 머묾, 존재자로 존재함을 말한다.”


존재와 존재자는 이와 같은 방식으로 서로로부터 나뉘는 동시에 서로에게 향함으로써 하나를 이룬다.


이것만으로도 이미 하이데거에서 ‘존재의 [존재자를] 존재하게 함 ’은 인과적 사건과는 다른 평면에 놓여 있다는 것이 분명해진다. 하이데거가 말하는, ‘존재자가 [무가 아니고] 존재함’은 존재자를 낳거나 (verursachen) 작용시키는 (bewirken) 형이상학적, 과학적 근거로부터 설명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에게서 존재자가 존재한다는 사실 혹은 경이는 이유, 근거의 추적에서 벗어나 있는 비 -근거 (Ab-grund)로서 심연深淵 (Abgrund)과 같다.


“존재는 하나의 근거로서 역할을 할 것이라는

모든 기대에 대한 거부이다.

존재는 어디서나 비 -근거(Ab-grund)로서

밝혀진다.”(Grundbegriffe)


존재자는, 예컨대 장미는 그런 의미로  ‘이유’ 없이 존재한다. 존재는 언제나 존재자의 존재란 자신의 자리를 떠나지 않으면서, 즉 존재자와의 단일함 속에서 스스로 밝음으로 발현하는 가운데 존재자를 그 자체로 있도록 한다.


이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일어난다. 이것이 또한 장미가 ‘이유’ 없이 피는 이유다. 산들과 집은, 장미는 존재 자체의 탈은폐 안에 그러한 것으로서 들어서 머물 뿐이다.




중국 북송北宋 시대의 유학자 정호程顥 (程明道 )(1032~1085)가 어느 가을날 우연히 느꼈듯이 인간의 의지나 욕심이 빚은 이러저러한 비본래적 관점들을 비우고 가만히 바라보면, 만물은 스스로 얻은 것 같다[萬物靜觀皆自得 ].(「秋日遇成 」)


뒤로 물러나면서 동시에 앞으로 나아가 존재를 맞아들이는 사유를 향해 만물은 그 자체를 순수하게 내보이며 고요히 서 있다. 존재의 광채 안에 감싸인 존재자는 “순수하게 그 자체로부터 나타남과 내보임의 고요함으로 들어선 것이다. 비은폐된 것은 그렇게 간수된 것이다 .”(Parmenides)


여기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뚜렷이 말하지 않는 가운데 존재와 인간, 존재와 사유의 관련에 대해 이미 말한 셈이다. 말하자면 사실상 여태  “언제나 이미 존재와 인간 본질의 연관 전체 안으로 나있는 ”(Was heißt Denken?) 길을 걸어온 셈이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인간 사유의 모든 길은 언제나 이미 그리로 향하며,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사유라 할 수 없다. 지나 온 길을 되돌아보면서, 이에 대해 밝히는 하이데거 사유를 살펴보자.


━━━━⊱⋆⊰━━━━


‘사유를 필요해서 사용하는 것’인  ‘에온 엠메나이’의 이중성 혹은 존재의 비은폐는 그리로 호출된 사유에 자신을 사유하도록 내준다. 존재는 오직 인간의 사유에서 참됨, 즉 비은폐로서 현성한다. 그러나 이것은 존재가 인간 주체에 의해 정립된다는 식의, 주관주의적 주장과는 무관하다.


‘에온 엠메나이 ’에서 지배하는 존재의 발현을 위해, 그것을 향해 사유로써 스스로를 바치는 것은 물론 인간에 의해 수행되는 일이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의 주관적 태도나 능력과 같은 것으로서 인간에 속하지 않는다.


존재의 사유는 존재가 불러 세워 자기 개현의 장소로 삼은 것이며 동시에 그 요구에 응해 존재를 향해 자신을 바치고 존재를 지키는 것이다, 그래서 존재 사유는 이중의 의미로 존재의 고유한 것 (das Eigentum)이다.


다시 말해  ‘존재의 사유’에서 소유격  ‘의’는 주격이며 목적격이다. 존재는 진리 장소로 전용한 인간의 사유에 자신을 내맡긴다 (übereignen). 즉 존재가 사유하게 한다. 동시에 인간은 존재 진리를 향해 사유로써 자신을 바친다 (zueignen). 즉 인간의 사유는 존재를 사유한다.


이로써 존재와 인간은 ‘존재 진리’란 동일한 것을 중심으로 서로를 향하며 함께 속한다.




이것은 파르메니데스 단편 Ⅷ에 속하는 시구를 통해 뒷받침된다. “우 가르 아뉴 투 에온토스 ... 휴 레세이스 토 노에인 (οὐ γὰρ ἄνευ τοῦ ἐόντος ... εὑρήσεις τὸ νοεῖν)” 하이데거 이해에 따르면 이 구절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의미한다.


‘사유 [노에인, 즉 앞으로 나아가면서 뒤로 물러나 개방된 자리를 여는 사유]은 현존하는 것의 현존과 떨어져 있지 않으니까 너는 사유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하이데거는 특히 여기서 ‘아뉴’(ἄνευ)가 존재와 사유의 ‘함께 속함’을 말하고 있다고 해석한다. ‘아뉴 ’는 독일어 ‘ohne’와 같은 말로서 ‘떨어져 있다’를 의미한다. 이것의 반대되는 사태는 ‘신 (syn)’, 곧 ‘함께’다. 따라서 ‘온 (아니 ; 아닌 ; 아니요 ) ~아뉴’는  ‘오직 ~와 함께 하니까’를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Was heißt Denken?)


나아가 둘은 그와 같이 “동일한 것으로부터 동일한 것으로”(Identität und Differenz) 함께 속한다는 의미에서 동일하다. 하이데거는 다시금 파르메니데스의 또 다른 시구를 통해 이를 확인한다. 파르메니데스의 단편 Ⅴ에 나오는 구절이다.


“토 가르 아우토 노에인 에스틴 테 카이 에이나이 

(τὸ γὰρ αὐτὸ νοεῖν ἐστίν τε καὶ εἶναι)”


통상 ‘존재와 사유는 동일하다.’로 해석되는 이 구절을 하이데거는 다음과 같이 이해한다. ‘사유와 또한 마찬가지로 존재자의 존재 [비은폐]는 동일한 것이다.’ 하이데거는 동일률과 비교 속에 이 시구에 담긴 동일성의 의미와 유래를 밝힌다.


사유의 최고 법칙으로 간주되는 동일률은 통상  ‘A=A’로 표현된다. 하이데거는 희랍어 ‘토 아우토 (τὁ αὐτὁ)’나 라틴어  ‘idem’은  ‘동일한 것 ’을 의미하고 그 동일성은 곧 자기 동일성이라고 밝힌다.


이에 따르면 동일률이 본래 말하는 바는 ‘존재자가 존재한다’는 것은 ‘자신과의 동일성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A=A’의 동일률은 동일성을 “존재자에서 존재의 근본특성”(Identität und Differenz)으로  규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반면 하이데거에 따르면 파르메니데스의 시구는 그것과는 전혀 다른 동일성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 파르메니데스는 서로 다른 사유와 존재를 동일하다고 밝힘으로써, 동일성이 존재에 속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거꾸로 사유가 존재와 더불어 동일성에 속하는 것으로 본다. 곧 파르메니데스가 생각하는 동일성은 사유와 함께 존재 또한 ‘동일한 것으로부터 그리로’ 속한다는 의미의 그것이다. 존재와 사유의 동일성은  ‘동일한 것’에 유래를 두고 있는 것이다.


‘동일한 것’은 앞서 말했듯이 존재의 진리이다. 그리고 그러는 한 ‘동일한 것’은 존재가 자신을 열어 밝히며 머무는 ‘동안’과 ‘폭’으로서 시공간의 성격을 갖는다.


이로써 파르메니데스 시구들은 인간의 본질을 규정하고 있다. ‘에온 엠메나이’에 의해 쓰이는 존재 사유는 오히려 인간보다 근원적이다. 인간은 존재를 사유함으로써 비로소 제 본질, 다시 말해 그가 되어야 할 바 고유함, 마땅함에 이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로 존재 사유는 “인간이 그의 속성으로서 갖고 있는 한 태도 방식이 아니라 오히려 거꾸로 인간을 갖는”(Einführung in die Metaphysik ) 셈이다.


이렇게 파르메니데스는 단순히  ‘노에인 ’을 말함으로써 동시에  ‘인간됨 ’에 대해 결정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보다 사태에 부합하여 말하면, 인간의 본질인 사유를 존재와 함께 속하는 것으로 규정하는 그의 시구들은 인간을 존재의 요구에 상응하여 사유로써 존재를 지키는 자로서 이해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인간은 존재자의 존재를 향하며 맞아들이는 사유를 떠맡아 존재를 은닉으로부터 환히 발현하여 그의 진리로서 머물도록 지키는 존재의  “목자”이며, 다만 그러할 뿐이다.


그래서 인간 본질에 대한 시원적 규정은 흔히 통용되는 “안트로포스 = 조온 로곤 에콘 (ἄνϑρωπος=ζῷον λόγον ἔχον)”(인간은 이성을 가진 동물이다)이 아니라,


“퓌지스 = 로고스 안트로폰 에콘 (φύσις=λόγος ἄνϑρωπον ἔχων)”(존재란 인간을 소유하며 근거 짓는 불러 모음 [존재 사유]을 필요로 한다 ]”(Einführung in die Metaphysik)이다.


달리 말하면 본래적 인간이란 존재의 본질로부터 필요해서 쓰이는 자다. 때문에 존재의 요구에 따라 존재를 사유하는 것은 인간의 편에서는 단순히 강요나 예속이 아니다. 그로써 존재와 함께 속하며 그 안에서 자기 본질을 실현하는 일이다.


그래서 존재의 부름은 인간에게는 비로소 그의 참됨으로 살도록 하는 호의며 선물이다 . 존재가 비은폐로 머무는 [시공간으로서의] 영역은 인간이 그 자신으로, 즉 존재의 진리를 지키는 자로 자유롭게 해방되는 터전이다.


“존재 안으로 옮겨놓음은 자유로 해방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해방만이 자유의 본질이다.”(Grundbegriffe)


또한 그럼으로써 비로소 진정한 안식을 얻는다. 그 열린 장은 일찍이 파르메니데스를 비롯한 시원의 사상가들이 경험했던 곳이며 동시에 우리에게 떠맡아야 할 것으로 도래하는 ‘또 다른 시원 ’이다. 인간의 사유는 그 은총에 대한 감사와 답례로써 수행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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