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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 "상해임시정부는 정읍 '보천교'에 많은 빚을 졌다"

2020.06.04 | 조회 10752 | 공감 0

 김구, "상해임시정부는 정읍 '보천교'에 많은 빚을 졌다"


정원식 (상생문화연구소 연구위원)


101년 전 1919년 4월 11일은 어떤날인가? 3.1운동을 계기로 현 대한민국 건국의 초석을 쌓은 상해임시정부가 수립된 날이다. 


상해임정은 해방될 때까지 26년 5개월 간 상해와 항주, 남경, 중경으로 이동하며 일제를 상대로 외교활동과 작탄투쟁 및 암살파괴활동, 광복군 조직 등을 통한 국내외 항일운동의 구심적 역할을 해왔다. 


특히 1920년~30년대 초반까지 임시정부는 공채 발행(아일랜드만이 500만달러 매입)과 미주교포들의 지원금으로 충당했던 운영자금이 여의치 않으면서 매우 열악한 재정 압박에 시달렸다.


이 시기 임시정부의 적극적인 항일투쟁이 가능하도록 인적·물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종교 단체가 있었다. 바로 우리 민족 종교인 보천교(普天敎)다. 




보천교(1911년~1936년 간 존속)는 동학의 ‘시천주조화정(侍天主造化定)과 무극대도(無極大道)’의 정신을 정통으로 계승한 종교이다.


이는 “후천개벽으로 상생의 새 시대가 열리면 한민족이 세계의 희망의 중심이 된다.”라는 교리로 나라를 잃고 좌절에 빠져 있던 민중들의 자존감과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1925년 조선주재 미국 총영사 밀러의 「조선보고서」와 1926년 조선총독부 「보천교 일반」 자료에 따르면, 보천교 신도 수가 약 600만 명이다. 당시 조선 인구가 1천902만 명임을 감안하면 30%가 넘은 거대한 조직이었다. 




막대한 자금력을 확보하고 있던 보천교는 민족자존을 지키고 항일투쟁을 위해 상해임정 설립 자금 5만원(20억원)지원을 시작으로 물산장려운동 등 사회운동 주도와 독립운동의 군자금 산실 역할을 묵묵히 해냈다.


  • 1921년 김규식의 모스크바 약소민족회의 참석 여비 1만원(2억원) 지원.

  • 보천교 재정 담당자인 김홍규의 상해임정에 대한 군자금 11만원(42억원) 지원 발각사건

  • 보천교 간부 임규의 상해임정 간부 라용균에 5만원 전달

  • 보천교 간부였던 신채호선생 부인 박자혜 여사의 만주 정의부에 군자금 지원 가교역할

  • 1923년 임시정부의 국민대표회의에 보천교 간부 강홍렬과 배홍길 파견 및 의열단에 가입

  • 북로군정서 김좌진 장군에게 5만원 지원 등




한편, 비밀리에 전달되어야 하는 독립자금의 특성상 보천교의 정확한 재정 지원규모를 가늠하기 어렵다. 보천교의 거액 독립자금( 현 가치 1,000억원 추정) 지원에 대한 정황과 언급은 조선총독부 경무국과 만주 관동청 경무국, 일본 검경문서나 재판기록에 나온다.


특히, 국가기록원 독립운동 관련 판결문 데이터베이스에는 1923년 충청도의 보천교 신자 박운업이 “보천교는 상해임정에 있는 힘을 다하여 물심양면으로 적극 지원하고 있다”라고 말한 내용이 있다.


그래서 김구 선생은 1945년 11월 23일 환국할 때 환영 나온 보천교 신도들에게 “우리는 전라도 정읍 보천교에 많은 빚을 졌다.”는 말을 했다.


김구 주석의 비서실장 조경한 선생의 증언에 의하면 김구 선생은 그 이후에도 측근들에게 평소 이 말을 자주했다고 한다. 




그러나 보천교의 활발한 항일독립운동에 대해 오늘날 우리는 무지하다. 그 배경은 무엇일까?

 

  • 첫째, 한민족 고유의 정체성을 해체하고 일본인으로 동화시키려는 일제의 교묘한 분열과 잔혹한 탄압정책이다.


조선총독부는 1915년 부령 제83호 ‘포교규칙’을 공포하여 불교와 기독교만 종교로 규정하여 학무국에서 관리하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보천교, 천도교, 대종교 등의 민족종교를 ’유사 사이비종교‘로 규정하여 경무국에서 감독하게 한다.


일제의 교활한 분열 및 이간책동은 결국 1925년 보천교를 친일단체로 매도케 함은 물론, 1936년 ’유사종교 해산령‘을 발동하여 해체시키기에 이른다.


이때 총독부는 아시아 최대 규모였던 보천교 본소 십일전 건물과 보화문을 불교단체에 헐값으로 매각하여 현재 불교 조계종 본사인 조계사 대웅전과 내장사 대웅전의 핵심 목재로 사용되게 하였다. 본소 청기와는 청와대 구 본관 건물 기와로 사용되어 청와대라는 명칭의 유래가 되었다.


  • 둘째, 일제가 획책한 식민사관에 기초한 식민사학자와 친일언론 및 종교인등 식민잔존 세력 간의 상호 카르텔이다.


이들은 일제가 민족말살정책의 일환으로 우리 민족종교를 유사 사이비종교로 낙인을 찍어 왜곡 은폐시켰던 총독부의 행태를 오늘날까지도 그대로 대변하고 있다. 이는 보천교를 대한독립운동사 전체 맥락에서 올바르게 인식하는 데 많은 장애가 되고 있다.


오늘은 전체 대한독립운동사의 상징인 상해임시정부 수립 100년이 넘어가는 시점에 서 있다. 그 동안 식민사관의 프레임에 의해 “보천교는 오랫동안 왜곡 날조된 상태로 독립운동사의 미아로 남아있었다.”


“역사를 잊는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라는 말처럼, 이젠 보천교를 하나의 종교가 아닌, 항일독립운사의 큰 맥락에서 그 발자취를 사실 그대로 재평가하고 올바르게 복원하여 “우리 한민족 역사주권의 진정한 회복의 첫 출발”로 삼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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