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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학 칼럼] 하늘의 뜻은 땅에서 이루어진다

2020.01.22 | 조회 4420 | 공감 1

상생문화연구소 양재학


우리 조상들은 지산겸괘와 중산간괘의 ‘산’이 들어가는 호를 즐겨 불렀다. 조선시대 중기 도가사상의 대표적인 학자이며 의학과 예언에 뛰어났던 정렴鄭磏(1506-1549, 호는 北窓)과 함께 이인異人으로 널리 알려진 토정土亭 이지함李之菡(1517-1578)이 있다. 포천현감였던 정렴의 후임자가 이지함인 점을 보면 두 사람 사이에 아주 깊은 인연이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서울과 충청도 일대에서 활동했던 민중 역학자인 이지함은 서경덕徐敬德의 가르침을 많이 받았다. 중국의 소강절邵康節(1011-1077)과 서경덕과 이지함의 삶에는 공통점이 많다.

 



지방에 은거하며 청빈한 삶을 영위한 점, 전국을 유람하면서 견문을 얻은 점, 주역을 학문의 중심으로 삼은 점, 일화에서 예언자적 능력을 인정받은 점, 중앙으로부터 천거받아 벼슬길에 나선 점 등이다. 신병주, 『이지함 평전』(서울: 글항아리, 2008), 176쪽 참조


족보에 따르면 이지함에게는 적실 소생의 산두山斗, 산휘山輝, 산룡山龍 세 아들과 서자인 산겸山謙이 있었다. 둘째 산휘는 호랑이에 물려 죽었고, 셋째 산룡은 열 두 살 때 역질로 죽었으며, 산겸은 임진왜란 때 의병장 조헌趙憲(1544-1592)의 휘하에서 활약했다. 


이지함은 조카 산해山海를 각별히 사랑했다. 이산해李山海(1539-1609)는 영의정과 이조판서를 지내면서 북인北人의 영수가 된 인물로 이색李穡(1328-1396) 이후 기울어진 가문의 영광을 되살리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 謙은 亨하니 君子有終이니라(겸은 형통하니, 군자는 끝마침이 있다.)


겸괘의 일차적 의미는 건괘와 곤괘의 내용을 겸비한 것에 있다. 왜냐하면 천도와 지도를 아울러 설명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귀신과 인간의 문제를 ‘동시에’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건곤괘가 담지한 결과적 총합체인 것이다.


그러니까 겸손은 시공을 초월하여 영원히 지속한다. 겸손은 인격의 성숙함만을 지칭하지 않는다. 우주원리에 대한 통찰이 덧붙어져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이 세상은 천도와 지도가 하나로 통일되면서 구체화되는 마당[場: field]이기 때문이다. 만약 겸괘를 윤리도덕의 차원으로 한정시킨다면 크나큰 오류를 범하게 되는 것이다. 


주자는 ‘군자는 좋은 끝마침이 있다[君子有終]’는 명제에 대해 “먼저는 굽히나 나중에는 펴는 것을 이룬다”고 풀이했다. 움츠리고 펴는 것은 음양의 운동과 다르지 않다. 


위대한 자연법칙은 한시도 그침이 없다. 오르고 내리며, 왔다가 다시 돌아간다. 자연법칙을 따르는 것이 군자의 역사적 사명이다. 사명을 굳건히 받들고 실천하기 때문에 군자는 하늘의 영광을 누릴 수 있는 자격이 충분하다.


산은 지상에서 가장 높은 위치에서 땅의 위엄을 자랑한다. 하지만 겸괘는 땅 아래에서 대지의 포근함을 한결 감싸는 버팀목 역할을 수행한다. 


다섯 음 속에서 다소곳이 들어앉은 양은 자신의 신분을 뽐내지 않으면서 음을 드높이는 동시에 스스로의 가치를 낮추는 아름다운 모습이다. 그래서 “겸은 덕을 움켜쥔 자루이다[謙德之柄也]” 「계사전」 하편, 7장. 라고 했던 것이다.


* 彖曰 謙亨은 天道下濟而光明하고 地道卑而上行이라. 天道는 虧盈而益謙하고 地道는 變盈而流謙하고 鬼神은 害盈而福謙하고 人道는 惡盈而好謙하나니 謙은 尊而光하고 卑而不可踰니 君子之終也라

(단전에 이르기를 ‘겸이 형통한다’는 것은 하늘의 도가 아래로 내려와 밝게 빛나고, 땅의 도는 낮은 곳에서 위로 올라간다. 하늘의 도는 가득 찬 것을 이지러지게 하여 겸손한 것을 더하고, 땅의 도는 가득 찬 것을 변하게 하여 겸손한 데로 흐르고, 귀신은 가득 찬 것을 해롭게 하여 겸손함에는 복을 주고, 사람의 도는 가득 찬 것을 미워하고 겸손한 것을 좋아한다. ‘겸’은 높고도 빛나고 낮아도 넘을 수가 없으니, 군자의 끝마침이다.)


공자는 「단전」에서 하늘과 땅과 귀신과 인간의 문제를 묶어서 얘기한다. 우선 하늘과 땅의 교감의 방식은 상하의 운동으로 설명한다. 이것이 바로 진리의 두 얼굴이다. 


하늘은 ‘↓’의 방식으로 중생을 구제하여 지상을 ‘광명’ 세상으로 만들며, 땅은 하늘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의 방식으로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 결합한다. 




그것은 ‘지천태괘地天泰卦’에 나타난 바와 같이 양 기운은 내려오고 음 기운은 올라가 장엄한 결혼식을 올리는 형상과 똑같다.


음양은 만나기 위해서 존재한다. 음양의 배터리는 소모된 적이 없다. 음양의 움직임은 시공간에 편재하여 에너지로 넘친다. 


밤과 낮은 천지의 두드러진 현상이다. 밤과 낮의 본질은 ‘하나’이다. 밤은 낮이 되고, 낮은 밤이 된다. 밤낮을 어떻게 나눌 수 있는가? 밤낮의 경계선은 어디에도 없다.


밤은 소리 없이 낮이 되고 낮은 서서히 밤이 된다. 이것은 하나의 수레바퀴와 같다. 하루는 밤과 낮으로 이루어지므로 밤과 낮은 하나이면서 둘이다. 


하루[태극]의 입장에서 보면 하나요, 밤낮[음양]의 입장에서 보면 둘이다.  


음양의 운동에는 목적이 있다. 밤과 낮, 부드러움과 강함, 삶과 죽음, 어둠과 밝음, 습함과 건조함 등은 음양짝을 이루어 일정한 질서를 유지하면서 목적을 향해 나아간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하늘의 뜻은 땅에서 이루어진다[下濟]’는 구원에 있다. 내려오는 길(↓)과 올라가는 길(↑)은 하나의 길에서 피스톤 운동을 한다. 


시작과 끝이 만나야만 ‘원圓’이 그려질 수 있는 것처럼, 하늘의 하강작용과 땅의 상승작용이 결합해야 만물의 완성되어 중생이 구제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천지의 ‘알파와 오메가’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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