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체
  • 영성문화 산책
  • 한국의 역사문화
  • 지구촌 보편문화
  • 제5차 산업혁명
  • 연구소 칼럼
  • 태고시대 문명과 여신문화
  • 기타

합스부르크 가문을 통해서 본 세계사 (1)

2021.08.16 | 조회 5232 | 공감 0

합스부르크 가문을 통해서 본 세계사 (1)

신성로마제국 황제로 선출된 루돌프 백작


상생문화연구소 김현일 연구위원


합스부르크 가문1273년부터 20세기 초 1차 세계대전 시기까지 신성로마제국과 그를 이은 오스트리아 제국 등을 통치한 왕가이다. 물론 신성로마제국이라는 나라는 선거왕제 즉 황제를 제후들이 선출하는 제도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합스부르크 가문이 줄곧 그 왕위를 차지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 가문의 명성과 위세, 그리고 부로 인해서 신성로마제국 황제 자리는 근대에 들어오면 거의 합스부르크 가문이 차지하였다.


합스부르크 왕가는 또 1516년부터 1700년까지는 신성로마제국 뿐 아니라 스페인 왕국도 다스리게 되었는데 그리하여 유럽 최고의 왕가가 되었다. 또 당시 스페인은 아메리카를 정복하고 있었는데 이 신대륙의 상당 부분이 합스부르크 가문의 지배영역에 포함되었다.


그런데 합스부르크 왕가가 처음부터 이렇게 강력한 가문이었던 것은 아니다. 1273년 합스부르크 백작 루돌프가 많은 사람들의 예상과는 달리 신성로마제국 황제로 선출되기 전까지 합스부르크 가문은 독일과 스위스 국경 근처에 있는 영지를 차지한 영주가문에 불과하였다. 지금도 그곳에는 11세기에 지어진 성채가 남아 있는데 대단한 규모는 아니다.




이 성은 루돌프의 6대조가 1030년 경에 세운 것이라 한다. 루돌프가 황제로 선출되던 당시 루돌프는 ‘합스부르크 백작’이라는 칭호를 갖고 있었는데 원래 ‘백작’(영어로는 count, 라틴어로는 comes)이라는 직책은 프랑크 왕국에서 지방관에게 부여하던 호칭이다. 조선시대 같으면 관찰사에 해당할 것이다.


합스부르크가 수 세기 동안 지배한 신성로마제국은 오늘날의 관념으로는 좀 이상한 국가이다. 그 속에는 다양한 크기의 제후국 뿐 아니라 황제에 직속된 제국도시들, 주교가 군주처럼 다스리는 주교령 그리고 심지어는 왕들이 다스리는 왕국들도 있었다.


이러한 신성로마제국은 그 기원이 프랑크 제국에 있다. 게르만계의 프랑크인들이 세운 프랑크왕국은 9세기 중반 동서로 갈라졌는데 프랑스와 독일은 이로부터 나왔다. 대체로 오늘날의 독일과 오스트리아 지역과 일치라는 동프랑크 왕국이 12세기 중엽부터 신성로마제국이라는 국호를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신성하다는 것은 하느님의 뜻을 받드는 기독교왕국이라는 뜻을 내포한다. 물론 신성로마제국이 가톨릭교회를 떠받든다고 해서 가톨릭교회의 우두머리와 신성로마제국의 우두머리인 황제 사이의 관계가 언제나 원만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로마교황과 신성로마제국 황제는 서로 싸울 때가 많았다. 신성로마제국 황제로서 시칠리아 왕으로도 불렸던 슈타우펜 가의 프리드리히 2세(1194-1250)는 중세 유럽의 군주들 가운데 시대를 앞서간 천재로 평가되는 사람인데 교황청과 대립하여 파문을 당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


다시 합스부르크 가의 루돌프 백작 이야기로 돌아가자. 합스부르크 성의 모습과는 달리 루돌프 백작은 그래도 독일 서남부 지방 (슈바벤 지방)에서는 무시할 수 없는 세력가였다. 적어도 세력이 미미한 소귀족은 아니었다는 이야기다. 그는 프리드리히 2세 황제 편에 서서 바젤 주교와 싸웠는데 바젤로 쳐들어가 수녀원을 불태운 적이 있다.


이로 인해 교황으로부터 파문을 당했다. 파문을 풀기 위한 고해 차원에서 먼 프로이센 지역으로 십자군원정을 갔다. 당시 독일 기사들이 중심이 되어서 이교도들의 땅을 무력으로 정복하는 사업을 벌이고 있었는데 오늘날의 독일 땅 너머 러시아에 속한 지역이다.


이교도들의 땅을 정복한 독일 기사들은 이곳에다 성채를 중심으로 도시를 세웠다. 후일 철학자 칸트 선생께서 대학에서 철학을 가르치며 내내 사셨던 ‘쾨니히스베르크’란 도시이다.




왕의 요새 혹은 왕의 도시라는 뜻을 갖는 이 도시의 이름은 보헤미아 왕으로서 프로이센 십자군원정대의 지도자였던 오토카르 2세를 기념하기 위해 지어진 이름이다. 오토카르 2세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역사와 관련하여 기억해야만 하는 주요한 인물이다. 그는 루돌프 백작의 신성로마제국 황제 등극을 끝까지 인정하지 않아 루돌프와 전쟁을 하였던 사람이다.


황제를 선출하는 제국회의에서 투표권을 가지는 사람들을 선제후選帝侯라 하는데 원래는 수십 명에 달했지만 12세기경에 와서는 프리드리히 바르바로사(1152-1190)에 의해 일곱 명으로 축소되었다. 프리드리히 바르바로사 즉 붉은 수염왕은 프리드리히라는 이름을 가진 첫 번째 황제로서 앞에서 언급한 프리드리히 2세의 조부이다.


좌우간 이 사람 때부터 7선제후 제도가 확립되었는데 세 명은 주교로서 트리어, 마인츠, 쾰른의 대주교이고 네 명은 세속제후로서 작센 공작(동부독일), 팔츠백작(라인지역), 브란덴부르크(베를린 너머 동쪽 지역) 변경백 그리고 보헤미아(체코) 왕이었다.




보헤미아 왕은 신성로마제국의 제후였지만 칭호는 공작이나 백작이 아니고 왕이다. 오토카르 1세 즉 오토카르 공작이 프리드리히 바르바로사의 편을 들어 그 충성에 대한 보답으로 왕의 칭호를 얻게 되었던 것인데 다른 제후들보다 좀 더 높은 지위라서 제국에 대한 여러 의무를 면제받았다고 한다.


1250년 슈타우펜 왕조의 프리드리히 2세가 죽었다. 그러나 황제 선출을 위한 제국회의가 열리지 못하고 정치적 혼란이 계속되었다. 그 이유는 프리드리히 2세가 교황으로부터 파문을 당하자 다른 사람이 황제로 나서고 또 그 사람을 인정하지 않는 또 다른 황제가 나타나 서로 싸우는 식이었다. 


그리하여 이런 사태가 23년간이나 지속하였는데 역사가들은 이를 대공위 시대라고 한다. 신성로마제국에서는 황제가 죽은 후 제국회의가 소집되어 새로운 황제를 선출하게 된다. 보통은 수개월 간의 공위기간(interregnum)이 발생하지만 이처럼 오랜 기간에 걸친 공위는 황제선거를 치를 수 없을 정도로 정치적 혼란이 심했다는 것을 뜻한다.


심지어는 대공위 기간에 외국인도 왕이 되었다. 스페인 사람 알폰소 10세와 영국의 콘월 백작 리처드가 동시에 신성로마제국 황제 즉 독일 왕 노릇을 한 것이다. 이러한 혼란을 겪자 교황 그레고리우스 10세가 보다 못해 황제 선출을 독려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선제후들이 1273년 프랑크푸르트에서 모여 새로운 황제를 선출하게 되었다.


이 1273년 제국회의에는 선제후인 보헤미아 왕 오토카르 2세도 입후보하였다. 선제후로서 입후보하였기 때문에 바이에른 공작이 그를 대신하여 선제후가 되었다. 회의에서 오토카르와 루돌프 외에도 두 명의 후보가 더 있었지만 선제후들은 모두 루돌프 백작을 지명하였다. 루돌프가 만장일치로 황제로 선출된 것이다.


루돌프 백작은 농민들에 대한 귀족들의 약탈에 반대하고 산적을 소탕하는 등 평판이 좋았다. 스위스의 산악지대 주민들도 그를 자신들의 우두머리로 지명하였다. 그러나 황제로 선출될 정도로 세력이 강한 사람은 아니었기 때문에 루돌프 스스로도 황제로 선출되리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당시 동유럽에서 상당한 세력을 구축한 오토카르 2세는 루돌프를 황제로 인정하기를 거부하였다.




오토카르는 제국 회의가 적법하게 소집되지 않았다는 점, 루돌프는 예전에 바젤의 수녀원을 불태운 불미스러운 행각을 자행하여 신성로마제국 황제로는 적합하지 않다는 점, 또 그보다 강력한 후보자들이 있는데 세력이 미미한 루돌프 백작을 황제로 선출한 것은 있을 수 없다는 등의 구실을 내세우며 루돌프에 대한 충성선서를 거부하였다.


루돌프는 자신을 황제로 인정하지 않는 이 오토카르의 영지 가운데 보헤미아, 모라비아 지역은 놔두고 오스트리아 지역의 영토를 박탈하였다. 오스트리아 땅은 원래 오토카르 왕가인 프르쉐미슬 왕가의 땅이 아니다.


루돌프가 오토카르로부터 빼앗은 오스트리아 지역의 땅은 오스트리아, 스티리아, 카린티아, 카르니올라, 빈디슈마르크 등의 영지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모두 프랑크 왕국의 카를로스 대제 때부터 제국의 경계를 수호하기 위한 변경령(Mark)이었다. 카를루스 대제(772-811) 때 오스트리아 일대에는 슬라브족과 아바르족 그리고 서쪽에서 온 게르만 계통의 바이에른족 등이 빈번하게 침략해왔다. 카를루스 대제는 이러한 침략을 막기 위해 군관구를 설치하고 군사령관인 변경백을 임명하였다.


그런데 오스트리아를 위시한 이 변경지역들은 10세기 말부터 바벤베르크 가문의 통치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동프랑크 왕국 오토 대제(912-973)의 충실한 신하이자 바이에른 공작의 후손이기도 하였던 레오폴드 바벤베르크가 오스트리아 변경백에 임명되었던 것이다. 그 이후 13세기 중엽까지 줄곧 바벤베르크 가문이 오스트리아 지역을 통치하였다.




중세에는 큰 잘못이 없는 한 제후들이 임명받은 지역을 세습하여 다스리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13세기 중엽 바벤베르크 가의 오스트리아 공작 프리드리히 2세(앞에 나오는 같은 시대 신성로마 황제의 이름과 같지만 다른 사람이다)가 헝가리와의 싸움에서 전사하고 만다. 그런데 그에게는 후사가 없었다. 가문이 단절된 것이다. 부친인 보헤미아 왕 바클라브 2세에 의해 모라비아 변경백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오토카르 2세가 오스트리아 귀족들의 동의하에 오스트리아 총독이 되었다.


그런데 이 오스트리아 영지가 이제 제국회의의 선거결과로 인해 합스부르크 가문의 수중으로 들어갔다. 오토카르는 이러한 선거결과를 끝내 받아들이지 않았다. 합스부르크 가문은 원래는 스위스 출신으로서 오스트리아와 연관이 전혀 없었지만 운 좋게도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에 선출되는 바람에 오스트리아 땅을 차지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후일 스위스 영지보다는 이 오스트리아 영지가 합스부르크 가문의 발전을 위한 기반이 되었다. 역사에는 이런 식으로 우연적인 요소가 많이 개입하는데 1273년 루돌프의 신성로마제국 황제선출이 그런 경우에 해당할 것이다.


바벤베르크 가문이 근 3세기 동안 지배하던 이 동부변경 지역은 10세기경부터 ‘오스타리치’라고 불렸다. 이는 동부제국이라는 뜻이다. 이 오스타리치라는 말에서 오늘날 오스트리아를 뜻하는 독일어 ‘외스터라이히’(Österreich)가 나왔다.




루돌프가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된 것을 끝내 인정하지 않았던 오토카르는 어떻게 되었을까? 그는 오스트리아 땅을 되찾기 위해 자신의 지배하에 있는 보헤미아 뿐 아니라 여러 공국들에 호소하여 루돌프에 도전하였다. 마침내 1278년 비엔나에서 50km 정도 떨어져 있는 마르히펠트(Marchfeld)에서 싸움이 벌어졌는데 황제측이 간신히 승리하였다. 양측에서 수천 명의 기사가 동원되어 싸웠던 이 싸움에서 오토카르는 전사하고 만다.


이후 오스트리아 영지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본거지가 되었다. 루돌프는 자신의 두 아들에게 오스트리아와 스티리아, 카르니올라를 봉토로 주었다. 또 카린티아는 오토카르와의 싸움에서 자신을 지지해준 충성스런 티롤백작에게 넘겨주었는데 이 티롤백작 가문이 단절되는 바람에 다시 합스부르크 가의 수중으로 돌아오게 된다.


twitter facebook kakaotalk kakaostory 네이버 밴드 구글+
공유(greatcorea)
도움말
사이트를 드러내지 않고, 컨텐츠만 SNS에 붙여넣을수 있습니다.
199개(4/20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