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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조선箕子朝鮮

2016.06.25 | 조회 6481 | 공감 0

기자조선箕子朝鮮


고조선을 말할 때 함께 거론되는 것이 기자조선이다. 기자는 상商 왕실의 근친인 ‘다자多子’ 출신의 제후로서 성姓은 자子였는데 기箕 지역에 봉해졌기 때문에 기자箕子라고 불렸다. 


그러나 기국箕國의 위치와 기족箕族에 대해 정확히 알 수 있는 기록은 문헌에 거의 남아있지 않다. 


기자가 등장하는 가장 오래된 문헌이 『상서尙書』로 여기에는 기자의 이름도 없고 기箕에 봉해진 자子라는 작위를 받았다고만 되어 있을 뿐이다. 


그리고 주周 무왕武王이 상商을 무너뜨린 뒤에 기자를 데리고 주나라 서울 호경鎬京으로 돌아와 홍범을 묻고 사관에게 기록하게 했다고 하였다.1) 


『사기집해史記集解』에서는 기자의 기箕는 국명이고 子는 작위의 명칭이라고 하였으며, 『사기색은史記索隱』에서는 기자의 이름이 서여胥餘였다2)고 전한다. 


남송南宋 때(1161) 학자인 정초鄭樵3)의 『통지通志』에서 기자의 성은 자子이고 상의 기내畿內(경기지역)의 제후였다4)고 나올 뿐이다. 


상대商代 문헌상으로 확인되는 기자족箕子族의 첫 근거지는 지금의 산서성 태곡太谷 일대의 기국箕國이다.


남·북한 학계는 그동안 기자조선설을 부정해 왔다. 그것은 기자조선이 일제에 의해 조선사 말살 차원에서 연구되었고, 진秦(BCE 221~BCE 206)나라 이전 문헌에서는 전혀 언급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기자가 죽은 지 근 천여 년이 지난 서한西漢(BCE 206~CE 8) 때, 90세가 넘은 복생伏生에 의해 구술口述되어 편찬되었다는 『상서대전尙書大傳』에 처음 나타난다.5) 


그리고 같은 시대에 편찬된 『사기史記』 본문에는 나오지 않고 「송미자세가宋微子世家」6)에 ‘주 무왕이 기자를 방문하여 홍범洪範에 대해서 묻고 그를 조선朝鮮에 봉하면서 신하로 삼지 않았다’7)라는 기자동래箕子東來가 기록되어 있다. 


후한後漢시대(CE 25~CE 220)에 편찬된 『한서漢書』에서는 기자가 조선으로 가서 ‘범금팔조犯禁八條’를 제정했다고 했고8), 『삼국지三國志』는 『위략魏略』을 인용, 후대의 고조선 왕들을 기자의 후예로 기록하는 등 내용이 후대로 갈수록 상세해지는 기이한 현상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우리 문헌에서 기자조선이 처음으로 나타나는 것은『제왕운기』로, 단군조선檀君朝鮮을 전조선前朝鮮으로 기자조선을 후조선後朝鮮으로 구분하여 기록하고 있다. 


비슷한 시기에 『삼국유사』를 쓴 일연은 기자는 살짝 언급만 하고 단군조선 다음에 위만조선으로 이어지는 것으로 보았다. 또한 주몽을 단군의 자손이라 하여 기자로 이어지는 계승 의식이 보지 않는다.

 

하지만 근세조선에 와서는 『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1476, 성종7) 이후 역사체계가 ‘단군조선(전조선前朝鮮)-기자조선(후조선後朝鮮)—위만조선’로 고정된다. 


그리고 사대모화事大慕華에 빠진 유학자와 사대부들은 주자의 정통론에 영향을 받아 기자조선은 더욱 강조되어 단군조선보다 더 정통으로 여기는 풍조가 자리 잡았다. 


국호도 기자조선을 잇는다는 의미로 조선이라 했고, 조선이 소중화가 된 것도 기자가 중화中華의 문화를 전수했기 때문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조선후기 오랑캐로 멸시하던 청나라가 천조天朝로 받들던 명나라를 평정하자 소중화小中華를 자처하며 조선의 유학자와 사대부들은 사상적인 충격에 빠졌다. 


더욱이 100여년이 지나도 명나라가 다시 회복될 기미가 보이지 않자 조선이 문화적으로 중화를 계승했다는 소중화를 넘어 혈통적으로도 중화의 적통을 이었다는 정체성 확립에 나서게 되는데 그 작업의 핵심이 기자조선이다.


윤두수尹斗壽(1533~1601)가 명나라 사신으로 갔을 때 명나라 사대부들이 기자의 사적史蹟을 물었으나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다. 이를 분하고 부끄럽게 여겨 귀국한 뒤 각종 경서와 사서류에 나오는 기자관련 내용들을 묶어 『기자지箕子誌』를 편찬하였다. 


그 뒤 율곡栗谷 이이李珥가 『기자지』의 내용을 간략하게 하여 『기자실기箕子實記』를 편찬하는 등 조선 후기에 와서 기자에 대한 많은 기록들이 만들어졌다.


현재 기자의 후손으로 알려진 청주한씨淸州韓氏의 경우, 1617년에 최초로 발간한 『한씨사적韓氏事蹟』과 1748년에 발간한 『청주한씨족보淸州韓氏族譜』에는 기자의 후손이라는 기록이 전혀  없었다. 


그런데 1789년에 발간된 『청주한씨보淸州韓氏譜』에 기자로부터 준왕準王까지 후조선 41대에 대한 상세한 계보가 수록된다. 


청주 한씨는 고려태조의 부인인 신의황후를 비롯하여, 조선조에서도 여러 명의 왕비를 배출한 명문세가로 기자의 후손이라고 여겼다면 반드시 족보에 기록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18세기 까지도 기자의 후손임을 표방한 적이 없었다. 


따라서 청주한씨 족보에 나오는 기자의 계보는 청주한씨 당사자들보다 조선이 유일하게 중화中華의 혈통과 문화를 계승했다는 근거를 제시하여 위안을 삼고자 했던 모화사대주의자들이 1748년 이후 만든 것으로 보고 있다.9)


1970년대 요령성 대릉하 유역의 객좌喀左에서 기후㠱侯와 고죽孤竹으로 해석되는 상말주초商末周初의 청동예기靑銅禮器가 발견되어 일부에서 기자조선설이 다시 제기되었다. 


특히 객좌현 북동北洞2호 유적에서 기자와 관련된 것으로 추정되는 기후방정㠱侯方鼎이 발견되며 이 유물을 근거로 기자가 상말주초 요서 지역으로 동래하여 기자조선을 세우고 이후 요서—요동—평양으로 이동했다는 견해가 이형구, 윤내현, 장박천張博泉 등 국・내외 학자들에 의해 제기되었다.


천관우는 기자조선설을 문헌 분석으로 제시하였는데 기자족箕子族의 첫 근거지는 지금의 산서성 태곡太谷 일대의 기국箕國이며, 은殷·주周가 모두 경시하지 못하는 일대세력으로 은의 제후국이 된 것은 은殷 말기부터로 본다. 


중국의 옛 기록은 견강부회한 일이 많아 기자가 은실殷室의 일족이라는 기록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하였다. 만약 기자가 은실의 일족이라고 한다면 하남성 상구商丘 방면으로 남하하여 정착하였다가 다시 산서성 태곡太谷 방면으로 분기分岐된 것으로 추정한다. 


기자족은 신흥세력 주周의 압력으로 그 주력이 동방으로 이동하여 처음으로 정착한 곳은 난하灤河 하류(지금의 하북성 노룡·난하 일대)였을 것이다. 


기자가 직접 영도하는 족단族團이 평양지역까지 바로 간 것이 아니고, 오랜 시간에 걸쳐 동진하여 마침내 평양지역에 도달하였다. 문헌상의 창려의 험독, 광녕의 험독, 집주의 험독, 낙랑의 험독 등은 모두 이동과정에서 일정기간 머무른 근거지로 보았다.10)


이형구李亨求는 진晋의 두예杜預가 『춘추좌씨경전집해春秋左氏經典集解』에서 기국의 위치를 산서성 태곡太谷으로 비정하였으나 은殷대유물이 발견되지 않으므로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하북성과 요서 일대에서 대거 발견된 기자를 비롯한 은대 유물들이 기자족의 이동과정을 말해주는 증거이며 발해연안 북부가 기자조선의 문하영역내지 지리강역이라고 하였다.11) 


기후방정에 새겨진 ‘기후㠱侯’를 殷이 망한 후에 상왕족인 기자를 대표로 하는 은나라 씨족들이 周의 세력을 피해 원래 조상이 거주했던 발해연안 북부의 대릉하유역으로 도망가 건국한 것이 기자조선이라는 것이다. 


초기 기자조선은 상말주초의 문화형태를 유지하면서 점차 고유한 문화를 형성 발전시켰는데 이것이 남산근문화南山根文化이며 대표적인 청동기가 비파형단검이라고 본다. 남산근 청동기문화는 요동반도와 한반도에 점차 파급되는데 이것이 기자조선의 이동과 궤를 같이했다고 파악하였다.12)


윤내현은 상말商末 기국箕國은 상왕商王의 직할지 내인 상읍商邑 부근인 하남성 상저현商邸縣 지역에 있었다고 보았다. 


상나라가 주족周族에 의해 망하고 기국에 강성姜姓의 제후가 출현하자 기국의 통치권을 상실한 자성子姓의 기자는 일족과 서주西周왕실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당시로서 가장 변방인 중국의 동북부 연산燕山지역으로 이동 자리 잡았는데 연후燕侯의 감시를 받았다.


그 후 기자국은 난하灤河 동부 연안까지 세력을 확장하다가 BCE 3세기 초 연燕나라 장수 진개와 마지막 통치자인 준왕 때 연왕燕王 노관에게 난하 서부의 땅을 빼앗겼다. 


그리고 기자국은 중국 변방의 작은 나라로 마지막 왕인 자준子準 때에 고조선의 변방으로 쫓겨 왔다가 오래지 않아서 멸망했다는 것이다. 


한인漢人들이 기자국의 통치자를 부르던 ‘조선후朝鮮侯 기자箕子’라는 것은 ‘조선국의 제후인 기자’라는 뜻으로 이해하였다. 따라서 기자나 기자국은 한국 고대사의 주류일 수 없으며 기자조선이라는 용어는 부당하다고 하였다.13)


갑골문과 금문金文 유물에 나오는 ‘기㠱’라는 글자를 ‘기箕’로 해석할 수 있는 청동기(㠱器)가 섬서성, 산동성, 하북성, 하남성, 요령성 등 다양한 지역에서 발견되었다. 


상 후기에 해당하는 㠱器들이 대부분 안양 지역에서 출토되어 箕國이 도읍지와 가까운 곳에 있었을 것이다. 상商나라 때 기족㠱族은 상왕실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였으나 상이 망하면서 다양한 지역으로 흩어졌을 것이다. 


북경지역에서 발견된 상말주초 기기㠱器는 서주초기 연나라 지역으로 이동한 것으로 추정한다. 그리고 춘추시대에 제작된 기기㠱器는 산동성에서만 발견되어 기국㠱國의 마지막 소재지로 추정하며, 또 ‘기箕’와 ‘기㠱’는 성씨가 다른 별개의 세력으로 보기도 한다. 


그러므로 요서지역에서 출토된 이른바 기후방정에만 초점을 맞춰 기자조선의 존재 유무를 따지는 자체에 한계가 있다.



요령성遼寧省 객좌喀左 북동北洞 기후방정㠱侯方鼎 명문銘文


중국에서 생각하는 고조선은 단군조선이 아닌 기자조선과 위만조선을 가리킨다. 단군은 일개 신화인물로 간주하여 존재하지 않았고 기자조선을 고조선이라 하여 周의 제후국이므로 그 역사와 강역이 모두 중국에 귀속된다고 주장한다. 


서한西漢 이후 문헌들에 비로소 등장하기 시작한 ‘기자를 조선에 봉하였다[封箕子於朝鮮]’는 기록을 근거로 중국 사가들은 조선 역사가 약 3,100년 전 중국의 제후국이었던 기자조선에서 시작된 것으로 정의한다. 중국이나 한국에서 전통적으로 기자가 실재인물이라고 서술해왔기 때문에 사실이라는 것이다.


최근에는 동북공정과 더불어 하북성 북부와 요서에서 발견된 청동예기를 고고학적 물증으로 보고 기자조선설을 기정사실화하 하고 있다. 


기자는 상나라의 귀족으로 한반도를 문명사회로 개화시켰고 이것은 곧 중국의 역사범위를 중원에서 동북삼성과 한반도로 확대시키는 유일한 근거이기 때문이다. 


문헌에 나오는 기자동래설 기록을 역사적 사실로 인정하며 서로 모순되고 있는 기자의 행적을 합리적으로 해석하는데 초점을 두고 있다. 이러한 태도는 문헌 연구를 통해 나타난 기자동래설의 모순을 제대로 반영하지 않고 역사왜곡을 통한 정치적인 의도를 강하게 드러낸 것이라고 하겠다.


살펴본 바와 같이 요서지역에서 발견된 기후방정으로 인해 한국 측 일부와 대다수의 중국학자 측이 기자조선의 실재를 주장한다. 이것은 기기㠱器의 ‘기㠱’를 기자의 ‘기箕’로 이해하는 데서 나왔다. 


그러나 기기㠱器가 요서 이외의 하남성, 하북성, 산동성, 섬서성 등 여러 지역에서 출토되어 ‘유물 출토지는 거주지’라는 문제와 ‘문헌상의 기箕와 갑골과 금문에 나오는 기㠱가 같냐?’하는 문제에 대해 연관성이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기㠱 관련 기물들이 발견된 곳은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로 장기간에 걸쳐 여러 지역에서 존속했음에도 불구하고 북경일대와 산동성 지역에 상말주초와 춘추시대에 해당하는 일정 기간에 집중되어 나타난다.


대릉하 유역에서 발견되는 유물은 대부분 예기禮器로 무기류는 발견되지 않았으며, 토착 문화와는 별도로 교장窖藏이라고 부르는 저장구덩이에서 발견되고 있다. 


더욱이 염冉, 미微, 어魚, 사史, 채蔡, 강康 등 20여 가까이 되는 씨족 명문이 함께 나와 한 씨족 집단이 이주 정착했다고 보기 어렵다. 따라서 기자족이 한 지역에서 오래 정착하여 세력을 형성했다고 볼 수 없다. 


대릉하 유역에서 발견된 청동기가 고조선 제후세력의 산천제사 흔적이거나 고조선이 연燕을 정벌하고 노획한 것으로 본다면 기자 동래와는 무관한 것이 된다.


요서지역에 상주商周시기의 예기를 남긴 주체에 대해, ①문헌상에 나오는 기자를 중심으로 한 상나라 유민, ②난하에서 요하에 걸친 넓은 영역을 가진 고죽국, ③연나라가 상나라 유민을 앞세워 군사적 진출의 흔적, ④여러 씨족의 족휘 명문이 새겨진 유물이 한곳에 모이고 무질서하게 매장된 정황은 요서지역의 토착세력이 연나라와의 전쟁을 통해 약탈해온 전리품, ⑤상주商周 교체와 중국 내의 정변으로 인하여 도피한 상나라 후예가 남긴 유물로 당시 요서지역에 고조선이 강한 토착세력으로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는 등의 견해가 있다. 


이렇게 유적의 주체를 넣고 다양한 견해가 제시된 것은 일부 유물의 출토를 곧바로 영역이나 세력의 진출로 해석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 유적을 남긴 세력이 이 지역에 독자적인 국가를 세웠거나 군사적인 활동을 했다고 볼만한 흔적은 발견되지 않는다.14) 


결론적으로 기자조선의 핵심은 무엇일까? 그것은 『상서대전』이나 『사기』 등에서 ‘주나라 무왕이 상나라를 멸망시키고, 감옥에 감금되어 있던 기자를 풀어주었다. 이때 기자는 주나라에 의해 풀려난 부끄러움을 참을 수 없어 조선으로 떠나 버렸다. 이 소식을 들은 무왕이 그를 조선의 왕으로 봉하였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유교 사대모화주의자들이 기자가 한반도까지 들어와서 왕 노릇을 하면서 중화의 문명을 전해 야만의 조선 인민들이 문자와 문화의 큰 은혜를 입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면 기자가 정말 조선의 왕 노릇을 했을까? 『상서대전』은  기자가 제후로 봉해진 이후 ‘기자가 책봉을 받은 후 신하의 예를 행하기 위해 주나라를 찾아가 무왕에게 홍범구주에 대해 전했다’라고 한 반면『사기』는 기자가 책봉은 받았지만‘주나라의 신하로 삼지 않았다[而不臣也]’라고 하였다. 


제후가 되면 당연히 신하가 되는 것인데도 제후로 임명했다고 하면서 신하로 삼지는 않았다는 것은 기자가 무왕의 신하였던 적이 결코 없었기 때문이다. 


또 기자가 기箕라고 하는 나라를 다스리는 왕을 했을지언정 단군 조선을 맡아서 다스렸다는 그런 내용은 없다. 따라서 기자가 무왕에 의해 조선 왕으로 봉해졌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 아닌 것이다.


『환단고기』에서는 “기자가 상나라가 망한 후 인사를 사절하고 서화에서 조용히 살다 죽었다”15)고 했다. 


기자의 무덤에 대한 중국문헌에서도 몽현蒙縣, 박성薄城, 상구현商邱縣 등으로 요서나 한반도와는 상관없는 하남성 상구현商邱縣과 산동성 조현曹縣 경계에 가까운 지역들이다. 


한마디로 기자가 조선에 망명해서 잠시 머물러 있었을지언정 조선의 왕이 된 적은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상서대전』에서‘기자가 조선으로 떠나 버렸다[走之朝鮮]’16)고 했는데 이것은 동방 땅에 그전부터 조선이 있었음을 밝히는 내용이다. 


기자가 망해 버린 고국을 떠나 이웃 조선으로 망명할 수 있었던 것은 이미 오래 전부터 단군조선이 존재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문헌과 고고학 유물을 수용한다고 해도 기자가 상나라가 망한 후 고향인 하남성 西華로 돌아가 살다가 산동성 조현曹縣에 묻혔다. 


그리고 상나라 기내畿內인 하남성 중남부 지역에 살던 기자국의 후손 일부가 주나라를 피해 북경과 요서지역으로 이동, 정착하여 고조선의 제후국 왕 노릇을 하였다고 추정할 수는 있다.


1)  "주무왕이 은나라를 이긴 뒤 수受(紂王)를 죽이고, 그의 아들 무강武康을 세워 계승하게 하고, 기자를 데리고 돌아와서 ‘홍범洪範’을 묻고 기록하게 하였다[武王勝殷, 殺受, 立武康, 以箕子歸, 作洪範]"(『尙書』「洪範」)

2) “馬融曰 箕, 國名也. 子,爵也”, “箕國 子爵也. 司馬彪曰 箕子 名胥餘”(『史記』「宋微子世家」)

3) 정초鄭樵(1104~1162)는 중국 남송의 관리이자 역사가로 『통지通志』의 편찬자이다.

4) 箕氏:子姓. 箕子之國,商畿內諸侯. 杜預雲:太原陽邑縣南有箕陽邑. 隋改曰大谷,今隸太原. 武王克商,改封箕子於朝鮮,其地後爲晉邑. 漢有西華令箕堪. 臧茶相箕肆.(『通志』「氏族略」第二)

5) 武王勝殷,繼公子祿父,釋箕子之囚. 箕子不忍爲周之釋,走之朝鮮,武王聞之,因以朝鮮封之. 箕子旣受周之封,不得無臣禮,故於十三祀來朝(『尙書大傳』「殷傳」洪範)

6) 『사기』는 현전하는 130편이 모두 사마천의 기록이 아니라 「송미자세가宋微子世家」 등 일부는 후대에 위작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7) “무왕이 은나라를 멸망시키고 기자를 찾아갔다. (중략) 이에 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하였으나 신하로 삼지 않았다[武王旣克殷, 訪問箕子 (중략) 於是武王, 乃封箕子於朝鮮, 而不臣也]”(『史記』「宋微子世家」)

8) “은나라의 도가 쇠하자 기자가 조선으로 가서 그 백성들에게 예의와 농사와 누에치기와 옷 짜고 물건 만드는 법을 가르쳤다[殷道衰,箕子去之朝鮮,敎其民以禮義,田蠶織作]”(『漢書』「地理志」)

9) 金泰潤, 「朝鮮後期 淸州韓氏族譜로 본 箕子와 箕子朝鮮 認識」-석사 논문, 중앙대학교 대학원, 2010.

10) 천관우, 『箕子攷』, 『東方學志』15, 연세대학교 동방학연구소, 1974.

11) 이형구, 「발해연안북부 요서·요동지방의 고조선」, 『단군학연구』제12호, 2005.

12) 이형구, 「渤海沿岸 大凌河流域 箕子朝鮮의 遺蹟·遺物」, 『古朝鮮과 夫餘의 諸問題』, 신서원, 1996.

13) 윤내현, 「箕子新考」, 『한국사연구 제41호』, 한국사연구회, 1983.

14) 조원진, 「기자조선 연구의 성과와 과제」, 『단군학연구 제20호』, 단군학회, 2009.

15) 丁亥三十七年, 箕子 徙居西華, 謝絶人事.(『환단고기』「단군세기」25세 솔나단군)

16) 武王勝殷,繼公子祿父,釋箕子之囚. 箕子不忍爲周之釋,走之朝鮮(『尙書大傳』「殷傳」洪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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