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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원 칼럼] 하이데거 80회 생일에 부치는 한 일본인의 축사祝辭(1)

2020.07.07 | 조회 3387 | 공감 0

하이데거 80회 생일에 부치는 한 일본인의 축사祝辭(1)


상생문화연구소 황경선 연구위원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을 가장 먼저 자국어로 번역한 나라는 어디일까? 일본이다. 그러면 하이데거를 다룬 최초의 에세이라고 광범위하게 간주되는 글은 어디서 먼저 발표되었을까? 역시 일본이다.


1924년 타나베 하지메(Tanabe Hajime)가 일본어로 작성한 「현상학의 새로운 전환: 하이데거에서 삶의 현상학」은 모든 언어를 망라해서 사실상 하이데거에 대한 최초의 논평이다. 이때는 아직 『존재와 시간』이 세상에 나오기 3년 전이다.


타나베의 글에는 이미 『존재와 시간』에 대한 하이데거의 초기 구상이 소개돼 있다. 또 1933년에 출간된 구키(Kuki Shuze) 남작男爵의 『하이데거의 철학』은 하이데거를 다룬 최초의 단행본이다. 1939년에는 『존재와 시간』이 일본어로 번역됐다. 영역본英譯本이 처음 나온 것은 이로부터 23년이 지난 뒤이다. 


하이데거와 일본의 인연은 백년 가까이 이어진 것이고 또 위에서 잠깐 소개했듯 그만큼 각별하기도 하다. 이미 1920, 1930년대 많은 일본 학자들이 독일에서 하이데거를 만났고 그의 세미나에 참가했다. Miki Kiyoshi, Nishitani Keiji, Tanabe Hajime, Kuki Shuzo 등.


이들은 나중에 일본 철학의 주요한 인물이 된다. 그 무렵에 하이데거 철학은 일본 내 수용되고 보급된다. 이 무렵은 하이데거가 유럽 철학의 무대에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훨씬 전이다. 이와 관련하여 다음의 일화는 매우 시사적이다. 한 기록에 따르면 프랑스의 대표적 사상가 중 한 명인 사르트르가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을 접하게 된 것은 한 일본인 때문이었다. 


『존재와 시간』이 출간되고 얼마 뒤 한 일본의 왕자가 『존재와 시간』을 옆구리에 끼고 파리를 방문했다. 왕자는 프랑스 실존주의 철학자들의 구루 격인 사르트르를 만나 『존재와 시간』을 무조건 읽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런 일이 있고 나서 사르트르는 저 독일인이 이룩한 사상의 산맥을 본격적으로 오르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하이데거의 견해에 따르면 그는 이 등정에서 여러 번 길을 잃었다. 하이데거에 대한 잘못된 이해는 눈으로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사르트르가 『존재와 시간』에 대한 일종의 응답인 책을 발표한 것이다. 그것은 사르트르의 가장 중요한 작품이 된 『존재와 무』이다.(Deutschland deine Denker)

 

일본인들은 하이데거가 그들의 눈에 어떻게 비췄기에 그에게 열광했는가? 이 물음과 더불어 하이데거와 일본의 관계에 보다 구체적인 접근은 뒤로 미루고, 일본인이 작성한 한 편의 글을 소개하고자 한다.


코이치 츠지무라(Koichi Tsujimura; 1922-2010)가 1969년 하이데거의 80회 생일을 기념하는 모임에서 하이데거에게 바친 축사祝辭이다. 코이치 츠지무라는 교토 대학에서 앞서 언급한, 타지메 하나베의 제자로서 철학을 공부했고 또 그 뒤를 이어 1948년에서 1982년까지 같은 대학에서 정교수로 재직했다.


선불교禪佛敎를 공부하고 또 선 수행자이기도 한 그는 선과 하이데거 사유를 각각의 입장에서 비교하는 글을 쓰고 관련 문헌을 일본어로 옮겼다. 아울러 하이데거의 물음과 교토 학파의 무 개념 사이의 연결과 차이를 밝히는 해석을 제시하기도 했다. 독일에도 소개된 그의 저술들은 동아시아의 선불교, 선 사유와 유럽 철학의 관계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그의 축사는 2008년 Richard Capobianco와 Marie Göbel에 의해 영역英譯되어 Epoché: A Journal for the History of Philosophy(Vol. 12)라는 학술지에 게재되었다. 여기에는 또 그의 축사에 대한 하이데거의 답사도 함께 실려 있다.[하이데거의 답사는 훨씬 분량이 적고 다소 의례적인 느낌이어서 이 자리에서는 생략하기로 한다.]


글의 성격상 하이데거에 대한 뜨거운 존경의 마음이 배어나오기도 하지만, 일본에서의 하이데거 영향과 더불어 일본 선불교와 하이데거 사유의 관계를 잘 요약하고 있다. 또 글의 앞부분에서 그가 고백하는 일본 토착 철학에 대한 고민은 동아시아, 아니 서구화를, 타고 갔든 끌려갔든, 겪은 대부분의 나라들에서 지성들이 공통적으로 떠안고 있는 문제일 것이다.


무엇보다도 우리로서는 어쩌면 하이데거를 ‘하이데거’로써 이해하기보다 우리와 많은 부분에서 사상과 문화적 전통을 공유하는 한 일본인 학자의 이해를 통해 하이데거를 더 잘 들여다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글에서는 주로 출처를 소개하고 있는 각주脚註는 생략하고 본문의 주는 ‘()’로 하는 한편 역자가 단 주에 대해서는 ‘[]’로 표기하여 구별하였다는 점을 먼저 밝혀둔다. 서론이 길었다. 이제 그의 축사를 들어보자.




가장 영예로우신 하이데거 교수님! 존귀하신 하이데거 여사님! 존경하는 쉴레 시장님! 그리고 신사, 숙녀 여러분! 우리에게 위대한 스승의 탄신 80주년을 기리는 오늘 이 행사에서 축사를 할 수 있는 것은 저 자신만이 아니라 일본 철학의 대단한 영광입니다. 이 자리를 빌려, 축하 모임을 개최한 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표합니다.


알려지지 않는 일본인인 저에게 이 명예로운 과제가 맡겨진 것은 아마도 하이데거를 공부하는 일본인인 제가, 그렇게 말해도 된다면, 멀리 떨어진 곳에서 왔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먼 곳으로부터의 방문 배후에는 꽤 긴 길이 놓여 있습니다. 지금까지 많은 일본인들이 그 길을 따라 거장巨匠의 사유가 머물고 있는 곳에 가까이 다가가려고 노력해왔고 그러한 시도는 지금은 더한층 많아지고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저의 길을 앞서 걸었던 대표적인 몇몇 선배님들을 간단히 상기하는 것을 양해해주시기 바랍니다.

 

한 일본인이 처음으로 당시 프라이부르크에서 강의를 하던 우리의 사상가[하이데거]와 공부했던 때는 1921년이었습니다. 야마노우치로 불리는 그는 나중에 교토대학에서 희랍 철학에 관한 세미나를 열게 됩니다. 일 년 후인 1922년에는 저의 스승인 타나베가 프라이부르크로 오게 됩니다.


제가 알기에 그는 하이데거 사유의 중요성을 처음으로 발견한 인물입니다. 단순히 일본에서만이 아니라 아마도 전 세계를 통틀어서도 그러할 것입니다. 그가 1924년에 작성한 「현상학의 새로운 전환 - 하이데거에서 삶의 현상학」에서 이미 『존재와 시간』의 첫 번째 버전을 알아볼 수 있습니다.


타나베는 1962년 작고할 때까지 쭉 진지한 숙고 속에 하이데거의 사유와 대화를 지속했고, 오늘날 일본에서 가장 주도적인 사상가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는 생의 말년에 한번은 제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생각에 하이데거는 헤겔 이후 유일한 사상가야.”


이어 구키 남작이 하이데거를 보러 독일의 마부르크를 찾았습니다. 그의 덕분에 우리 일본인들은 『존재와 시간』에 대해 처음으로 신뢰할 만한 해설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불행히도 그는 1941년 아직 이른 나이(53세)에 작고하였습니다.


1930년대의 혼란한 시기에 저의 스승[타나베]과 저의 선임자인 교토대학의 니시타니 교수는 니체에 대한 하이데거의 강연에 참석하기 위해 프라이부르크를 방문했습니다.


하이데거의 후기 사상은 니시타니의 심오한 해석, 예컨대 예술 작품의 기원에 대한 그의 글을 통해 우리에게 접근 가능한 것이 되었습니다. 제가 알고 있는 한 그는 오늘날 하이데거 사유를 가장 깊이 이해하는 사람에 속합니다.


이런 배경 아래 일본, 특히 교토 대학에서는 하이데거 사유의 전통과 수용이 존재해 왔는데, 이는 이미 지난 반세기 가까이 이어져 온 것입니다. 그래서 또한 방금 언급했던 저의 스승과 선배님들을 대신하여 이 자리에서 하이데거 교수님에게 진심어린 존경과 사의를 표합니다.




제가 앞에서 거론했던 ‘꽤 긴 길’은 하이데거 사유가 일본 철학과 특별히 중요한 관계를 갖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리하여 우리 입장에서는 감사의 글이었으면 좋을 이 축사의 제목은 「마르틴 하이데거 사유와 일본 철학」입니다.

이 관계를 어느 정도 이해하려면 먼저 일본 철학의 본질 그리고 그 본질의 궁핍[Wesensnot]에 대한 규정에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일본 철학’을 일본에 있는 철학이란 의미로 이해한다면 일본에도 현대 철학의 거의 모든 사조들이 있습니다.


유럽과 미국으로부터 대부분의 철학 흐름들이 일본에 소개돼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은 당연히 우리의 자생적인 사유가 아닙니다. 그러나 ‘일본 철학’을 서구-유럽 철학의 지역에서 생기지 않고 오히려 우리의 고유한 정신적 전통의 기반(Quellgrund) 위에서 솟아난 사유의 시도로 이해한다면, 그러한 철학은 매우 희귀한 어떤 것입니다. 아래에서 저는 일본 철학을 후자의 의미로 이해할 것입니다. 이 철학은 본질적 궁핍에 처해 있습니다.

 

아주 먼 고대로부터 일본인들은 특별한 의미로 자연친화적이었습니다. 우리는 자연을 지배하려는 의지를 갖고 있지 않는 대신 가능한 한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방식으로 살고 죽기를 원했습니다.


한 소박한 일본인은 침상에 누워 죽음을 기다리면서 그를 둘러싼 사람들에게 말했습니다. “나는 지금 죽어가고 있다. 마치 가을에 잎이 지듯이.”


그리고 저에게 선禪 수행의 조부祖父 격인 한 선사禪師는 죽음에 놓였을 때 주사 맞는 것을 거부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렇게 억지로 삶을 연장한들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 의료적인 처치를 택하는 대신 그는 그가 좋아하는 청주 한 모금을 마시고 조용히 죽음에 이르렀습니다.


올바로 이해됐다면, 여기서 이미 일본의 오래된 정신적 전통과 유럽의 정신적 전통 및 과학과 기술에 의해 규정된 삶 사이의 뚜렷한 대조가 드러나고 있습니다. 요약하면 자연에 순응하며 살고 죽는 것이 고대 일본에서 삶의 지혜가 추구한 이상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물론 이 점이 우리 일본인들이 의지를 갖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고, 의지의 기반에 자연이 지배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무엇보다도 의지는 자연에서 나와 자연으로 사라집니다. 이 자연은 분명 모든 과학적 객관화에서 물러나 있으면서도 또한 모든 곳에 현존합니다.


일본어로 'schizen','zinen'이라고 불리는 자연은 ‘어떤 것이 그 자체로부터 나아감’, 간단히 말해 ‘그 자체로 있음’과 ‘참으로 있음’입니다. 이런 이유로 고대 일본에서 자연은 “자유”와 “진리”와 거의 같은 의미를 지녔습니다. 이러한 자연관은 “만물의 무상함과 공空에 대한” 불교의 “통찰”로 인해 심화되었습니다.


이같은 의미에서의 일본 철학이 안고 있는 본질의 필요를 조명하기 위해서 그 문제의 다른 측면을 잠시 주목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약 백 년 전에 시작된 일본의 유럽화 이래 우리는 전력을 기울여 유럽 문화와 문명을 거의 우리 삶의 모든 영역으로 끌어들였습니다.


우리에게 유럽화는 역사적 필연이었습니다. 그 결과 우리 일본인들은 현대 세계, 다시 말해 의지에 의해 결정되는 힘의 세계에서 독립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거기에는 위에서 언급한 우리 자신의 고유한 본질을 잃게 될 수 있는 위험이 놓여 있습니다.


과거에는 이런 요인을 피하기 위해 일본의 유럽화는 대체로 우리 자신의 정신적 전통과 내적인 연관 없이 이뤄졌습니다. 그때 이래로 우리는 자연과 조화하는 고유한 삶과 사유의 방식 그리고 외부로부터 부과된, 강력하게 의지에 의해 결정된 서구적 삶과 사유의 방식 사이에서 심각한 갈등을 우리 현존現存의 핵심에서 겪어야 했습니다.


이러한 갈등은 무엇보다도 낙관적 방식 안에 감춰져 있었지만, 그럼에도 당시의 한 슬로건 안에서 모습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유럽의 능력을 지닌 일본의 정신” 여기서 능력은 무엇보다도 모든 현대 과학과 기술을 가리킵니다. 이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일상생활 안에 실재합니다. “유럽화된 일본인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이중적 삶을 살아야 합니다.




제 생각에 이 갈등을 모종의 방식으로 시원적 통일성으로 이끄는 것은 일본 철학에서 본연의 과제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일부 시도를 제외한다면 이제까지 그러한 과업은 성취되지 못했습니다.


일본 철학 그 자체는 대개 “유럽의 능력을 지닌 일본의 정신”이라는, 중재되지 못한 동일한 갈등에 머물러 왔습니다. 그리고 사실상 그 갈등의 정도는 훨씬 더 커졌습니다.


지난 세기 후반부 이래 우리나라에 이식하려고 시도해왔던 다수의 다양한 유럽 철학 사조들은 우리의 지반에 뿌리를 내리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거의 그 모든 사조들이 하나의 패션처럼 단순히 모방되었거나 그렇지 않으면 기껏해야 과학이나 기술과 같은 사회적 삶의 제한된 영역에 활용되는 정도였습니다.


결론적으로 “일본 철학”이란 개념은 이미 본질의 고유한 결핍을 가리키는 하나의 표지標識입니다.


이 결핍의 문제는 한편으로는 앞서 언급했던, 고유한 정신적 전통의 근본 원천이 개입됨이 없이 유럽 철학을 받아들였다는 사실에서 기인합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그 철학 사조들이 대부분 우리에게 울림을 주고 저 정신적 생활의 기저 아래까지 동요시키지 못했다는 데 있습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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