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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시의 고향을 찾아서 (2) - 대주對酒

2020.05.07 | 조회 5061 | 공감 0

 한시의 고향을 찾아서

 

상생문화연구소 원정근


2. 백거이白居易의 「술을 마주하며(대주對酒)」


【제목풀이】 

이 시의 제목은 「대주對酒」이다. ‘대주’는 술을 마주한다는 뜻이다. 모두 5수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 시는 5수 가운데 둘째 시다.   


달팽이 뿔 위에서 무슨 일로 다투나? 

부싯돌 번쩍이는 찰나에 몸을 맡기네.

부유한 대로 가난한 대로 잠시나마 즐거우니, 

입을 벌려 웃지 않으면 바보로세.


와우각상쟁하사蝸牛角上爭何事, 

석화광중기차신石火光中寄此身. 

수부수빈차환락隨富隨貧且歡樂. 

불개구소시치인不開口笑是痴人. 



【시풀이】 


이 시는 중당中唐 시기를 대표하는 백거이白居易(772-846)의 「술을 마주하며」라는 시이다. 백거이의 자字는 낙천樂天이고, 호는 취음선생醉吟先生과 향산거사香山居士 등으로 불리었다. 


백거이는 이 시에서 우주의 시공간에 대한 예리한 통찰과 혜안을 통해 인생의 참뜻을 밝히려고 한다.


『장자莊子』 「달생達生」에서 말하는 것처럼, 좁디좁은 공간에서 하찮은 일로 아등바등 다투면서 좀스럽게 사는 것이 우리네 허망한 이슬 인생이다. 또한 우리네 인생 그 얼마나 덧없는가?


돌아보면, 인간의 삶이란 부싯돌이 번쩍하고 지나가는 짧디짧은 찰나의 순간에 지나지 않는다. 백년도 채 되지 못하는 속절없는 인생에서 사람들은 천년의 근심을 안고 살아간다.


입을 벌리고 하하하 크게 웃으며 살 수 있는 날들이 따지고 보면 그다지 많지 않다. 부유하면 부유한 대로 가난하면 가난한 대로 매 순간의 삶을 오롯이 즐겨야 하리라. 




백거이의 시 가운데 「동짓날 밤 한단에서 집을 그리면서(한단동지야사가邯鄲冬至夜思家)」라는 시가 있다. 


한단 역사에서 동짓날 맞아, 

등불 앞에 무릎 안고 그림자와 몸을 짝하네.

생각건대 식구들 밤늦도록 모여 앉아, 

응당 먼 길 떠난 내 이야기도 하겠지. 


한단역리봉동지邯鄲驛裏逢冬至, 

포슬등전영반신抱膝燈前影伴身. 

상득가중야심좌想得家中夜深坐, 

환응설착원행인還應說著遠行人. 


이 시는 시적 화자가 고향을 그리워하면서도 자신의 관점을 직설적으로 드러내지 않은 채 식구들의 관점에서 고향을 생각하는 독특한 표현 기법을 활용하였다.


한단邯鄲은 전국시대 조趙나라의 수도였다. 지금의 하북성 한단시로 당나라 때에는 매우 번성한 도시였다. 이 때, 백거이는 가족을 떠나 객지에 나와 있었다.


동짓날 기나긴 밤은 타향을 떠돌며 향수에 젖어 있는 나그네에게는 참으로 견디기 어려운 시간이다. 식구들은 지금쯤 한 방에 둘러앉아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시인은 객사에서 홀로 자신의 그림자와 짝하며 함께 이야기를 나눌 식구들이 없는 외로움과 서러움을 달래고 있다.


시인은 집안 식구들이 타지를 떠돌고 있을 자신을 생각해 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시에다 슬쩍 집어넣음으로써 고향을 그리워하는 애절한 마음을 식구들의 입장에서 절묘하게 표현하고 있다.  


백거이의 한평생은 어찌 보면 진정한 삶의 고향을 찾아 돌아가려는 귀향의 여정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백거이는 「장자를 읽으면서(독장자讀莊子)」에서 이렇게 말한다. 


나라와 집을 떠나 딴 곳에 쫓겨났지만,

근심과 아픔이 적은 걸 마음으로 괴이하게 여기네.  

『장자』를 보다가 돌아갈 곳을 알았지, 

아무 것도 없는 곳이 본향인줄을.  


거국사가적이방去國辭家謫異方, 

중심자괴소우상中心自怪少憂傷. 

위심장자지귀처爲尋莊子知歸處, 

인득무하시본향認得無何是本鄕 


백거이는 『장자』를 읽다가 비로소 인간이 돌아가야 할 곳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장자莊子』 「소요유逍遙遊」에서 말하는 ‘무하유지향無何有之鄕’이다. 그곳에는 모든 것이 따로 떨어져 있지 않기 때문에 다른 것과 갈등과 대립을 빚을 필요가 없는 이상향理想鄕이다.


모든 것이 따로의 독자적 자유를 맘껏 누리면서도 다른 것과 하나로의 통일적 조화를 이룰 수 있는 곳이다. 자유와 평화가 도도하게 흐르는 강물처럼 넘쳐흐르는 인간세상의 별천지다. 


백거이는 우리네 인생이 돌아가야 할 본향本鄕이 그 어딘가에 따로 있다고 여기지 않았다. 그는  「초출성유별初出城留別」에서 “우리네 인생은 본래 고향이 없으니, 마음 편한 것이 돌아갈 곳이다.”(我生本無鄕, 心安是歸處)라고 하고,


또  「종도행種挑杏」에서 “바닷가든 하늘가든 대저 마음 편한 곳이 집이다.”(無論海角與天涯, 大抵心安卽是家.)라고 하여, 사람이 어느 하늘 아래에서 어떻게 살아가든, 발붙이고 사는 곳에서 얼마든지 진정한 삶의 고향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해가 높이 뜰 때까지 실컷 잤으나 일어나기 싫고, 

집은 작으나 이불이 두꺼워 추위가 겁나지 않네. 

유애사의 종소리 베개 베고서 듣고,

향로봉의 눈 발 걷고 바라보노라. 

여산은 이름 감추기에 좋은 곳, 

사마는 여전히 늙음 보내기에 좋은 벼슬. 

맘 편하고 몸 편한 곳이 돌아갈 곳, 

고향이 어찌 유독 장안에만 있으랴?


日高睡足猶慵起, 小閣重衾不怕寒. 

遺愛寺鐘欹枕聽, 香爐峰雪撥簾看. 

匡廬便是逃名地, 司馬仍爲送老官. 

心泰身寧是歸處, 故鄕何獨在長安? 


백거이는 여산의 향로봉 아래 산집을 짓고 난 뒤에 「중제重題」라는 시를 지었다. 이 시는 원래 다섯 수 연작시로 되어 있다.


첫 수에 「향로봉하신복산거초당초성우제동벽香爐峰下新卜山居草堂初成偶題東壁」이란 제목을 붙이고, 나머지 네 수는 합해서 「중제」라는 제목을 따로 달았다. 이 시는 「중제」의 세 번째 시다. 


백거이는 지금의 강서성 구강시에 있는 강주사마로 좌천을 당하였다. 여산의 향로봉 아래에 초당을 마련하고서 유애사의 종소리와 향로봉의 눈을 뒤섞어 마시면서 덧없는 인생살이에서 돌아갈 곳이 어딘가를 자문한다.


백거이는 「오토吾土」에서 “몸과 마음이 편안한 곳이 내 땅이니, 어찌 장안과 낙양에 한정되리오?”(身心安處爲吾土, 豈限長安與洛陽?)라고 하여, 우리가 태어난 곳만 고향이 아니라 몸과 마음이 편안한 곳이 바로 진정한 삶의 고향이라고 힘주어 말한다.


한마디로 말해서, 등 따시고 배부르며 아무 근심 걱정 없이 사는 것이 진정한 삶의 행복이라는 것이다.



여산초당도(廬山草堂圖)


소동파蘇東坡(1036-1101)도 「정풍파定風波·남해귀증왕성국시인우랑南海歸贈王定國侍人寓娘」에서 왕정국王定國의 가희歌姬 유노柔奴(우낭寓娘)의 말을 인용하면서 “이 마음 편한 곳이 내 고향이다.”(此心安處是吾鄕.)라고 말한다.


소동파가 인용한 유노의 말은 백거이가 이미 여러 차례 사용한 것이다. 따라서 소동파가 「정풍파·남해귀증왕성국시인우낭」을 지은 것은 백거이의 고향 개념에서 도움을 받은 것이라고 하겠다.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백거이와 소동파는 모두 온갖 정치적 역경과 시련을 겪으면서도 어디에서든 마음과 몸이 편안히 살 수 있는 활달한 심령을 지녔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백거이는 어떻게 몸과 마음이 편안한 고향땅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보는 것일까? 백거이는 「책상에 기대어(은궤隱几)」에서 이렇게 노래한다.


몸이 편안하니 사지를 잊고, 

마음이 편안하니 시비를 잊네.

편안하고 또 편안한 것조차 잊으니,

내가 누구인지 모르겠네.

온 몸은 메마른 나무와 같아, 

올연히 아는 것이 없도다. 

마음은 타버린 재와 같아,

고요히 생각하는 것이 없도다.

오늘도 내일도,

몸과 마음을 홀연히 다 잊었노라.

나이 서른아홉,

세모에 날이 지나가는 때.

마흔엔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다더니, 

내 지금 그것에 가깝게 되었나? 


신적망사지身適忘四支, 심적망시비心適忘是非. 

기적우망적旣適又忘適, 부지오시수不知吾是誰. 

백체여고목百體如槁木, 올연무소지兀然無所知. 

방촌여사회方寸如死灰, 적연무소사寂然無所思. 

금일부명일今日復明日, 신심홀양유身心忽兩遺. 

행년삼십구行年三十九, 세모일사시歲暮日斜時. 

사십심부동四十心不動, 오금기서기吾今其庶幾? 



이 시는 『장자』 「제물론」에 나오는  “오상아吾喪我”의 절묘한 경지를 제시하고 있다. “오상아”란 사람이 자기 자신을 의식함이 없는 상태를 뜻한다. 


장자는 자기 자신을 잊은 경지를 몸의 욕망과 마음의 분별에서 벗어난 상태로 규정한다. 형체를 죽은 말라 죽은 나무처럼 만들고(形如枯木), 마음을 식은 재처럼 만드는(심여사회心如死灰) 것이다.


백거이는 마음을 식은 재처럼 만들어 시비를 잊고 몸을 메마른 가지처럼 만들어 탐욕에서 벗어나서 자아가 따로 없는 ‘무아無我’와 ‘무기無己’의 상태에 이르러야 비로소 몸과 마음이 편안하게 살 수 있는 이상적 삶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고 한다.


진정한 자아를 찾아야만 진정한 삶의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니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은 참으로 가깝고도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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