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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원 칼럼] 철학을 바라보다 2 산다는 건

2020.06.17 | 조회 4248 | 공감 0

상생문화연구소 황경선 연구위원



   “산다는 건 참 좋은 거래요.”


   ‘갓(god)진영’으로 불리는 가수 홍진영의 흥, 그의 발랄함과 쿨함은 언제나 기분 좋게 한다. 그는 신나는 트로트 리듬에 삶의 긍정을 노래하고 있다. 반면 뒤 이은 “오늘도 수고 많으셨어요.”라는 가사를 보면 삶의 하루하루가 녹녹치 않음도 내비치고 있다. 그래서 “산다는 건 참 좋은 거래요.”는 진위가 문제되는 명제가 아니라 우리를 인정하고 위로하며 내일의 희망을 상기시키는 격려의 말일 터다. 여기서 그치면 될 일을 ‘왜 사는 게 좋은 건지, 아니 도대체 사는 게 뭔지’ 알려달라고 하는 것은 일종의 시詩인 노래 가사에 대한 너무 ‘산문적’ 요구일까?


   하이데거도 ‘산다는 것’에 대해 글을 남겼다. 물론 이 독일 철학자의 사유는 다른 철학자에게서 기대할 수 없는 시詩의 정서적 울림을 주는 것도 사실이지만 어쩔 수 없이 산문적이다. 그에 따르면 산다는 것은 지키는(지켜주는) 것이고 그 지킴의 의미는 ‘살림’이다. 그래서 하이데거에게 산다는 건 살리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1950년대 사물(das Ding)에 관한 일련의 글을 발표한다. ‘산다는 것’에 대한 하이데거의 생각을 들여다 볼 수 있는 「Bauen, Wohnen, Denken」도 그 중의 하나이다. 제목에 쓰인 독일어 'Bauen', 'Wohnen', 'Denken'은 동사이면서 명사이다. 여기서는 동사로 쓰일 경우 'Bauen'은 ‘짓다’, 'Wohnen'은 ‘살다’, ‘거주하다’, 'Denken'은 ‘사유하다’로 옮겼다. 그리고 명사의 경우에는 각각 ‘짓기’, ‘산다는 것’(살이; 거주), ‘사유’로 번역을 시도했다.  



▲ 하이데거(Heidegger, Martin, 1889~1976)


   하이데거 저술들에서 가장 많이 발견되는 개념은, 그 표현은 다를지라도 ‘지킴’(돌봄)의 뜻을 갖는 단어들이다. 'hüten', 'schonen', 'bergen', 'wahren', 'verwahren', 'besorgen', 'retten' … . 여기서 문제가 되는 'bauen'(짓다), 'wohnen'(살다)도 거기에 속한다. 심지어 열거된 단어들과 얼핏 결이 다르게 보이는 'denken'(사유하다), 'heißen'(이르다), 'sprechen'(말하다), 'gebrauchen'(필요해서 사용하다), 'dichten'(시짓다) 등의 근본 뜻도 역시 지킴으로 이해되고 있다. 어느 면으로 하이데거 존재 사유 전체의 폭을 관통하는 이 지킴의 사태는 ‘~을 본질에 이르게 함, ~을 본질로 있도록 함, 그렇게 지켜줌’이다. 한편 지킴이 그런 활동을 가리키는 것이라면, 하이데거의 뜻에 보다 상응하는 우리말은 ‘살림’이 될 것이다. 


   죽어가는 새를 살리다/ 한강을 살리다/ 마을을 살리다/ 경제를 살리다/ 기억을 살리다/ 분위기를 살리다/ 기능이 멈춘 기계를 살리다 등. 살림의 다양한 용례들에서 ‘살리다’의 공통된 의미를 주의 깊게 살펴보면, 살림은 ‘어떤 것이 변형, 위축, 훼손, 오염, 소멸되지 않고 본래 있어야 할 그것의 고유함, 온전함대로 있도록, 다시 말해 그것의 본질로 머물도록 함(지킴)’의 사태다. 즉 새를, 경제를, 마을을, 분위기를, 기계를 본래의 모습, 제 고유함으로 있도록 지키는 것이다. 하이데거에 의해 자주 쓰이는 저 일련의 단어들은 근본적으로 그러한 의미에서 살림을 가리킨다. 


   다시 「Bauen(짓다), Wohnen(살다), Denken(사유하다)」으로 돌아가 보자. 하이데거에게 주택이나 다리 등을 짓는 것은 단순히 살기, 거주를 위한 수단이 아니다. 짓기 자체가 이미 살이(고향 살이; 인생 살이)며 거주함이다. 독일어 'bauen'은 우리말 ‘짓기’와 같이 ‘세우다’, ‘건립하다’ 이외에 ‘밭을 일구다’, ‘포도나무를 재배하다’, ‘옷을 짓다’, ‘마르다’ 등을 뜻한다. 독일어에서도 짓기는 의, 식, 주, 곧 인간의 삶(살이) 전체에 걸쳐 있다. 그렇지만 누가 또는 어떤 것이 짓기가 곧 살이며 거주함이라고 해석하도록 허락했는가? 하이데거에게는 ‘언어로부터의 말건넴’이 그 척도이며 기준이 된다. 'bauen'의 고고古高 독일어는 'buan'인데, ‘살다, 살이’(wohnen)의 의미를 갖는다. 그리고 이 'wohnen'은 ‘머물다’, ‘체류하다’를 가리킨다. 


   나아가 'bauen', 'buan'과 함께 'bhu', 'beo'는 'Ich bin', 'du bist', 명령형 'sei'란 표현들에서 알 수 있듯 'bin'(1인칭 주어에 쓰는 ‘있다’, ‘존재하다’란 뜻의 동사)이다. 그리하여 'bin'이 속하는 고대어 'bauen'은 다음의 사실을 전해준다. ‘내가 있다(Ich bin)’, ‘네가 있다(du bist)’는 사실은 ‘내가 살다(ich wohne)’, ‘네가 살다(du wohnst)’를 뜻한다. 즉 인간이 ‘있다’, ‘존재한다’는 것은 인간이 대지 위에 ‘산다’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bauen'을 두 가지 방식에 따라 구분한다. 먼저 돌보고(hegen) 보호하는(pflegen) 방식의 짓기이다. 경작지 일구기, 포도 농사의 짓기와 같은 것이 그에 속한다. 이러한 방식의 짓기는 다만 돌보는 대상 스스로가 열매로 무르익도록 지킨다. 또한 설치함으로서의 짓기가 있다. 예컨대 배를 건조하고 사원을 짓는 등 일정한 방식으로 제품이나 작품 자체를 앞에 제작하는 것이다. 하이데거에서는 이 중 후자의 짓기가 주로 다뤄진다. 말머리를 바꾸기 전에 'bauen'이란 말이 건네주는 시원적 의미를 확인해 보자: 짓기는 본래 살이(거주함)이다. 살이란 인간이 대지 위에 존재하는 방식이다. 살이로서의 짓기는 성장을 돌보는 짓기와 제작하고 설치하는 짓기로 전개된다. 우리는 짓기 때문에 사는(거주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사는 한 짓고 지었다.

 

   짓기가 그렇듯 살이(Wohnen)라면 그 인간 살이의 본질은 또 어디에 있는가? 하이데거는 앞서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언어가 본래 말하고자 하는 것에 유의한다. 일상적이며 통상적인 의미 때문에 가려지고 잊힌 본연의 의미를 건져 올리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시원적인 언어의 말 건넴은 망각 속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침묵할 뿐이다. 


 우리가 오염되지 않은 귀로 청종聽從하기를 기다리면서. 'wohnen'이란 말이 유래하는 고대작센어 'wuon'과 고트어 'wunian'은 고대어 'bauen'처럼 ‘머묾’, ‘체류함’을 의미한다. 특히 고트어 'wunian'은 이 체류함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보다 분명하게 밝혀준다. 'wunian'은 ‘손상과 위협에서 보호함’, ‘~으로부터 지킴’을 의미한다. 이때 지킴는 단순히 구호와 보호의 대상에 어떤 것도 가하지 않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본래적인 지킴은 어떤 긍정적인 것으로서 우리가 어떤 것을 본질로 놔둘 때, 어떤 것을 고유함으로 있도록 간수할 때, 즉 살릴 때 일어난다. 'wohnen'의 옛 말 'wunian'은 인간이 대지 위에 거주하는 살이의 본질은 살림에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때 ‘대지 위에’는 이미 ‘하늘 아래’를 의미하며 이 둘은 ‘신 앞에 머묾’과 ‘인간의 상호귀속성’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그렇다면 인간 살이로서의 살림은 네 가지의 것, 즉 하늘〔天〕, 땅〔地〕, 신적인 것〔神〕, 죽을 자들〔人間〕을 살리는 방식으로 전개될 것이다. 여기서 하늘은 태양의 운동, 달의 운행, 별들의 빛남, 계절의 바뀜과 하루 낮과 밤, 기후 등이다. 땅은 기르며 떠받치는 것으로서 바위와 물에까지 펼쳐져 있고 식물과 동물을 망라한다. 신성神性을 알려주는 사자使者와 같은 것인 신적인 것은 사물들에게서 빛나는 성스러움으로 이해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죽을 자들이란 인간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자신의 죽음을 죽을 수 있는 자들을 말한다. 오직 인간만이 소멸하지 않고 자신의 죽음에로 나아가고 또 그것을 떠맡는다. 


   이 네 가지의 것들은 근원적인 단일함으로부터 하나로 어울린다. 이 넷 중에 어느 하나만 말해도 이미 다른 세 가지의 것을 함께 사유하고 있다. 이 하늘, 땅, 죽을 자들, 신적인 것의 근원적인 어울림이 “사방”(das Gevierte)이라고 불리는 세계다. 사방 세계는 단순히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총체’나 ‘피조물 전체’가 아니다. 그 세계는 저 하늘과 땅, 신적인 것과 인간의 어울림으로써 생기生起하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그럼에도 사람들이 이 넷의 단일성을 숙고하지 않는다고 개탄한다. 그러나 아마도 적어도 상고 시대 한민족의 조상들만큼은 예외에 속할 것이다.


   당시 한민족의 삶과 사상을 전하는 『단군세기檀君世紀』에 의하면 하늘은 무형의 이치로서 땅과 그 위에 일어나는 인간과 만물의 변화를 규정함으로써, 즉 참〔眞〕으로써 땅, 인간과 하나이다. 또 땅은 그 하늘 이치에 따라 쉼 없는 생장력으로서 인간과 만물을 낳아 기름으로써 하늘, 인간과 하나이다. 인간은 스스로 천명天命을 깨쳐 이웃과 더불어 하늘, 땅의 이상을 실현코자 함으로써 하늘, 땅과 하나이다. 얼핏 보기에 이 천지인 일체에는 하이데거가 말하는 단일성에 비해 ‘신적인 것’이 빠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한국 고대의 문화 공간에서는 하늘, 땅, 인간을 하나로 꿰뚫고 동시에 감싸는 통일성 혹은 그 통일성의 중심인 ‘하나’가 신령한 기운, 혹은 신적인 것이다. 하늘, 땅, 인간은 그 신성의 화현이다. 그래서 이 단일함을 일러 ‘천지인 삼신 일체’라고도 부른다. 그 하나를 중심으로 천, 지, 인 각각에는, 서로를 되비추는 거울놀이처럼, 이미 천지인 셋이 간수돼 있다. ‘天人天地天天이고 地人地地地天이며 人人人地人天’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어떤 방식으로 사방을 본질로 있도록 지키는가, 다시 말해 살리는가? 하이데거에게 지키고 살리는 일은 어디에 온전하게 간수, 보호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앞의 물음은 이렇게 바뀐다. 인간의 살이는 사방을 살릴 때 그것의 본질을 어디에 간수하는가? 그곳은 우리들 자신인 인간 가까이 머무는 사물들이다. 그러나 사물들은 그 자체로서 또는 그것들의 본질로서 있을 때만, 말하자면 자기와 무관한 온갖 외적 규정들을 떨치고 민낯 그대로의 모습으로 있을 때만 사방을 간수한다. 그리고 이는 짓기를 통해서 일어난다. 인간은 짓기, 즉 자라나는 것들을 보호하고 돌보고, 또 시설이나 제품, 작품 등 성장하지 않는 것들을 고유하게 설치하는 짓기로써 사물이 사물로서 존재하며 세계를 본질로 있도록 간수한다. 더 이상의 설명을 유예하고 하이데거가 그렇게 지어진 것들로 제시한 예들을 살펴보기로 하자. 이때 하이데거는 주로 후자의 짓기, 즉 제작이나 설치에 의해 지어진 것들에 주목한다. 항아리, 다리, 농가가 그것이다. 


   하나의 사물인 항아리를 그러한 사물이게 하는 것, 즉 항아리의 사물성은 항아리를 구운 도공도, 점토도 아니며 항아리의 바닥과 벽도 아니다. 오히려 텅 빔이다. 텅 빔이 무엇을 담는 용기로서의 항아리를 항아리이게 하는 것이다. (유有의 가능성을 무無에서 본 것이다. 이 점에서 하이데거와 노자를 비교하기도 한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사물의 본질을 무에서 구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항아리의 텅 빔은 부어진 것을 받아들이고 간직함으로써 그것을 담아낸다. 그러나 이 받아들임과 간직함은 다시금 비워냄, 따라냄으로부터 규정된다. 즉 텅 빔의 본질은 안에 든 내용물을 따라주는 데 있다. 이때 따라주는 것은 마실 수 있는 음료인 물이거나 포도주일 수 있다. 


 따르는 물에는 샘이, 이 샘에는 암석이 머물며 암석에서는 땅의 몽롱한 졸음이 하늘의 비와 이슬을 받아들인다. 샘물에는 하늘과 땅의 축제(혼례)가 머무는 것이다. 그 하늘, 땅의 축제는 포도주에도 머문다. 포도주가 된 포도나무의 열매에는 땅의 자양분과 하늘의 태양이 서로 친밀하게 어울려 있는 것이다. 또한 포도나무나 물은 죽을 자들인 우리들 자신을 위한 음료이다. 그들의 목을 축여주고 원기를 돋궈주고 그들을 쾌활하게 만든다.  또 포도주는 성스런 제의祭儀에서 신을 향해 바쳐지기도 한다. 이제 그 따라주는 것은 신적인 것들을 향하여 바쳐진 음료가 된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짓기가 내세운 항아리로서의 항아리에는 하늘, 땅, 신적인 것들, 죽을 자들이 하나로 어울리며 깃들어 있다. 즉 사방 세계가 펼쳐진다. 




   다리가 지어짐으로써 다리에는 강과 강가, 땅이 서로 이웃하게 된다. 이런 방식으로 다리는 땅을 가까이 불러 모은다. 물살의 충격을 감당하는 교각을 가진 다리는 이미 하늘의 날씨에 대비돼 있다. 또 다리는 강물을 잠시 수문 안에 받아들였다가 다시 방류함으로써 강물을 하늘을 향하게 한다. 강물은 그렇게 해서 하늘을 자기 곁에 간수한다. 다리는 죽을 자들인 인간들에게 그들이 뭍에서 뭍으로 걸어가거나 차를 타고 가도록 길을 내줌으로써, 급기야는 이 차안의 삶 저편으로 인도함으로써 죽을 자들인 인간을 불러 모으고 있다. 이밖에도 언제나 이미 마지막 다리로 가는 도상에 있는 인간들은 ‘신적인 것’의 구원 앞에 이르려고 애쓴다. 그럼으로써 다리는 또한 신적인 것을 자기 안에 간수하고 있다. 다리로서의 다리는 이런 방식으로 하늘, 땅, 죽을 자들, 신적인 것들을 간수한다. 


   슈바르츠발트의 농가農家는 바람을 막는 산기슭에 남향으로, 풀밭 사이와 샘 가까이에 지여져 있다. 이로써 농가는 땅을 자기 곁에 불러 모으고 있다. 또한 농가의 지붕은 적당한 경사로 깊숙이 아래로 드리워져 있어서 눈의 무게와 긴 겨울밤의 세찬 바람을 막아줌으로써, 하늘을 불러 모으고 있다. 그 집은 식탁 뒤에 십자가나 성모상을 모시는 자리를 둠으로써 신적인 것들을 가까이 머물게 한다. 또 출산과 임종을 위한 신성한 자리를 배치함으로써 시간을 거치며 지나가는 죽을 자들의 삶의 행로를 특징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그 본질이 살림인 짓기를 통해 지어진 농가는 이렇듯 하늘, 땅, 신적인 것 그리고 죽을 자들을 자기 곁에 불러 모아 간수한다.


   항아리, 다리, 농가라는 사물은 하늘, 땅, 인간, 신적인 것에게 자리를 내주는 방식으로 그것들을 불러 모은다. 사물들은 스스로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사방의 어울림이 생기하도록 하는 것이다. 사물의 사물성은 최종적으로 사방 세계를 밝게 트이도록 하는 데, 그런 의미로 “세계의 분만”에 있다. 동시에 그처럼 사방을 살리는 일은 사물의 편에서도 그것이 순연純然한 저의 본 모습을 찾는, 스스로를 살리는 일이다. 


 하이데거에 있어서는 이러 저런 관점에 따라 채색되고 왜곡되지 않은 사물로서의 사물이란 바로 하늘, 땅, 죽을 자들, 신적인 것들의 성스런 어울림 속에 들어서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사물은 사방의 단일함으로 밝게 트이는 “세계의 광휘 안으로”(Unterwegs zur Sprache) 감싸임으로써 비로소 사물이 된다. 사물은 자기 안에 세계를 깃들게 하고 세계는 자신의 밝음 안에 사물을 간수함으로써 둘은 서로 속하게 되며 그 가운데 각자의 고유함으로 머문다, 즉 서로를 살린다. 그 살림을 통해 모든 사물이 바로 서고, 하늘도, 땅도, 죽을 자들인 인간 자신도, 신적인 것도 모두 하나의 단일함 속에 본연의 모습을 되찾아 세계가 세계로서 열리는 것이다.




   여기서 이제까지의 논의를 요약해보자. 짓기의 본질은 살이이고 죽을 자들인 인간의 고유한 존재 성격인 살이란 사물 곁에 세계를 살리고 그럼으로써 인간 자신과 사물을 살리는 것이다. 한편으로 사방 세계는 존재 진리의 지평과 방식이다. 사물로서의 사물, 세계로서의 세계는 존재가 자신을 열어 밝히며 사방으로, 즉 하늘, 땅, 인간, 신적인 것으로 영역화함으로써 들어서고 펼쳐지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짓기는 존재자(사물)에서 세계로서의 세계가 열려 존재의 밝게 트임, 발현이 일어나도록 하는 것이다. 짓기는 곧 존재 진리의 수립이 된다. 그리하여 존재를 향해 자신을 바쳐 존재가 그 고유함으로 발현하도록 자리를 내주는 존재 사유 역시 짓기와 동일한 의미로, 다만 다른 방식으로 살이에 속한다. 


   그리고 존재의 사유는 시작詩作의 근원적 방식이다. “인간의 본질이 존재 진리의 사유에 있다면? 그때 사유는 존재의 수수께끼에 대한 시작詩作이 될 것이다.”(Hw 368) 존재의 발현에 자리를 내주고 그 침묵의 말 건넴을 받아쓰는 사유는 근본적으로 시짓기라는 것이다. 사유의 시작적詩作的 본질은 그 존재가 참되게 발현하도록 한다. 바꿔 말하면 시작은 그 자체 존재 진리를 수립하는, 탁월한 의미에서의 짓기이다. 


   철학은 존재를 사유하고 시는 성스러움을 노래한다. 시작은 성스러운 언어를 지으며 존재의 시원적 차원을 연다. 시작은 그 존재 진리의 밝은 터에서, 그것을 중심으로 사물에서 세계가 고유하게 펼쳐지고 사물이 세계의 밝은 빛에 감싸여 사물로서 있도록 한다. 그럼으로써 세계와 사물, 인간을 본래 있어야 할 바대로 새롭게 살려낸다. 


 시짓기에서 모든 것들이 비로소 마침내 그것들이 원래 속했던 곳으로 돌아가 그 자신의 참됨으로 고요히 머무는 것이다. 존재가 밝게 트이며 우리 가까이 머물고 인간이 인간으로서 사는 그곳이 하이데거에게는 우리가 떠나온 그러나 새롭게 돌아서야 할 고향이다. 이로써 성스러움 속에 밝게 열리는 존재 진리를 시적 언어로써 받아 적는 본질적인 시짓기는 민족에게 새로운 운명을 열어 주고 또 다른 역사가 시작되도록 한다. 시인의 말은 “죽을 자들〔인간〕이 고향에 살도록 살이의 터를 닦고 정초하는 것을 표현한다.”(Erläuterungen zu Hölderlins Dichtung)


   그리하여 사방으로 영역화하는 존재를 위해 자신을 비워 자리를 내줌으로써 이윽고 하늘, 땅, 인간, 신적인 것이 또한 모든 사물이 시원의 모습으로 새롭게 펼쳐지도록 살리는 모든 삶은 시적詩的인 것이다. 다시 말해 대지 위에 고향에서의 삶을 마련하려는 시도는 모두 본질적으로 시짓기이다. “시작詩作은 인간의 살이를 비로소 그것의 본질 안으로 들어서게 한다. 시 짓기는 근원적으로 살도록 함이다.”(Vorträge und Aufsätze) 따라서 시적으로 사느냐 그렇지 않느냐 여부는 살이의 본래성을 가늠한다. 


   결국 ‘산다는 것’에 대한 하이데거의 ‘산문적’ 설명은 그가 인용한 횔덜린 시 한 구절로 요약된다. “ … 인간은 대지 위에 시적으로 산다.( … dichterisch, wohnet Der Mensch auf dieser Erde/ 디히터리쉬 보넷 데어 멘쉬 아우프 디설 에르데.)” 괄호 안에 독일어 원문과 발음도 넣어 보았다. 한글로 읽어도 또는 독일어 원문을 소리 나는 대로 읽어도 되겠다. 혹시 아는가? 앞뒤 없이 외운, 횔덜린의 저 시 한 구절이 무슨 기적을 일으킬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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